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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맞춤형

당신은 어떤 거울인가요?

  

 

 

삶은 가끔 되돌아 보는 것이 좋다. 그래야 현재의 스스로가 잘 보이고, 미래도 더 밝아진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함이다. 과거는 살아 갈 미래의 지혜를 넌즈시 던져준다. 그러니 역사는 현재학이자 미래학이다. 하지만 과거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누구는 과거에 담긴 참 뜻을 읽지만, 누구는 그 의미를 자신의 입맛대로 각색한다. 과거를,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제각각인 이유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에 힘을 좀 빼야한다. 그게 바로 성숙이다. 고집의 유연화는 비굴함, 연약함이 아니라 배려의 공간을 그만큼 넓히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고집이 더 단단해지는 사람이 있다. 고집에도 일종의 관성이 생기는 탓이다. 경험이란 것이 때로 아이러니하다. 경험은 세상을 넓혀 주는 망원경이지만 경험에만 매몰되면 오히려 시야가 좁아진다. 경험이란 편린들은 간혹 잘못된 믿음이나 신념을 바윗돌처럼 단단하게 만든다. ‘내가 경험해 봐서 아는데…’는 때로 스스로를 한정짓는 올가미다. 몇몇 경험으로만 단정짓기에는 세상의 이치가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성숙은 일종의 나잇값이다. 나이에 걸맞게 생각하고, 나이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나이에 걸맞다’함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균형을 잡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너무 자기 잇속만 챙기면 육체는 성숙해도 정신은 미숙한 셈이다. 용기와 배려, 관용, 더불음 등은 대표적 ‘성숙지표’다. 과욕은 정신은 물론 육체 건강도 해친다. 어찌 보면 정신의 균형이 바로 건강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고,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는 얘기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창한 맹자는 모든 사람의 본성은 착하지만 지나친 욕심이 그 본성을 가린다고 했다. 선한 본성의 인간이 사는 세상에 악이 넘치는 이유를 과욕으로 설명한 것이다. 

 

 

 

거울은 형상을 비춘다. 거울을 마주하면 자신의 얼굴이, 스스로의 스타일이 드러난다. 그러니 겉모습이  궁금하면 누구나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며 애를 태운 ‘질투의 여왕’ 거울만이 진실을 말하는 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거울은 진실하다. 그러니 외형에 자신이 없으면 거울 마주하기가 영 불편하다. 우리사회에 성형이 늘어나는 것은 거울 앞에 설 때의 불편함을 덜어보려는 것이다. 

 

거울이란 발명품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물은 인간의 형상을 비춰주던 ‘자연의 거울’이었다. 인간은 물에 비친 얼굴에서 외형의 더러움을 보고 그 물로 그 더러움을 씻어냈다. 인간에게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깨달음의 근원, 더러움을 씻겨주는 정화수인 셈이다. 그러니 물은 늘 인간 마음을 비유한다. 잔잔한 호수로 마음의 평온을 노래하고, 성난 파도로 격노한 심성을 암시한다. 명경지수(明鏡止水)는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을 일컫는 상징어다. 물은 고요해야 비춰지는 형상이 비툴리지 않는다. 마음 또한 고요해야 내면이 더 깊게, 더 투명하게 비쳐진다. 그러니 도도히 흐르는 물은 세상사의 많은 이치를 담는다.

 

 

 

물(거울)로 외면을 살핀다면 내면은 무엇에 비쳐볼까.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 묵자(墨子)는 ‘물을 거울로 삼지말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라’(不鏡於水 而鏡於人)로 깨우친다. 거울에 비춰보면 얼굴 하나쯤은 보이겠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스스로의 길흉화복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세 사람이 걸으면 그 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고 했다. 장점을 배우고, 단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면 모두가 스승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결국 누군가의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타인이라는 거울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묵자·공자의 말씀이 아니라도 세상엔 사람만한 거울이 없다. 나는 누군가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고, 누군가는 나를 통해 그 스스로를 들여다본다. 사람이라는 거울도 유리라는 거울만큼 거짓이 없다. 호주머니에 숨겨둔 송곳처럼 언젠가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니 ‘나’라는 거울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수시로 살펴봐야 한다. 혹여 내가 닮고 싶은 형상이 아닌, 반면교사로 누군가의 삶에 깨달음을 주는 존재라면 그것만큼 슬픈 것도 없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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