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건강/맞춤형

잊지 않을 그날의 기억, 세월호와 정신건강






집 앞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려고 운동복 바지를 입었는데 왼쪽 무릎이 다 헤져있었다. 내가 이걸 언제 샀지, 하고 보니 세월호 당시 진도 터미널에서 3만원 주고 구입한 그 바지였다. 2년 전 4월 16일, 팀장 지시로 허겁지겁 내려가느라 입었던 청바지를 버리다시피하고 아침마다 이 바지를 입고 팽목항과 진도 체육관, 진도군청을 왕복했던 생각이 났다.





당시 2년차 병아리 기자의 역할은 하나였다. 진도군청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임무였다. 해경과 주고받은 문서, 범정부 합동 대응팀이 매일 어떤 안건으로 회의하는 지 등을 살피라는 지시다. 저녁을 먹고 해가 어둑어둑해질 즈음 차를 타고 군청뒤편 쓰레기통으로 갔다. 순찰자를 피해 잽싸게 쓰레기 더미를 챙겨 트렁크와 뒷자석에 싣는다. 숙소로 돌아와 잘라진 종이를 맞춰본다.


3일이 지나자 뒷자석 뿐 아니라 내몸에서 쓰레기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숙소 주인 할머니에게는 애인에게 줄 반지를 모르고 버렸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마음씨 좋은 할머니는 자신이 같이 찾아주겠다고 했다. 둘이 모텔 로비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하며 조각을 찾았다. 언론사별로 쓰레기를 탐하는 경쟁이 점차 심해졌고 결국 정부는 완벽히 세절한 쓰레기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 즈음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정확히 한달 뒤인 2014년 5월 16일, 나는 진도를 다시 찾았다. 세월호 한달 르포기사를 쓰기 위해서다. 아직도 바다에서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 20여명이 천막에서 쉬고 있었다. 시신이라도 찾는 게 남은 가족들의 마지막 바람이라고 했었다. 월드컵을 한달여 앞두고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했던 기억의 다짐은 세월호 청문회를 거쳐 2년이 지난 지금 흐지부지됐다. 나를 포함한 취재기자 대다수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유족들의 안타까운 모습, 취재 당시 느꼈던 자괴감이 밀려와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마 우리 국민들 모두가 비슷한 마음이었을 터다.


취재 기자가 느낀 감정이 이러한데, 유족들은 오죽했을까. 참사 이후 유족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물었더니 ‘마음껏 슬퍼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치유는 진실을 마주한 뒤 깊숙한 곳의 슬픔을 끄집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직면’의 문제인데, 2년이 넘은 지금까지 직면에 어려움을 겪는 유족이 많다고 한다.


한창우 안산트라우마센터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더 서글펐다. 그는 세월호 참사로 막내딸을 잃은 A씨와 함께 지난해 전북 정읍을 걸었다. 피해 가족들은 세월호 인양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경기도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전남 진도 팽목항 분향소까지 19박20일간 약 450㎞ 릴레이 도보행진을 했었다.





두 사람은 이날 처음 만났다고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었다. 점심시간에는 나란히 앉아 김치찌개를 나눠 먹었다. 그렇게 4시간을 함께하면서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한 센터장은 A씨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 걷는 것밖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5시간쯤 지났을 때 A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사고 후 생업에 복귀했다고 했다. 남은 가족을 위해서였다. 몸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일하는 도중 느닷없이 가슴이 턱 막혀 주저앉을 때가 많다고 했다.





슬픔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밤은 더 힘들었다. 막내딸이 자꾸만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끔 ‘이제 1년쯤 지났으니 조금씩 잊어야지.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면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마음에 차올랐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센터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그조차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헤어질 때 A씨는 한 센터장의 손을 꼭 잡고 “조심해서 가라”고 했다. 한 센터장은 “세월호 유가족들과 피해자들에게 대단한 치료법이나 프로그램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고 했다. 함께 있어줄 사람, 자신의 억울함과 상처를 들어줄 사람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우리는 사는데 바빴고, 시국도 어수선하다. 그래도 2년전 그날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낙인처럼 아로새긴 그 설움을 풀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글 / 박세환 국민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