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불면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질환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때마다 터지는 대형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를 비롯해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까지 매일매일 축적되는 그 양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마어마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가정, 친구, 직장 또는 사회적으로 겪는 문제로 인해 심리적 고통을 겪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가능한 심리 치료법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미술치료법이다. 말 그대로 미술활동을 통해서 심리적인 어려움이나 마음의 문제를 표현하고 완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치료법인 것이다.

 

 

 

미술치료는 미술과 심리학의 결합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미술 활동을 통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미술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러내고 감정을 안도감과 정화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의 경우 자신의 공포, 불안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경우가 상당하다. 이때 그림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공포, 불안은 물론 뒤섞여 있는 감정들을 노출함으로써 자신의 현 상태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

 

 

 

 

물론 미술치료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노인들에게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해외에서는 이미 50여년 전부터 미술을 통한 치료가 시작됐고 국내에선 1992년 미술치료학회가 설립된 이후 전문적인 치료사들을 양성하고 그 활동범위를 넓혀나가고 있다. 미술치료의 치료 질병으로는 우울증, 불안증,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발달 장애, 정신과적 질환, 암 만성질환을 비롯한 신체질환자가 모두 포함된다.

 

 

 

 

이 밖에도 최근에는 질병까지는 아니더라도 심리적인 어려움, 적응의 어려움, 대인관계의 어려움이 있는 경우에도 미술치료가 도움이 되고는 한다. 그 외에도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분리 불안을 가진 아동, 치매를 앓는 노인, 이주가정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가족, 신체질환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을 겪는 이들이 모두 대상이다.

 

 

 

미술치료는 크게 '가족을 그리세요'와 같이 특정한 주제를 제시하는 방법과 '좋아하는 것을 그리세요'와 같이 비지시적인 방법으로 진행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치료하는 사람은 대상자들이 자유롭게 표현하고 내면을 알 수 있도록 도우며, 다양한 재료를 제공해 콜라주를 만들거나 찰흙이나 점토로 그 대상을 빚을 수도 있게 한다. 이때 떠오르는 감정, 경험을 같이 공유하면서 내적 경험을 하게 하고 치료자와 환자사이에 상호작용을 통한 치료적인 효과를 보는 것이다.쉽게 예를 들면 집을 그리라고 했을때 각 집의 구조에는 거기에 맞는 심리적인 해석이 뒤따른다.

 

 

 

 

굴뚝의 경우엔 가족간의 관계나 애정교류가 지붕은 내적인 공상활동이나 자기생각, 관념을 내포한다. 또 창문은 대인관계,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나타내고 문은 세상과 자기 자신과의 접근 가능성을 이야기 한다. 이외에도 벽은 자아의 강도와 통제력을 욽타리는 외부환경과 방어적인 행동을 마지막으로 계단은 타인과의 근접성을 표현하는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다. 만약 집을 그려 넣고 문을 그리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창문 역시 과도하게 많이 그려 넣는다면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싶은 욕구가 큰 것이고 창을 그려 넣지 않는다면 대인관계에 대한 불편함이 있어 위축되어 있다는 방증이다.

 

 

 

 

집뿐만 아니라 나무나 사람 역시 누구에게나 친밀감을 주는 소재로 미술치료를 할 때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주제이다. 나무의 경우를 보면 나무에 표현된 사과나무 열매나 새는 애정욕구를 상징한다. 가지는 환경과 접촉하는데 필요한 자원이자 능력이다.줄기는 자기대상의 힘이고 나이테는 외상적인 사건이나 자아상처를 표시하기 위함이다.

 

옹이구멍안의 동물은 퇴행하는 자아를 동일시하며 뿌리는 내적인 자신에 대한 안정감을 표현한다. 사람을 그릴 때 역시 대상의 심리상태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우선 얼굴의 경우 희미하거나 생략된 경우엔 개인 상호간에 소심함이나 관계가 분명치 않고 피상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눈은 크게 그릴 경우 사회적 의견에 과민하거나 외향적인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나며 반면 작게 그린 눈은 내향적이거나 관조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 밖에도 입이 강조되면 야만적인 경향이나 언어의 문제의 가능성을 갖기도 하며, 입이 생략되면 우울 상태이어가 타인과의 소통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술치료는 미술이라는 방법을 통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이미 학교나 주변 미술관에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은 우리 주변 가까이에서 존재한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리기나 만들기를 통해 표현하기를 계속한다면 감정적으로 힘들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을 해소할 수 있다. 보다 전문가를 찾기 원한다면 각 지역에 있는 심리상담센터나 미술치료센터를 방문하면 된다. 임상학적인 치료로도 접근이 가능하다.

 

 

 

 

이미 노인전문병원이나 대형 종합병원의 경우엔 미술치료사를 따로 두고 보다 전문적인 영역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이처럼 미술치료는 과거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소아질환에 주로 활용됐지만 최근엔 다양한 질환의 성인환자까지 확대되고 있으며, 특히 암 환자나 마비환자의 치료효과는 탁월하다.

 

 

 

2005년 국내 최초로 미술치료실을 개설한 분당 차병원을 시작으로 현재는 강동성심병원, 서울시립병원 등 국내 거의 모든 종합병원이 미술치료실을 설치 및 운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포천중문의대, 명지대, 서울여대, 원광대, 대구대, 영남대 대학원 등에 미술치료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글/ 김지환 자유기고가(전 청년의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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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가 지금 나이가 30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쉴 수 있겠어요.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은 토익 고득점을 확보하는 거예요.”

30대에 접어든 한 여성의 하소연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왜냐면 그녀는 항상 아프기 때문이다. 첫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날에도 그녀는 아팠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자꾸 아프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도 도전하고 있다. 스펙을 쌓는 일에 말이다.


그녀의 생각이 문제라고 책망할 필요도 없다. 그녀 자신도 책망해서는 곤란하고, 주변의 그 누구도 그렇게 책망할 자격이 없다. 다만 관찰만이 필요하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마음을 잘 들여다보세요.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말이에요. 우리의 마음은 언제라도 두 가지죠. 마음 하나는 푹 쉬면서 행복이라는 에너지를 충전하려고 하고 있고요, 또 다른 마음 하나는 자꾸 달리려고만 하는 조급해 하고 있죠.”

 

 

 

 

우리의 마음은 치처럼 여유를 추구하는 본성(本性)이라는 마음과 빨리 얻으려고만 하는 칠정(七情)의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성에 가까우면 깨달음에 이른 것이요, 칠정에 가까우면 마음이 병든 것이다. 그녀가 다시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저 모든 것을 내려 놨었거든요. 그리고 충분히 쉬었어요. 그런데 왜 자꾸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거죠?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정말 짜증나는 일이에요.”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화도 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충분히 쉬었다면, 그래서 내가 삶의 에너지를 충분히 축적했다면, 어찌해서 내가 도전하는 일들이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자연과 인생에는 거짓이 없다. 따라서 이유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도전하는 일들이 너무 크거나, 혹은 내 행복의 에너지가 아직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음처럼 말했다.

 

“믿음(가명)씨! 자동차가 언덕을 올라가다가 멈췄어요. 차에는 이상이 없다고 가정하면 어떤 문제일까요?”
“그야 언덕이 너무 길고 높거나, 연료 탱크에 연료가 떨어졌겠죠. 뭐”
“바로 그렇죠. 당신 마음의 행복 연료가 충분치 않은 거예요.”

 

우리 몸의 느낌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힘이 들거나, 어떤 사정도 없이 몸이 아픈 일은 없다. 반드시 몸이 불편하고 건강이 따르지 않음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그러니 내 몸에 일어나는 모든 병증 들, 그것이 우울이든, 그것이 불안이든, 두려움이든, 만성 통증이든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몸의 증상들에 대해 좀 더 경건해져야 한다. 왜 이렇게 몸이 아프냐고, 자신의 몸 신호를 경시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학대해서는 곤란하다.


필자는 중,고교 학창시절에 공황장애를 앓았다. 그 땐 그 공황장애가 공황장애인 줄 몰랐다. 강단에 서는 게 두려웠고, 어른들을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 밤에는 속칭 ‘가위귀신’이 날마다 찾아들었다.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두려움에 엄습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이 공황장애인 줄 몰랐다. 참으로 불행한 일 같지만, 엄청나게 다행한 일이다. 왜냐면 모르기 때문에 심각하지 않았고, 심각하게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을 매우 잘 앓을 수(?) 있었다.


그렇다. 병이란 비록 불편하지만, 내 몸이 스스로 병을 고쳐내려는 과정이다. 즉, 내 몸의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자연치유력의 발동이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병이든, 육체적인 질환이든지 병이 걸리게 되면, 병이 걸렸다고 나 자신을 미워하거나, 재수 없다면서 자기를 부정하기 전에 내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고, 좀 더 겸허한 자세로 병을 맞이하고, 병이 잘 빠져나가도록 관리하는 게 낫다.


나는 잠시 몸과 마음이 힘들면서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생겨났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정신병이라는 심각한 단정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내 병에 심각하지 않았다. 또한 내가 아프다보니, 대학시절 한의학과에 다니면서 좀 더 마음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증상 역시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병이 다 나아갈 무렵, 내게는 속칭 ‘가위눌림’증이 더욱 거세게 다가왔다. 잠결에 나타난 시커먼 귀신! 아, 다시 의심이 생겨났다. ‘뭐야 정말 귀신이 있는 거야?’ 그러나 내 마음은 이런 의심을 희석시킬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이미, 논어와 노자, 장자, 황제내경, 퇴계집, 율곡전서 등 동양의 고전으로부터 스며든 크고 아름다운 삶에 대한 믿음이 가슴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나는 고전이 주는 메시지 그대로 ‘마음을 비우고 현실을 인정하라’는 가르침이 가슴 깊이 새겼다. 그리고 내 상황에 대해서 겸허히 수용했다. ‘그래 모든 증상이 나타나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목이 타면 갈증이 느껴진다. 물을 마셔도 물이 충분치 않으면 다시 갈증이 올라온다. 그러한 갈증이 어찌 가짜일 수 있겠는가. 내 몸이 아프다는 것, 내 마음이 우울하다는 것은 반드시 내 몸과 마음에 필요한 심리적인 영양분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그 영양분이 있더라도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다. 행복의 샘물, 기쁨이라는 감로수, 그리고 평화가 충분히 깃들어야 비로소 통증과 우울감이 해소된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충분히 기뻐야 한다.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또 사랑해야 한다. 내일은 신경을 꺼야 한다. 오늘만이 중요하다. 오늘 내가 행복한 삶만큼 중요한 과제는 없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나는 내 몸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몸의 기력을 보강하는 한약을 들었고 당랑권과 태극권을 수련하면서 몸과 마음에 기쁨의 물결을 일으켰다. 지금의 아내가 된 한 여인을 만나면서 뜨겁게 사랑도 했다. 수시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성현의 말씀을 암송하고 숙독했다. 그러자 밤마다 찾아왔던 ‘가위귀신’이 어찌 대결할 수 있겠는가.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위귀신은 나의 부정적인 생각이 몰고 온 부정적 에너지의 덩어리였을 뿐이었다. 내 마음이 기뻐지고 내 생활에 활력이 생기면,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나의 공황장애는 나를 드러내려는 교만한 생각이 몰고 온 부정적인 감정이었을 뿐이었다. 우주는 그런 내게 두려움이라는 손님을 보내주었던 것이다. 지금 만성통증과 공황증을 앓고 있는 그녀는 서른 살이다. 가장 나이의 무게가 크게 느껴지는 시기다. 그 젊고 싱싱한 서른 살밖에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 내 나이 51세, 그러나 나는 참으로 감사하다. 그래도 80대보다는 30년이 젊지 않은가? 나는 어쩌면 80대가 되어도 100세보다 젊다고 자위할 수 있을 듯하다. 누군가 말했다. 오늘은 남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젊은 날이라고 말이다. 참으로 멋진 생각이다.


절대동감! 그녀는 지금 의지로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 그녀 몸의 통증이 잘 물러서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비록 지금 내가 마음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증상의 소멸에는 시간이 필요해요. 왜냐면 내가 그 전에 경쟁적으로 살려다 보니, 세상과 싸워야만 했고, 그 것이 내 몸에 좋지 않은 파장을 일으켜서 통증이 있는 거죠. 그러니 이재는 그 통증을 그대로 두고, 오늘 하루 행복을 찾아보는 거예요.”


“어떻게 찾죠?” “간단해요. 일단 걸음걸이에 집중해 봐요. 그리고 숨 쉬는 것에, 먹는 것, 보는 것, 듣는 것에 집중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감각을 느껴 봐요. 처음에는 잘 느껴지지 않아요.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요. 그러나 자꾸 시도하면 미세한 희열이 생겨나고, 그 희열의 불꽃이 점점 발화하면서 내 몸의 통증과 내 마음의 불안을 씻어낼 정도로 거대해지면서 병이 낫게 되죠.”

 

다행히 그녀는 지금 감각의 기쁨을 찾아가는 훈련을 시작했다. 더 이상 자신의 증상과 싸우지 않는다. 그녀의 미래는 당연히 해피엔딩이다. 내가 그랬듯이.


대학(大學)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니,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알면 거의 도에 가깝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무엇을 먼저 할 바인가? 내 인생의 행복이 먼저다. 그 다음이 직장이다. 내 인생이 기쁨이 먼저다. 그 다음이 돈이다. 사랑이 먼저다. 결혼은 나중이다. 먼저 할 바가 근본이고, 나중할 바가 말단이다. 이를 거꾸로 하면 몸에 고통이 따르고 마음이 힘들어진다. 나는 마음병을 앓았을 때, 나를 드러나는 일을 중시했다. 거꾸로다. 그러니 두려울 수박에 없었다. 나를 낮추는 일이 먼저다. 그래야 내 마음이 기뻐진다. 서른 살의 그녀도 이제 순서를 제대로 잡았다. 스펙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일이다.


‘일이 안 돼서 웃을 수 없다’는 말은 사물의 근본과 말단을 모르기 때문이다. 먼저 할 바와 나중할 바를 모르기 때문이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웃는다. 웃으면 일이 다 잘 풀리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어떨까? 일이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있는가? 아니면 오늘 하루 열심히 웃으며 살아가는가? 무엇이 먼저 할 바인가?         

                             

글/ 제천시 제3한방명의촌 한방자연치유센터장 황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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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감성이 마른다. 음악을 들어도, 영화를 봐도 뭉클함이 무뎌진다. '감성체감의 법칙'이라고나 할까. 감성이 둔해지면 감정은 예민해진다. 마음의 윤활유인 감성이 메마르니 '마음의 회전'이 거칠어지는 탓이다. 나이 들수록 화내는 일이 잦아지는 이유다. 물론 일반적인 얘기다. 나이가 먹으면서 오히려 감성이 풍부해지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기억력도 약해진다. 기억이 흐려지면 잔소리(?)가 많아진다. 한 말 또하고, 또 그말을 반복한다.

 

 

 

젊다고 감성이 다 풍부한 건 아니다. 노년보다 감성이 빈약한 청춘도 많다. 사색에 게으르고, 책과 거리를 두고, 편협한 논리에 찌들고, 자연을 멀리하면 감성이 움틀 토양은 그만큼 척박해진다. 그래도 감성이 넘쳐나면 타고난 천성 덕이다. 유전의 축복이다. 더그 라슨은 "결코 눈덩이를 던져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 않으면 당신은 노화의 손아귀에 꽉 붙잡힌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감성이 척박해지면 20, 30대 청년도 정신적으로는 이미 노인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감성체감의 법칙'이 누구에게나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모든 것은 일단 방향을 잡으면 그쪽으로 쏠림현상이 강해진다. 그러니 게으름도, 거짓말도, 미루는 습관도, 남의 약점을 들추는 버릇도, 남의 공을 가로채는 뻔뻔함도 쏠림이 빨라지기 전에 방향을 틀어야 한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습(習)의 중요성을 잘 일깨운다. 모든 것에 가속도가 붙으면 방향을 바꾸기 어렵다.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에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차가 바로 뒤집힌다. 말라가는 감성에도 관성은 예외없이 적용된다. 그러니 시들해지는 기미가 보이면 감성에도 빨리 물을 줘야 한다.

 

 

 

'수확체감의 법칙'. 경제공부를 안 한 사람이라도 귀에 익도록 들어본 말이다. 노동이나 자본을 투입하면 처음에는 투입단위당 생산량이 늘어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투입단위당 생산량이 갈수록 적어진다는 이론이다. 감성 얘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수확체감이란 경제용어를 꺼낸 것은 정신영역인 감성도 물질영역인 생산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감성도 인생 초반에는 '감성체중'의 원리가 적용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감성체감'의 법칙이 적용된다.
다만 그 '어느 순간'은 삶의 길이만큼이나 시점이 제각각이다. 더그 라슨의 비유대로 어떤 사람은 20대 초반에 이미 눈덩이를 던져보고 싶은 충동이 없어지고, 어느 사람은 80대에도 눈덩이를 던지며 아기처럼 즐거워한다. 거울을 보며 '나는 나이에 비해 젋다'고 되뇌면 나이에 비해 늙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실제로 훨씬 젊게 산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건강에 지나친 자신도 위험하지만 스스로가 '약골'이라고 지나치게 위축되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성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이가 들면 감성이 메마른다는 '감성체감의 법칙'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은 중년이나 노년의 지혜가 아니다.

 

 

 

건강은 육체만의 얘기가 아니다. 육체뿐 아니라 마음, 정신, 영혼이 골고루 건강해야 진짜 건강이다. 마음은 삶의 소소한 것들을 보는 시선이다. 이런 잔잔한 시선(마음)이 모아져 정신을 만든다. 정신은 마음의 모둠이다. 영혼은 정신의 모둠이다. 그러니 어떤 이의 영혼이 고결하다 함은 그의 마음이 고결하고 정신이 맑다는 의미다. 순수한 영혼을 마주하면 나의 영혼도 맑아지는 듯 하다. 영혼은 전염병만큼이나 전파력이 강하다. 부러운 마음은 닮고 싶은마음이다.

 

정신의 윤활유인 감성이 말라가는건 삶이 그만큼 건조해진다는 얘기다. 삶이 건조하다 싶으면 '위치'를 바꿔보자. 발의 위치를 바꾸면 만물이 달라보이고, 생각의 위치를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익숙한 주변의 것을 감사의 마음으로 다시 보자. 그럼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친구도, 아파트 옆 가로수도 많은 게 달라보인다. 감성을 깨우는 삶은 주름살을 극복하고 마음의 건강을 회복하는 또다른 건강관리법이다.

 

 
글 / 한국경제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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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정이 늘고 있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혼밥’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혼자가 편하고, 인맥을 늘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들며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린다. 모임이 많아지는 연말. 하지만 그 속에서 군중 속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은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혼자가 편한 것일까? 정말 혼자가 편한 것일까? 

 

  

‘혼자’가 좋은 이유?! 성격을 들여다보자

 

몇 가지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한 가지는 어렸을 적부터 혼자서 지낸 것을 학습한 경우다. 요즈음 혼자 노는 사람들은 노인들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핵가족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도시문화 속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어렸을 적부터 함께 어울려서 집단으로 놀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혼자 놀았던 경우가 많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본래 좋은 것보다는 익숙하고 편한 것을 찾는 법이다. 중년이나 노인들을 보라. 그들도 어린시절 경험으로 어떻게든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여전히 즐겨 하지 않는가.

 

그 다음은 성격 때문이다. 성격적 이유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회피적인 성격은 혼자 지낸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수용 받지 못하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여 만남을 회피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항상 인정받고 수용 받기는 힘 들다. 때로는 무시당할 수도 있고,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은 정말 믿 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과만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꺼린다.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성격 역시 혼자 논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일이나 음식도 마다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일들은 자기중심적 사람들에게 심리 적 불편감인 불안을 유발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불안을 떨쳐 버리기 원한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남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희생하거나 포기하기는 것이 과도한 불안을 초래하기 때문에 혼자 노는 것이다. 

 

 

문명의 발달, 혼자인 듯 혼자 아닌 혼자 같은 나를 만든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존재한다.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함께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잡기 원한다. 혼자 있다 보면 함께 있고 싶어지고, 함께 있다 보면 혼자 있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대부분의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람의 마음이 라고 할 수 있다. 계속 혼자 있는 것이 좋다거나, 계속함께 있어야만 한다면 이것은 심리장애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들이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이유 도 현대 사회가 사람을 혼자 놀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해도 누군가와 늘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통신의 발달은 결국 사람들에게 족쇄를 채워주었다. 예전에는 자녀들이 집을 뛰쳐나가면, 부모는 맨발로 뛰어다니면서 자녀를 찾아 헤맸다. 지금은 어떤가? 자녀들이 집을 나가면 일단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일에서 해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인터넷과 통신수단의 발달로 집에 가서도 회사 일을 거 의 똑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문명의 발달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자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핸드폰 위치 추적을 해서라도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전국에 깔린 수억 개의 CCTV를 통하여 지금도 끊임없이 노출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혼자 있기를 원한다. 함께 있는 것이 지겹고, 함께 있다 보면 ‘나’는 사라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있으면 처음에는 좋지만 조금씩 심심해지고, 처음에는 독립감이었는데 나중에는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혼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고, SNS로 안부를 남긴다. 물론 이러한 부분에서 문명사회는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한편 언제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물꼬를 마련해주고 있다. 

 

 

사람들 속에서 '나'를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너무 식상한 표현이다. 너무 식상하다는 것은 그만큼 맞는 것이다. 맞기 때문에, 계속 회자되고 그래서 식상해지는 것이니까. 언제나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사는 우리의 인생에서 가끔은 혼자 보내는 시간이 꿀맛 같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기를 원한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은 ‘혼자’와 ‘함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인생이다.

 

만약 혼자 지내다가 다시 사람들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다면, 그것은 사람들 자체가 싫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누구와 함께 있든지 자기 생각과 감정, 욕구와 의지는 그 누구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자신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글 / 누다심(심리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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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고 희망과 계획으로 가득 차는 계절입니다. 기온이 올라가고 태양의 고도가 높아져 낮이 좀 더 길어지는 것인데 우리의 마음까지도 바뀌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도 자연의 작은 일부분이기 때문에 시작과 계획을 위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대자연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봄철 건강은 자연의 순응에서

사람의 몸과 마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기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됩니다. 기후의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영향이 큰 두 가지는 온도(따뜻함과 차가움)와 습도(습함과 건조함)입니다. 봄의 대기는 겨울의 차갑고 건조한 기운에서 여름의 습하고 무더운 기운으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에 해당됩니다. 사람의 체질도 온도와 습도를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데, 평소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은 따스해지는 봄이 더욱 반가울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여 몸의 기능이 너무 앞서거나 뒤처지면 몸살이 나고 병이 생기게 됩니다. 봄이 되면 따듯한 온도와 길어진 일조량에 저절로 우리 몸의 신진대사와 오장육부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봄은 겨우내 땅속에 숨어 지내던 만물에서 양기가 꿈틀거리며 증가하는 시기입니다. 겨울은 ‘수(水)’의 기운, 즉 물 기운이 작용하여 모아두고 쌓아두는 계절이지만, 봄은 ‘목(木)’의 기운이 작용하여 솟아나고, 뻗어 나오고, 무엇이든지 발생하는 기운이 가득하게 됩니다. 한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에는 계절에 따른 생활 관리를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봄의 3개월은 ‘발진(發振)’의 계절로 ‘발진’이란 봄에 만물이 양기(陽氣)를 발생시키고 자라나는 시기이므로 자연에는 생기가 충만해지고 만물이 소생하며 번영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봄철 건강법의 핵심은 양기와 생명력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봄, 마음의 건강관리까지도

봄에는 겨울보다는 해가 일찍 떠서 눈도 일찍 떠지게 되므로 아침에 부지런히 일어나 산책을 하면서 자연을 거닐며 생기를 마셔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산과 들의 초록을 보기가 쉽지 않겠지만 주변의 작은 자투리땅에도 봄은 찾아오기에, 땅에 올라오는 초록을 보면서 생기를 느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옷을 입을 때에도 봄기운이 피부에 잘 닿을 수 있도록 몸을 꽉 조이는 옷보다는 느슨하고 편안한 옷을 입는 것이 좋습니다. 피부 역시 호흡을 하므로 바람이 잘 통하는 옷은 입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지혜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몸에 꽉 맞는 의복을 입는 경우가 많기에 봄에는 조금은 넉넉한 옷을 입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발생’의 기운이 우리 몸과 상응하게 되어 무엇이든 하고 싶은 생각과 의욕이 자연스럽게 샘솟게 됩니다.

보통 건강관리에 대한 경우 몸에 대한 것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마음관리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봄에는 아지랑이처럼 상승하는 기운에 맞게 마음을 써야합니다. 어떤 일에 대한 의욕이 생기면 잘 살려내야 하고 봄기운에 순응하면 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습니다. 또 봄에는 전쟁과 살생을 하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기운을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 시작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마음, 잘되기를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피어나는 꽃과 새싹 가운데에 느껴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글 / 왕경석 대전헤아림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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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의 공포가 훨씬 큰 법이다. 영화에서도 공포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에 깔리는 스산한 배경음악이 더 소름을 돋운다. 중국 황제가 머물고 있는 열하(熱河)로 향하는 연암 박지원은 어두운 밤에 극한의 공포를 마주한다. 깜깜한 어둠, 그것도 하룻밤에 무려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 것은 매순간이 절체절명이다. 어둠 아래 깔린 물, 그 공포스런 흐름의 소리, 말 위라는 불안감…. 그건 분명 공포의 극한조합이다.

 

 

 

스스로를 먼저 채워라

 

 

 

공포는 마음의 평정심이 깨진 상태다. 극도로 불안한 마음이다. 불안은 눈과 귀, 마음이 예민해진 결과다. 그 예민함을 둔화시키면 공포가 가라앉고 평상심으로 마음이 옮겨간다.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연암은 극도의 공포상황에서 ‘명심(冥心)’, 즉 평상심을 찾는다. 그리하니 그 험악한 강물 소리가 조용해졌다. 아니, 물소리는 그 물소리인데, 마음이 잠잠해진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고전인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열린 마음으로 넓은 세상을 보라는 메시지가 담긴 생생한 여행기다. 또한 물에서 깨달은 마음의 이치를 담고 있기에 더욱 뜻이 깊다.  

 

암에게 명심이란 깨달음을 준 물은 삶에 던져주는 함의가 적지않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채움이다. 자신의 낮은 곳을 채운 뒤에 비로소 흘러간다. 스스로도 부족하면서 남의 모자람을 손가락질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은 채우지 않으면서 남의 비어있음을 탓하지 말라는 무언의 교훈을 흘려준다. 천하를 다스리는 출발이 ‘스스로의 마음 닦기’라는 공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도 맥이 닿는다.

 

 

 

끊임없이 변화하라

 

 

 

물은 꿈이고 변화다. 시냇물에 안주하지 않고 강으로,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간다. 쉬지 않고 흘러서 좀 더 큰 세상을 보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행복도 쌓아두며 향기가 사라진다고 귀띔한다. 그날 구운 빵처럼 하루하루 만들어가는 행복이 더 향기로움을 일깨운다. 그건 게으름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굽어 살핀다’는 말이 있다. 임금이 백성을 굽어살피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굽어살피고, 강자가 약자를 굽어살피면 세상이 따스해진다. 굽어살핀다함은 스스로를 낮추고 마음을 아래로 쏟는 것이다. 또한 굽어살핀다함은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시소는 균형이다. 어른과 아이가 시소를 타면 어른이 아이쪽으로 한 발짝 다가가야 높이가 맞춰진다.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다가가고,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다가가고, 많아 배운자가 덜 배운자에게 다가가야 사회가 조화롭다.

 

모든 건 상대적이다. 부자가 있기에 가난한 자가 있고, 배운 자가 있기에 못 배운 자가 있다. 내 위엔 더 부자가, 아래엔 더 가난한 자가 있다. 그러니 누구나 굽어봐야 할 대상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굽어보고, 나는 또 다른 누군가를 굽어봐야 한다. 굽어보는 것은 더불어 사는 것이다. 공자의 인(仁)도, 맹자의 덕(德)도 결국 더불어함에 깃든다.

 

 

 

크게 보고 화합하라

 

 

 

물은 화합이다. 만산의 골짜기 물들이 흐르고 흘러 세상이란 넓은 바다에서 꿈을 합한다. 흘러서 하나가 되는 물은 사소로움으로 편을 가르지 말고, 어깨동무를 하고 큰 세상을 함께 보라고 조용히 인간을 꾸짖는다. 노자는 ‘물이 깨져도 다시 붙는 것은 그 성품이 부드럽고 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약돌의 날카로움을 다듬어 주는 것은 결국 물의 부드러움이다.

 

세상의 이치가 꼬이고, 마음의 평정이 깨지면 오늘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보라. 마음이 탁해지는 듯하면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를 들어보라. 유유히 흐르는 그 물이, 청량한 그 소리가 연암만큼의 깨달음은 아닐지라도 의외로 삶을 정화시키고 신선한 에너지를 줄지도 모른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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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미래에는 행복해지리라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그러나 지금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주변을 맴도는 행복을 끌어안지 않았을 뿐 돌아보면 지금도 충분히 행복할

    이유가 가득하다.

 

 

         

    

 

 

 

 "당신은 왜 살아가죠?"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던져진다면, 대부분은 “행복하기 위해서요.”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목적이 있다면,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행복’이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도 미래에는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기에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삶에 어떤 행복도 느끼지 못하고 미래마저도 행복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왜 우리는 이다지도 행복에 집착하는 걸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곧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물을 찾듯이, 새들이 하늘을 날듯이, 사람은 저 깊은 속마음에서부터 행복을 추구한다. 그냥 그렇게 설계되었다. 어쩌면 태초에 조물주가 입력한 가장 중요한 유전자 암호가 곧 ‘행복실현의 욕구’가 아닐까?

 

실제로 행복하면 그만이다. 비록 높은 지위와 화려한 명예, 충분한 재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 앞에서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행복감은 삶의 완성품! 누구라도 행복한 사람을 가장 부러워한다. 행복이야말로 삶의 참된 의미요, 절대가치가 아닐 수 없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사실 이 질문은 매우 짓궂기 그지없다. 굉장한 실례다. 그저 친한 친구들에게나 할 수 있는 농담이다. 그런 실례를 무릅쓰고 필자가 이 질문을 던져 보니 선뜻 “맞소. 나는 행복하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보다 대답을 주저하거나 “글쎄요.”라는 대답이 훨씬 많았다. 어찌해서 우리는 ‘왜 사느냐?’는 질문에는 ‘행복하기 위함’이라고 쉽게 말하면서도 막상 ‘행복한가?’라는 질문에는 왜 확연히 대답하지 못하는 걸까?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미안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불행한 일이 적지 않다. 이 지구에는 전 세계 인구 73여억 명이 먹을 수 있는 두 배의 식량이 생산되지만, 아직도 인류의 1/6은 절대빈곤자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각종 질병과 사건, 사고, 전쟁이 늘 끊이지 않는다. 내가 그런 아픔의 당사자일 수 있고, 설령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내 이웃이 이와 같을진대 어떻게 내가 선뜻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곧 철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누구라도 위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위 질문은 곧 매우 큰 결례를 범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푸른 하늘을 보고 “하늘색이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누구라도 행복하고 나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행복을 굳이 말로써 드러낼 필요가 없다. 지극히 당연한 행복을 물어서 무엇하고, 내세울 건 또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내 행복을 꼭꼭 숨기거나 포기할 이유도 없다.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은 나만의 사정이 아니며, 우리 모두의 공통 관심사이며 보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다는 표현을 삼갈 수 있지만, 행복감만큼은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

 

 

 

 행복을 끌어안아야 행복하다

 

어느 날엔가 나는 50대의 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몹시 불행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든요.”

“혹시 지금 부인은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라, 떠난 사람에게 미안해서 행복을 멀리하려는 마음이 아닐까요?”

 

사람으로 태어나 생각할 수 있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본래 행복하지만, ‘행복을 끌어안느냐, 떨쳐내느냐’의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후자를 선택해서 곧잘 내 행복을 떨쳐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위대한 우리네 삶은 반드시 내 고집을 꺾고 나를 행복의 물결에 동참시킨다.

 

필자 역시 십여 년 전 사랑하는 혈연을 잃었다. 나는 행복할 수 없었다. 아니 행복하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사는 동안 외로움에 몸부림쳤고 아픔만 겪다가 하늘나라로 가 버린 혈육이지 않았던가. 더욱이 그 책임이 내게 있다는 생각에 나는 내 행복을 철저히 배격하고 거부했다. 나는 내 마음 둘레에 두꺼운 옹벽을 쌓고 행복의 요소들을 모두 차단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행복은 불과 수개월도 안 되어 내 마음 옹벽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소리 없이 파고드는 행복의 습격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토록 불행해지려고 굳게 다짐했지만, 행복의 에너지는 치밀하고 조용했고 거대했다. 나는 행복의 물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내 방어는 무력했고 내 저항은 초토화되었다. 완패! 나는 행복 앞에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게 행복이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었음을. 내 행복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일련의 사건들 역시 행복 덩어리일 수 있다. 행복하기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불행하다는 것은 착각일뿐

 

마음병을 앓고 있는 29살의 한 청년이 말했다.

 

“집에 있는데 자꾸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받게 해요. 특히 먹을 것 가지고 그러세요. 배가 불러서 더부룩하고 속이 울렁거리는데도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하시거든요. 왜 이토록 사소한 일로 제 삶이 불행해져야 하는 거죠?”

 

그는 불행한 게 아니었다. 불행의 이유를 붙인 것에 불과했다. 울고 싶을 때 누군가 뺨을 때려 주면 고맙지 않은가. 그는 스스로 뺨을 때릴 수 없었고 핑곗거리를 찾아내었다. 누구라도 불행하고 싶을 때, 이런저런 핑계를 댈 만한 일들이 보이면 얼른 그것을 부여잡는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되물었다.

 

“아직 어머님께서 젊으셔서 체력이 좋으시고, 치매도 없으시고 건강하게 살아계시잖아요. 지금의 이런 상황이 곧 행복 아닌가요?”

 

불행감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내가 행복을 멀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불행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혔을 뿐,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의 불행은 결국 행복에 겨운 소리였다. 그는 불행을 가장하여 행복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른 데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는 타인에게 뺨을 맞을 수도 있다.

 

 

  

마음을 비우면 행복이 온다

 

행복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상대가 불행하다고 주장할 때, 그의 말에 속아줄망정 결코 속지 않는다. 만일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다면, 사기와 절도, 폭력, 그리고 그 이상의 범죄일 뿐이다. 설사 누군가가 언어폭력을 휘두를지라도 내가 듣지 않거나, 흘려들으면 그만이다. 더욱이 가까운 사람들의 잔소리라면 ‘자장가로 들리는 사랑의 노래’가 아닐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행복의 요소가 없는 게 아니라, 행복을 느끼는 마음의 센서가 오작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기대치가 높음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마음병이다. 마음병은 마음의 센서를 고치면 된다. 그 방법이 곧 자기수양이다. 성현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자기를 수양하면 바로 해결된다.

 

현실보다 더 많이 바라는 생각이 곧 기대치가 높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허준 선생은 동의보감에서 ‘마음을 비우면 도와 합한다(虛心合道)’라고 하였다. 자기만족의 기대치를 내리는 게 곧 ‘마음 비우기’다. 분수를 잊은 채 남처럼 되려는 마음, 내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모습만을 좇는 마음이 문제다. 도(道)란 곧 지극한 행복! 마음을 비우면 본래부터 있었던 지극한 행복감이 즉시 회복된다.

 

 

  

마음껏 행복해도 괜찮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한 투쟁으로도 규정해 볼 수 있다. 선을 추구하는 철학, 사랑과 자비를 실현시킨 종교, 민주화에 대한 열정, 그 모두가 후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선각자들의 치열한 노력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들의 뜻을 따라 행복을 누려야 할 의무가 있다.

 

다만 선각자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음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내가 먼저 행복하고 그 행복한 에너지를 발판 삼아 다시금 다음 세대가 행복할 수 있도록 더 아름다운 자연을 남겨 주고, 기부문화에 솔선수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내가 지금의 행복을 거부하고, 또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내 삶을 희생하고, 다시금 그 후대의 누구도 나처럼 따라 한다면 도대체 누가 행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지금 마땅히 행복해야 하며, 기대치를 내려서 마음껏 행복해도 괜찮다.

 

글 / 황웅근 인의예지 심성계발원 대표

출처 / 사보 '건강보험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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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에 대한 이해 역시 인문학을 이루는 근간이다. 이를 위해서는 감정을 수용할 수 있는 진정한 대화가 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의 감정을 표현해 주는 깊은 공감이야말로 관심과 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인문학 강의를 하러 다니다 보면, 인문학이 생활 속에서 유용한지를 묻는 질문이 항상 따라다닌다. 그중 젊은 친구들이 빼놓지 않고 하는 질문이 있는데, 바로 “인문학이 연애에 도움이 되느냐?”는 것. 이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예스”라고 대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문학이 다루는 내용들은 너무도 광범위해서 그 모두가 즐거운 화젯거리가 될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심리학이 인문학의 주된 분야이다 보니 인간의 심리, 남녀의 심리와 직결되는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심리학의 연구 결과가 보여주는 단순한 통계나 이성의 행동에 대한 의미 분석, 또는 이성을 자극하는 행동과 언어에 대한 조언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녀 간의 사교 스킬보다도 인간으로서의 상호 이해와 대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은 날 그리 출중하지 못한 탓에 이성의 마음을 얻고자 여심 공략법이나 다양한 심리서들을 들추어 보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와 주변의 여러 사례들을 보아 오면서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또한 상대를 얼마나 이해하고 또 알아봐 주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연애의 시작임은 물론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도, 심지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대화와 이해가 부족한 남녀는 쉽게 연인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연인이 되더라도 만남이 오래가지 못하거나 즐겁고 활기찬 만남이 되지 못하며, 어찌 결혼까지 하더라도 서로 만족한 결혼 생활을 기대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대화야말로 두 사람 앞에 직면한 모든 문제를 함께 풀 수 있는 열쇠이며, 동시에 서로의 사랑과 관심을 확인하며 키워갈 행복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대화란 '감정의 수용'이다

 

그렇다면 시작하는 연인에게도 필요하고, 함께 사는 부부에게도 필요한 대화의 방법이란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감정의 수용’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말이 오간다고 다 진실한 대화는 아니다. 지시하고, 아는 척하고, 상대를 함부로 해석하는 것은 진정한 대화라 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심리학자, 특히 내담자와 전문가의 직접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담 분야의 발전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과거 많은 상담가가 내담자들에게 주의를 주고 충고하고, 바람직한 것을 하기로 약속을 받아내곤 했다. 프로이트로부터 본격화된 초기 정신분석학은 내담자들의 문제의 원인을 파헤치고 알 수 없던 이유들을 모두 해석해 주었다. 또한 많은 상담가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주 잘하셨습니다”와 같은 긍정적 암시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상담가들은 그런 것들을 선호하지 않는다. 주의와 충고, 일방적인 약속은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유해할 수 있음이 밝혀졌고, 마음을 다 파헤쳐 지식을 전달한다 한들 치료가 되기보다 저항받기 쉬우며 아무리 긍정적인 암시도 말 없는 억압이 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에 가장 탁월한 상담가 중 하나요, 오늘날 상담의 주 흐름을 제시한 칼 로저스(Carl Rogers)를 위시한 많은 상담가가 내담자의 가능성을 믿고 그의 감정을 수용하면서 상담을 시작하라고 이야기한다.

 

칼 로저스가 열어 보인 인본주의 심리학이 그러하듯 그들은 인간이 가진 자아실현 욕구와 이성의 의지를 믿는다. 그들이 당면한 슬픔이나 분노 등 당면한 감정만 충분히 받아들이고 이해해 준다면 그들은 다시 용기를 내어 올바른 자신의 길을 선택해 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에 그들은 상대방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피드백하라고 이야기한다.

 

 

 

상대의 감정을 표현해 주자

 

그렇다고 그들이 말하는 피드백이라는 것이 그렇게 거창하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어떤 일에 몹시 분개하고 있다면,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그것 때문에 몹시 기분이 상했군요.”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랑하고 싶은 일을 당신에게 이야기한다면, 잘난 체한다고 지적하거나 무성의하게 맞장구를 치기보다 “그래서 매우 자랑스럽구나.”라고 말해 주면 된다. 논리적으로 해석하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단순히 상대방의 감정을 수용하고 그것을 표현해 주는 것만으로 상대방은 자신이 이해받고 수용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그렇게 말하기 위해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마음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내친김에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다면

 

한 번 시도해 보라. 놀랍게도 빠른 시간 안에 서로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이 마음을 열지 않는 많은 내담자를 접해야 하는 상담실에서 가장 유용한 방법이며, 심지어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아동상담에서도 사용하는 첫 번째 방법이기 때문이다. 부모역할훈련(Parent Effectiveness Training) 등의 권위 있는 자녀교육 프로그램에서도 가장 먼저 제시하는 방법 또한 이것이다.

 

감정의 수용 없이 시작된 대화는 마음과 마음의 대화로 들어가기 쉽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감정을 이해받고 나누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지식 또한 이것이 우선되지 않는다면 유해할 수 있다. 그저 아는 것이 많음을 과시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관심거리에만 푹 빠져 인문학 지식 나열에 급급하다 보면 오히려 사람들은 당신과 담을 쌓고 멀어지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감정의 수용이야말로 마음을 여는 것이요, 관심의 시작이고, 대화의 시작이며, 카운슬링과 교육의 시작인 것이다.

 

물론 내 말이 다 맞으라는 법은 없다.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도 알기 힘든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게 믿을 때 내 삶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따뜻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 / 주현성 인문학 작가

출처 / 사보 '건강보험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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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의 핵심 키워드는 ‘마음’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추상적 정의에서, ‘흔들리는 마음은 어찌 잡을까’라는 실천적 과제까지 마음은 언제나 철학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연구대상이다. 동양고전의 백미인 논어 역시 ‘마음 다스리기’로 귀결된다. 행복은 마음이 평온하게 다스려진 결과이고 갈등과 대립은 마음이 난잡해진 탓이다. 누구나 새 해엔 ‘새로운 결심’을 한다. 누구는 건강을, 누구는 명예를, 또다른 누구는 사람과의 관계회복을 소원한다. 하지만 건강이든, 부(富)든, 명예이든 마음이 흩어지면 행복은 저만치 멀어진다. ‘마음 다스리기’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공염불이 된다는 얘기다.

 

 

 

더불어 살아보자

 

흔히 21세기는 ‘융합의 시대’라고 한다. 이질적인 것들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다. 인문학과 기술이 결합해 새로운 제품들을 만들어내고, 옛 것과 새로운 것이 만나 또다른 새로움을 창조한다. 더불어야 더 빛이나는 시대다. 더불어 사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출발점이다. 세상은 넓고 생각은 너무나 다를 수 있다는, 어쩌면 너무나 단순한 진리를 먼저 인정하자. 우리나라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극심한 생각의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나와의 다름’을 ‘나만 옳다’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 자로편에서 군자를 화이부동(和而不同), 소인을 동이불화(同而不和)로 풀어냈다. 군자는 남과 두루 어울려 지내되 의(義)나 도리까지 굽혀가며 무리를 좇지는 않는다는 의미고, 소인은 겉으로는 모든 사람과 한마음인 듯 하지만 속으로는 진심으로 화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화이부동엔 현대적 해석까지 따라붙는다. 군자는 모든 사람과 화합하지만 한마음 되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면 마음은 저절로 다스려진다.   

 

 

 

때때로 비워보자

 

원래 마음이란 것은 하루종일 그네를 탄다. 사랑과 미움이 종일 들락거리고, 비움과 채움이 수시로 교차한다. 의마심원(意馬心猿)은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을 꼬집은 표현이다. 당나라 석두대사는 ‘인간의 마음이 말처럼 날뛰고 원숭이처럼 가볍다’고 설파했다. 서유기의 손오공은 인간 존재의 가벼움을 상징한다. 하지만 인간은 가벼운 존재이면서도 끊임없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만물의 영장’이다. 손오공은  악들을 연이어 물리치고 극락의 세계, 즉 서방으로 나아간다.

 

최근엔 비움이 화두다. 정신건강을 회복하고 행복을 크게 하려는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이다. 노자의 도덕경엔 무지이위용(無之以爲用)이란 말이 나온다. 없는 것이 쓰임새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로, 쉽게 풀면 비움의 효용성을 강조하 것이다. 그룻이 아무리 화려하고 재료가 좋아도 결국 쓰임새는 비어있음, 즉 빈 공간에 있다는 얘기다. 비움은 자연에의 순응이다. 세월이 가는 것, 주름이 느는 것, 생각이 다른 것은 넓게 보면 모두 자연의 순리다.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미련을 오래 두지 않는 것도 마음을 비우는 요령이다. 

 

 

 

작은 일에도 웃어보자

 

불교에 무재칠시(無材七施)라는 말이 있다. 물질과 재능이 없어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7가지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석가모니를 찾아가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다”고 호소했고, 이에 석가는 “남에게 베풀지 않은 탓”이라고 답했다. 그가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털이’라고 해명하자 석가가 물질말고도 남에게 베풀수 있는, 요즘말로 노하우를 귀띔해준 것이다.

 

무재칠시의 첫째는 화안시(和顔施)다. 환한 표정을 짓고, 부드러운 얼굴로 남을 대하면 그 것이 바로 베품이라는 것이다. ‘웃는 얼굴에 침못뱉는다’는 속담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환한 표정은 주위에 덕을 베풀고, 스스로의 격도 높인다. ‘한번 웃으면 하루가 젊어진다’는 말은 인생을 건강과 행복으로 인도하는 명언중 명언이다. 언시(言施)는 사랑과 칭찬으로, 심시(心施)는 열리고 따스한 마음으로, 안시(眼施)는 호의를 담는 눈빛으로, 신시(身施)는 몸의 수고로움으로, 좌시(座施)는 자리양보로, 찰시(察施)는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으로 물질이 없어도 얼마든지 세상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자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은 얼굴빛이 다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말씀은 감사가 바로 행복을 담는 그릇임을 함의한다. 감사의 크기가 바로 행복의 크기인 것이다. 병의 절반은 마음이 원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감사가 부족한 탓이다. 감사의 마음이 옅어지면 ‘감사하다’는 말부터 일상화하자. 감사는 얼굴빛을 바꾸고, 우울증을 치료하고, 소통의 문을 활짝 열어준다. 감사는 상대와 내가 동시에 행복해지는 ‘소통의 시너지’다.

 

천 날의 기도보다 한 시간의 실천이 더 귀한 법이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소망을 꿈꾸고,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면 꾸준한 실천으로 소망과 목표의 결실을 거두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 다스리기’로 행복의 덩치를 키운다면 그 또한 2014년을 더 없이 멋진 한 해로 만들 것이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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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어디를 가나 건강 이야기뿐이다. 인류 역사상 사람들이 이렇게나 건강에 신경을 쓴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온갖 의학정보, 병의원 광고, 건강 관련 보험상품, 건강보조식품을 비롯해 건강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여전히 병의원이나 약국, 한의원에는 아픔과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이렇게 쏟아지는 건강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왜 건강하지 못할까?

 

 

           

 

 

 

 

심리학, 건강에 눈을 뜨다

 

심리학의 한 분야인 건강심리학에서는 인간의 건강을 단순히 생물학적 차원에서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질병의 발생과 치유 과정,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일에는 생물학적 요인에 더해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동일한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질병에 대한 마음이나 태도, 그리고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병세는 확연히 달라진다. 이외에도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지원이나 관심, 또 지역에 건강관련 기관이 존재하는지 여부도 중요하다. 따라서 심리학자들은 건강과 질병을 생물심리사회적 모델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는 단지 심리학자들의 주장 뿐 아니라 의학계의 흐름이기도 하다.

 

병원에서도 환자들의 심리적 편안함을 위해 음악회와 영화감상을 비롯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들을 실시하고 있으며, 환자와 가족들이 질병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태도를 갖게 하도록 다양한 교육도 한다. 그리고 IT 강국답게 환자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의료전문가에게 전달하는 서비스도 개발된다고 하니 건강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질병 치유와 건강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마음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치유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마음은 무엇일까? 심리학자들과 의사들은 단연 자발성을 꼽는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의사들은 문진과 여러 검사를 통해 정확히 진단을 하고, 그에 적절한 수술이나 시술, 혹은 약을 처방한다. 오랫동안 전문지식과 훈련을 받은 의사들의 몫은 여기까지다. 그 다음은 오로지 환자의 책임으로 남는다.

 

환자가 제 아무리 정확한 진단과 처치, 약 처방을 받았더라도 집으로 돌아가 약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고 그 다음 방문 약속도 지키지 않거나 혹은 약을 먹고 다음 방문 약속도 지키지만 마지못해 억지로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병세가 더 악화되거나 만성화될 것이다. 환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느냐, 즉 자발성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질병 치유뿐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자발성은 중요하다. 이는 '헬싱키 역설(Helsinki Paradox)'로 불리는 실험에서 밝혀졌다. 핀란드 정부가 실시한 이 실험에서 연구자들은 40세 초반의 상급 관리자를 각 600명씩 두 그룹으로 나눈 뒤 A 그룹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획대로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식이요법, 운동, 금연, 금주 등 의사의 지시를 철저히 따르게 하고, B 그룹은 평소 자기 생활습관 그대로 지내게 했다. 그리고 15년이 지나 참가자들이 대략 60세에 가까워진 시점에서 이들의 건강을 조사했다. 어떤 그룹이 더 건강했을까? 놀랍게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의사의 지시를 철저히 따라야 했던 A 그룹보다는 평소처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했던 B그룹이 심장혈관계 질환, 고혈압, 암, 각종 사망, 자살 등에서 월등히 낮은 수치를 기록했고 삶의 질도 높았다고 한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

 

헬싱키의 역설 실험을 오해하면 안 된다. 의사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것이 아니다. 자발성 없다면 제 아무리 명의를 만나도, 좋다는 약과 음식을 먹어도 건강 유지와 질병 치유에는 도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평양은 원래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 곳을 다스리는 벼슬은 누구나 탐을 내는 자리였지만, 이것도 자기가 싫다하면 누구도 억지로 시킬 수는 없다.

 

우리의 건강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용하다고 소문한 곳을 찾아가고, 좋다는 약과 음식은 다 먹는다고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치유하고자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런 자발성, 더 나아가 행복하고 편안한 마음이 전제된다면 밥도 충분한 보약이 될 수 있다.

 

                                                                                                                                     글 / 심리학 칼럼니스트 강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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