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삼키는 큰 물고기는 작은 갈래의 흐름에서 헤엄치지 않는다. 큰 고니는 높이 날고 더러운 연못에 내려앉지 않는다. 그들의 꿈이 원대하기 때문이다.” 


≪열자≫에 나오는 문구로, 구름을 타고 다녔다는 열자의 꿈이 얼마나 웅대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허황한 듯하면서도 그 안에 뜻이 가득한 것, 그게 도가(道家)의 묘미다. 



뭍에서

배를 부릴 수는 없다


높은 것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아래가 깊다. 우뚝 선 나무는 뿌리가 깊고, 우러름을 받는 지식인은 아는 게 깊다. 치솟은 빌딩은 지하가 깊고, 고고한 사상가는 철학이 깊다. 



깊지 않으면 높아지지 못한다. 깊지 않고 높은 것, 그게 바로 사상누각이다. 수시로 흔들리고, 언제든 무너진다. 깊어진다는 건 양심의 씨앗, 앎의 씨앗, 생각의 씨앗을 켜켜이 쌓아가는 수양이다. 촘촘히 쌓아서 깊어지는 것, 그게 진정한 높아짐이다.


장자는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우지 못한다”고 했다. 주머니가 작으면 큰 것을 담을 수 없고, 두레박이 짧으면 깊은 물을 퍼 올릴 수 없다(관중). 벌집에는 고니 알을 담을 수 없고(회남자), 땅을 깊이 파야 시원한 샘물을 얻는다(채근담). 



스스로가 커야 큰 것을 담는다. 메추리는 결코 황새 알을 품지 못한다. 깊어야 높아진다. 건물을 세우고 지하를 파는 건축가는 없다. 채워야 넘친다. 밑이 뚫리면 한 치짜리 대롱에도 물을 채울 수 없다. 


종자기의 물에는 기껏 겨자씨나 지푸라기밖에 띄우지 못한다. 아무리 근사한 배라도 물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뭍에서는 결코 배를 띄울 수 없다. 당신 삶에도 물을 채워라. 배를 띄우고, 꿈을 띄우고, 세상도 띄우는 그런 깊이로 물을 채워라. 한 방울씩 채워도 조금씩 깊어진다.



깊이 갈아야

수확이 풍성해진다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 과거를 답습하고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면서 적당히 땜질식으로 살아가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연암 박지원은 만년에 병풍에다 이 글을 써넣고 “천하만사가 모두 이 여덟 자로 무너진다”고 했다. 연암의 둘째 아들 종채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담은 ≪과정록≫에 나오는 얘기다. 



유가나 도가의 궁극적 지향점은 ‘평천하’다. 다만 거기에 이르는 방법론이 다를 뿐이다. 공자·맹자로 대표되는 유가는 배우고 익혀서 거기에 닿으라 하고, 노자·장자가 선봉인 도가는 비워서 거기에 이르라 한다.


장자의 비움은 크게 담기 위한 수양이다. 장자의 낮춤은 높아지기 위한 지혜다. 고을 하나 다스릴 만한 깊이로 나라를 맡으면 모두가 불행하다. 개인이 불행하고, 국가도 불행하다. 뭍에서 배를 끌면 몇 보 움직이기도 버겁다. 물에서 수레를 끌면 몇 발짝 나아가기도 힘들다. 



누구나 높아지기를 원한다.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을 탓하는 건 ‘나는 무능하다’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걸 비움으로 포장하는 것 또한 자기기만이다. 


문제는 당신의 진짜 키다. 당신은 한 자짜리 키로 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는가, 아니면 수십 자 당신의 키로 세상을 당당히 내려다보는가.



끝보다 뿌리를 봐라


참 농사꾼은 땅에 정성을 쏟는다. 대충 뿌리면 대충 열리고, 깊게 갈면 튼실한 열매로 보답한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깊어야 담고, 깊어야 띄운다. 누구나 재주가 다르다.


한비는 “무릇 좋은 말과 수레가 있더라도 종놈에게 부리게 하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만 왕량(王良)이 부리면 하루에 천 리도 갈 수 있다”고 했다. 



웃음거리가 되고 천 리를 가기도 하는 것은 말과 수레가 달라서가 아니다. 그건 재주의 뛰어남과 졸렬함의 차이 때문이다. 내가 깊어야 남도 부린다. 가랑잎 하나 달랑 띄울 깊이, 햇볕 한 번 들면 바로 마르는 깊이로는 담을 수도 없고 부릴 수도 없다. 


급히 이룬 것은 급히 사라진다. 순간에 솟은 것은 순간에 무너진다. 뿌리가 없는 화병 속 꽃은 금세 시든다. 뿌리 얕은 나무는 잔바람에도 쓰러진다. 물이 얕아지면 놀던 고기도 떠나간다.


속히 이루려고 서둘지 마라. 뭍에서 배를 띄우지 마라. 얄팍한 마음으로 남의 생각을 저울질하지 마라. 자신의 공을 뽐내면서 남을 업신여기지 마라. 모두 자신의 깊이를 얕게 하는 어리석음이다. 올려다볼 때는 바닥이 단단한지를 먼저 살펴라.



장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맘껏 높아지라고. 맘껏 꿈을 펴라고. 그러면서 묻는다. 당신은 얼마나 깊으냐고. 혹여 뭍에서 배를 띄우느라 끙끙대지는 않느냐고. 지푸라기 몇 개 띄울 물로 세상을 논하고 있지는 않으냐고. 


높아지기만을 바라는 세상이다. 깊이를 보지 않고, 바닥을 무시하고, 기둥을 간과하고 오직 끝단의 높이에만 매달리는 형국이다. 


너도나도 올려다만 볼뿐 아래를 보지 않는다. 아래가 깊으면 저절로 높아진다는 단순한 이치를 모르는 탓이다. 바다를 꿈꾸는가. 그럼 먼저 물을 채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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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스승이다. 누군가 당신을 배우고, 당신 길을 걷고자 한다. 당신을 닮고, 당신을 따르고자 한다. 


따르는 줄이 길다면 당신이 아주 근사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당신은 반면교사다. 누군가는 당신이란 거울로 자신의 허물을 비춰본다. 


당신은 참스승인가, 아니면 당신의 허물로 남의 허물을 비추는 거울인가. 당신의 자녀가 당신을 닮아간다면 반길 일인가, 꺼릴 일인가. 이왕이면 참스승으로 살자. 누군가의 길이 되고, 꿈이 되는 그런 삶을 살자. 



큰 스승은

회초리를 들지 않는다


그윽하면 오래 머물고 고요하면 절로 맑아진다. 높으면 푸르러지고 넓으면 깊어진다. 골짜기의 난초는 두루 향을 풍길 뿐 나를 알아달라고 목을 빼지 않는다. 그윽한 자태로 머물 뿐 나를 봐달라고 목청을 높이지 않는다. 


군자는 난을 닮았다. 그윽이 덕에 머물고, 고요히 뜻에 머문다. 세상을 향해 요란스레 외치지 않는다. 큰 것은 담담하다. 바다는 고요하고, 태산은 늘 그 자리다. 


큰 부모는 자식에게 윽박질하지 않는다. 회초리를 들지 않고 스스로 모범이 된다. 모범으로 가르친 자식은 세상을 살면서 어긋남이 적다. 무언지교(無言之敎), 노자는 큰 가르침은 말이 없다고 했다.



빈 깡통이 시끄럽고, 빈 수레가 요란하다. 물이 얕으면 자갈조차 소리를 내며 떠내려간다. 속이 비어서 시끄러운 줄 모르고, 아는 게 많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짐이 가벼워서 덜컹대는 줄 모르고 많이 실은 때문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니 세상이 요지경이다. 행동으로 깨우치는 자가 진정 큰 스승이다. 


몸소 실천하지 않는 가르침은 헛된 교훈일 뿐이다. 작은 가르침은 빈말을 세상에 흔들어대고, 큰 가르침은 행함으로 세상에 모범을 보인다. 


작은 지식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큰 지식은 자신을 스스로를 닦으려 한다. 세상 어디서나 작은 게 시끄러운 이치다. 



군자는

타산지석으로 옥을 간다


다른 산의 거친 돌로 자기의 옥을 간다(他山之石 可以攻玉). 《시경》소아편에 나오는 시의 한 구절이다. 


소인은 군자에게도 배우지 못한다. 군자는 소인에서도 배운다. 세상 만물 모두가 군자의 스승이다. 스승이 많으니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진다. 


타산지석은 소인이고, 옥은 군자다. 군자는 타산의 거친 돌을 숫돌로 삼아 자기의 옥을 간다. 타인의 하찮은 언행이나 허물을 자기를 다스리는 거울로 삼는다. 


덕이 부족한 자를 보면 자신의 인품을 되돌아보고, 앎이 부족한 자를 보면 자신의 학문을 되돌아본다. 그러니 사방이 모두 스승이고, 세상이 큰 배움터다. 성인은 일정한 스승이 없다 했다.      



소인은 남을 탓하고, 군자는 자기를 나무란다. 주자는 “안이 차면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이 비면 밖으로 객기를 부린다”고 했다. 


안이 차면 세상 보는 눈이 여유롭고, 안이 비면 세상 보는 눈이 날카롭다. 수시로 치르고, 수시로 찔린다. 소인이 목소리가 큰 데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소인은 용기와 만용의 구별이 서투르다. 만용을 용기로 착각한다. 진짜 가짜의 구별 또한 어설프다. 가짜를 진짜로 믿고, 사이비로 세상을 어지럽힌다. 소인은 언변에 혹하고, 포장에 혹한다. 한데 사이비는 언변과 포장, 이 둘을 즐겨 쓴다.



당신은

스승이면서 제자다


세상의 인정은 생각보다 가볍다. 굶주리면 아부하고 배부르면 떠난다. 이익 앞에서는 너절한 태도로 굽신거리고, 손해다 싶으면 의로움까지 냉정하게 팽개친다. 


물론 깊은 인정도 있다. 후한 시대 설포(薛包)는 상당한 재산가였다. 어느 날 조카가 재산을 나눠달라고 하자 늙은 노비는 자기가 데리고 있겠다며 말했다. “이 사람들은 나와 일한 지가 오래되어 네가 부리기 어려울 것이다.” 


황폐한 땅과 기울어진 농막은 자신이 갖겠다며 말했다. “이것들은 내가 젊었을 때 관리한 것이어서 정이 깊다.” 



남루한 그릇과 물건은 자신이 취하겠다며 말했다. “이것들은 평소에 쓰던 것이어서 내 몸과 입에 편하다.”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다. 흰색끼리 모이면 검은색을 흉보고, 검은색끼리 모이면 흰색을 비웃는다. 그게 세상의 인정이다. 


누가 당신을 참스승으로 부른다 해서 당신이 참스승이 되는 건 아니다. 악은 악을 선으로 부른다. 


사특한 자는 당신에게 붙어 사욕을 취하려고 당신을 참스승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중요한 건 누가 당신을 참스승이라고 하느냐다. 


인간은 모두 누군가의 스승이며 누군가의 제자다. 당신은 누구의 스승인가. 반면교사의 스승인가, 정면교사의 스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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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애쓰지 않는다. 거슬러 오르려고 무리한 몸짓을 하지 않는다. 자연스레 아래로 흘러 강에 닿고 바다에 이른다. 물은 자연의 이치를 안다. 만물은 각자의 결이 있고, 사물은 각자의 법칙이 있음을 안다. 


세상은 틀림이 아닌 다름의 모둠이다. 다르다고 따돌리지 마라. 어울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걸어가라. 함께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봐라. 나의 마음으로 너를 헤아려라. 



세상의 다른 결을

인정해라


목수는 나무의 결을 안다. 결을 거스르지 않아야 무늬가 산다는 걸 안다. 대패는 결을 따라 움직인다. 결은 사물의 이치이자 본래의 모습이다. 



타고난 고유성, 너와 다른 나만의 색깔이다. 만물은 각자의 결이 있다. 결은 일종의 DNA다.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소 잡는 백정 이야기가 ≪장자≫에 나온다.


소 잡는 솜씨가 경지에 이른 백정에게 문혜왕이 물었다. 


“참으로 훌륭하다. 재주가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르렀느냐.” 


백정이 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인데, 그 도가 재주보다 앞섭니다. (중략) 소의 본래 몸을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을 건드리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를 건드리겠습니까.”



그는 또 능숙한 백정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건 살을 자르기 때문이고, 보통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건 뼈를 건드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칼은 19년간 잡은 소가 수천 마리나 되지만 숫돌에 새로 간 듯 날이 서 있다고 했다. 


역시 장자는 이야기꾼이다. 맛깔난 비유로 말하고자 하는 뜻을 짚어준다. 


도(道)는 결국 결을 따르는 것이다. 세상을 인간 중심이라고 우길 때, 인간을 내 중심이라고 고집할 때 결이 어긋난다. 장자는 인간의 결만 고집하지 말고 세상의 결을 보라 한다. 내 결만 곱다 하지 말고, 너의 결도 살펴보라 한다.



최고 화술은

언변이 아닌

독심(讀心)이다


한비는 유세(遊說)가 어려운 건 앎이 얕기 때문도, 논리가 부실한 때문도, 용기가 부족한 때문도 아니라 했다. 


진짜 어려운 건 상대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 상대가 왕이라도 된다면 유세는 목숨을 건 도박이다. 


“무릇 용이란 짐승은 잘만 길들이면 등에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다. 하지만 턱밑에 한 자쯤 거꾸로 난 비늘(逆鱗)을 건드리면 누구나 죽임을 당한다.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목숨을 잃지 않고 유세도 절반쯤은 먹힌 셈이다.” 


한비는 최고의 화술은 수려한 언변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읽는 독심(讀心)임을 일깨운다.



남의 의중을 헤아리면 절반은 성공이다. 이미 절반쯤 설득하고, 절반쯤 성사시킨 거다. 의중은 마음의 결이다. 헤아림은 그 결을 거스르지 않는 거다. 


세상은 내 맘 같지 않다. 그게 정상이다. 결이 모두 다른데 어찌 한마음이겠는가. 그릇이 큰 자는 세상의 결들을 두루 보고, 그릇이 작은 자는 자신의 결 하나로 만물을 재단한다. 


성숙은 다름의 인정이다. 소는 다리가 네 개고, 닭은 두 개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아지랑이는 위로 피어난다.



속도에

너무 매이지 마라


인(仁)을 묻는 궁중의 질문에 공자가 답했다.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바라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 성경도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으로 남을 헤아리는 혈구지도(絜矩之道) 역시 ≪대학≫이 강조하는 덕목이다. 우리는 이 ‘처세의 황금률’을 거꾸로 적용한다. 


내가 바르다고, 그러니 내게 맞추라고 한다. 약을 독으로 쓰고, 황금을 쇠붙이로 쓰는 격이다. 지켜야 할 때 공격하고, 떠나야 할 때 머무는 식이다.     



먼 길은 쉬며 걸어라.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뛰면 그림자를 떨쳐낼 거로 생각했다. 


한데 아무리 달려도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뜀박질이 느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숨이 차도록 뛰다 죽었다. ≪장자≫ 어부 편에 나오는 얘기다. 


속도에 매달린 그는 몰랐다. 그늘에 들어가면 그림자가 절로 없어진다는 것을, 한숨 돌리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것을. 


삶에는 속도가 필요하다. 한데 사람들은 자주 잊는다. 빠름도 속도지만 느림도 속도라는 사실을. 크면 만 길도 내어준다. 작으면 한 치도 다툰다. 그 한 치가 작은 자의 전부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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