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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맞춤형

당신을 부리는 리스트들

 

 

 

 

≪행복에 목숨 걸지 마라≫는 저명한 심리학자 리처드 칼슨이 쓴 일종의 힐링서다. 칼슨은 앞서 출간된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마라≫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자 “사소한 일은 무시한다 해도, 큰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독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고 한다. ≪행복에…≫는 이런 궁금증들을 풀어주는 답변서다. 원제 ≪What about the big stuff?≫를 ≪행복에…≫로 번역한 출판사의 센스(?)에도 눈길이 간다.

  

 

 

집착하면 행복과 멀어진다

 

칼슨이 현대인의 ‘바둥대는 삶’에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무엇이든 너무 집착하면 오히려 행복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고 되뇌고 실패, 스트레스, 갈등, 과욕 등 마음을 어둡게 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라는 것이 그의 충고다. 물론 세상에 말처럼 쉬운 건 없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지만 멀리서 바라봐도 비극인 삶은 많다. 이런 삶에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고 되뇌라는 것은 어쩜 지나치게 이기적인 강요다.

 

삶의 모습은 상상보다 다양하다. 같은 평수, 같은 디자인의 아파트지만 내부의 삶은 너무 다르다. 하지만 처한 상황이 어떻든 의식적으로라도 ‘이미 충분히 행복해’라고 읊조린다면 행복의 발치는 그만큼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그러 점에서 칼슨이 던진 메시지는 나름 의미가 있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중얼대다 스스로의 말에 취하면 평생을 ‘불행한 마음’으로 살 수도 있다. 육체의 건강도 마찬가지다. 과신은 곤란하지만 스스로의 건강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져야 건강관리할 마음도 더 생긴다. 그러니 세상사의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린 셈이다. 긍정은 긍정을 낳고, 부정은 부정을 낳는다. 세상의 역사도 낙천주의자가 쓴다.

 

 

 

군자는 사물을 부린다

 

세상에 목숨을 걸 만큼 소중한 게 있을까. 가끔 머리를 스쳐가는 질문이다. 돈에 목숨 걸고, 권력에 목숨 걸고, 명예에 목숨 걸고, 인기에 목숨 걸고, 사랑에 목숨 걸고…. 살다보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손에 쥐고 싶은 것들이 삶을 유혹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목숨 걸 만큼 가치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혹여 지나치게 부풀려진 가치에 삶이 질질 끌려가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한번쯤은 스스로에게 던져볼만한 질문이다.

 

‘군자는 사물을 부리지만, 소인은 사물에 부림을 당한다(君子役物, 小人役於物).’ ≪순자≫ 수신편에 실린 글이다. 군자는 물질에 이끌려 스스로를 내던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꾸로 해석하면 세상엔 물질에 유혹돼 자신을 팽개치는 소인들이 너무 많다는 질책으로 읽힌다. 삶이 끌려다니는게 어디 명예·권력·물질뿐일까. 때로는 편견에, 때로는 고정관념에, 때로는 남의 시선에 스스로의 삶을 무력하게 내맡기는 건 아닐까. 그것도 ‘자아’라는 그럴 듯한 포장을 뒤짚어 쓴 채.

 

 

 

지나치게 안달하지 마라

 

지나치게 안달하는 삶, 과거에 매여있는 삶, 수시로 분노가 수위를 넘는 삶, 욕심이 만족을 모르는 삶….  모두 뭔가에 부림을 당하는 삶이다. 무념은 생각이 없는게 아니라 잡스런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고, 무소유는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물건을 비우는 것이다. 돈과 권력, 욕심과 이기심, 시기·질투도 이치는 같다. 그 자체가 불필요한 게 아니라, 과하면 그것에 삶이 부림을 당하기 쉽다. 부림을 당하는 건 노예가 되는 것이다.

 

세상엔 돈의 노예, 권력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모두 집착이 과한 탓이다. 허세, 칭찬, 게으름, 미련…. 사소하면서도 삶을 부리는 것들은 의외로 많다. 그러니 여유라는 포장으로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아닌지, 칭찬에 매달려 자아가 희미해지는 것은 아닌지, 과시욕이 삶의 거품을 부풀린 건 아닌지, 미련이 길어져 미래를 보는 시야가 흐려진 것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한다. ‘당신을 부리는 리스트’를 한번쯤 꼼꼼히 챙겨야 한다는 얘기다. 마음이 주인으로 당당히 서면 육체의 건강은 저절로 따라온다. 그러니 마음과 육체는 언제나 같은 공간이자 같은 영역이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