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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살아가는 이야기

김시습의 자취를 따라서, 경주 남산과 금오신화






나 죽은 뒤 내 무덤에 표할 적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준다면
나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할 것이니
품은 뜻을 천 년 뒤에 알아주리.

- 김시습의 “나의 삶(我生)’ 중에서 -





‘천재학자’, ‘신동’, ‘방랑시인’, ‘생육신’, ‘ 최초의 한문소설 작가’ 등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에 대한 수식어는 많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김시습의 일화는 많이 전해지지만,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했던 경주 남산의 용장사가 있는 곳 주변으로 김시습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경주 남산은 금오산이라고도 불리며,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남산은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뉘는데 동남산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 서남산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이 서남산쪽에 위치한 용장골은 고위산과 금오산 사이의 계곡으로 남산에서 가장 깊고 넓은 계곡이며,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삼층석탑 보물 제186호>



용장사는 용장계곡에서 가장 큰 사찰로 동쪽 높은 바위 위에는 보물 제186호의 삼층석탑이 있고, 그 아래 보물 제187호의 석불좌상과 보물 제913호의 마애여래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용장사터의 동쪽산맥 위에 솟아 있으며 신라 석가탑의 양식을 취한다.



<석조여래좌상(삼륜대석불좌상) 보물 제187호>



여래좌상은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이라고도 하는데, 머리부분이 없어져서 불상의 명칭을 정확하게 짓지 못하나 승려상이라는 설과 보살상·불상·미륵불상이라는 설도 있다.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913호>



바로 이 석불 옆 동쪽 암벽에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마애석불로는 거의 완벽할 만큼 균형잡힌 불상이다.




김시습은 세 살 때 시를 짓고, 다섯 살 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통달하는 등 천재적 자질과 행적을 보여 신동이라 불렸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유학의 최고 경전인 [논어(論語)]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이름을 따서 ‘시습’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5세의 나이에 세종의 부름을 받고 비단 50필을 하사받을 정도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로 벼슬을 접고 절개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접하고, 책과 지필묵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손수 머리를 자르고 초라한 승려로 방랑의 길에 들어서 세상의 허무함을 글로 지어 읊었다. 10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방황하다가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여 서른여섯 살까지 머무르며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하게 되었다.






김시습은 경주남산에 금오산실(金烏山室)을 짓고 칩거하면서 이곳에서 [금오신화]를 집필하였다. [금오신화]는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한문소설)로서 완본은 전하지 않으며,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 등 5편이다.


금오신화는  최초의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금오신화가 온전한 소설집으로 발견된 것은 김시습 사후 4백여 년이 지난 뒤 일본 땅에서이다. 이유인즉슨, 김시습은 “후세에 반드시 설잠(김시습)을 아는 이가 있으리라”라고 예언하고는 [금오신화]를 석실에 감추어 두었는데, 그 당시 조선의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고, 금기시 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석실에 감춘 진짜 이유는 어쩌면  [남염부주지]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한다. 폭력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에 대한 벽력 같은 외침이 글 속에 은유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해지고 있는 다섯 편 모두 사람과 귀신과의 사랑 또는 이계(異界)로의 신비로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다섯 편 중 세 편은 죽은 여인 또는 전설 속 선녀와의 사랑 이야기이고, 나머지 두 편은 염라국과 용궁에 다녀온 선비가 그곳에서 듣고 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김시습은 한국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이지만 ‘미인박명 (美人薄命)’처럼 천재는 불운한 것일까? 유교의 이기철학과 불교의 화엄사상, 그리고 선도의 내단사상을 한 몸에 지닌 사상가이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로 방랑의 길을 택한 김시습. 그의 금오신화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처럼 금오신화의 결말에서 그의 바람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삶에는 발전과정이 존재한다. 인간의 삶이란 곧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러한 역사도 기존의 사실과는 다른 오류를 발견할 수도 있고, 그 오류를 수정하고 다시 발전하기를 거듭한다. 역사를 알고자 할 때 정사보다는 야사가 더 친근하게 다가올 때가 있듯이 천재학자 김시습의 역사 또한 그럴 것이다.


단순히 경주 남산을 등산으로만 생각하고 오르기 보다는 역사를 알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배경을 알고 하는 등산이라면 그 의미는 배가 될 것이다. 이는 등산을 하는 동안 역사적 인물이 살았던 역사적 공간 속에 나를 ‘존재’하게 함으로써 좀 더 온전히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