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즈베키스탄의 허준  김현탁

  사랑의 마음을 전하다.

 

 

 

 

 

 

 

 초등학교 6-2학기 도덕교과서에 어느 한의사의 미담이 실려 있습니다.

 고려인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치료해 준 은인에게 쓴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소녀는 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류머티즘이 편도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였기에, 그 소녀는 엉뚱하게 편도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류머티즘 증상은 개선되지 않고 붓는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 학교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온 한의사에게 20여 회에 걸친 봉독치료인 벌침주사를 맞은 후 거뜬하게 나아 다시 등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정부파견한의사 김현탁입니다.

 

 


 그는 1962년에 태어나, 1987년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한의원을 하면서 환자와 돈이 연결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약을 먹어야하는 환자에게 약을 권했을 때, 환자는 약을 팔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시골이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약을 먹지 않고 병을 나을 수 있는 방법인 침과 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침으로 한의원은 명성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에 돌연히 한의원을 그만둘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간간히 시간을 내어 차가 다니지 않는 시골로 의료봉사를 하러 다녔고, 여름휴가 때 휴가 대신 에티오피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등 해외의료봉사를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느꼈던, 대가와 연결되지 않는 인술을 베풀고 싶다는 생각을 현실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누구의 평가보다 나 스스로 나를 평가했을 때 떳떳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행복감으로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한 생을 살면서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삶보다 남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삶이 행복한 삶일 것 같았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 모집기사를 읽었을 때, 그는 기쁜 마음으로 참가하였습니다.

 

 KOICA 지원 아래 KOMSTA(대한한방의료봉사단)가 활발히 활동하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겐트 국립 제1의과대학의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 한방병원에서 1998년부터 2002년까지 4년간 근무하였습니다


출국을 준비하면서 우즈베키스탄에는 화장지가 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는 이삿짐의 절반이 휴지였다고 합니다.

생필품이 턱없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처음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몇 달 동안은 식료품 및 생필품을 사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많은 민족이 살았고 그들의 음식문화가 모두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시장, 러시아시장, 고려시장 등 각 민족의 먹을거리가 다르고 파는 품목이 달라 하루는 고려시장에서 두부를, 하루는 러시아시장에서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하루는 독일시장에서 유제품을 사기위해서 다니는 색다른 경험을 하였습니다.

 시장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러시아어이었는데, 그들은 각기 자기 민족어를 시장에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각각 다른 민족들의 생활상을 경험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 곳의 아픔을 차근차근 보듬었습니다.

 

 사회주의국가인 구소련의 지배를 받으며 세계적인 의료수혜를 받던 백인계 러시아 사람들로 하여금 한방치료는 첨단치료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독립 이후, 치료를 한 번도 제대로 못 받았다.

 

 그곳에서의 의료체계는 1차 진료기관(보건소)과 2차 진료기관(시립병원) 그리고 3차 진료기관(대형병원)으로 상당히 선진화된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지원받던 것이 단절되고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해 의료시설은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병이 나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무료로 운영하는 한국,우즈베키스탄 한방병원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갔습니다.

 과다한 항생제복용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침이나 뜸이 한국 사람들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습니다.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이 호전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한방병원의 신뢰도는 점점 높아갔습니다. 자연히 보건당국 및 의과대학에서 한국한의학에 대한 관심도도 지대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국 의서를 번역하여 전통의학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한의학교재를 만들고, 의과대학에 한의학과를 개설하여 한의사를 양성하여 주민들을 치료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는 타슈겐트 국립 제1의과 대학생에게 매주 두 시간 씩 한의학 강의를 하였고, 대학 부속병원 원장 및 의사들에게 침구학 강의를 하였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은 한국과 일본을 같은 수준의 나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위상은 옛날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5년에 걸쳐 연인원 약 6만여 명의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전체 인구의 10%가 러시아인인데, 내원 환자의 80% 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타타르의 환자일 정도로 그들은 한의학치료에 대한 관심과 신뢰가 지대하였습니다.

 

 한의학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아 뇌성 마비환자가 내원해 치료해 달라고 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그는 희망적인 말로 환자를 따듯하게 위로하였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신통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하루는 병원입구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사색이 된 아이를 안고서 살려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습니다. 아이는 급체로 얼굴은 샛노랬고, 사지는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아이의 명치끝에 장침을 놓자, 한 시간 가량 안정을 취한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씩씩하게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엄마가 울면서 그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라신이 선생님을 우리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치료할 때는 통역사가 옆에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통역사가 환자에게 통역해 주는 동안 치료방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과 말은 안 통했지만, 성실한 의술을 사랑의 마음으로 전하였습니다.

 

 그곳의 전통의학은 물리요법이 위주가 되어 숯치료와 물치료 그리고약초 연기치료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물치료는 물속에서 디스크 환자의 척추를 만지는 것으로, 특이한 물리요법이었습니다.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한국에서 가져간 벌의 독인 봉독으로 치료하였습니다.
 봉독치료를 할 때,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인과 외국인의 체질이 달라서인지 한국인은 침 맞은 부위가 금방 부어오르는데, 그들은 피부에 별다른 반응이 없어 매일 시술할 수 있었습니다.

 

 바다가 없는 내륙지역이라 해산물이 부족하여 요오드 결핍으로 갑상선 질 환자들이 증가했지만 약품이 없었습니다. 구소련 시절에는 식품에 요오드를 첨가하여 섭취해 왔었으나 연방 해체 후 요오드 부족현상이 심각했습니다.
 불쌍한 그들에게 빨간 소독약인 소위 머큐로크롬은 만병통치약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빈민촌의 엄마가 자기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울면서 순서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병원입구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요오드 성분이 들어있는 옥도정기를 달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자기 동네 아이가 상처가 나서 옥도정기를 발랐는데 나았고, 배가 아플 때도 나았다며 제발 옥도정기를 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맨 윗쪽에 위치한 카라칼팍스탄 누크스 한방 진료소를 찾아 순회 진료 및 이동 진료를 실시하였습니다.

 

그가 거주하던 타슈켄트에서 1,200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는 누크스에서 갈 때나 돌아올 때는 항상 마음이 짠해서 발걸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든 아랄해는 바다의 염도를 적절히 유지하였는데, 소비에트연방시절 댐을 건설하여 아랄해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을 목화밭으로 비틀었기에 아랄 해에서는 소금꽃만 날렸고 그들의 짜디 짠 생활은 처참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인 리뾰시카나밀빵 하나를 물에 풀어 끓여서 다섯 식구가 한 끼니를 때우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여름에는 신도 안 신고 너나 할 것 없이 팬티 한 장 달랑 걸치고 돌아다녔습니다. 순회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숙소 문 앞에 모여들어 그에게 제발 타슈켄트로 데려가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월급으로 한국 돈 2,000~3,000원만 줘도 된다고 하였고, 어떤 아이 엄마는 자기 아들을 그냥 데리고 가서 심부름시키고 밥만 먹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른조차도 월급은 필요 없으니 문지기라도 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너무나 불쌍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5년에 걸쳐 환자들을 보면서 환자의 체격과 말투와 의복을 한번 보고서 어느 민족인지 그리고 민족의 음식습관에 따라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가난한 우즈베키스탄 할머니가 4번 이상 재사용한 꼬질꼬질한 검은 비닐봉지에 버터 대신 양 기름을 사용해 만든 빵을 감사하게 그는 받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나 올 때의 우즈베키스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봉사활동을 마치고 이제는 돌아와 대전의 어느 한의원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파견의사활동에 대한 여러 번의 텔레비전 출연요청에 대하여 정중히 거절하였고, 당연히 할 일을 하였다고 오히려 그런 시간을 갖게 된 것에 대하여 고마워할 뿐이었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그때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합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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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슈바이처  김일경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남아메리카 중부 태평양 연안의 나라. 위대한 잉카제국을 탄생시킨 페루(Peru).

페루는 아메리카 남부에서 유일하게 고대 문화유산을 꽃피웠습니다.

1532년 에스파냐에 정복되었다가 1824년 독립하였습니다. 스페인의 가혹한 폭정에 분노하여 1780년 농민반란을 일으켰던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의 이야기를 주제로,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가 된다던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라는 가요는 안데스인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철새는 날아가고>라는 엉뚱한 내용으로 소개되었지만, 페루하면 잉카문명보다 이 노래가 먼저 떠오릅니다.

지금도 서울의 어느 지하철 공간을 총총 걸음하다 보면 인디오 전통복장인 숄과 판초를 입은 페루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연주하는 안데스 전통악기 께나와 싼뽀니아의 경쾌하면서도 비장한 음률에 삭막한 도시인의 심사가 시나브로 촉촉해집니다.

 

1935년에 태어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환갑의 나이로 1995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페루로 간 한국인이 있습니다. 

 

치과의사 김일경. 

 그는 5년간 꼬모스 제2 의료센터에서 근무하였습니다.

 

1996년 KOICA에 보냈던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총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페루 리마 꼬모스 제2병원에 근무하는 정부파견 치과의사 김일경입니다.

 

   세계 많은 나라에 지원하시느라고 노고가 많을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간혹 이곳 페루에 대하여 사정을 잘 파악하시겠지만, 저로서는 근무하면서 느낀 점을 총재님께 말씀드리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리마에서 북쪽을 향하여 약 1시간정도 벗어나면 시내와는 전혀 달리한 빈민촌이 눈에 들어오고, 국도라고 하지만 소규모 시장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복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도로입니다.

  이곳 제2병원 꼬모스는 신흥도시로서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하여 다소 위험하지만 근무처에 들어서면 우리 대한민국 정부의 고마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병원건물이 있고 모든 장비, 기계 등 KOICA에서 보내주신 시설에 제 자신도 놀랄 정도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고 이곳 원주민들은 저만 보면 감사한마음을 몸짓으로 표시하곤 합니다.

 

  이곳 페루 리마에는 일 년에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아 나무 잎새들은 먼지로 더더기를 입은 것처럼 모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이슬비가 내리는데 반가워서 밖으로 나가 비를 맞고자 하면 얼굴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은 콕콕 찌르는 듯한 매서운 감이 있어서 원주민들에게 물으면 잉카문명의 종식의 눈물비라고들 하여 더더욱 마음 쓸쓸하게 합니다. 


 

 

 

 

 

 

 

 

 

 

 

 

 

 

 

 

그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페루의 아픔을 치료하였습니다.

 

 연평균 치과진료인원이 약 4,200여 명이었으며 지역주민 구강위생 프로그램을 실시하였고, 현지 의료진에 대한 선진치과의료 기술을 전수하였으며, 한국과 페루 의료협력사업의 현장관리 및 중간역할 그리고 국위선양 및 민간 외교사절로서의 양국간 관계증진에 기여하였습니다.


 사회사업활동에 참여하여 사회봉사와 격지 및 오지주민 보건상태 개선 등을 목적으로 한 NGO단체인 HAPECO(Humanitario Amistad Peru y Corea)의 창립멤버였고, 그 활동의 결실로서 설립된 리마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지카마르카 자선병원에서 원주민 의료진과 협조하여 진료단을 구성, 순번제로 주 2회 진료봉사를 수행하였습니다.

 

 마침내 꼬모스 관내 30여 개 보건소 중에서 수년째 진료실적 1위를 고수하여 페루 보건청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오지의 주민을 찾아 갈 때는 따로 진료소가 없어서 타고 간 소형트럭 짐 칸에서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번듯한 진료실은 그에게 사치였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꼬모스의 한 주민은 갓 태어난 자신의 딸의 이름을 이 지역에 병원을 지어준 한국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덕실’이라는 한국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였습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병원에 초대하여 유모차 등 선물을 전달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이 병원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지으려고 대사관에 이름에 대해 문의하는 등 한동안 한국 붐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한국과 페루 사이의 비자 면제 협정으로 한국인 범법자들의 무분별한 유입에 따른 사고와 그동안 페루에 진출했던 거친 한국선원들에게 시달려왔던 주민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결핵 전담 진료실을 조성하였습니다. 전염성이 강한 활동성 결핵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매일 일반 환자 및 감수성이 높은 소아환자들과 함께 같은 건물에서 진료를 받아 감염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1998년 소규모 프로젝트 사업비 전액을 별도 진료실 건축에 지원하였습니다.  이후로 결핵환자들은 따로 진료를 받음으로써 일반 환자들의 감염 위험성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년 크리스마스 파티 및 산타할아버지 행사에는 병원직원들 뿐만 아니라 동포들을 초대하여 병원직원 자녀 및 한인자녀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양국간의 우의를 다졌습니다.

 

 1963년 한국과 국교를 맺은 페루에 남다른 애정이 깊었던 그는 여러 가지 개선점을 제시합니다.

   최초 파견시 현지 언어에 대한 충분한 연수가 필요하고, 장기 근무자의 경우 전문분야에 대한 재교육 및 연수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국제학회참석 등의 지원이 절실하며, 또한 소외된 환경에서 근무하는 만큼 재충전을 위한 일정시간이 있어야 한다.

 

  특히 KOICA의 지원 사업이나 연수생파견에 대한 추천에 있어서 수혜기관을 페루정부에 일임하여 미국이나 일본 등 기타 선진국의 대량 원조물자에 함께 섞여 우리 측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혜택을 주기보다는, 이왕이면 정부파견의사단과 관련이 있거나 계속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곳에 혜택을 줄 수 있도록 지정하여 조치하는 것이 사후관리도 용이하고 원조 효과 및 연수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의료직은 전문직으로서 직접 현지인 환자들을 오랜 기간 접하여 노하우와 언어능력이 축적되었기에 정년에 관계없이 업무수행능력에 의해 근무연장의 허락여부가 평가되었으면 좋겠다 

 

 

 

 

 

 

 

 

 

 

 

 

 




아래와 같은 그의 건의 사항은 보다 구체적입니다.

   KOICA에서 실시하고 있는 의료협력사업이나 무상원조사업은 국제사회에서 지위향상과 함께 우리 의료기자재 및 국산품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나 기타 선진국의 물량지원에 비하면 원조 규모가 양적으로 열세이다. 따라서 물적 지원만 하는 것보다는 의사, 치과의사, 봉사단원 등 인적자원의 지원을 통해 협력사업의 사후관리 및 원조효과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홍보효과 역시 극대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꼬모스 제2 한국 · 페루 의료센터에는 정부차원에서 건축된 병원 본 건물 외에 1994년 개원당시 한인들의 모금으로 건축된 한인의료진을 위한 별도 진료병동이 유지되고 있다. 또한 이 진료병동에는 KOICA에서 기증형식으로 원조한 치과용 의자(Unit Chair) 및 치과 X-Ray 장비를 비롯한 고가의 각종 치과장비가 설치되어, 지난 5년간 현지의 인근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한인사회에도 양질의 치과진료를 제공하여 많은 호평을 받아왔다.

 단순한 의료협력의 차원을 떠나서 어렵게 마련된 이러한 진료병동, 의료시설 유지관리차원에서도 후임 의료진의 배치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페루정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많은 어려움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따라서 이를 위해 가난퇴치, 질병퇴치, 거리아동 돕기 등을 목표로 설립된, 현지의 자생적인 민간단체 또는 NGO(비정부 기구)의 많은 역할이 있다. 이에 대해서 현지 사무소나 공관을 통한 적절한 평가를 통해 지원이 가능하면 좋겠다.

 

  현지 NGO에 대한 지원은 대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은 의욕들을 가지고 일을 하므로, 사전평가와 사후관리만 잘한다면 소규모 지원으로도 효율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치과 의사 김일경.

평화를 사랑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남들은 개업 일선에서 은퇴 할 나이에 젊은이도 하기 힘든 결정을 하고 페루로 떠난 그에게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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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복도에서 책 서너 권을 품에 안은 꼬마 숙녀와 마주쳤다. 똘망똘망하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웠다.

  병실로 들어서는데, 꼬마 숙녀가 뒤따라 들어왔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해맑게 웃는 꼬마 숙녀가 바로 가영이였다.

  여덟 살배기 가영이는 또래보다 한참 작았다. 
 장운동이 매우 느리고 정체돼 음식물이 차곡차곡 쌓이기만 할 뿐 영양 섭취

  가 
전혀 되지 않은 탓이다.   가영이는 생후 15개월 때부터 6년 동안 줄곧 병원 생활을 해왔다.

  옷을 들어 올려 배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덩치 큰 링거 거치대를 제 몸인 양 밀고 다니지 않았다면
가영이는 그저 새침하고 

  사랑스러운 꼬마 숙녀로만 보였을 것이다.

 

 

 

[부제 : 만성가성장폐쇄증후군 앓고 있는 가영(8세)이 이야기]

 

  생후 15개월, 터질 듯한 배를 안고 병원을 찾다 


지난 2006년 4월,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가영이를 데리고 엄마 김배정 씨(39세)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찾았다.

 

2주일이 지난후, 의사는 만성가성장폐쇄증후군이라는 너무도 생소한 병명을 얘기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병명에, 어처구니없는 증상들에 배정 씨는 그저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봤다.


“모유를 먹을 때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어요.

 돌이 지나고 이유식과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이상하게 배가늘부풀어 있고 대변 누기를 힘들어하더라고요.

 

 소아과며 한의원이며 여러 곳을 돌아다녔는데 그저 변비라고만 했어요.

 밤늦게 혹은 새벽녘에 너무 아파해 응급실에 가도 관장을 하고 변비약을 처방받는 게 고작이었어요.

 만성가성장폐쇄증후군이라는 병이 있는 줄도 몰랐고 가영이가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갓난쟁이가, 터질 듯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움켜쥐고 울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엄마.

 

서울의 병원을 찾던 그날 새벽에도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며 아파하는 가영이를 위해 배정 씨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집 근처 병원에서 같은 증상이 반복되니까 어딘가 막힌것같다고 수술을 해보자 하더라고요.

그런데 겨우 15개월밖에안 된 가영이를 수술대 위에 눕힐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정밀 검사를 하고 정확한 병명을 찾아보자 싶어 서울로 올라왔죠.

잠깐이면 될 줄 알았는데….”


배정 씨는 의사 진단을 받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3개월 동안 지켜보자는 의사의 말에, 3개월 후면 좋아지겠거니 내심 기대도 했다.

그 3개월이 1년이 되고, 2년이 되고 이제 6년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어느 누구도 그 끝을 얘기해 주지 못하고 있다.

 

 

  하루 밥 세 숟가락 양이 전부, 영양분은 혈관으로


가영이가 앓고 있는 만성가성장폐쇄증후군은 선천적인 장운동장애로 위장에서부터 음식물이 차곡차곡 쌓이기만 할 뿐 소화는 물
론 영양 섭취도 전혀 되지 않는 병이다.

 

않아 정기적으로 관장을 해줘야 한다.

쌓인 음식물은 부패해 배는 늘 가스로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있고, 정상적인 배변이 되지

 

심장 가까이에 있는 혈관에 동전만 한 크기의 케모포트(중심정맥관)를 삽입해 영양분을 섭취 하는 탓에 링거 거치대를 제 몸 인양끼고 산다. 

 

더욱이 배에 찬 가스를 빼내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가영이는 코에 튜브까지 달고 살았다.
 

“코에 튜브를 달고 있을 때에 가영이는 무척 까칠하고 예민했어요.  

제 딴에는 창피했나 봐요.  

짜증이 잦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싫어할 정도였어요.

수술을 받고 튜브를 뺀 지금은 성격도 많이 부드러워지고 훨씬 의젓해졌어요.”
 

현재 가영이가 하루에 먹는 음식량은 밥숟가락으로 세 숟가락 정도에 우유 150㎖가 전부.

그나마도 배정 씨가 어르고 달래야 겨우 먹는 시늉이라도 한다고. 

어릴 때부터 음식을 멀리 하다 보니 음식을 거부하는 것 같아 배정 씨는 내내 안타깝기만 하다.

 

가영이는 고향인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병원에서 기저귀를 떼고 뛰는 것을 익히고 말을 배우면서 여덟 살배기 꼬마 숙녀로 자랐다. 기운이 없어 늘 앉아서 책을 읽거나 TV 프로그램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6년 병원 생활에 9차례 수술을 견뎌내다


지난 6년 동안 가영이는 오로지 ‘성장’ 을 위해 아홉 차례나 수술대에 오르며 모진 병원생활을 견뎌냈다.

고농도영양제를 혈관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케모포트 삽입 수술을 받았고, 이 부분이 감염되면서 수차례 가슴을 여닫아야했다.

 

그리고 지난 4월, 가영이는 음식물이 쌓이면서 늘어난 위장의 반을 잘라내고 배 옆쪽으로 인공 장로(臟路)를 내는 수술을 견뎌냈다.

 

수술에서 회복까지 꼬박 두 달이 걸렸는데, 얼마 후 복압 때문에 내장들이 장로로 쏟아져 나오는 통에 또 한 차례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다. 아홉 번째 수술이었다.

 

배정 씨는 갓난쟁이 가영이가 그 혹독한 시련들을 참고 견디며 이만큼 예쁘게 자라준 것이 그저 고맙고 기특하다. 더욱이 지금은 검사도 혼자 받으러 다니고 자기 몸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을 정도로 의젓해졌다. 

 

그럼에도 배정 씨는 가영이가 자라는 것을 마냥 기뻐 할 수 만도 없다고 말한다.

 

“ 지금까지는 자기의 몸에 대해 담담하게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좀 더 크고 생각이 많아지면 다른 아이와 비교하게 될까 봐 겁이 나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냐고, 

 나만 이런 혹독한 짐을 지고 살아야하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집에 가기를, 학교 다니기를 바라는 꼬마


가영이 걱정하기도 바쁜 배정 씨의 또 다른 고민거리는 바로 하루가 다르게 부는 병원비다.

대부분을 병원에서 지내면서 영양제를 달고 살아야하는데, 만성가성장폐쇄증후군은 희귀난치성 질환 코드에 포함되지 않아 산정특례를 받을 수 없다.

 

더욱이 지난해 11월, 가영이가 만 6세를 넘으면서 병원비 부담이 더 늘었다. 그나마 가영이가 맞는 영양제 TPN이 보험 적용이 되는 것이라 다행이었다.
 

“그동안 병원 후원회나 여러 단체가 도움을 많이 줬어요. 힘들 때마다 지칠 때마다 그분들 의사랑과 따뜻한 마음들이 큰 힘이 됐어요. 고맙고 또 고맙죠. 가영이가 이만큼 자란 것도 어찌 보면 그분들 덕분이에요.”

 

그리고 감사하게도 지난해 초부터 보름이나 길게는 한 달 남짓 집에서도 생활할 수 있게 됐다.

가영이에게는 즐거운 변화였고 배정 씨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집에 가는 게 좋아요. 집에 가면 텔레비전도 많이 보고 오빠랑 놀 수 있어서 무척 좋아요.”

 

엄마 배정 씨는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도 오빠 재영이를 누구보다도 잘 따르는 가영이나, 동생을 무척 아끼는 오빠 재영이가고맙고 대견하다.

 

“아마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는 모든 부모들이 같은 마음일 거예요.

 완치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고 더디더라도 조금씩 나아지기만을 바라죠.

 우선은 조금 더 건강해져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입학을 한 해 미뤄 뒀는데, 2년 후에는 갈 수 있었으면 해요. 

 교실에 한두 시간 앉아  있다가 오더라도 학교에 가서 친구들도 사귀고….”

 

 배정 씨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런데, 걱정하는 배정 씨와는 달리, 가영이의 꿈은 이미 저 멀리로 내달리고 있었다.

 

“내 꿈은 치과의사가 되는 거예요.

 예전에 아빠가 소아과의사가 되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는 치과의사가 되고 싶어요.  오빠랑 같이 치과의사가 되어서 오빠는 위층에서, 나는 아래층에서 치료하면 좋겠어요. 오빠가 상한 이를 뽑으면 나는 치료를 할 거예요.

그런데요, 사실은 이를 뽑는 게 조금 무서워요.”

 

멋쩍은 듯이 웃었지만, 꿈을 얘기하는 가영이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만성가성장폐쇄증후군이란?

  장운동 장애로 해부학적 폐쇄 부위 없이 반복되는 장폐쇄 증상과 징후를 나타내는 드문 질환이다.

  이 질환의 반 이상이 출생 후 수개월 내에 증상을 보인다. 음식물이 위장에서 부터 소화도 되지 않고 쌓여 내려가지 않아

  배는  가스로 늘 불룩해 있고, 영양 섭취도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국내에서도 드문 질환이라 아직 환우회도 조직돼 있지 않다.

 

 

 가영이를 후원해주세요 

  후원계좌 국민은행 488402-01-240135 (예금주:천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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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카자흐스탄의 허준  김동선

  알마티의 하늘 아래

 

 

 

 







 

 

 

 그에게 슬픈 역사가 담긴 어느 고려인 동포의 아픔이 찾아옵니다.

바쁜 일정으로 눈코 뜰 새 없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국대사관의 영사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한 환자를 부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싹 마른 노인이었습니다. 처음 본 순간, 김동선은 그를 꼭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석도인.
경남 합천군 용주면 버드실마을이 고향이었습니다.


일제강점하, 막 결혼한 그의 형에게 징병통지서가 날아들었고, 집은 한마디로 초상집이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형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머나먼 전장 사할린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사할린에서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카자흐스탄까지 떠돌았습니다.

 

그는 고향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한국에서 온 청년 한의사 김동선의 옷자락에 매달렸습니다.

 

“내 고향에 좀 데려다 달라."

 

여느 동포와 다른 정확한 발음이었습니다. 한시도 고향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김동선은 결심하였습니다.

 

바쁜 한국 출장길이었지만, 합천군 용주면 사무소 호적계를 찾았고, 수소문 끝에 마침내 그의 조카를 찾아냈습니다.

부산에서 온 그의 조카는 아버지 대신 사할린으로 떠난 작은아버지를 가물가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온 김동선은 이 사실을 알렸고, 조카들의 사진도 보여주고, 통화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후로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는 매일 김동선을 찾아와 아이처럼 졸랐습니다.

결국 한국의 조카들이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조카와 마지막으로 통화할 때 울먹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향에 가고 싶은데, 안되냐…….”

거기에 물러 설 김동선이 아니었습니다.
합천군수에게 간곡한 편지를 썼습니다.

비행기표는 내가 부담할 터이니 고향에서 그가 체류하는 동안 보살펴 줄 수 없겠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2월에 편지를 썼는데 3월이 가고 4월이 다 지나가도 합천군에서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 날은 5월 5일이었습니다.
우연히 한국대사관에 들렀더니, 어느 직원이 합천군수로부터 온 행정우편을 김동선에게 전하였습니다.

급히 뜯어보았습니다. 언제라도 환영이니, 담당자와 상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1997년 3월 합천군에서 발송된 편지였는데, 외교행낭 속에 묻혀 있다가 그제야 빛을 본 것입니다.

 

김동선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하였습니다.

급히 그의 집으로 달려가 보니 러시아인 부인에게서 낳은 14살 아들이 아버지 주검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김동선은 장례식만이라도 한국식으로 치러 드리고 싶었습니다.

관에 빨간 천을 씌우고 붓이 없으니 굵은 매직으로 명정을 썼습니다.


‘대한민국 석도인지구’


그날은 5월인데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진눈깨비가 하염없이 날렸습니다.

 

 

한국 · 카자흐스탄 친선병원 의사들과 함께(맨 오른쪽 김동선)

 

 

김동선은 1964년에 태어나, 1989년 대구한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 광산 김씨 종택인 쌍벽당이 그가 자란 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보수적이었지만, 그는 외국을 동경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개방적인 성격이었습니다.

 특히 역사학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청년이었습니다.

 

 

대학시절에 대구 비산동에서 주말의료봉사를 했습니다.

봉사라기보다 모순을 개혁하고 싶다는 갈망이었고, 올 곧은 선비정신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구에서 한의원을 개원하여 부도 많이 쌓았습니다.

 

 

1994년 여름. 한국에서는 약사법분쟁이 가열되었습니다.그의 고민은 더 심해졌고, 출구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를 모집한다는 신문 공고를 보는 순간, 운명적으로 ‘내 길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교사로 근무하던 아내에게 그 뜻을 이야기하자 아내는 ‘3일의 시간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3일 후, ‘당신이 원한다면 하자.’고 대답하였습니다.

 

1995년 출국 준비를 분주하게 서두르고 있었는데, 건강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지만, 장례를 마치고 예정대로 카자흐스탄(Kazakhstan) 알마티 국립아카데미학술원병원에 부임하였습니다.  1999년까지 알마티 제5시립병원에서 이전 근무하다가 2000년 귀국하였습니다.

 

유목민의 후손인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의 인구는 약 150만 명 정도이며 이중 동포는 2만 명가량입니다.

1993년과 1994년에 한의사들이 알마티를 방문해 무료진료봉사활동을 펼쳤고, 동포 등 현지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카자흐스탄정부는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의사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했으며, 그동안 인도적인 차원에서 의사들을 해외에 파견해 온 KOICA가 그 요청을 받아들여 한의사 김동선이 파견되었던 것입니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 북부에 위치하며, 카스피해에서 몽골 접경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입니다. 1991년 구소련의 해체로 카자흐스탄공화국으로 독립했습니다. 약 120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로 종교는 이슬람교와 러시아정교가 다수를 차지합니다.

 

정국 불안으로 치안이 취약하여 외국인에 대한 신변안전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고, 특히 돈을 많이 가지고 다닌다는 한국인에 대한 테러가 빈번하였습니다. 생계형 범죄로 의사뿐만 아니라 의사가족들의 안전도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도둑이 들어 비싼 의료기구들을 가져가는 바람에 진료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가족들과 입주한 집은 대학기숙사로 부엌은 밖에 있었습니다. 든 것이 한국과 달랐습니다.

 

아내가 우유를 사러 다녔지만 구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그들이 손으로 주물럭주물럭 짜서 널브러진 그릇에다 파는 생우유를 사다 먹었습니다.  그리고 뭉텅이 고기를 사다가 뼈를 발라 얼렸다가 썰어서 삼겹살을 구우며 가족의 건강을 챙겼습니다.

아내는 지금도 그 시절을 그립다고 하는 현모양처입니다.


그는 진료에 정진하였습니다.

 

임상 경험은 짧지만 의술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아직 젊은 만큼 봉사정신을 발휘하여 한의학을 카자흐스탄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에 처음으로 파견된 정부파견의사로서 자부심과 성실함을 한시도 잃지 않았습니다.

 

진료실의 난방이 원활하지 못하여 겨울철 환자 치료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매 분기 심장질환, 요통질환, 각종 관절계질환, 부인과질환 등 2,200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현지 환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시술했던 금연침에 대한 효과가 입소문을 타게 되어 이에 대한 요청이 급증하여 하루 5~6명 정도의 금연침 시술을 하였습니다. 구스따나이, 끄즐오르다, 우스토페, 아띠라우, 우스찌까메노고로스 등지로 년 3~4회 순회 진료를 하였습니다.

 

 

당시 식량이 부족하여 굶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먹는 네모난 빵을 많이 사 놓고 치료를 받고서 하나씩 가져가도록 하였는데, 빵 때문에 치료받으러 오는 환자도 많았습니다.

 

카자흐스탄인과 터키인 그리고 강제 이주된 고려인에 이르기까지 100여 민족으로 구성된 카자흐스탄은 중국과 인접했기 때문인지 침술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으나 말이 잘 안 통해 진료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색을 보고 진맥과 청진기 등을 통해 환자를 진단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는데, 유능한 고려인 간호사 김옥남의 도움으로 해결했습니다.

 

한약재 등 필요한 약재는 한국에서 왔으며, 기본적인 진료장비와 함께 KOICA에서 소규모 프로젝트 지원비로 연간 만 달러를 지원해주었습니다.그밖에 대구한의대와 대구시한의사회 그리고 대한한의사협회에서도 지원해줘 진료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몰려드는 환자들을 다 돌보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알마티 제5병원에서는 의과대학생을 대상으로 한방을 특강하였고, 보건성 및 정부 관계자들의 환자진료에 관한 요청이 쇄도할 정도로 호응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한의학》이라는 서적을 영어로 옮기고 러시아어로 편역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는 1996년 1월 폐결핵을 진단받습니다. 

 

그곳에서 겨울에 할 수 있는 운동은 스키가 거의 유일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스키장에 가보지 않았는데, 스키를 배워 겨울철 건강유지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스키장에서 심하게 넘어졌는데, 왼쪽 가슴이 아파 며칠 후 엑스레이를 촬영하였습니다. 결과는 반대쪽인 오른쪽 폐에 결핵이 발견되었습니다.

 

하루에 120~13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며 무리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으로 후송되어 여러 가지 검사를 실시하였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3개월 정도 휴식하라고 권고 받았지만, 석달치 약을 챙겨가지고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주일 정도 쉬었지만, 밀려드는 환자를 보고 자신의 건강을 챙길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른쪽 가슴에 맺혀있던 망울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주위의 강력한 권유로 결핵요양원으로 가야만 하였습니다.

알프스처럼 풍광 좋은 바라보예 옥제트페스요양원에서 하루 종일 아무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환자들과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들과 정을 나누며 ‘세상은 참 묘한 것이다. 내가 이런 곳에서 이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 이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는구나’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인정의 나눔과 생명의 섬김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습니다.  뜨거운 감동이 번졌습니다. 한의사로서의 사명감도 느꼈습니다.

한 달 보름간의 요양이 끝나고 결핵도 완치되었습니다.

 

 

 

그의 성실하면서 정확한 의술은 소문에 소문을 탔습니다.

1997년 8월 12일 어느 중앙 일간지에 실린 그의 기사내용을 간추려 봅니다.

  부와 명예를 버리고 인술 3년째인 카자흐스탄 한의사 김동선씨.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에 사는 미하일로바 지나이다 할머니는 요즘 기분이 아주 좋다. 수년 동안 시달리던 원인모를 두통이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온갖 병원을 다 돌아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병원에선 간단한 진료만 하고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몇 달 전 이웃 사람이 한국에서 온 의사가 용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의사가 있다는 국립과학원 부설병원을 찾았다.

  말도 없이 손목을 잡고 뭔가를 생각하던 의사는 몸 이곳저곳에 가는 바늘을 꽂기만 했다.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기를 며칠, 이제 두통은 잊고 지낸다


  한국국제협력단의 해외파견 의료단원으로 지난 1995년 1월 이곳에 온 한의사 김동선씨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처음 진료를 시작할때 그를 찾는 환자는 하루 1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고국에서의 정신없던 하루를 생각하면 왜 이역만리 먼 이곳까지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감쪽같이 병을 고쳐내는 명의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갈수록 환자들이 늘어나 올해 초에는 하루 130여 명의 환자를 돌보기도 했다.  초인적인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최근 들어서야 진료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환자수를 하루 30여 명으로 제한해 그런대로 환자를 차근차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정부파견한의사 임무가 끝난 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갑니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에게 ‘독또르 김’이라 불리던, 그는 언제나 KOICA의 존재에 대하여 뜨거운 갈채를 보냅니다.
만약 정부파견한의사제도가 계속 시행된다면, 그는 언제라도 다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동아일보(1995.2.2일자) 한의사 김동선 관련 기사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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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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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베트남의 슈바이처   황혜헌

의사이기 전에 인간이다.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 상하의 나라 베트남(Vietnam).
 하얀 아오자이를 차려입고 야자 나뭇잎으로 만든 모자 농라를 날렵하게 쓴 어여쁜 처녀들이 시원한 야자수 그늘 아래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는 나라.

 

 강대국 프랑스와 미국과의 처절한 전쟁을 두 번이나 치룬 참상의 나라.
 특히 정치경제적인 이해가 맞물려 파월한국군이 참전해야 하였던, 현대사의 비극을 나누어야 했던 나라.

 



 

  가정의학 전문의 황혜헌...

 

 

 그는 1953년에 태어나 1972년 서울대학교 의대에 입학하였지만, 학생운동에 연루되어 제적과 동시에 투옥되었습니다.

 이후 5년 동안 회사원 생활을 하다가 복학해서 11년 만에 의대 공부를 마쳤습니다. 

 

 1986년부터 정읍 아산병원에 18년간 근무하면서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주민에게 무료진료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2004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베트남 하노이의 한국, 베트남 친선 병원에 부임하였습니다.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 사업은 1995년부터 시작되었고, 2007년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 병동이 완공되었습니다.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 등 6개 분야 진료소에 수술실, 입원실 그리고 통역원을 갖춘 국제종합 진료소였습니다.

 

 대형종합병원장이 어느 날 그 자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개발도상국의 작은 병원으로 봉사활동을 떠났습니다.

 그의 의사로서의 직업관이 선합니다.
  의학은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방편이고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의사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의사는 이미 기득권자가 아니다. 의학도 자기가 가진 달란트이다.  

 사회와 더불어 살고 선한 데 사용하여야 한다.

 

현지인과 의료상담을 하는 의사 황혜헌

 

 

 

 

 

  그는 하노이에 도착하여 일기를 씁니다...

 

 2004년 3월 30일 화요일.....
 대한항공 683편으로 하노이공항에 도착했다. 캄캄한 어둠과 공산국가라는 음울한 선입견이 나를 에워싸며 다가 온다.

케냐이던가, 아프리카의 황량한 공항에 도착한 이야기를 적었던 의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국제협력단의 김복희 부소장이 마중 나와 주었다. 대우하노이호텔에 짐을 풀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다음 날....

 앞으로 근무할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에 책을 운반한 후, 성 바울병원 원장과 기획실장에게 인사한 후, 코이카 단원인 임상병리사 황승원씨, 베트남 소아과 의사 뇨, 간호사 러이, 통역 흐엉과 짱, 행정요원 하 등과 상견례를 했다

대사관을 방문, 공사, 참사관등과 만난 후 대사와 점심식사를 했다.

 

하노이의 수많은 오토바이가 매연을 품으며 나를 압도한다. 6성조를 가진 베트남어가 소음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얼마나 지나면 이것들에 익숙해질까?  호텔에 오니 벌써 한국에 두고 온 사람들이 보고파진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소한 약 이름을 정리해야하나, 옷을 정리하여야 하나, 밥을 먹으러 갈까?


한 달 전 답사차 여행사를 통해 관광객으로 왔건만 이제는 관광객을 보
는 입장이다.
밖은 번개가 치고 비가 오는데 창밖의 대하센터의 붉은 조명은 유행가가락이 생각날 듯, 하지만 내 심사는 무겁고 편치가 않다.

지금은 암울하게 보이는 이 도시가 언젠가는 따뜻하게 다가오리라 기대해본다.

‘대하’라는 말이 대우와 하노이를 합한 말이라고 하는데 나도 하노이와 친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남다른 활동을 펼쳤습니다.


 

 4년 동안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에서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현지인, 외국인 그리고 교민에 대한 진료가 5만 2천여 명을 넘었습니다. 주말을 이용하여 소수민족과 벽지주민을 위한 진료를 벌였습니다.

  월 3~4회 정도 시행하였고, 한국인이 세운 공장에 있는 근로자와 음식점 종업원을 중심 으로 진료 및 투약, B형 간염검사 및 예방접종, 일부 AIDS와 매독 반응검사, 구충제 투여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시행한 주말진료는 총 횟수가116회, 진료인원 5,800여 명, 간염검사 및 백신투여 5,700여 명, 구충제투여1,900여 명, AIDS와 매독검사는 2,600여 명이었습니다.

 

 2005년.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한국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는 병원 직원 6명과 세인트 폴 병원(St. Paul Hospital) 직원 2명을 시작으로 한국어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베트남 사람들 30명 정도 씩 모아 3개월 단위로 강습을 시작하였고, 초급 3개월, 중급 3개월 합계 6개월의 ‘무궁화 한글교실’을 운영하였습니다. 이후 한국어 강습은 귀국 때까지 6기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국제화시대의 추세에 따라, 베트남 처녀들이 한국남자와 결혼하는 수가 날로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베트남 처녀와 건강한 2세 출산을 위하여 서울 아산재단의 도움을 받아 AIDS와 매독 검사를 위한 시약을 공급받아 검사와 예방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시 살포된 고엽제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자 외에도 후유증을 가진 2~3세가 선천성 이상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루 종일 자기 머리를 때리는 아이. 매일매일 뼈가 부러지고, 머리에 물이 차서 큰 호박만한 아이. 하루에도 수차례 간질발작을 일으키는 아이. 15살인데도 몸무게가 8kg인 소년. 뇌수술 후 자극만 가면 웃는다는 아이 등 전쟁의 처참한 후유증이었습니다.  그는 베트남에서 인술을 펼쳤고, 한국과 베트남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졌습니다.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집안이 어려워 미국 독지가한테서 약 2년 동안 매월 25,000원 정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액수는 그 당시 한 달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그후 그가 12년 동안 선명회를 통해 베트남에 월 2만 원씩 후원하였는데, 그 액수도 베트남 시골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그는 ‘아!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며 갚아가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의사 황혜헌의 진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환자들



 



  4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치고

 

 

 그는 경기도 도립의료원 포천병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만약 정부파견의사제도가 계속 시행되었다면, 아직도 그는 베트남에서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입니다.
 해외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체가 기뻤는데,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아 안타깝네요.

 그는 처음 3개월 동안 베트남에서 적응하기에 무척 힘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의사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목숨을 걸고 인술을 펼치는데, 이곳 베트남에서조차 버거워 하는 자신을 자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업무기간 중 아픈 하루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환자와 함께 병마와 씨름하였습니다. 직접 환자를 상대하지 않았던 전직 병원장으로서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의사 황혜헌은 베트남을 사랑합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거리와 그 소음과 그 말소리와 그 살아가는 모습 들을 문득문득 떠올리고 있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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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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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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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랑카의 허준   한규언

  한의학을 스리랑카에

 

 

 

 

 

 

 

 

 

 한규언은 1956년에 태어나, 경희대 한의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는 에티오피아(Ethiopia), 알바니아(Albania) 그리고 라오스(Laos) 등지 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2004년 KOICA(한국국제
력단) 정부파견한 의사로 스리랑카(Sri Lanka) 콜롬보 보렐라의 국립 아유르베딕 교육병원(National Teaching Hospital of Ayurveda)에 부임하였습니다.

 

 정부파견한의사 제도가 2008년에 끝나자 아쉬웠지만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리랑카 정부는 현지 보건의료 환경개선 및 국민건강증진에 기여를 했기 때문에 그의 재 파견을 수차례 요청했으며, KOMSTA(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 등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계속 의술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한의사 한규언은 정부파견한의사로 활동하면서 인류애를 실천하는 의료봉사활동과 우리 한의학을 세계에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역할로 한국 한의학 이론에 근거하여 침 치료를 하는 스리랑카인 침의사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부임하면서 스리랑카 국립 아유르베딕 교육병원에 클리닉을 설립하고 한의학에 관심이 있는 스리랑카 인 전통의사를 대상으로 침구학 교육과정을 운영해왔습니다.

 

 특히 2005~2008년 사이 그가 직접 훈련 육성한 스리랑카 전통의사 36명을 중심 으로 ‘스리랑카 침구의료 봉사단’을 조직하여 한의의료시술의 현지화와 토착화를 일궈냈습니다.  또한 2008년에는 4기 수료자 19명의 전통의사들에 대해서 스리랑카 전통의학부 아유르베딕 청장이 수료증을 인증함으로써, 텃세 심했던 그곳에 한국 한의학을 국가 제도화하는 개가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는 근무 기간 4년 동안 약 8만 천여 명에 이르는 환자를 진료하였고, 분기에 한 번씩 지방 순회 무료 봉사활동을 실시하였으며, 저녁식사 일찍하기, 소금 섭취 줄이기 등 식생활 개선 건강 증진 캠페인을 진행하였습니다.

 

2005년. 그는 사상의학과 체질 침을 포함하는 한의학 침구서적《Acupuncture in Oriental Medicine》을 영문으로 저술하여 한국침구학의 우수성을 과시했습니다.

 

 그는 저서를 통해 영문으로 사상의학 이론과 체질 침을 소개했으며, WHO(세계보건기구) 발행 표준 경혈명칭 규격집의 용어를 사용하고 한국식 영어 명칭을 우선 표기했습니다. 이 저서는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교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스리랑카 정부에서 발행하는 전통의학 전문학술지 《아유르베다탐구(Ayurveda Sameekshawa)》 2010년 10월호에 한국 침을 소개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중국의학의 아류라 인식되던 한의학의 가치와 위상을 널리 알렸습니다.

 

스리랑카의 《아유르베다》는 인도와 스리랑카 등지에서 전래되고 있는 질병의 예방과 치료, 건강과 장수의 방법으로 요가와 자연 식이요법, 오일마사지, 약물요법 등을 처방하는 전통의학 체계를 일컫습니다.  한국의《동의보감》인 셈입니다.

 

아유르베딕 교육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받는 전통의사들도 한의학 교육과 실습에 참여하면서 아유르베다와 한의학의 접목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전통의학병원 소속의사 및 콜롬보대학교 전통의과대학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의학의 특징, 양의학과 한의학, 음양이론, 침술의 요소 등 침구 경혈학을 교육시켰습니다.  그리고 전통의학병원 인턴 및 콜롬보대학교의과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및 실습을 실시하였습니다.

아유르베딕 의사들을 위한 수료증 수여식 관련기사

 

스리랑카 사람들은 손을 제대로 씻지 않기 때문에 피부병, 배탈, 설사 등이 자주 발생하였고, 살생을 금하는 불교적인 전통 때문에 모기를 잡지 않아 뎅기열이 만연하였습니다. 모기를 잡으라고 말하면 그들은 웃으면서 쫓을 뿐이고, 그가 손바닥으로 모기를 잡을라치면 웃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고혈압, 당뇨, 비만과 같은 성인병도 심각하였습니다.

 

 스리랑카의 전통의학인 아유르베다의학은 종족과 밀착한 3가지 부류가 있어 늘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 왔습니다. 북부인도와 남부인도 그리고 아랍에서 전파된 전통의학입니다.  

 

 그들의 전통의학은 인류 4대문명의 하나인 인더스문명의 일부로서, 전통의학을 전담하는 장관을 따로 둘 정도 로 전통의학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리랑카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그리고 영국의 지배를 150년가량 씩, 450년간 경험한 나라이기 때문에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2006년 그들의 민족해방전선 열기는 거셌습니다.

 

  민족해방전선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시각에서는 한규언의 한의학 진료가 지금은 무료이지만, 언젠가는 스리랑카 국민들 모두가 필요로 하게 되면 비싸지는 것이 아닌지 하는 차가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오랜 외세의 침략을 받았던 사람들의 당연한 조급증이었습니다.  그가 귀국을 고심할 정도로 민족해방전선의 압박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마침내 KOICA의 중재 아래 스리랑카 전통의학 대표, 민족해방전선 대표, 한국의 한규언 그리고 그에게 침구학을 배운 제자 대표가 모여 타협안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한약처방은 최소한으로 자제하고, 침 시술에만 주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봉사활동이 침 시술로 제한된 다음에 그의 능력과 한의학의 우수성은 오히려 더욱 빛을 발하였습니다. 그의 활동이 다소 위축된 지 6개월가량 지난 때였습니다.

 당초 한의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민족해방전선에서 파견된 병원관리가 갑작스레 가슴이 답답한 증세를 호소하면서 다급하게 그에게 진료를 의뢰하였습니다. 진료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도있었습니다.

 

 20년 동안 쉬지 않고 딸꾹질을 심하게 하여 본인은 물론 주위사람들조차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한 환자가 그를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치료해주자 이 환자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의 제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침술로 딸꾹질인 흘역을 치료해주었는데, 치료받은 환자 한 명이 한의학 침구과정을 교육받았던 침의사가 근무하던 병원의 병원장에게 한밤중에 고맙다는 전화를 해서 병원장이 침구과정에 등록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2008년 9월에는 침구학과정 수료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의료봉사단체인 SAMST(Sri Lanka Acupuncture Medical Service Team)을 구성, 지방순회 진료를 실시했으며, 스리랑카 전통의학부의 요청으로 벽지 순회 진료에 나섰습니다.

 

 

스리랑카 중부 내륙 팔레깰레 지역에서의 지방 순회 진료모습

 


 2009년 타밀반군과의 26년간에 걸친 내전이 종식되면서 전후복구사업의 일환으로 북부지역에서 전통의학 분야에서의 병원보수와 신축사업이 강화되었고, 병원에 부속된 식물원이 새롭게 개원되었고, 제약회사가 설립되었으며, 서양의학과 전통의학의 협진시스템이 스리랑카 최초로 시도 되었습니다.

 

 

 

이제 한의사 한규언에게 스리랑카는 떠날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스리랑카의 환자들을 생각하면 그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는 허준의 후예로서, 스리랑카 환자를 치료하면서 한국의 위상을 오래도록 드높일 것입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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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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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얀마의 슈바이처   최재성

 주민들과 친숙하게

 

 

 

 

 

 


  최재성은 중학교 때 마하트마 간디의 《진리를 찾아서》와 슈바이처의 《생명의 외경》같은 책을 읽고, 자신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런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의대에 진학하면서 사람이 살면서 특이한 환경에서
남을 도울 수 있는 이런저런 일을 해볼 수 있다면 짧은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1955년에 태어나, 1974년 한양대학교 원자력공학과를 다니다 군제대 후 1978년부터 전북대학교 의대에서 공부하였습니다. 1988년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에서 내과전문의를 취득하였고, 1990년까지 수원제일병원에서 내과과장으로 재직하다가, 그 후 수원에서 내과의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의사 최재성은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의사 공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개원하고 있던 의원을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집안이 모두 월남가족이었고, 이모가 자식 없이 혼자 사는 관계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모를 모시라는 유언을 하였기 때문에 이모를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미얀마(Myanmar) 양곤병원(Yangon General Hospital) 내과(Liver unit)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의사 최재성의 진료모습

 

 버마였던 미얀마.

 수도 양곤 시가지 북쪽 언덕 위에는 1453년에 세워진 둘레 426m의 광대한 정사각형 기단 위에 높이 100m의 쉐다곤 파고다가 황금색으로 찬연히 빛나는 불교의 나라. 영국과 전쟁을 수차례 벌였던 용감한 나라.

 

 

 미얀마는 그의 어린 시절 사회 환경과 유사하였습니다. 의료 환경도 낙후하여, 1960년대 초반의 한국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미얀마는 그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나, 영국식민지이었던 까닭에 의사들이 영어를 잘하여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군사독재체제이며, 폐쇄적인 사회로 감시가 철저했는데, 병원에서 접촉하는 의사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개별 진료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고 병원에서 지정해주는 업무만 맡아서 해야만 했습니다.

 

 미얀마의 여름은 보통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찜통이었는데, 그가 근무한 병원은 100년 이상 된 건물로 에어컨도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너무 더워 외부의 열기가 몸 안으로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미얀마의 모든 지역에는 전기가 24시간 공급되지 않았고, 전기가 몇 시간 동안 공급되는 지역인지에 따라 월세가 확연히 달랐습니다.  저녁시간에 저녁을 먹고서는 모기나 해충이 많아서 산책이나 외출할 마땅한 곳이 없어 집에서 주로 생활을 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습니다.

 

 밖에서 음식 사먹을 곳이 없고, 사먹을 돈도 없으므로 대부분의 미얀마 의사들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닙니다.

 점심시간에는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을 펼쳐놓는데, 자신의 가장 좋은 반찬을 돌리며 상대방에게 나눠주는 것을 예절로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찬에는 진한 향신료가 있어 맛을 즐긴다기보다는 그냥 삼켜야 했습니다.  

 그들의 호의를 생각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마치지만, 그곳의 음식은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칠 때까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미얀마의 국립병원은 돈이 없는 극빈층의 사람들이 오는 곳이었습니다.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유능한 의사들이 많았지만, 하루 벌어 하루를 근근이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약값 등은 너무 버거웠습니다. 수술은 무료지만 마취약, 항생제, 진통제 등은 환자가 구입해야 하는데, 약값이 보통 한달 월급이상의 비용이므로 환자가 약을 구입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사 최재성이 병상의 환자를 돌보고 있다

 

 

 어떤 의사가 그를 찾아와 수술 받은 환자가 항생제를 살 형편이 못되니 약을 달라고 해서 예비로 비축한 주사제를 주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민간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국립병원의 의사들이 따로 예약 받아 순회하면서 진료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한국의 서울대학병원 같은 양곤병원에서 미얀마 의사와의 협진은 환자들에게 그저 상징적 의미였습니다.  오히려 수련중인 의대생들에게 선진화된 한국의 의료강의를 통해 공감대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의료 활동으로 후진국을 지원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미얀마는 영국식 의료시스템이라 의료수가가 너무 비싼 현대식 의료에 목맨 형국이었습니다.

  위내시경을 할 수 있는 병원이 전국에 고작 몇 군데 뿐이었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민간병원을 이용하였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의료시설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얀마의 경제력이 감당할 수 있는 값싸고 효과 좋은 침술과 근신경자극요법(IMNS)이나 일종의 에너지요법인 동종요법(Homeopathy) 같은 좀 더 특화된 영역의 의료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전통적 불교국가인 미얀마에도 한국에서 온 선교사가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을 보면 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미얀마 주민들과 그냥 같이 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과 친숙하게 지내는 것이 그들에 대한 봉사요 국제협력이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정부파견의사 임무가 끝나던 2005년 새해. 쓰나미가 남아시아를 휩쓸었습니다.

 

 미얀마의 이웃 나라인 태국에도 쓰나미가 밀려왔고, 태국 푸켓 위에 난민수용소가 있는 팡아주의 초등학교에서 서울에서 온 10여 명의 봉사단원과 난민들을 치료하며 뜻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무차별 폭격을 맞은 것 같은 처참한 그곳에서 2주일 동안 다친 그들을 치료하며 인생의 의미와 감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야전침대에서 잠을 자며 그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의사 최재성이 KOICA에 보고한 문서를 종합하면, 3개월마다 외래 환자 297명, 입원 환자 371명, 내시경 진료 307명, 초음파 진료 62명 그리고 동포 진료 131명 정도를 담당하였습니다. 미얀마에는 한국인이 1,000명 정도 있었고, 동포를 위한 클리닉에서 진료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대외경제협력기금인 EDCF(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차관으로 건립중인 B형 간염 백신 공장이 진척됨에 따라 미얀마 보건부의 기대도 높아졌습니다. 그는 의학연구단체인 DMR(Department of Medical Research)를 조직하여 간염백신의 임상실험인 Clinical Trial(백신적응도 항체 생성률 및 합병증 발생률)을 DMR과 함께 공동 연구하였습니다.  미얀마 보건부의 백신 전문가 홍보 프로그램의 일종 인 B형간염백신 회의에 정책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미얀마에서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다음과 같은 제의를 합니다.

 

 후진국에 정부파견의사를 파견하여 보다 많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 나라의 보건정책에 참가하여 예방의학적 접근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WHO(세계보건기구)나 UNICEF(유엔아동기금)에서 이런 일에 관여하나, 이 단체에서는 알 수가 없는 소위 중간급 병원에서의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약 투여와 진단 그리고 시술행위의 경우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것의 시정은 환자를 몇 명 더 진료하는 것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각 나라의 국제협력단 파견의사의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양곤병원의 간장학(Hepatology) 분야에서 환자 상담치료외의 본인이 담당하고 있는 일 중에는 치료내시경이 있는데, 미얀마 인구의 20~30% 가 간염환자이고 이중 상당수가 간경화나 간암으로 진행된다. 소위 간경화로 인한 식도 위출혈 환자를 내시경적 혈관치료를 통해 지혈하는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치료내시경의 수련병원이 없으므로 본인이 이 부분을 담당했고 내과 수련의에 대한 교육을 하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했으나 내시경자체가 없고 지혈소모품이 없는데 무슨 배울 의욕이 있겠는가.  결론으로 각 지역 사정에 맞는 의료 시스템 적응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지역사정에 맡는 의료와 현대적인 의료시스템의 통합이 시급하다.

 그리고 최근에 KOICA에서 정부파견의사와 태권도사범 등 전문가 파견을 없애고, 병역면제 조건으로 파견하는 협력의사제도는 보편적인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 생각된다.  일본의 대사관의사나 JICA(일본국제협력기구)의 정부파견의사 제도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의사 최재성은 미얀마에서의 4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성공적로 마쳤습니다.

 

 귀국 후 한동안 너무 많이 달라진 한국의 사회와 의료시스템에 적응하는데 홍역을 치루기도 했지만 현재는 인천 나사렛 국제병원에서 내과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에서의 국제협력단의사의 경험을 토대로 은퇴 후 개인적인 후진국 진출과 봉사도 부담 없이 계획하고 수행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즉, 후진국에 꼭 필요한 침술과 근신경자극요법 그리고 동종요법 같은 돈이 들지 않는 의료를 수행할 현지 의료인력 교육과 의료시스템의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그는 병든 불쌍한 환자를 찾아가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원의료체계의 제도개선이 보다 효과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생명외경의 정신으로 미얀마 주민과 친숙하게 잘 지내는 것이 봉사이고 협력이라 여겼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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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글라데시의 슈바이처  이용만

  즐겁지 않으면 이일을 못한다.

 

 

 

 

 

 

 1992년 겨울. 아내와 함께 퇴근하던 의사 이용만은 반포대교를 건너면서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해외에서 봉사의 삶을 살고 싶다....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로마의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듯이 한국의 이용만은 운명의 주사위를 던진 셈이었습니다.

 

 1993년 겨울. 그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의 자격으로 방글라데시(Bangladesh)로 갔습니다. 부부는 한국을 떠날 때, 자녀들이 살던 아파트 한 채만 남겨놓고 모든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마치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않겠다는 배수진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둥이였으니, 하늘의 명령을 안다는 50을 바라보는 나이였습니다.


 이용만은 조선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업을 마쳤습니다. 서울에서 병원을 개원하면서 나름대로 보람 있고 편안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사가 되면 신앙인으로서 봉사하는 기회를 반드시 갖겠다고 서원했던 대학시절의 각오가 항상 마음에 남아있었습니다.

 

 정부파견의사로 파견되기 전에 그는 내심 사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를 두 차례 방문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누나가 여행경험에 대하여 묻자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사진 속에 있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카딩턴 박사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직후 혼란기에 자궁외 임신에 의한 심한 출혈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에서 수술을 해 누나를 살린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연락이 끊어져 생사조차 몰랐는데 그 고마운 카딩턴 박사를 의사 이용만이 방글라데시 여행 중에 같이 사진을 찍게 되어 누나에게 소식이 전해졌던 것입니다. 운명이란 것이 그를 이끌었던 모양입니다.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근교 통기병원 내과에서 그는 인술을 펼쳤습니다.

 

 외국인 의사에 대한 현지 의료인들의 배타적인 상황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일과 후에는 교민들을 위한 예방접종 및 각종 상담에 응하였습니다. 그가 KOICA에 알린 실적보고서에는 무려 40여 종에 달하는 질병을 진료하였으며, 매 분기마다 3,000명에 가까운 환자를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이슬람국가이기 때문에 환자를 진찰할 때 옷을 입은 채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동안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다정한 인술은 꽃을 피웠고, 그의 병실에는 환자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진료 시작은 아침 9시인데 7시부터 기다리고 있었고,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보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환자들도 오래 기다리다 보면 화장실에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새치기를 당할까 봐 참고 기다리다가 병실에서 실례를 하는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의사 이용만이 묵묵히 진료하던 중에 언제부터인가 여자 환자들이 대다수를 이루는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부다처제 아래서 여성들이 겪는 스트레스와 고민에 대해 귀를 기울여주다 보니 큰 위안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근무한 지 3개월이 지난 무렵, 병원 복도에 누워 있는 세 살가량의 아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버려진 아이였고, 한눈에 보기에도 영양실조였습니다.  

 아이를 병실로 옮기고, 우유와 햄 그리고 빵을 사다가 옆 침대의 여인에게 먹여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일주일 쯤 지나 아이를 찾아가 상태를 보니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부인이 아이에 게 줄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당황한 그는 직접 아이에게 음식을 주기 시작했고, 한 달가량 지나면서 아이가 뚜렷하게 건강을 회복하였으며, 주변에서는 아이를 양녀로 삼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 한 고위공무원이 입양하겠다며 그의 의향을 물어와 아이의 장래를 위해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훗날 양부모와 함께 가끔 병원을 방문한 그 아이는 공주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3년을 근무한 후 방글라데시 정부로부터 비자연장을 받지 못해 네팔(Nepal)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가 네팔정부로부터 지정받은 국립 박따뿔(Bhaktapur)병원은 어쩌면 본격적인 봉사와 희생의 마당이었습니다.

네팔은 비록 후진국이지만 국가가 보건예산을 전체 예산의 7%를 배정할 정도로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네팔의대에서 배출되는 의사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높았습니다.

 

 네팔 사회에서 의사들은 가장 우수한 인재로 간주되며,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권력층과 연결된 집안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의과대학 학자금은 너무 비싸고, 가난한 집 출신들은 장학금 수혜가 많지 않은 여건에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엘리트의식
과 자존심이 강하였습니다.

 어쩌면 신성한 인술을 펼치는 의사들이 이미 폐지된 카스트 제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인 의사에 대해 차별적이었고, 병원의 환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담하였습니다.

 새로운 병동도 지어졌고 KOICA의 지원으로 시설도 개선되었지만, 그가 진료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분만을 하기에는 너무 시설이 열악하여 산모와 신생아 모두에게 위험해 보였고, 진료 중에 정전도 잦았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작은 나라 네팔에서는 병이 생기면 무속인, 민간요법, 시골 약국이나 보건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원을 찾았습니다.

 

 70대 할머니의 종양을 제거한 수술은 하나의 전설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배가 산처럼 솟은 노인을 초음파로 진단해보니 커다란 물혹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수술을 권유했지만 ‘70이 넘은 내가 얼마나 더 살겠다고 수술하겠느냐’며 거부하는 환자를 설득해서 18Kg이나 되는 종양을 들어냈습니다.

 수술 받은 후 퇴원했다가 세 손녀와 함께 그를 찾아와 이제는 살 맛이 난다고 고마워하였습니다.

 이 환자가 수술 받은 후 의료진과 함께 찍은 사진과 들어낸 물혹 사진은 지금도 그 병원에 걸려 있습니다.

 

 의사가 부족하다 보니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수술을 감행한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응급실로 환자가 들어왔는데 유방염이었습니다. 응급실의사는 환자를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하자고 제안했지만, 그가 만류했습니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산부인과과장은 그를 유방농양치료전문가(Breast Abscess Specialist)라 부르면서 부러워하였습니다.

 

네팔에서는 남자들이 또삐를 머리에 쓰고 다니는데, 오직 또삐만을 만들어 살아가는 환자가 선물한 것을 그도 쓰고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환자들이 보통 높이보다 두 배 정도 높은 것을 주면서 당신은 반드시 이걸 써야한다고 해서 영문을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상류층이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를 극구사양하고 보통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낮은 또삐를 쓰고 다녀 더욱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2003년은 박따뿔병원 개원 100주년이었습니다.

 

 네팔 왕실은 의사 이용만에게 각별한 인사말을 담아 감사패를 전달하면서, 그의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치하하였습니다.
 이용만은 KOICA의 전적인 지원을 받아 2009년에 개원한 한국·네팔 친선병원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박따뿔병원에서 진료 받던 환자가 멀리 떨어진 이 병원까지 그를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노래를 하면 아내도 따라서 부른다고 했던가요. 이용만의 부인 박영례도 묵묵히 남편을 돕다가 봉사에 나섰습니다.


 2002년, 2층짜리 주택을 임대해 고아원 ‘시온의 집’을 열었습니다. 부모가 없거나 결손가장 출신이며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원거리 시골출신 아이 12명을 자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못 먹고 못 배우던 아이들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회계사와 의사 등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들은 이용만 의사 부부가 없었다면 학교에 가지도 못하였을 것이니, 자신들의 인생이 완전히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시온의 집’ 어린이를 지도하다가 의과대학에 합격한 시골청년에게 이용만 부부는 입학금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업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후원하였습니다. 그 가난했던 청년은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6개월 동안 연수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의사가 부족한 시골 주민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으며, 이용만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고 있습니다

의사 이용만과 네팔인 양아들    

  

 그가 방글라데시로 가던 해 집안에는 고등학교 3학년인 대학입시생이 있었습니다.

 3남매를 남겨두고 부인과 늦둥이인 막내만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어찌 보면 자식에게는 무심한 부모였습니다.

 이용만은 지금도 20년 전 양복을 입고 다녀서 주위에서는 유니폼이라고 합니다.  아내는 둘째 셋째 딸 결혼식에 친구와 시댁 조카 한복을 빌려 입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마음으로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였습니다.

 

 그는 2000년 적십자 박애상 금상, 2005년 KOICA 표창 그리고 2008년 외교통상부가 후원하고 KOICA와 KCOC(한국해외원조단체협의회)가 공동 주최하는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08년 KOICA에서 거행된 제3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표창을 수상하면서 그는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말없이 열심히 봉사활동을 한 사람들에게 죄송하고 부끄럽다.

 의사 이용만의 자랑스런 해외봉사 이야기는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사회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20년 세월.

 즐겁지 않으면, 이 일을 못한다고 그는 겸손하게 말합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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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여름휴가의 절정기 8월 첫번째 주말 아침.  여기는 서울 마포에 위치한 국민건강보험공단 본사 앞마당이다.

   일찍부터 수상한 사람 여럿이 여기저기 분주히 움직이며 피서길을 나서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들이 준비하는 피서용품들도 수상하다. 봉고차에 차곡차곡 가득찬 저것들이 다 뭘까?

   혈우환우들과 한여름 열기를 날려버린 건강보험공단 밴드 '건이강이'



 

 

 



 

 아무래도 악기인 듯한테 피서용품 대신에 악기를 가득실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출발인원은 9명.

 오늘 하루 여행을 위해 빌려온 봉고차와 리더의 일방적인 명령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몰고 온 구 대리의 승용차에 나눠탔다.

“오늘 노래할 사람들 같이 타서 입 좀 맞춰~” 좌석 배치까지 리더의 명령이 이어진다.


 이들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원들로 구성된 직장인 밴드 '건이강이'에 멤버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  특별한 피서를 계획중이다.  바로 서해안 만리포해수욕장.  함께 시간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떤 명령이라도 이의가 없다. 
 서울에서 세 시간 남짓 걸린 만리포 해수욕장.

 해변에선 물놀이가 한창이지만 직원들이 먼저 찾은 곳은 혈우병환우회모임인 한국코헴회 여름캠프가 열리는 현장이다.

 

 


 

 

 

  한국코헴회(http://www.kohem.net)는 혈우환우 모임이다.

 


혈우병 환자는 출혈이 생겼을 때 응고가 잘 되지 않아 계속적인 출혈로 이어지며, 잦은 출혈로 인하여 출혈부위가 악화되어 장애로 이어질 수 있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생명을 위협을 받을 수 있어 평생 응고인자를 투여받아야 한단다.

 

평생 같이 가야 할, 친구처럼 지내야 할 질병이기에 조심만 하면서 소극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만은 없는 것.

그래서 이들은 한국코헴회를 통해 자가 관리방법도 공유를 하고 이렇게 여름캠프를 통해 사회생활에 대한 자신감도 키우고 질병 극복의 의지를 키우고 있다. 평생 혈액응고제를 달고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건강보험은 필수일 터. 그들의 의지와 노력에 힘을 실어주기위해 직원들이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이 매일매일 일상생활에 허덕이지만 오늘은 화려한(?) '건이강이 밴드로 변신을 한다.

평범하디 평범한 직장인,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원, 오늘만큼은 평범함을 벗어내고 7년 차 직장인 밴드의 실력을 과감하게 보여줘야 한다. 벌써 한 달 전부터 연습을 시작해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업무와 생활의 굴레에 엮이다보니 모든 멤버가 한시간에 모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에서라도 연습하라는 리더의 명령에 아무도 이의제기를 못하는 것.

 

더군다나 오늘은 세컨 드러머 박 과장과 음향 엔지니어 구 대리가 보컬로서는 처음으로 무대에 서는 날이다. 
만리포에 도착한 시간은 태양이 작렬하는 오후 2시. 멤버들은 무대를 둘러보고 악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드럼 셋팅이 오늘은 좀 수월하다.  박 과장과 리더인 권 과장과 같이 하기때문이다. 구 대리는 엔지니어의 습성을 못 버리고 이리저리 음을 맞춰달라고 요청하고 있고, 메인보컬인 최 과장은 무대 모니터가 이상이 없는지 체크하고 있다. 

 

 

 

 악기 세팅이 끝나자 바로 리허설. 연습은 많이 못했지만 7년 차 직장인 밴드의 실력이 조금씩 나온다.

실력발휘도 실력발휘지만 무엇보다 환우들의 축제가 빛을 발하도록 흥을 돋구어 줘야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다.
알고보면 '건이강이'는 그동안 많은 곳을 찾아 다녔다. 마음의 건강이 필요한 곳, 즐거움이 필요한 곳-장애우 시설, 장기입원환자가 있는 병원, 노인 시설, 노인들이 많이 사는 시골마을 등...

 

 

 

 음악이 있기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함께하기가 쉽다.

 

 

 마음의 문을 열기가 쉽다. 

 그런 것을 잘 알고있는 건이강이 밴드는 실전에 강하다. 그들이 함께하면 더 기운이 나서 무대에 서면 신이나고 연주도 더 잘 된다. 그래서 연습이 부족해도 은근한 자신감을 가지기도 한다. 

 오늘은 환우들에게 나눠준 노래가사가 힘을 발휘했다.  멀리서 지켜보기만하던 이들도 노래를 따라하면서 환호를 한다.
 박 과장과 구 대리도 역시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은 처음임에도 객석으로 나아가 환우에게 마이크도 대주고 노래도 같이부르고 능숙하게 흥을 돋구고 있다.

 

 

 

 

 또 언제나 그렇듯 나눔이란 일방적이 될 수가 없다. 

 그들을 위해 연주한 음악들은 훈훈한 정의 메아리로 돌아와 멤버의 마음을 채워준다. 그래서 건이강이 밴드는 시원한 바닷가의 피서보다, 숲속의 피서보다 이들과 함께한 여름밤을 더 소중한 피서로 생각한다.
 처음 만나는 코헴회 환우였지만  멤버들은 이제 '만리포' 하면 한 여름밤의 추억, 혈우환우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한국코헴회 환우 여러분~ 우리가 항상 응원할게요~" 란 메시지를 떠올리며...??

 

 

(공연 동영상)

 

 

 

 

 

 

글   박정미 / 국민건강보험공단 사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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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

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

(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미얀마의 슈바이처  이영식

   의료행정 제도개선을 위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대륙 사이에 있는 나라.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벌인 아웅산 수지여사로 유명한 나라.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모양의 전통의상 론지를 차려입은 남녀들.
특히 1960년대 동대문운동장에서 버마와 한국 축구팀 청룡이 억수같은
비가 오던 날, 진흙탕 수중전을 벌여 한국인에게 인상 깊던 나라.
미얀마에 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영식입니다.

 

그는 1955년에 태어나 1974년부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1996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의사로 미얀마(Myanmar) 양곤종합병원에 파견되었습니다.
의사 이영식의 미얀마에서의 정부파견의사 활동은 헌신적이면서 체계적이었습니다.

 

 미얀마는 치안이 비교적 좋으며 국민성도 유순하고 외국인에 대해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기후풍토가 전혀 다르므로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기본적인 건강이 요구되었습니다.

 

 경제 수준에 비해서 주택임대료나 전기와 전화세는 터무니없이 높았습니다.

 특히 외국인에 대해선 모든 세금, 공공요금, 병원치료비, 숙박비, 항공료 등에 차별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사회주의 체제로 정부기관의 직원들은 관료적이고 권위적이며 부서간의 협조가 잘 안되었습니다.

 

 미얀마의 의료체계 자체는 영국의 영향과 사회주의 국가로서 법적으로는 조직이 잘되어 있으나, 의료기자재와 조제약이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개인병원에서 비교적 양질의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아 약품을 구입해서 치료할 수 있으나, 대다수 가난한 주민들은 열악한 공공의료기관 시설에서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더라도 생활수준에 비해 너무 비싼 약을 구입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1996년에 부임한 그는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 단독 진료를 하지 못하고 영어를 잘하는 원주민 의사 혹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낮에는 의료 활동에 전념하였고, 진료가 없는 밤에는 언어습득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주경야독인 셈이었습니다.

 

 그곳에서의 활동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습도가 높은 우기에 각종 바이러스와 알레르기 질환의 만연이었습니다.

 

 그는 청결한 주거 문화와 식생활 습관의 개선에 관심을 기울였고, 또한 무의촌 진료에 있어서 진료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비교적 적극적인 환자보다는 오히려 찾아오지 않는 이들 중에 더 만성적이고 치료 효과가 높은 감염질환자들이 많다는 점을 발견하여 그는 기다리는 진료보다는 찾아 내어 치료하는 방식을 지향하였습니다.

 

의사 이영식의 무의촌 진료 모습

 

 그곳 무의촌에는 만성중이염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이 많았습니다. 말을 배워야 할 시기에 중이염으로 인한 청력 저하로 말을 배우지 못하여 평생 장애인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 어린이들을 찾아내어 염증을 치료하고 필요하면 보청기를 착용시켜 청력을 향상시켜 줌으로써 적은 비용으로도 본인에겐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원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그는 예방접종도 활발히 벌였습니다.


 1996년도 3/4분기에는 간염, 홍역, 소아마비 등 예방접종을 비롯하여 미얀마인 외래환자 282명과 입원환자 176명을 치료하였으며, 동포 220명을 진료하였습니다. 또 교회인 Living Water Dragon Church와 장님 마을 그리고 고아원인 Inya Boy’s Training school을 찾아다녔고, 무의촌에서 720여명 의 환자 진료에 적극적이었습니다.

 

 특히 고아원에 대한 정기적인 진료로 개인 위생 및 영양상태 개선과 질병치료에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그리고 C형간염 감염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수혈로 인한 C형 간염 감염률이 높아 공혈자들에 대한 질병이 발생하는 특정 지역에서 바이러스 양성률을 조사하였습니다.

 

 미얀마 보건부의 지원을 받아 전체의 유병률 및 위험인자를 조사하여 미얀마 보건정책에도 기여하였습니다.

 

<미얀마내 수혈액의 C형 간염 양성률 및 C형 간염환자의 질병경과에 관한 연구>를 소규모 프로젝트로 수행하였으며, 보고서에서 미얀마의 열악한 공중위생 상태와 높은 간질환 환자 비율, 수혈용 피에 대한 검사가 행해지지 않고 있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공혈자들에 대한 C형 간염 바이러스 양성률을 조사함으로써 미얀마 전체의 유병률을 알아내고 위험인자를 조사하고 양성자들에
대한 추후관찰을 통해 질병의 경과를 밝혀 미얀마 보건정책 결정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일반적인 C형 간염 양성자의 자연 경과를 알아 내어 학술적으로도 기여할 수 있도록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검사가 완료 된 414개 샘플 가운데 47개 샘플이 C형간염 항체 양성반응을 보여 11.4%의 양성률을 보였으며, 헌혈자의 경우 대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는 이들이므로 일반인들에 있어서는 더 높은 비율로 나타 날 것이라 예상하고, 실제로 중대한 국가적인 보건문제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의 지속적인 예방활동에 힘입어 원래 2~3%로 예상되었던 미얀마 수혈혈액의 C형간염 항체 양성률이 무려 12%에 가까워졌고, 이런 보건위생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 결과 수혈혈액에 대한 검사를 조기에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미얀마에서도 AIDS가 큰 문제였습니다.  태국과 국경을 이루는 북쪽지방의 경우 태국으로 넘어가 매춘에 종사하다 귀국하는 여성들이 많아 이 사람들을 통해 AIDS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AIDS에 대한 교육과 홍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으며 지역적으로 마약생산지와 겹쳐, 불결한 주사기 등을 통해서도 확산이 가속화되고 있었습니다.

 

 비공식적인 조사에 의하면 미얀마 북쪽 국경지역의 마약상습자를 위한 수용병원에서 입원환자를 대상으로 AIDS에 대해 검사한 결과 75%가 AIDS에 감염되어 있을 정도로 심각하며, 미얀마가 경제개방을 확대해가면서 유흥업소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어 시급한 대책이 요구된다고 그는 지적하였습니다.

 

 1960년대의 우리나라처럼 미얀마에도 거의 전 인구가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부 사람들만이 개인적 으로 구충제를 복용하는 형편임을 알리고 분변처리를 비롯한 주거양식의 근본적인 개선과 구충제복용 캠페인을 제안하였습니다.  

 

 특히 회충에 감염되었을 경우 탄수화물의 흡수율이 감소하는 것을 밝혀내 회충퇴치에 대한 학술적인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회충감염과 쌀 탄수화물 흡수 및 장내 투과성에 대한 연구를 제도적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지원방안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내시경 시술 및 초음파가 극히 제한된 수의 의사들에 의해서만 행해지고 있어, 기술전수를 통해 미얀마의 현대화된 의료체계를 세웠습니다.


 미얀마 북부지방에 자생하는 갯질경이(Plantago Major : 이미 동물실험에서 궤양치료 효과가 확인된 약초)라는 야생약초를 소화성 궤양 치료에 적용해 보려는 임상연구를 시작함으로써 결과에 따라 대학이나 기업연구소와 공동으로 신약을 개발할 가능성이 매우 클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plantago major라는 야생약초의 생태조사를 위한 조사모습

 

 

 그 외에 민간에서 흔히 사용하며 약효가 거의 확실히 인정되고 있는 항결핵제, 항생제, 혈당강하제가 함유되어 있어 연구진과 공동 연구할 경우 매우 전망이 밝을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야생약초 갯질경이의 소화성 궤양에 대한 연구 등을 자비를 투자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 대한 지원을 비정기적으로라도 요청할 수 있는 제도를 모색하기도 하였습니다.

 

 성실하고도 헌신적인 자세와 투철한 사명감으로 무의촌 진료와 한인병원 운영 등 자원봉사 활동 등으로 한국과 미얀마의 관계 강화와 한인사회의 어려움 해결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의사 이영식은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하면서 체계적이고도 건설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일상적인 의료 활동이 보건행정에 도움이 되겠지만, 국가적 보건정책 결정이나 공공위생의 개선, 질병예방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실질적으로 미얀마에 유익할 것이다.

 경제적 사정 때문에 첨단의학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미미하고, 대 다수의 국민들은 민간요법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서 미얀마의 전통의학과 민간요법에 대한 공동연구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미얀마 교민들을 진료하게 되는데 교민진료 자체를 제도화해야 하며, 교민들을 위해 상담하고 치료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자발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필요한 약제와 병원 임대료 그리고 간호사 고용비용 등등의 제반경비를 자체적으로 부담하기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리가 있다.  

향후 교민뿐만 아니라 출장자와 관광객들이 많이 늘어날 것으로 생각되는데 제도화된 교민진료 체계가 필요할 것이다.

 

의사 이영식은 미얀마에서 주민들에 대한 성실한 의료 활동은 물론 국가보건행정의 체계를 세운 점이 특이합니다.

그는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익힌 의학지식을 충분히 활용하기에는 의료시설이 너무 빈약하였으나, 반면 조그만 노력이나 비용으로도 매우 큰 효과를 올릴 수 있었고, 그 노력으로 미얀마 주민들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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