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스리랑카의 허준  이상호

   아름다운 촛불

 

 

 

 

 

 

 

 

 

  보우머 이쓰뚜띠, 마터 고닥 싼또레이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내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스리랑카(Sri Lanka) 사람들이 그에게 전하는 영원한 인사말입니다.
자기가 가진 재능으로 남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 말하고,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난 그는 한국과 스리랑카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한의사 이상호.

1968년에 태어나,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한의사로 인술을 펼치다가 2004년 7월 8일 새벽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 트링코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한 그곳에서 하루 100~200여 명 에 달하는 환자들을 보살피느라 누적된 피로가 뼈아픈 요인이었습니다.
그는 경희대학교 한의학과에서 공부를 마치고, 2003년 스리랑카 콜롬보의 보렐라 교육병원에 정부파견한의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장마비로 순직하였으니, 1년 3개월간 그의 꿈을 뜨겁게 펼친 셈이었습니다.

 

이 슬픈 소식이 매스컴을 탔을 때,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행적을 깊이 새겼습니다.
한의대 본과 시절, 다일공동체에서 한의사인 아내 황경선과 함께 주말 의료봉사를 했습니다.

젊고 촉망받는 재활의학과 전문의 시절, 학교에 남아달라는 부탁이 이어졌지만 그의 열정은 누구보다도 뜨거웠습니다.

 

2001년 KOMSTA(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 단원으로 스리랑카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날씨는 더웠고 몸은 피곤했지만 당시의 감동은 여느 때의 봉사활동에서 느꼈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2002년 다시 스리랑카에 왔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한의학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자기 인생에 큰 보람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는 정부파견한의사에 지원했습니다.

 

 

 

 

  다음은 정부파견한의사 지원 동기서의 내용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재능을 통해 남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리라 확신한다.

 

나와 나의 아내는 한의사이다.

의료는 다른 직종에 비해 그 특성상 공익성이 두드러지는 직업이고 직종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학창시절부터 의료봉사에 관심이 있었고, 본과 3~4학년 때는 다일공동체(청량리소재)에서 지금의 아내와 함께 주말 무료봉사를 했었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경희의료원 한방재활의학과 레지던트 2년차 때(2000년 11월), KOMSTA의 일원으로 스리랑카로 해외의료봉사를 가게 되었다.

 

날씨는 더웠고, 피곤한 몸으로 많은 환자를 보았지만, 잠시 스쳐가는 일회성 봉사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때의 감동은 여느 때의 봉사에서 느꼈던 것 이상이었다. 이듬해 다시 한 번 스리랑카로 봉사를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해외의료봉사를 다녀왔으며, 나는 2번의 스리랑카 의료봉사를 통해 이곳에서 내가 가진 의술, 한국이 한의학으로 이들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큰 보람이며 아울러 영광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의료봉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한의학을 세계화시킨다는 것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배우고 익힌 의학지식이 나와 나의 가족만을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것이 의학적인 도움이든 그것을 통해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것이든지 간에……)

 

아내와 함께 고민하며 결정한 것이 있다. 그것을 지킬 수 있을지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은 60세 이후부터는 full time으로 의학적인 지식과 기술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풀며 살자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시기를 조금 앞당겨 보고 싶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이웃을 위해 살지 못한다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한번 살아 보자는 것이 지금 나와 나의 아내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때를 기다리며 스리랑카 정부파견한의사에 지원한다.


대학에 남아 한의학 이론을 세워 존경 받는 교수가 되어도, 한의원을 개원하여 이웃을 도우면서 명예를 쌓아도 될 터인데, 그는 자신을 태워 주위 를 밝히는 촛불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길을 찾았습니다.의서 《의방유취醫方類聚》에서 강조하는 ‘환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는 인술을 태생적으로 갖춘 아름다운 한의사 이상호였습니다.

 

 

  그는 늘 자신을 이렇게 다독였습니다.

 

배우고 익힌 의학지식이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돼서는 안 되며,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이웃을 위해 베풀며 살고 싶다.    가난한 자가 가장 서러울 때는 제대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할 때이다.

 

그는 스리랑카의 전통의학을 존중하는 아유르베딕(Ayurvedic) 교육병원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대학부속 종합병원 같은 곳입니다. 곳에서 진료실 설치, 진료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아유르베딕 의사들에게 한의학을 가르치고 병원에 개설된 Korea Clinic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진료활동을 하였습니다.

 

경혈침구학 기본과정을 만들어 1기생 10명을 배출했으며, 2기생 18명을 가르쳤습니다.
그곳에서 구하기 힘든 약재들이 많았으나, 홀로 돌아다니며 구했습니다.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도 참기 힘들었고, 불규칙한 전력공급에다가 의료기기도 지원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늘 환하게 웃었습니다. 자녀교육에도 빠듯한 월급이지만, 아내 그리고 1남 1녀의 자녀와 너무나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주위에서는 뭔가 이룩하려 하지 않고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사람이다 라고... 그를 그렇게 기억했습니다.

2005년 제33회 보건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석류장을 추서했습니다.

신앙인이었던 그는 훈장을 받으며 생전에 하던 말 처럼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그냥 삶입니다. 나를 낮추기만 하면 정말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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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몽골의 허준  문영식

  초원의 무지개

 

 

 

 

 

 

 

  "약재는 한국에서 가져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기 것입니까? "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파견한의사 문영식의 안내로 한국, 몽골 친선한방병원의 진료실과 약제실을 둘러보면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한의사 문영식은 관절 통증 질환, 부인과 질환, 심혈관계 질환을 주로 진료한다는 설명과 함께 치료 한약재와 소모품은 대부분 한국에서 가져오는 정부지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는 물리치료실로 이동해 한국에서 봉사 나온 KOMSTA(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 단원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몽골인 디스크 환자를 치료하는 추나요법을 관심 있게 지켜봤습니다. 또 병원 직원과 정부파견 한의사 문영식과 국제협력의 정용수 등을 격려하며 한국, 몽골 친선한방병원에 앰뷸런스를 기증하고, 몽골에서의 한방진료가 국가를 대표한 세계의료로 발돋움하기를 기원했습니다.

 

 

 

  한의사 문영식은 1959년에 태어나....

 

1977년부터 원광대학교 한의과 대학에서 한의학을 공부하였고, 한의원을 개원하여 환자를 돌보면서 지역사회에 의료봉사활동을 실시하였으며, 지금은 인도로 편입된 히말라야 라닥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면서 ‘의료와 재화는 낮은 곳으로 흘러야 그 가치가 있다.’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로 2003년부터 2007까지 몽골의 한국 몽골 친선한방병원에서 5년간 근무하였습니다.

 

한국, 몽골 친선한방병원은 1998년부터 KOMSTA가 꾸준하게 벌인 의료봉사가 계기가 되어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몽골 국빈 방문 때, 양국 우호협력 강화 방안으로 추진돼 2001년 KOICA의 무상경협사업 일환으로 한국과 몽골의 합작 투자로 건립된 몽골 소유의 전통의학병원이었습니다.  이 병원엔 KOICA의 정부파견한의사 문영식과 몽골 전통의사, 국제협력의 김중길 그리고 몽골 양방의사 4명과 간호사 4명 등 모두 17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2003년부터 근무를 시작하면서 병원경영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을 병원장 및 직원에게 설명하여 협조를 얻었고, KOICA와 유관단체에서 지원을 받아 방치된 물리치료실을 몽골 최고의 한방물리치료실로 개조했습니다. 병원에서 매일 40~60여 명 환자들을 예약 진료하였는데, 주로 관절질환, 요통, 경추부위동통, 부인과, 내과 질환 등이며 치료는 침, 약침, 추나, 테이핑 치료와 약으로는 한국의 한약을 사용했습니다.


2005년 그의 진료실을 취재한 국정홍보처의〈몽골의 슈바이처 문영식〉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박사는 몽골에서 최고의 명의로 알려져 있다. 한국·몽골 친선한방병원의 문박사의 진료실에는 매일 40명이 넘는 몽골 환자들이 몰린다. 관절·척추·불임 등을 우리의 한방의학으로 치료를 한다.

  수많은 몽골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완치된 후 다시 찾아와 문박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울란바토르 인근뿐 아니라 지방과 해외에서도 몽골인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올 정도다.

 

병원진료 중에 틈나는 대로 몽골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수백km 멀리 떨어진 바양골 아이막, 아르항가이 아이막, 수흐바타르 아이막, 홉수골 아이막, 고비알타이 아이막을 순회하여 무료 진료하였으며, 몽골전통의사에게 개인 실습 등 한의학을 교육하였습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한의사 문영식


 

 

  한의사 문영식은 한국의 의술과 인정을 전하였습니다....

 

2005년, 그가 몽골에서 소규모 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한 바 있 는 침구학교재가 제4회 대한한의학 학술장려상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했습니다.  2006년. 생방송인 몽골 이글 텔레비전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병원소개와 한국의 추석, 몽골인의 건강관리 등을 주제로 대담하는 등 몽골의 여러 방송매체와 신문 등에 한국의 한의학의 장점과 병원의 활동 상황 등에 대하여 인터뷰도 했습니다.


몽골 보건부가 주최하고 WHO(세계보건기구)가 후원한 전통의학과 공중보건(Traditional Medicine and Public Health)에서 그는〈VDT 증후군에의한 목 통증에 대한 한의학적 치료방법(Oriental Medical Therapeutic of The Neck Pain of VDT syndrome)〉이라는 주제로 발표 이후 여러 차례 의학 공식회의나 세미나에 참석하고, 발표하여 몽골 보건부와 몽골 전통의학계와 교류했습니다.

 

또한 몽골 울란바토르 징기스칸호텔에서 개최된 제7차 국제 체질의학 회의(The 7th International Congress of Constitutional
Medicine)를 한국 몽골 친선한방병원과 경희대학교 그리고 몽골국립의
과학대학교 공동으로 주최하는 등 수 차례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하여 한국 한의학과 몽골 전통의학의 연구와 교류 증진에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사상의학 교수인 이의주 교수팀과〈몽골과 한국의 전통의학에 대한 건강 증진 진단기술 교류 및 구축〉을 위한 임상시험 승인을 몽골 보건부로부터 받아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이 연구의 목적은 몽골인을 대상으로 한 얼굴 부위 사상체질 진단기를 개발하여, 최종적으로 몽골인 체질진단시스템 개발을 위한 것이었으며, 한국 한의학이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이 치료방법이 됨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많은 몽골 환자들이 한의학적 진료를 선호하고 치료 받기를 원하고 있으나, 병원에서 다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는 KOMSTA와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봉사단을 초청하여 무료진료를 실시했습니다. 2003년 KOMSTA 무료진료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진행하였고, 몽골 보건부장관의 초빙으로 이루어진 2006년 KOMSTA 무료진료는 노무현 대통령의 몽골 국빈 방문에 맞추어서 진료를 실시하여 약 3,0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이 봉사에는 대한한의사 협회장을 비롯하여 총 19명의 한의사가 참여했으며, 한국 한의학의 우수성과 홍보에 기여했습니다.

 

 

 

  문영식 수백km 떨어진 곳에서 찾아온 환자를 진료하면서 스스로 다짐합니다..

 

‘이 환자는 나를 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고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왔으나, 나는 단지 수많은 환자 중의 한명으로 본다.’  그래서 그날 이후 그는 환자를 만날 때마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좌우명 같은 이런 임상명을 적어 진료실에 붙여 놓고 항상 되새겼습니다.

 

"지금 진료하고 있는 오직 이 한 사람의 환자를 위하여 평생 동안 배우고 익혔습니다.

진실하게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내면의 영혼을 보고 따듯하게 위로하겠습니다."

 

 

 

  한의사 문영식은 5년간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렇게 말합니다...

 

"병원을 나오기 전에 다시 내 진료실과 치료실을 둘러보았다. 매일 40~60여 명씩 진료한 여러 가지 추억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어려운환자, 잘 치료되어 웃으면서 간 환자, 치료되지 않아서 실망한 환자, 먼 시골에서 어렵게 올라와서 만족스럽게 치료받고 감사의 말을 전하고간 몽골 어르신 환자들, 어린이들, 몽골 델을 입은 할머니들, 정치인, 국회의원들 그리고 여러 전통의사와 교수들, 예술인, 체육인 등 끊임없이 다시 진료하고 치료해 주고 싶은 몽골 사람들이다."

 

"나는 여기서 진료하고 있으면 내가 한국에 있는지 몽골에 있는지 구분 이 잘 가지 않았다. 단지 환자들이 다른 언어로 말할 뿐이지, 그 분위기는 너무나 한국과 같았다. 그만큼 나에게는 친근하고 감사했다."


유목민의 나라, 아시아 내륙 초원의 칭기즈칸 제국이었던 몽골은 한의사 문영식에게 2006년 몽골 보건 분야 최고공로자 훈장인 몽골보건부장관 훈장을 수여하였고, 2007년에는 대몽골제국 800주년 영예훈장과 몽골대통령이 직접 가슴에 달아주는 ‘내림달(친선)’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그의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오래도록 치하하였습니다.

 

문영식은 몽골에 파견된 최초의 한의사입니다.
그의 몽골인들에 대한 따듯한 사랑은 마치 초원에 핀 무지개처럼 오래도록 영롱할 것입니다.

 

몽골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문영식(2007.5)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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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의 슈바이처  김시찬

  베트남의 상처를 어루만지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1965년 부산항....

 

거대한 군함에 승선해 있는 맹호부대 용사들을 향해 가족과 학생 그리고 시민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뜨겁게 흔들었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들의 무운을 간절히 기원하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수업이 끝나면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 노래를 배웠습니다.

이역만리 월남 전장으로 떠나는 대한민국 국군아저씨들의 백전백승과 무사귀환을 염원하면서 불렀습니다.

미국의 군사적 논리였던지 한국의 경제적 복안이었던지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우리나라 국군 아저씨들을 위해 그냥 힘차게 불렀고, 월남에서 베트콩과 싸워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마냥 환호하였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는데도 그 노래들을 들으면 왜 그런지 가슴이 울컥합니다.
전쟁은 끝나고, 지금 베트남(Vietnam)과 한국은 사이좋은 나라입니다.
반세기 전에는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죽기 살기로 싸우러 갔지만, 지금은 의료진들이 청진기와 약품을 가지고 그곳을 찾습니다.
머나 먼 곳 베트남에서 의술을 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 김시찬....

 

그는 1957년에 태어나 1983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내과를 공부하였습니다.

1995년 베트남 하노이 세인트 폴 병원(Saint Paul Hospital)에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뽑혔고, 1996년부터 개원한 한국·베트남 우정병원 Korea Clinic(한국병원)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정부파견의사의 임무를 끝낸 지금도 한 결 같이 베트남의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학창시절부터 의료봉사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92년 의과대학 동기 10명과 함께 인도차이나에 관심을 갖자는 좋은 이웃 모임인 GNA(Good Neighbors Association)를 조직하였습니다. 의료 인력도 절박했고 의술환경도 최악이었던 캄보디아에서 3년 동안 봉사활동을 벌였습니다.

 

1996년. KOICA의 지원을 받아 세인트 폴 병원의 협력 아래 기자재와 약품을 보강하여 Korea Clinic을 출범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찾는 환자의대부분은 한국인으로 정부파견의사의 본래 취지와는 맞지 않았습니다.
국민소득이 낮은 베트남인들에게는 병원을 찾을 여력이 없어서 그는 기본 의료수가를 하향 조정하여 베트남 환자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의 의료현실은 참담하였습니다.....

 

가난도 문제였지만, 의사들의 수준이 더욱 문제였습니다.

의사 봉급이 월 50달러이므로 의욕이 현저히 떨어져 있기도 하였지만, 그들 대부분은 환자의 치료보다는 선진국의 발전된 기술만을 배우고 싶어했습니다.

갈 곳이 없는 환자들은 병원을 찾기보다는 약국에서 엉뚱하고 값싼 약을 선택해야만 하였습니다.

 

현대화된 의료 장비는 생명선이나 다름없습니다. 첨단 기능의 장비 보유가 치료의 질을 좌우합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Korea Clinic에는 한국에서는 흔한 CT(컴퓨터 단층촬영)나 MRI(자기공명영상) 한 대가 없었습니다.

그는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듯, 1년 동안 병원 운영비를 절감해 초음파와 전자내시경 기기를 구입하였습니다.

 

 

 

 

  Korea Clinic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의 성실한 의술 활동과 깨끗한 의료시설 그리고 올바른 치료약의 선택 및 질환에 대한 자세한 설명 등으로 인해서 Korea Clinic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습니다.

1999년도에는 연간 약 13,5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였고, 다양한 인도주의적 활동을 통해서 베트남 사람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는 베트남의 병든 사람을 위해 심장학 분야를 추가로 공부하였습니다.

 

그가 KOICA에 전한 활동보고서에 따르면, Korea Clinic에서의 활동은 일반진료 업무가 주종이었습니다.

그곳을 이용하는 환자 중 점차 베트남 환자들이 늘어가는 추세이며, 이는 Korea Clinic이 독자적으로 의료수가를 베트남 사람에 한하여 받지 않거나 병원에서 결정한 수가보다 낮게 책정하여 시행하였기 때문이고, 또 여기에 다녀갔던 사람들의 소개로 오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한국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는 늘 이런 생각으로 베트남을 도우려고 했습니다.
의사 김시찬은 이제는 KOICA 정부파견의사가 아니라, 베트남을 사랑하는 의사로 거듭났습니다.

 

 

 

  인터넷에서 '의사 김시찬'하면 이런 기사가 뜹니다....

 

《KBS WORLD》와 《월간 안과정보》의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2005년 4월. 20여 년 전 김시찬이 진정한 의사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으면서부터 추진한 한국병원의 기공식이 있었다.

하노이 외곽 릉 쩌우마을이다. 건축은 약 4개월 정도 소요되고, 2층 건물로 독립적인 운영체제를 갖추고 있다.
2명의 베트남 의사 등 모두 14명으로 진료를 시작할 한국병원은 지역사회 예방의학에도 힘을 기울일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은 하노이 시내에서 북쪽으로 35km 떨어진 곳으로 농촌 지역이며 또 가장 가난한 마을이다.

주로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클리닉이고 한국의 NGO들이 도울 예정이다.

의사 김시찬의 숨은 노력은 베트남 정부의 호응으로 20년 장기계약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의료 인프라가 워낙 부족해 각종 의료 기자재나 기타 시설에 대한 준비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때마침 뜻있는 동포들이 정성을 담아 각종 장비를 보내와 기초적인 진료에는 차질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세운 목표가 어떻게 하면 이 사람 들을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선천성 심장병을 앓는 아이 2명을 한국으로 데리고 와서 수술을 도운 적이 있다.

 

대한안과의사회는 2010년 12월. 베트남 하노이의 Hanoi Red Cross Sunny Clinic을 방문하였는데,  의사 김시찬이 안과진료를 할 의사를 파견해달라는 협력요청에 따라 의료봉사활동 차원에서 자매결연 후 안과 부문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대한안과의사회에서는 우선 안과용 세극과 수술 현미경을 지원, 안과를 개설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원봉사를 원하는 안과 의사를 주기적으로 파견하여 연속적인 안과 진료가 이루어지도록 할 예정이다.

 

그밖에도 2010년, 무료개안수술로 유명한 실로암 안과병원의 베트남 해외진료 시에는 사전 준비 단계부터 도왔으며, 수술 진행시 통역 등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의사 김시찬은 지금도 베트남에서 의료선교 및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의사 김시찬은 지금도 베트남에서 의료선교 및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의사는 돈이라는 통념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가끔 한국으로 날아와서는 어떻게 하면 베트남을 보다 잘 도울까 하는 생각으로 노심초사입니다.

 

가난해서 병을 얻고, 그 병을 끝내 떨쳐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도 많지만,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과 정신불안증세로 살
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박애주의에서 우러나온 사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의사입니다.

 

 

soc con clinic에 기자재 및 약품을 전달하는 의사 김시찬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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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돌아가니 반가운 안내장이 기다렸다. 고향 마을 고모님댁 조카가 시집을 가는데, 고향에서 전통혼례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릴 적 코흘리개 때나 보았던 전통혼례를 한다니 너무 반갑고 기대가 됐다. 

  주말에 아이들과 아내 온가족이 고향으로 내달렸다.

 

 

 

한낮, 마당에 차일이 쳐지고, 여기저기서 모여든 구경꾼들과 혼주 친인척 들은 잔칫집 마당에서 분주하게 바지런을 떨었다.

옛날에는 흔한 일이었지만 요즘은 보기 드문 일, 즉 신랑 신부가 한 동네에서 자란 동무라고 했다.

그러니 보내는 이도 서운함도 없어보였다. 노인들은 “잘 키워 멀리 안보내는 것도 고마운 일”이라며 기뻐들 했다.

 

사모관대 신랑과 연지곤지 신부가 나서자, 마당을 채우고도 모자라 축하객들은 까맣게 주변에 진을 치고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전통혼례에서 신랑은 턱시도가 아닌 사모관대를 입고, 신부는 드레스가 아닌 황원삼을 입기 때문에 도시의 예식장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순서로 행해졌다.


처음 하는 결혼식, 엉거주춤 서투른 신랑을 두고 신랑 친구들은 “첨엔 다 그래. 다음엔 잘하겠지.”라며 키득거렸다.

 

처음 술잔으로 마시는 술은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는 것을 의미하며, 표주박 잔으로 마시는 술은 부부의 화합을 의미한다.

성스럽고 기쁜 혼례를 하늘에 고하여 이 뜻을 만천하에 전하여 신랑, 신부의 앞날을 축원하는 고천문 낭독, 그리고 양가부모님과 축하객 여러분들께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이윽고 다산을 기원하며 하늘 높이 장닭과 암탉을 날린다.


새내기 부부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신명나는 풍물소리에 맞춰 힘찬 성혼 행진을 하자 축하객들은 초례상 위에 있던 팥과 쌀을 한줌씩 나누어 쥐고 있다가 성혼 행진을 할 때 신랑과 신부를 향해 “행복하게 잘 살아라” 라는 덕담과 함께 던진다.

 

드디어 신부를 태운 가마가 대문을 나서자 대문을 막아서고 있던 축하객들은 약속처럼 비켜서 길을 열었다.

 

2011년에 치루는 전통혼례를 보노라니 그 옛날 코흘리개 시절에 보았던 전통혼례의 추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옛날 혼인식은 이보다 더 왁자지껄하며 소란했고 인정미, 사람 사는 맛이 넘쳤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들의 이야기꽃과 신랑신부 친구들의 흥분어린 웅성댐, 무엇보다 어린 아이들의 수선거림이 정겨웠다.

 

잠시 옛 추억을 떠올려 보는 사이 벌써 어디선가 “가마 앞을 막으면 징 맞고 동티 나 오래 못산다”고 외치는 어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미 몇 십 년 전에도 들었던 말 이었다.
젊은 교꾼들은 “목이 말라 못가겠다”는 너스레로 술을 청하며 잔칫날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다.

 

이제는 정말 보기 힘든 전통혼례를 뒤로 하고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고향은 지금 그저 순수하게 시끄러웠던 흥분되고 북적거렸던 맛이 없어졌고,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모두 다 도시로 나가서 없기 때문이다.
얼굴 들이밀기도 부담스러운 요즘 결혼식장 보다는 차라리 도떼기시장 같은 옛날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결혼식장에 갈 때마다 들어서 못내 아쉽고 서운하기만 하다.

고향의 전통 혼례를 이제 언제 또 볼 수나 있으려나?

 

 

윤현숙(서울시 동대문구 전농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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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모리타니아의 슈바이처  최상일

그러나 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10월이 막바지에 들면서 누아디부의 기온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사하라 서쪽 끝자락에도 계절이 바뀌고 한해도 막바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나라 밖에서의 일을 마무리하면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봅니다.

 

 

 

 

   처음 아프리카 땅에 발을 들였을 때는 벌써 13년 전의 일입니다.

 

종족분쟁이 한창이던 르완다 난민촌에서 온통 검은 얼굴 검은 몸에 유난히 흰 이빨의 낯설던 아프리카인들의 첫 인상이 기억납니다. 먹구름이 드리우고 비를 뿌리던 아름다운 키부호수 위로 하혈하던 산모를 모터보트에 태우고 절박한 심정으로 키를 잡고 후송하던 일의 기억도 선명합니다.

 

캄보디아에서의 2년은 주로 말라리아와 지뢰 그리고 험한 도로 사정에 얽힌 경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증상이 시작된 지 2~3일 만에 혼수상태에 빠져버리는 열대열 말라리아의 무서움과 산간마을 곳곳에서 수시로 불거져 나오는 지뢰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주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직도 크메르루즈 잔당의 영향 아래 있던 북부 산간지대를 유엔 안전 담당관의 인솔 하에 답사하던 일과 우기에 마을로 난 길이 뻘밭으로 변해버려 소달구지를 타고 진료소로 향하던 일의 기억도 새롭습니다.

 

사막의 나라 모리타니아는 참 메마르고 혹독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심성도 기후와 어느 정도 닮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특히 정착초기에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수술이 필요했던 응급환자들과 딴청을 피우는 팀원들 사이에서 느꼈던 당황스러움을 기억합니다.

양철지붕의 열기, 파리 떼의 성가심과 함께 빈민진료실 문을 기웃거리는 염소와 벽에 난 틈새로 들락거리던 고양이의 정경도 떠오릅니다. 조가비처럼 엎드린 누아디부 잿빛 시가지 사이로 석양이 지고 있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계속되어오던 한국정부의 제3세계 의사파견프로그램이 종료되기로 결정되면서 이제 귀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구촌 주민들을 위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동기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는 이곳에서의 활동에 큰 힘이 되어왔으며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보름 쯤 후면 그간 사용하던 책이며 세간을 컨테이너로 부칠 예정이며, 귀국날짜는 12월 4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서신이 모리타니아에서의 마지막 통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간 부족함이 많은 활동에 성원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건강한 활동 그리고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며, 한국에 도착하면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누아디부에서 최상일......

 

 

  2007년 11월 18일

 

모리타니아(Mauritania) 누아디부에서 의사 최상일은 자신의 활동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지원하였던 한국의 카페회원들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전합니다.


얼마나 고되고 얼마나 험하고 얼마나 혹독한 노정이었을까요.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의 편지는 자신의 험했던 역경을 담담히 회고하면서 서정성을 갖춘 낭만적인 문학미가 물씬 배어 있습니다.

1955년에 태어나 고교 시절부터 제3세계에 가서 봉사하는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는 카이스트 전기과에 진학했고,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덕연구단지에서 전자공학을 연구하면서도 꿈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부친의 병환을 계기로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30살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처자가 있는 가장의 몸으로 의대로 학사편입해서 39살에 부산 고신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부산의 외과병원에서 7년을 근무하였지만 한시도 자신의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침내 그는 자원봉사 자격으로 1994년 가족을 남겨둔 채 전쟁이 한창이던 우간다로 향했습니다.

20만 명이 수용된 난민캠프에서 2개월간 구호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캄보디아에서 2년간 유엔 자원봉사 의료단원으로 일했습니다.
킬링필드로 유명한 캄보디아, 그 중에서도 태국과의 국경지대인 북부 지역은 아직도 지뢰가 살아있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얻지 못한 극빈층이지뢰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말라리아 위험 지역일 뿐만 아니라 도로 사정도 워낙 좋지 않아 의료 사각지대였습니다.

유엔에서 추천한 비교적 안전한 지역 대신 스스로 이 지역을 택했습니다. 이유는 너무나 명료했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도 의사가 필요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왕복 4시간이 넘는 비포장도로는 소형트럭으로, 진흙탕은 소달구지나 오토바이로 약품 상자를 끌고 다니며 야전병원 의사처럼
환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2000년에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모리타니아 누악쇼트 국립병원으로 부임했습니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모리타니아, 의과대학이 없는 인구 약 300만의 사막국가는 전국에 외과의사가 30여 명에 불과하여 외과 질환으로 인한 수술적 치료가 어려웠습니다.

 

현지 외과의사가 꺼리던 대수술을 솔선수범함으로써 직접진료를 통한 의료기술 전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한편, 외과전공의를 교육하여 전문의를 배출하였습니다.

 

그가 KOICA에 보고한 2003년 1/4분기 활동내용을 간추리면, 전신 혹은 척추마취 하 수술을 113건, 국소마취 하 수술을 29건 시행하였습니다. 외래진료는 512명을 진료하였으며, 병실 대 회진은 12차례가 있었고, 야간 및 휴일 당직근무 총 22일이었습니다.
고군분투의 의료 활동이었습니다.

2005년 9월부터는 의료 환경이 끔찍하고, 외과의사도 절대 부족한 수도에서 500km 떨어진 누아디부 국립병원을 자원하였습니다.

진료 외에도 빈민지역민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무의촌 진료시술을 실시하는 등 ‘인간생활의 기본적 욕구’라는 뜻의 인도적인 BHN(Basic Human Needs)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였습니다.

 

 

  낡은 수술대 하나에 플라스틱 테이블 두 개가 있다.

 

천장의 떨어져 나간 나무판자 사이로 햇빛을 타고 들어오는 먼지바람으로 실내는 먼지투성이다.
“제가 보따리 장사입니다.”
최박사는 큰 가방 두 개에서 손 씻을 물이 담긴 10리터짜리 플라스틱 물통과 물주전자를 먼저 꺼냈다.

 

그리고 도시락 크기의 알루미늄 상자에 든 의료기구들과 진료기록을 위한 노트, 휴지 뭉치와 밴드를 꺼냈다.
파리 떼와 모래가 날리는 진료실. 수술대에 쌓인 먼지를 손수 닦아 내고 첫 환자를 맞았다.

야전병원보다 더 열악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0대로 보이는 한 남자의 38년간 지녀온 복부지방 혹 제거 수술이 시작됐다.
마취주사, 메스 선택, 약품 찾기, 수술 봉합, 소독…… 붕대와 밴드, 자르고 붙이기까지 모든 작업을 최박사 혼자서 했다.
수술 중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쳐낼 수 없었다.

 

“손이 하나만 더 있어도…….”
최박사는 “큰 수술 때는 집사람이 와서 도와준다.”고도 했다. 대부분의 의료장비와 약품은 KOICA에서 지원받지만, 간단한 소모품들은 자비로 구입했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들이닥친 두 번째 환자의 머리에 난 혹을 제거하고, 세 번째 환자의 이마에 난 혹을 제거했다.

세 환자를 수술하고 다른환자를 진료했다.

 

행장 스님의 《아프리카 대륙 자전거 종단기》에 실린 누악쇼트 서남쪽 ‘시지엠’ 지역의 빈민촌 진료소 장면을 그린〈사하라 ‘모래 늪’에서 만난 아름다운 의사 최상일〉의 한 장면입니다.

스님은 의사 최상일을 전쟁지역과 오지를 누비고 다니는 야전병원 체질이라 말합니다.

 

의사 최상일은 어떤 사람일까요.  독한 사람일까. 약한 사람일까요.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포연이 자욱한 전장이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두메든 가리지 않는 진정한 의사였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그곳에서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가 있었기에 그들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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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튀니지의 슈바이처  장기순

봉사는 내 생애의 가장 큰 보람

 

 

 

 

 

 

 

  한국이 오히려 외국같다

 

이 말은 의사 장기순이 1997년 유석창박사가 제정한 상허대상을 수상하기 위해 20년 만에 세 번째로 귀국하면서 고국을 낯설어 하며 한 이야기입니다.

1934년에 태어난 그는 1960년 전남대학교 의대를 졸업하였고, 광주적십자병원을 거쳐 충남 금산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했으며, 10여 년 동안 재산도 많이 모았습니다.


그는 1977년 의학전문지에 실린 아프리카지역 정부파견의사 모집광고를 보고 새 삶을 계획했습니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조국을 위해서는 이 만큼 일했으면 됐다. 이제 정말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일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처음엔 병원도 잘되고 아이들도 아직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 반대가 심했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오자며 가족을 설득했습니다.  계약기간인 2년만 근무하다 오기로 약속하였습니다.


1977년 겨울. 그는 부인과 세 자녀를 데리고 생면부지의 땅 아프리카 튀니지(Tunisie)로 떠났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남은 생애를 아프리카 환자들과 함께 지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에 인접한 튀니지

 

 

그곳에는 풍토병이 없고 의료수준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는 튀니지의 스팍스(Sfax) 대학병원 산부인과 의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곧 이동시술반 차량을 다섯 팀으로 꾸렸습니다. 이후 시골 구석구석을 돌며 하루 최고 20건씩 무료 불임시술을 했습니다.

그 후 10년간 총 7,000건의 복강경시술을 한 결과 가구당 7명의 자녀수가 평균 3명으로 줄어드는 성과를 냈습니다.

튀니지 국민들과 정부의 신임을 얻어 부임 6년째 되던 해 병원장에 취임했습니다.

 

아내가 이제 그만 고국으로 돌아가자고 몇 번이나 졸랐지만, 한 참 진행 중이던 가족계획운동을 중도에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1986년까지 10년 동안 고국에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일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그가 보고한 1986년 4/4분기 활동 결과입니다.

  산부인과 분야 질환 치료(치료인원 1,386명).
  난소낭종 제거술 1건, 자궁경관 낭종제거술 5건, 자궁외 임신수술 1건.

  자궁하수증 복원수술 1건, 계류 유산 제거술 31건, 유방농양 절제술 5건  

 
 
의약품 및 의료장비의 부족으로 의료 활동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580건의 복부소절개술에 의한 여성 불임시술, 9,000여건의 복강경을 통한 여성 난관 불임시술, 6만 천여 건의 산부인과 질환 진료수술, 10만 2천의 산부인과 환자 진료를 시행하였습니다.

정부파견의사 계약 기간도 끝났습니다.
그는 튀니지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한국에 있는 의사 월급의 50% 수준밖에 안됐지만, 그때만큼 보람 있고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더 험한 곳, 모리타니아(Mauritania)로 갔습니다.

 

사하라사막 서부의 신생국 모리타니아는 튀니지와는 달리 가난한 국가인데다, 일부다처제의 영향으로 가구당 8~15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처음 그가 모리타니아 수도에 있는 누악쇼트 국립병원에 부임했을 때는 의사들도 거의 없었고 의료장비도 청진기에 간단한 X-Ray 장비가 고작이었습니다.  국민들도 10살만 되면 결혼하기 시작해 보통 6~7명의 자녀를낳았습니다.

 

그는 장관을 찾아갔습니다.
가족계획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산아 제한 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더니, 이슬람국가로서의 풍습과 전통 운운하며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시술기구를 이용해 시범을 보여주며 설득해 마침내 정부의 지원을 받아냈습니다.
 
현지 원주민들은 그를 ‘독토르(Doctor) 장’이라 부르며 따랐고, 정부도 보건부 자문관으로 위촉했습니다.

 

낙태가 금지되었기에 아버지 없는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할 때,
의사 장기순은 자신의 성을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땅 모리타이니아에는 한국의 ‘장씨’ 성을 가진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의사 장기순은 모리타니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 선원 2,000여 명을 공휴
일과 주말을 이용해 10년간 무료 진료했습니다.
그곳에서 13년의 세월이었습니다.

 

23년간, 그의 튀니지와 모리타니아에서 인술활동은 고귀한 희생이었지
만,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어느 포털사이트 검색란에 '의사 장기순'을 쳐 보았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 중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 좀 찾아주세요.’라는 어느 중학생의 질문에 반갑게도 의사 장기순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1999년 정부는 의사 장기순에게 수교훈장 창의장을 수여했습니다.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다시 아프리카 모리타니아로 돌아가야 합니다.
후임의사가 갑자기 오지 않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은 아주 행복하다며 빈자리를 지키러 다시 간다고 하였습니다.

 

의사 장기순은 1988년 재외국민포상 대통령상, 1989년 대통령 표창,
1996년 적십자사 박애장 은장, 1997년 상허대상, 1999년 수교훈장 창의장을 수상하였지만, 요즘 사회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 중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에 더 깊은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장기순박사가 1989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고 있는 모습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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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카메룬의 슈바이처  장계만

  민간외교전선 이상없다

 

 

 

 

 

 

 

 

자식들이 아빠인지 몰라볼 만큼 새카맣게 탄 얼굴로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의사가 있었습니다.
의사 장계만.


 

그는 1945년에 출생하여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림대학교 한강성심병원에서 일반외과를 전공하였으며, 육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당시 외무부에 근무하던 친구의 추천으로 1977년 정부파견의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고국에 남겨둔 채 인술을 펴고자

아내와 함께 동경하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두툼한 겨울 잠바를 걸치고 파리를 경유하여 카메룬(Cameroon)에 도착했지만, 국제공항은 입국대가 턱없이 높아서 짐을 밟고 올라서서 입국 수속을 마쳐야 할 정도로 허름한 시외버스 정거장과도 같았습니다.

 

처량하고 쓸쓸하였으나 내심 마음을다잡고 한국대사관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미터기에 표시된 대로 요금을 건네는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무뚝뚝하던 택시운전사가 갑자기 긴장하더니 짐도 들어주고 사근사근 대하는 등 마치 VIP를 모시는 자세로 변한 것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프랑스 프랑과 카메룬 쎄파프랑(CFA)을 혼동하여 택시비의 100배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택시운전사가 내려 준 곳이 태극기가 펄럭이는 한국대사관이 아니라 인공기가 휘날리는 북한대사관이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비동맹권 아프리카 국가를 대상으로 한 외교 강화 추진 차원에서 1972년에 카메룬과 북한과의 수교가 이뤄졌습니다. 대한민국과 카메룬과는 1969년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여 왔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서로의 입장을 견지하는 등 양국은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택시는 다시 달렸습니다.
태극기를 보고 그제서야 그는 안심했습니다.
대사관으로 들어가 그의 입국을 당당히 알렸고, 다음날 오기로 했는데 벌써 도착하였다며 대사관 직원들은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카메룬 바멘다병원(Bamenda Provincial Hospital)과

수도 야운데보건소에서 2년간 외과과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한때 나이지리아 땅인 바멘다는 수도 야운데에서 서울~ 부산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영국 식민지로 있었기에 그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현지인들은 소위 카메룬과 서부아프리카에서 널리 쓰이는 크레올어(Creole Language), 또는 ‘비진잉글리쉬’라고도 하는 현지영어를 사용하는 데 처음에는 어색하였지만 잘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바멘다는 해발 2,000m로 항상 가을 같이 서늘하여 말라리아 환자가 없었습니다.

일반외과 과장으로 환자를 진료하는데, 특히 탈장과 화상환자가 많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였고, 수술은 책을 보며 연습하였습니다. 때 전공 중 그만둔 마취과 의술을 현지에 전수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탈장환자 수술을 하였는데 성공적이었습니다.

처음 수술할 때에 흑인은 피부가 까만데 속은 어떤 색깔일까 궁금하였지만 우리와 같았으며 피부 색깔만 달랐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너무 태연히 받아들였습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하여 환자는 의사를 한 번만 보고 죽어도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만큼 의사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고, 의사 장계만에 대한 존경은 하늘같았습니다.

 

카메룬 부통령은 바멘다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의사였기에 서로 대화가 통하였습니다.

언젠가 바멘다의 대 부족의 추장 동생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정성스런 치료로 완쾌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대문에서 현관 그리고 거실까지 빨간 카펫이 깔려 있어 당황하였습니다.

그때 추장은 고맙다는 인사를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왔고, 고마움의 표시로 추장의 딸인 공주까지 부인으로 맞이하라 하니, 옆에 있던 그의 부인이 황당하여 ‘You are bad!(나빠요!)’라고 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추장의 공식행사장에서는 모두가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였지만, 그의 부인은 한국식으로 허리만 굽히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만약 추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사람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닌 그곳에서 말입니다.

순간 의사 장계만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추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부인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부인에게는 추장과의 까다로운 격식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부통령과는 언제라도 통화가 가능하였고, 추장은 그들 부부를 은근히 떠받들었습니다.

민간 외교전선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곳의 전통의학이 독특하여 골절환자는 약초를 바르면 금세 나았습니다.

한번은 그의 친구인 미국보험회사 지사장이 교통사고로 뼈가 부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치료도 제대로 못해 주어 얼마 후 미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방문하였더니 멀쩡하였습니다.

그는 사무실에서 깁스도 안한 채로 회사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서 물어보니 어떤 풀즙을 발랐더니 통증 없이 아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경우를 그는 여러 차례목격하였습니다.

 

카메룬 사람들은 참 유순합니다.

그러나 한번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렸습니다. 근무하는 2년 동안 싸움이나 실랑이하는 것을 거의 못 보았는데, 한번 싸웠다 하면 도끼를 휘둘렀습니다. 사망 아니면 대형 사고였습니다.


카메룬은 인구 부족으로 인한 출산장려 정책이 활발하였습니다. 이슬람 사회가 아닌데도 일부다처제였습니다. 그런 정책 때문인지 심지어는 중,고등학생들까지 불타는 사랑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학생이 임신을 하면 경사였습니다. 취직을 보장받고 정부의 보조가 뒤따랐습니다.

때문에 카메룬의 산부인과 의사는 밤낮 없이 바빴습니다.


카메룬 사람들은 동양인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시절 카메룬에도 이소룡의 영화가 인기여서 동양인은 모두 장풍을 하는 줄 알고 겁냈습니다.

반갑다고 손을 잡으면 도망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1979년 1월 귀국하였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즐거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를 카메룬 사람들은 아쉬워하였습니다.

 

카메룬의 바멘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웃나라 가봉 랑바레네에서 생명외경의 신념으로 거룩한 인술을 펼쳤던 슈바이처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원주민들은 카메룬에도 슈바이처와 같은 의사가 있는데, 그가 바로 한국에서 온 슈바이처라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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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에티오피아의 슈바이처  유민철

에티오피아의 아픔을 보듬다

 

 

 

 

 

 

 


아픔과 배고픔 그리고 슬픔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에티오피아(Ethiopia).


한때 솔로몬의 후손이라 자처하며 아프리카의 자존심이었던 에티오피아는 지금은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였고, 오늘도 뜨거운 태양 아래 기아와 질병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에는 아픔을 같이하고 사랑을 나누었던 성형외과 의사 유민철이 있었습니다.


그는 1941년에 태어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련의를 마쳤습니다.

1975년, 그는 아프리카 파견의사 모집에 지원했습니다.

인술에 목마른 곳에서 봉사하며 살고 싶었던 평소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가 갑자기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부모는 반대하였습니다.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아들의 뜻을 꺾을 수 없게 된 부모는 몇 년 만 있다가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부인과 다섯 살 난 딸, 세 살 난 아들이 동행하였습니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블랙 라이온(Black Lion) 국립의료원으로 파견되어 30년이 지난 2005년 정년퇴임하였습니다.

 

 

학생 기술 회진을 하고 있는 의사 유민철

 


그가 도착한 1975년은 하일레 셀라시에 왕정이 군부쿠데타로 무너진 직후였습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운 나라였지만, 경제는 끝없이 추락만 거듭하였습니다.

세계는 에티오피아를 도왔지만, 쿠데타가 터지고 나서는 에티오피아를 외면하였습니다.


공산화된 그곳의 현실은 혹독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몇 달 일하지도 못하고 쫓겨났으나 현지 의사의 도움으로 의료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1980년대까지 잇따라 내란과 분쟁을 겪으며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여 병원은 전상자들로 넘쳤습니다. 절단, 총알제거 수술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습니다.

 

1991년 공산 정권이 무너질 때는 집 근처까지 총탄이 날아왔습니다.

사관에서는 철수를 종용했지만, 그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평화는 찾아왔지만 병원은 또 다른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병원 내과환자 중 60%가 AIDS 환자인데다 낙후된 의료장비와 시설은 그를 항상 감염의 위험으로 내몰았습니다.

에티오피아는 AIDS환자가 3백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아디스아바바는 더욱 심해서 6명 중 1명이 감염자입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넘쳐나 AIDS 검사도 없이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화상을 입은 소말리아 난민 환자를 수술할 때였습니다.

환자에게 가벼운 마취를 한 뒤 수술에 들어갔는데, 환자가 그의 팔을 치는 바람에 피 묻은 수술 칼에 손을 베이고 말았습니다. 환자가 AIDS에 걸렸다면 그도 감염될 우려가 큰 것입니다.

환자의 피를 채취해 AIDS 검사를 요청했으나 하루 뒤 결과가 나오기까지 착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환자는 AIDS 감염자가 아니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선 싸구려 부탄가스를 쓰는 가정이 많아 가스폭발로 인한 화상을 입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구순구개열인 언청이가 흔할 뿐만 아니라 턱없이 부족한 의료시설로 종양이 생겨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말기에 이르러서야 의사를 찾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유일한 성형외과 전문의인 의사 유민철은 일상처럼 종양과 화상 그리고 언청이 환자의 수술을 맡았습니다.

 

주 6회 언청이 수술을 하였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끝이 없었습니다.

입천장이 바깥으로 드러난 환자, 얼굴이 기형인 환자를 수술했습니다.

수술 뒤 좋아하는 환자들을 볼 때면 그는 뿌듯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병원을 찾는 환자는 약값은 물론 수술 장갑이나 반창고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형편이었고, 이것마저 살 수 없는 환자도 흔하였습니다.

입원환자는 그나마 치료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일반 환자들이 여기 오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빈 병실이 나오기만 기다리다 죽어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가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 보고한 1996년 1/4분기 활동내용입니다.
 

분기별 600여 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거나 수술함.

선천성 질환 및 총상환자, 화상환자 등을 주로 치료함.

 

의료 활동상의 애로사항은 마취약, 고가 항생제 등의 부족과 위생 재료의 부족

그리고 AIDS 환자의 증가는 큰 문제점임.

 

 

장갑이나 반창고를 살 수 없는 극빈자에게 그는 장갑 등을 주었습니다.
연신 고마워하며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는 이들.

어떤 이는 나중에 찾아와 지푸라기가 묻은 달걀 10여 개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순박한 표정에서 그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맛보곤 했습니다.


아디스아바바 국립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레지던트 트레이닝을 맡아 200명이 넘는 외과 의사를 배출시켰고, 난민촌 방문을 통해 다수의 빈곤자 들에게 무료 의료 봉사활동을 실시하였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들과 고아원에 무료 진료와 지속적인 지원을 하였고, 의술만큼이나 신앙심도 깊었던 그는 노숙 아동, 전쟁 미망인을 지원하는 사회봉사 활동에도 헌신적이어서 ‘걸인의 아버지’라 불렸습니다.

 

에티오피아는 그에게 있어 삶 전체였습니다.

 

50년 전의 아시아와 비슷한 수준인 아프리카 지역은

50년 후에는 분명 우리 후손의 삶의 터요, 외교와 무역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를 돕는 일은 50년 후 세계무대의 주역이 될 우리 후손을 위한

외교의 시작인만큼 더 많은 이들이 앞장서 주길 바랍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에티오피아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정부와 민간차원의 인도적 지원을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1997년 그의 슈바이처 같은 감동적인 삶은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실렸습니다.

 

1982년 정부에서는 의사 유민철에게 수교훈장 숙정장을 수여하였고, 1994년에는 KOICA 총재 표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제7회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30년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그 오랜 세월을 에티오피아인으로 살았습니다.

30년 세월을 뒤로 하면서 어느 기자와 나눈 대화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제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를 떠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조선일보 97년 6월 23일자 기사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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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간다의 슈바이처  유덕종

받은사랑이 더 많기에, 사랑할 수 있었다

 

 

 

 

 

 

 

대학 입학 땐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인생을 어떻게 살더 라도 의미가 없어 보였죠.

어차피 의사가 될 거라면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졸업하기 전에 결심을 했죠.

아프리카로 가야겠다고, 가서 나보다 힘든 사람을 도와야겠다고요.

 

2010년 잠시 귀국한 유덕종이 모교인 경북대학교 웹진에 전한 서면 인터뷰 내용입니다.
유덕종은 1959년 출생하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아프리카 우간다(Uganda)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린 두 딸과 임신한 아내가 눈에 밟혔지만, 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캄팔라 물라고(Mulago) 국립병원에서 16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곳에서 머물며 캄팔라 마케레레(Makerere)대학에서 의학을 강의하며 진료도 계속하였습니다.

 

강의를 마친후 의과 대학생들과 함께

 

캄팔라 외곽에 의사가 처방한 약이 환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기초가 제대로 서 있는 병원을 세우려고 동분서주하는 의사 유덕종을 경북대학교 동문들은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습니다.

 

서른 셋, 의사로서의 앞날이 창창한 그가 처음 우간다 땅을 밟았다.

리고 그의 나이 쉰하나. 젊음도, 열정도, 꿈도 모두 그 땅에 바쳤다.

18년 동안 그를 붙든 것은 배고픔과 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그곳 사람들이었다.

 

 우간다의 열악한 의료상황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고 병원건립을 준비한 것만도 9년째.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이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는 폐결핵과 위암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은 뭔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하는 생각을 자주하였고, 의대에 들어가 크리스천이 되면서 아프리카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부터 아프리카에서 사는 문제를 상의했고, 동의를 받아 결혼했습니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그에겐 보람이고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들이 아플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모든 걸 다 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위로가 된다면 족하였다.

 

1992년 정부파견의사로 우간다에 도착한 그가 KOICA에 보낸 편지 일부분입니다.

 

저는 이곳에 도착하여 수도 캄팔라에 있는 물라고병원(Mulago Hospital)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병원인 물라고 병원의 시설이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곳의 재정상태가 엉망이라 기구와 약품이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입니다.

비싼 약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약도 없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환자를 지켜봐야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며칠 전 20세 밖에 되지 않은 환자가 당뇨혼수로 죽는 것을 보고 화가 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환자가 한국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걸어서 퇴원을 할 환자인데

속수무책으로 죽는 것을 보고 한동안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인구의 60%가 의사 한 번 만나 본 적이 없이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바짝 마른 결핵환자가 그를 보고 “Doctor, I am hungry.(선생님, 배고파요.)”라고 할 정도로, 환자들이 굶주려 죽어나가는 그곳의 병원은 차라리 난민촌이 었습니다.

 모기장만 있어도 말라리아 발병률을 60%가량 줄일 수 있지만, 모기장 구입도 큰 부담인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덕종은 한국의 앞선 의료기술과 의료기자재의 활용방법 등을 익혀 그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봉사에 나서리라 다짐하였습니다.


 1993년 7월.
 의사 유덕종은 어느 환자의 조직검사를 하다가 주사 바늘에 손이 찔렸습니다.

 끼고 있던 장갑에 피가 흥건히 고일 정도로 깊이 찔렸습니다.

 문제는 그가 AIDS환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치료약이 없는 천형…….

 

“순간 손가락을 잘라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그 상황에서

AIDS에 걸릴 확률이 3백분의 1이기 때문에 거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죠.”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까지 기다린 5개월간 그는 정상인이 아니었습니다.

 부부관계도 멀리하는 등 매사에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것을 깨달은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한 달 간은 정말 우울했습니다.

 

그러나 감염됐다 해도 5~6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동안 더 가깝게 AIDS환자를 치료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1994년 봄.
 이번에는 폐결핵이었습니다. AIDS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아프리카였기에 결코 간단한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큰딸 주은이가 뇌염에 걸렸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뇌염이 없지만, 일단 걸리면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명색이 의사라는 애비가 한다는 게 링거주사를 놓는 것뿐이었어요.
AIDS 때도, 폐결핵 때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는데, 막상 딸이 뇌염에 걸리자

‘왜 이곳에 왔나’하는 후회뿐이었습니다. 집 사람은 그저 울고 만 있었지요.”

1997년 8월 24일자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AIDS에 감염됐다 해도 몇 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동안 더 가깝게 AIDS환자를 치료할 수 있겠구나 하던 유덕종이였습니다.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던 환자가 완치된 후 퇴원하면서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입원환자의 80%가 AIDS 환자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AIDS 환자가 줄고 있는 나라가 우간다라며,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 아프리카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국에서 자리 잡은 대학 동기생과 비교해 본적이 없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부동산도 집도 없다. 하지만 그런 게 다가 아니다.

사람의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경제가 발전하면서 삶은 윤택해졌는지 모르지만 삶의 질은 퇴보한다는 인상이다.

 

내 눈길에 와 닿는 아프리카의 하늘은 아름답고, 힘과 용기를준다.

당신은 한국의 하늘을 가끔씩이라도 올려 보는가?

행복지수로 보자면 한국보다 아프리카 나라들이 더 높을지 모른다. 나는 행복하다.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행복한 의사 유덕종입니다.

 

우간다 캄팔라에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진료하는 유덕종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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