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는 2007년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인정 받았을 만큼 자연 그대로의 옛 모습을 간직한 섬이다.
   ‘청산(靑山)’이란 이름처럼 하늘도, 바다도, 들판도 푸른 이 섬의 속살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무조건 걷는 것

    최고의 방법이다.

 

 

 

 

 


사실 1993년 영화‘서편제’를 통해 청산도의 황톳길과 돌담이 알려지면서 그 길을 걷고 싶어 몸살이 난 사람이 많았다.  언젠가 한번은 가보리라, 마음 한구석에 청산도를 품었던 사람들이 그 로망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청산도 걷기는 요즘 걷기축제가 열릴 만큼 최고의 걷기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더구나 작년 봄 이 섬에는 총 20.8㎞의 슬로길이 열렸다. 청산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따라 3개 코스로 구분되는
데, 굳이 슬로길이라 부르지 않아도 걷다 보면 눈길 돌릴 곳이 많아 저절로 천천히 걷게 된다.

 

 

 섬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슬로길 핵심 코스는 1코스다.

 완도에서 40여 분 배를 타고 오는 길, 여객선 안에서 파는 맛있는 라면을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나면 어느새 청산도가 저 앞에 나타난다. 야트막한 산세에 유채와 청보리가 어우러지고, 산비탈에 따라 펼쳐진 다랭이논은 멀리서도 한 폭의 유채화를 보는 듯 선명하고 푸근하게 다가온다.

 

 ‘靑山島’라 쓰여있는 기념탑이 서있는 도청항에서 내려 슬로길 푯말을 따라가면 첫번째 만나는 소박한 마을이 도락리다.

 이 마을의 골목 담벼락에는 이곳 주민들의 옛날 사진들이 걸려 있어 어느새 섬 마을의 역사와 정겨운 인심을 느낄 수 있다. 파란 벽이 인상적인 어느 집 외양간에서는 중소 한 마리가 인사를 건내는 듯 연신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세우고 있다.

 

 

 


 도락리를 벗어나면 멋진 해안을 따라 해송이 일렬로 소나무길이 이어지고 슬로길 이정표는 왼쪽 언덕 길로 향해 있다. 유채꽃과 청보리, 마늘밭이 어우러진 색의 향연에 가파른 언덕길이지만 조금도 힘든 줄 모른다.

 

 언덕에 올라서면 바로 그 유명한 서편제 길이다.

 영화 속 유봉 일가가 진도아리랑 가락에 맞춰 어깨춤을 췄던 그 길이 아직 그대로다. 영화 속 장면이 생각나 덩실덩실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지만 서편제 촬영 이후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길도 적지 않은 곡절을 겪었다.

 처음엔 흙길이었는데 장마가 되면 질퍽해지자 주민들이 민원을 넣어 시멘트 길로 바뀌었고, 이후 영화팬들이 ‘어떻게이 길을 포장할 수 있냐’ 고 항의해 시멘트를 벗겨냈다.  

 다시 주민들의 요청으로 비싼 황토포장 길이 새로 깔렸다.


 

 돌담길을 지나면 드라마‘봄의 왈츠’세트장이 우뚝하다.

하얀색 예쁜건물은 이제 당리 언덕의 상징처럼 자리잡았다. 세트장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전경과 어우러진 해안 풍경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정말 아깝다.

 

 

 

 세트장을 지나 계속 걸어가면 바다가 보이는 숲길이 이어지고 화랑포 입구 사거리에 다다르게 된다.

 화랑포에서는 일몰이 장관이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멀리 제주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사거리에는 이 섬의 오랜 풍습인 초분이 전시되어 있다. 초분은 산비탈과 밭 사이사이에 짚으로 이엉을 씌운
무덤으로, 섬사람들은 부모가 죽으면 초분에 모셨다가 2~3년 지나 이장을 했다고 하는데 번거로워 지금은 거의 없어진 풍습이다.

 다시 바다와 나란히 걸으면 새땅끝을 지나 화랑포 사거리로 돌아오게 되고, 오른쪽 해안절벽길을 따라 가면 도청항으로 돌아가는 길과 당리 갯돌밭으로 이어지는 2코스 갈림길이 나타난다.

 

 

 2코스의 명물은 범바위다.

 보적산 8부 능선에 자리잡은 범바위는 20㎞ 슬로길 구간 중 가장 힘든 코스이지만 그 수고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범바위에는 재미난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

 청산도에 살던 호랑이가 자신이 울부짖는 소리가 범바위에 부딪히면서 더욱 크게 울려퍼지자 더 크고 힘센 호랑이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고 섬 밖으로 내뺐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청계리에서부터 시작되는 3코스에서는 상서리 돌담길이 유명하다.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굽이굽이 쉼없이 이어진 돌담길을 걷다보면 누구라도 옛 추억의 아련함에 젖어들곤 한다. 걷는 길에 자주 마주치는 다랭이논과 구들장논도 빼놓을 수 없는 반농반어촌인 청산도의 상징이다.

 논이 부족한 섬사람들은 산을 깎고 다듬어 다랭이논을 만들었고, 한 줌 흙마저 아껴 구들을 깔 듯 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쌓아 구들장논을 만들었다.

 

 섬사람들의 애환과 고단한 삶이 묻어나는 풍경이지만 뭍에서 온 이들의 눈에는 그저 신기하고 아름답게만 비쳐지고 있다.

 

 

 

   찾 아 가 기 |    
 ▶ 서해안고속도로 목포나들목에서 나와 해남이나 강진을 거쳐 완도까지 간 후 완도 연안여객선 터미널(061-552-0116)에서

     청산도행 배를 타면 된다. 호남고속도로에서는 광산나들목을 빠져나와 나주~영암~해남을 거쳐 완도로 갈 수 있다.
 ▶ 고속버스를 이용할 경우는 서울 강남센트럴 터미널과 광주 유스퀘어 종합터미널에서 완도행 버스를 타면 된다.
 ▶ 완도여객선터미널에서는 청산도행 배가 하루 4~5회씩 운행되는데 계절과 일기 변화에 따라 운행시간이 자주 바뀌므로 미리

     출항시간을 확인해두는 것이 좋다. 청산도까지 40여 분 걸리며 승용차도 싣고 갈 수 있다.

 

 

 

 

글, 사진 /  유인근 스포츠서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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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초등학교 시절 때의 일이다.

그 당시는 보릿고개라 하여 하루에 밥 세끼를 먹는 집은 부자였고 하루 중 한 끼는 고구마나 감자 아니면 죽 등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밥이래야 쌀은 조금만 들어가고 보리가 70~80%나 되어 꽁보리밥 그대로였다.

반찬이래야 양념도 별로 들어가지 않은 소금만 많이 넣어 만든 김치와 겨우 메주를 띄워 만든 된장이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에 학교가 멀고 가방도 없어서 책을 가득 넣어 둘러 싼 책보를 들고 걸어 다닌 시간이 많아 하교할 때면 힘이 빠져 비실거릴 정도였다.

비가 내릴 때는 책을 비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해 책보를 허리춤에 차고 달음박질까지 했었다.
그런데 학교 앞 문방구에서 일명 ‘십리과자’ 라는 것을 팔았는데 동그랗고 견고하게 만든 사탕으로 굉장히 단단해 깨어먹을 수가 없었다.

 

문방구에서 이 과자를 한 알 사서 입에 넣으면 거의 집에 다 도착할 때쯤 단물이 빠지고 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요즘 사탕류들은 이만 좋으면 바로 깨물어 부술 수 있지만 당시의 그 십리과자는 너무나 단단해 도저히 입으로 깰 수 없었으며 만약 깨다간 이가 부러져 그냥 입에 넣어 천천히 녹여 먹어야만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약 4km이었으니 그 짧은 보폭에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여겨지며 요즘 아이들은 학교까지 가까워도 자가용으로 가거나 버스를 타기도 한다.

지만 먹을 것이 없거나 부족해 체격이 왜소했지만 그 먼 거리를 달음질하거나 빠른 걸음으로 걸어 다녔으니 격세지감이 든다.

 

정말 당시에는 돈도 없어 무엇 하나 사 먹기도 힘든 시절이었으므로 유일한 군것질이라고는 실리적인 그 과자였다. 그것도 매일 사 먹기는 힘들어 친구들과 반씩 씹기도 했다. 먼저 입에 넣은 친구가 한참 단물을 빨아먹고 다음에 친구의 것을 받아 입에 넣어 녹여 먹었다.


요즘 같으면 더럽고 비위생적이라 하여 아무도 남이 먹던 것을 받아 먹지 않을 것이다.

위생상 좋지 않고 에이즈니 무슨 질병에 걸릴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남이 먹은 것을 받아먹어도 병 하나 걸리지 않고 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자랐던 것이 아닌가.

 

최근에는 자기가 먹고 싶은 것 무엇이든지 간식이나 군것질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가정환경도 어렵고 밥 세끼도 먹기 어렵던 시절이었기에

군것질마저 함부로 할 수 없던 시절이었던 기억이 새롭다.


요즘은 이것저것 너무 잘 먹어 비만이나 당뇨병에 걸리지만 당시에는 이런 질병에 걸릴 염려는 아예 없었다.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서서히 다 녹아내려 한 시간 이상이나 걸었던 다리에 그나마 피로회복제가 되었던 것이다.
과자 하나 제대로 사 먹기 힘든 시절을 머릿속에 떠 올리며 요즘 어린이들은 너무나 집에서 잘 해 먹이고 간식이나 군것질 비용도 자주 주어 제멋대로 사 먹고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체격은 좋지만 체력은 요즘 학생들이 형편없이 낮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들며 요즘 아이들을 적게 낳다보니 지나치게 과보호하고 정신적으로도 강하지 못하고 부모께 의존해 버리는 경향이 많아 자주적이고 독립된 개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지 걱정스럽다.


 

우리의 아이들이 더 건강하고 밝게 자라기 위해서는 학교와 학원 안에만 가두어둘 것이 아니라 틈나는 대로 바깥에서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고 많이 노는 모습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을 누리길 기대해 본다.

 

우정렬(부산시 중구 보수동 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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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코트디부아르의 슈바이처  안순구

사랑을 실천한 의사 추장님

 

 

 

 

 

 

 

 

환자 치료를 잘하는 의사가 명의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상 사랑을 실천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의사.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한 안순구.

 

 


검은 대륙의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황색 슈바이처’라 칭송하였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아프리카를 사랑하였습니다.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난 아프리카에 미친 사람이었어요.

 

안순구는 1937년에 태어나, 1962년 가톨릭대학교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육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69년 코트디부아르 국립중앙의료원에 정부파견의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아비장국립 중앙의료원에서 1년간 열대의학과 프랑스어를 공부한 후, 디보 도립병원을 거쳐 띠아살레도립병원에서 26년간 봉직하다가 1993년 1월 영예로운 정년퇴직을 맞으면서 귀국하였습니다.


1975년 외무부장관 표창, 1997년 수교훈장 숙정장, 1982년 대통령 표창,1985년 코트디부아르 농림부장관 표창, 1994년 KBS해외동포상, 1995년 대한의사협회 표창 등을 수상하였고, 1994년에는 가톨릭대학교 명예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학생 시절부터 막연히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왔던 ‘사랑의 실천’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아프리카 외교의 일환으로 봉사할 의사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서를 냈고, 2~3년 정도를 예상하고 어린 두 딸을 떼어놓고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젊음을 송두리째 바친 3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 서부 기니아만 연안의 나라로서 면적은 한국의 4배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나라이지만, 수도를 벗어나면 바로 오지가 펼쳐집니다.

프랑스 식민지로 있다가 1960년 독립하였고, 공용어는 프랑스 어이며, 종교는 이슬람교와 토착신앙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1993년 시무식후 병원직원들과 함께

 

 

띠아살레시 도립병원장에 취임하면서 사랑의 실천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일한 의사 안순구와 현지 출신 간호사를 포함한 30여 명의 직원 그리고 40여 개의 병상이 고작인 가난한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열대성 기후와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으로 가족의 건강 위협은 물론, 토착민의 상이한 체질과 열대성 특이체질에 대한 의료지식 이 부족하여 모든 것을 다시 공부해야 했습니다.

특히 언어소통의 장애로 진료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은 드물고, 60개의 종족이 서로 다른 토착어를 제각기 사용 하고 있어 타 종족끼리는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진료나 회진 때면 통역관 3명을 동반해야 하였고, 환자가 오면 같은 종족의 간호사를 찾아 통역을 부탁해야 했습니다.


병원살림이 열악하여 종종 약품부족으로 치료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십 리 먼 길을 찾아와 병원 앞에서 서성이는 수많은 환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자비를 털어 의약품을 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갈 경우 X-Ray를 찍어봐야 하는데, 장비가 없으니 도무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나라 관계부처에 몇 번이나 의료지원을 건의하였지만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봉사하러 온 것이지 불평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마음을 다잡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해결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뼈가 부러진 사람들은 며칠 간 입원시켜 놓고 상태를 본 후 그 차이에 따라 조치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 온 이상 아프리카의 법을 따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들을 주민들도 차츰 이해하게 되었고, 의사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의 어른으로 서도 존경받게 되었습니다.

 

환자들은 말라리아, 피부기생충, 폐렴은 기본이고 원목수송차량들의 교통사고가 빈번해 새벽에 응급환자를 맞거나 한밤중에 왕진가방을 꾸리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출산에서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의 삶과 죽음을 보살피는 일 외에도 아버지 판정, 어린이 나이결정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으며, 인근 부족을 아우르는 유일한 해결사이기도 했습니다.

 

바우레족과 아베족 사이의 갈등을 풀었던 그는 두 부족의 명예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안순구가 치료한 환자의 수는 분기별 1,000명 정도가 예사였고, 예방접종까지 포함하면 2,000명을 훌쩍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병원 진료활동 이외에 순회 진료를 실시하였는데, 1992년 모무리진료소와 이로보진료소 등지에 월 2회 총 24회의 순회 진료활동으로 2,000여 명의 환자를 살폈습니다.

또 중, 고등학생들에 대하여 AIDS에 대한 예방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때로는 원주민들이 그를 마술사나 신적인 존재로 오해하였습니다.


AIDS 감염률이 10%정도 되는데, 그가 고쳐낼 수 있을 거라며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뻔히 아는데 조금 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그들을 볼 때 안타까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의료비는 무료입니다.

그래서 환자들도 부담 없이 병원을 찾았고, 의사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치료를 받다가 죽어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처럼 애써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원주민의 생로병사를 사랑으로 따듯하게 감싸면서 그 들은 의사 안순구를 삶의 주재자처럼 대하였고, 스스럼없이 그를 찾아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학교를 가야겠는데 자신의 나이를 모를 때, 키와 몸무게를 재고 치아의 수를 헤아리는 등 나름대로 검사를 하지만 당사자에게 몇 살이 좋겠느냐고 물어보고, 큰 무리가 없는 한 원하는 나이에서 역산해 생년월일을 정해 주었으며,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그를 찾았습니다.

 

사람이 귀한 곳이라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하면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혈액검사를 해주기도 하지만, 산모를 은밀히 불러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묻고서 아버지를 선택해 주는 현명함도 발휘해 주는 의사추장님이었습니다.

 

 

어머니날 행사에 그날 출산한 산모에게 선물증정

 

환자가 오면 무슨 종족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어디가 아파서 왔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띠아살레의 대표적인 인물은 그였습니다.

 

그들은 의사추장님을 부를때, ‘띠아살레 안순구’라 부릅니다.

그의 삶은 1994년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하면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바 있는데, 아프리카 체류 25주년을 기념하며 명예추장으로 추대되었던 장면입니다.

 


취임식장에 코트디부아르 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렸다.

마을 사람들은 의사선생님을 추장으로 모시게 됐다.

추장을 상징하는 의상이 둘러지고 띠아살레 안순구씨는 의사추장님이 되었다.

같이 어울려 춤을 추고 아프리카 노래가 울려 퍼진다.

아프리카에서 25년의 시간이 안원장에게 남긴 것은 바로 함께 살아간다는 것 아닐까.

피부색이 다르고 풍습이 달라도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

 

명예추장 추대식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는 안순구 [주간조선 95.9.7자]


의사 안순구가 의사추장으로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은 것은 바로 피부색이 다르고 풍습이 달라도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소박한 바람인 ‘사랑의 실천’에 따른 보람이었습니다.

열대의 악천후를 비롯한 제반 악조건 속에서 오직 훌륭한 의료인으로서 남겠노라는 다부진 결심 하나로 버텨온 시간들 속에서 아프리카인들의 믿음직한 보호자로 우뚝 서긴 했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가장으로서 또한 아버지로서의 아픈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부인과 어린 둘째 딸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가족은 본의 아니게 이산가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지낸지 2년 후에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스페인 라스팔마스로 마중을 나갔는데, 가슴에 커다란 이름표를 달고 스튜어디스의 손을 꼭 잡은 아이들이 부모도 몰라보고 엄마와 아빠를 찾아야 된다면서 울 때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프리카와 한국 그리고 파리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아온 탓에 세 딸들 중 첫째와 막내는 1살 때 헤어져 15살이 되어서야 만났습니다. 세 딸 모두 10세 전후해서 한국과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10년에 한 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아기를 낳으면 절대로 자식과 떨어져 지내지 않겠다고...

매일 일기에 써 부부를 울렸던

세 딸은 이제는 ‘부모님을 존경하고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의사 안순구가 코트디부아르 띠아살레를 떠나던 날. 마치 혈육의 생이별인양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온 원주민들은 그를 에워싸고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든 일을 기쁘게만 받아들여 장례식에서조차 춤추고 노래하던 그들에게 안순구는 사랑 그 이상이었습니다.

울면서 매달리는 원주민들에게 ‘이젠 세 딸과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설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귀국 도중 비행기 안에서 아내 의 손을 잡고 내내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던 그였습니다.
아베족의 노래를 들으며 아프리카식 죽음을 맞고 싶다던 안순구는 다 음 세상에 태어나도 꼭 다시 아프리카로 가고 싶다고 합니다.


일산 신도시에 그림 같은 하얀 돌담집.
31년 만에 돌아와 자리 잡은 보금자리.
안순구는 열대의학과 법률, 상식 등을 잘 몰라 고생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가이드를 정리하였습니다.
이제 안순구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한국의 도시생활을 하고 있지만,

프리카가 환청처럼 늘 그를 부르고 있습니다.


 

맨발로 몇 십리 병원을 찾던 원주민이 몹시도 그립네요.
한 달이 지난 지금도 현관 소리가 나면 원주민 환자들이 병원 문을 두드리는 것 같습니다.

눈에 선해요. 호롱불 하나 들고 새벽 3~4시부터 몇 십리 길을 달려와

아픈 아이를 절절한 눈으로 내맡기던 원주민들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요

 

 

아비잔 한인교회 입원환자 위문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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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탄자니아의 슈바이처  박형동, 서미라 부부

신앙의 힘과 생명 존중의 외경심으로

 

 

 

 

 

 

 

선교활동을 펴기 위해 1991년 8월 초 탄자니아로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가톨릭병원 일반외과장을 그만 둔 박형동(35)씨와 성남병원 정신과장인 서미라(34)씨 부부가 두 자녀와 함께

탄자니아 킬리만자로산 밑 인구 80만 명의 아루샤 기독병원에서 무료봉사하기 위해 출국한다.

 

 

그들의 장도를 격려하는 어느 신문 기사의 일부분입니다.
박형동은 1957년에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의대에서 일반외과를 공부하였고, 1991년부터 의료선교의 일환으로 탄자니아(Tanzania)에서 근무하다, 1993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신분이 변경되었습니다.

 

서미라는 1958년에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의대에서 정신병과를 공부하였고, 1991년부터 의료선교의 일환으로 탄자니아에서 근무하다, 1996년KOICA 정부파견의사로 신분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들은 부부였습니다. 그들이 몸담았던 병원은 킬리만자로 크리스천 메디컬센터(Kilimanjaro Christian Medical Center).

 

KCMC 중환자실에서의 진료모습


의사 박형동과 의사 서미라는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였으며, 평생의 동지였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났습니다.
부부의 어느 날 선언은 폭탄이었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로 간다. 의사보다는 선교사에 더 매력을 느낀다. 미련없이 떠나겠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이들 부부가 독실한 신자인줄은 알았으나, 막상 선교사로 떠날 줄은 몰랐습니다.

주위의 부러움을 받던 맞벌이 의사가 안정된 직업을 박차고 오지인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난다는 것은 그
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동부 인도양을 마주한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산이 있는 나라.
그들의 활동은 드넓은 아프리카 초원의 표범처럼 긍정적이며 역동적이었습니다.

 

의사 박형동은 일반외과 전문의였습니다.
탄자니아의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자 세스나기를 구입하여, 직접 몰고 하늘로 날아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호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신속히 사막을 날아가 최고의 의료 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를 제공하는 것에 착안하여, 경비행기를 타고 외과의사가 없는 지역을 순회 진료하면서 환자 수송에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탄자니아의 의료 상황도 여타의 아프리카 최빈국과 유사하였습니다.
불안한 전력 공급과 부족한 의료 장비는 물론 병원의 재정난으로 인한 마취약 부족으로 응급 수술 위주의 수술만 시행하였습니다.

 

수술을 하다가 불이 나가면 랜턴을 밝혀야 했습니다.
의사들의 협조가 부족하여 항상 갈등이 발생하였고, 생명 경시 등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좌절도 맛보아야 했습니다. 약품 밀반출과 금품수수 등의 부조리가 만연하였고, 병원도 항상 원조를 바라는 구태의연한 모습이었으며, 심한 부패와 불신으로 인하여 세계가 등을 돌렸습니다.

 

 

수술중 전기가 나가 후레쉬로 비춰가며 수술하고 있는 광경

 

 

그는 묵묵히 그의 본분을 지켰습니다.
그가 KOICA에 보고한 1993년 3/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치료한 환자는 약 400여 명으로 병명은 각종 외상, 화상, 위장질환, 혈관질환, 항문질환 등이다.

또한 위절제술, 소장대장절제술, 피부이식, 혈관외과수술 등 100여건의 수술을 집도하였다.

 

특히 그는 탄자니아 최초로 식도암 절제와 혈관 문합 그리고 흉부교감 신경절제수술 등을 시도하여 최신 의료시술을 선보였습니다.
매주 준의사 코스 수강생을 대상으로 외과학을 강의하였으며, 분기별 한차례씩 마사이족을 찾아 아픔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았으나 임박한 약품을 정가보다 싸게 구매하여 원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에는 브룬디(Burundi)와 르완다(Rwanda) 두 나라에서 발발한 내전과 부족간의 전쟁으로 탄자니아 서북쪽 국경지대에 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난민들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그는 UN이나 적십자기구 등에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난민수가 워낙 많아 세계 각국의 구호가 절실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예방 가능한 질환으로 죽어가는 환자가 많아 예방의학의 중요성도 주장하였고 보건소 건설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특히 심장센터 설립이 절실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르완다 난민 지원 프로젝트 활동 모습


 

 

의사 서미라는 신경외과 전문의였습니다.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에 의사를 파견할 때는 주로 Major과인 외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위주였습니다.

실제 탄자니아에서도 Minor과 전문의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탄자니아에서는 구순구개열인 언청이 등 성형수술이 필요한 환자수가 부지기수인데도 성형외과 전문의는한 명도 없는 상태였으며, 신경외과 전문의는 딱 한 명만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는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탄자니아의 정신질병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1994년. 3천2백만의 탄자니아 인구 가운데 전문적 정신치료가 요구되는 환자의 수는 70~80만 이상으로 추정되었는데, 아프리카는 미개발지역으로서 문화가 덜 발달하여 환경적인 스트레스가 적으므로 정신질환자가 적을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간질환자는 잘못된 문화적 관습과 가정불화 그리고 기생충의 만연으로 선진국보다 환자수가 2배이상 많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서미라 의사의 근무 모습

 

 

그가 KOICA에 보내온 1996년 1/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외래환자 분기당 외래환자는 450여 명. 카운슬링환자는 100여 명에 이르며 병명은 정신분열증, 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간질, 치매, 파킨슨증후군 등 다양하다.

의료 활동상의 문제점으로 정신과 약품구입의 어려움과 수입약품 대부분이 고가로 매매된다.

중증 정신질환자 수용시설 및 훈련인력이 부족하다.

정신질환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주재국과 주민의 반응이 호의적이나 정신과 의사의 태부족으로 훈련된

간호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KOICA에서 지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탄자니아 국민의 간질환자 실태 조사 및 진료 프로젝트를 실시하였으며, 세계적으로 치료를 요하는 간질환자의 수는 인구의 1~2%선으로 알려졌으나 탄자니아는 이보다 두 배가량 높은 3% 전후일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 원인으로 분만 시 뇌손상 후유증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열악한 교통시설로 인한 가정에서의 출산과 미비한 의료시설 및 여성할례 등 잘못된 관습으로 인한 산도손상에 기인하며, 기생충감염도 한 원인이라 지적하였습니다.

 

탄자니아 인구 중 약 백만 명 가까이가 치료가 요구되는 간질환자로 추정되며 이중 어떤 형태이든 투약을 받고 있는 환자 수는 불과 1%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그나마 약효가 떨어지는 페노바비탈에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탄자니아에 정신과 전문의가 불과 10명 내외인 것을 고려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의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의 수
는 불과 1천 명 내외일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정신질환자 인식증대와 정신과 위상 제고에 노력하였으며, 그의 부단한 노력으로 탄자니아에서 처음으로 정신과가 개설되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킬리만자로 영봉을 바라봅니다.

아프리카인의 성지라 일컬어지며, 적도 부근에 있으면서도 만년설로 덮여 있어 항상 번쩍거리는 산.
설산이 아프리카를 묵묵히 굽어보고 있습니다. 그들 부부는 그 산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강원도 산골에 들어와 있는 느낌 같아요.


젊음으로 버텼지만, 어찌 갈등과 좌절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힘과 생명존중의 외경심으로 탄자니아에서의 봉사활동을 성실히 수행하였습니다.

 

 

국민일보, 1997.7.11일자 「검은대륙에 심은 복음인술」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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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통영 출신 문호 故박경리 선생은 통영을 배경으로 쓴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서문에서 ‘통영은 부산과 여수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지점으로써 그 고장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고 썼을 정도로 그 풍경은 아름다움을 발한다.

 

 

 

 

 

나만의 속도로 풍경과 마음을 주고받아야


가는 곳곳 모두가 사람의 마음에 안식을 주는 절경이 펼쳐지는 여행지는 드물다.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가고 싶은 여행지 1순위에 뽑히는 곳 통영은‘동양의 나폴리’로 불리울 만큼 그 명성이 대단하다. 또한 먹거리들 또한 풍부해 오감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성공한 여행이란 자신만의 계획대로 모든 풍경을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 오랫동안 곱씹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시간과 마음에 쫓기다보면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잊을 수 있기에 통영에서는 특별히 주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천혜의 자연과 역사, 그리고 문화가 숨 쉬는 그곳


통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 바다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의 나폴리라 불릴 만큼 통영만이 가진 천혜의 자연환경은 눈부실 만큼 아름답다. 마치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자연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빚어낸 역사가 통영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투박하면서도 착하다. 횟감을 사러 재래시장에 들러보아도 상인들로부터 금세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모난 곳 없이 둥글다. 굽이굽이 나있는 길과 산, 그리고 통영을 둘러싸고 있는 섬들도 둥글다.
또 문화예술의 천년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흔히‘예향’이라 불리는 통영 출신의 예술가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다. 문학, 미술, 음악, 연극,사진, 무용, 조각 등 무형문화재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이충무공 유적지와 한산대첩을 통한 역사교육 학습과 다양한 문화체험시설을 갖춘 곳이다.


특히, 벼랑이란 의미를 가진‘동피랑’은 어촌의 달동네이다. 언덕을 따라 50여 채의 낡은 근대식 건물이 언덕에 자리하고 있고, 2006년부터 이 동네를 보존하고자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담벼락에 온통 벽화가 그려진 이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통영의 명소가 됐다. 형형색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달동네 아래에 보이는 바다의 아름다움과함께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아름다운 해안도로에서 바람을 만나다


통영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굽이굽이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타고 달릴 수 있는 드라이브코스다. 산양일주도로를 따라 돌다가 달아공원에 올라 수많은 섬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저미어 온다. 여기서 깊은 숨을 들이 마셔보는 것 또한 잊지 말길 바란다.


통영의 바닷길은 시내를 감싸고 있다. 산양면에서부터 서호시장, 강구안, 중앙시장 앞까지 들어오며, 저마다 다른 이름을 가진 출항을 대기하고 있는 배들은 여느 해안의 항구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전한다. 또한 해안도로 가까이 보이는 굴 양식장들은 카메라의 셔터를 가만두지 못하게 한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만나면 첫사랑에게 편지를 띄우고 싶어진다. 그만큼 풋풋하고 싱그럽다.

 

 

 


통영을 맛보러 오세요

 

통영은 바다가 내어주는 다양한 해산물로 차려진 밥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대표적인 먹거리인 싱싱한 굴이 유명하다. 수확량도 전국 최고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싱싱한 굴을 주재료로 하는 음식점도 타 지역에 비해 많다. 그러나 여름철엔 독성을 품고 있기 때문에 영양 가득한 싱싱한 생굴을 먹기는 어려워 아쉬운 부분이다. 대신 제철의 굴을 수확한 후 영양과 맛이 그대로 담겨있는 급속냉동 굴이 있어 다양한 굴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또 통영의 다양한 해산물을 누리고 싶다면 미륵도 포구마다 자리한 작은 횟집들과 중앙시장을 찾아가면 직접 잡아온 자연산 활어를 생각지도 못했던 저렴한 가격으로 맛볼 수 있고 흥정만 잘한다면 덤도 얻을 수있다.

 

자연의 맛이 그립지 않은가?

그렇다 면 당장 통영으로 가보시는 것이 좋겠다.


또 하나 충무김밥과 꿀빵도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다. 저마다 원조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고 있는데, 그 중 원조는 분명 따로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원조가 아니라도 그 맛은 비슷해 어느 가게를 찾아가도 그 맛을 보기는 쉽다. 이처럼 통영은 다양한 군침 도는 먹거리들을 통해 여행자들의 주린배를 채울 수 있다.

 

 


 

 

점점이 떠있는섬의 나라를 탐하다

 

 

다음으로 통영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섬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바다에 보석처럼 박혀있고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힐 듯 가까이 자리해 있다. 뱃길로 약 20여 분을 가면 만날 수 있는 한산도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섬으로, 통영시가 축제로 만들어 지금 껏 기념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이 통영과 한산도를 잇는 뱃길에서 이뤄진다. 6월을 맞아 호국 얼이 담긴 한산도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욕지도는 알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한 섬이라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1시간30여 분 정도의 뱃시간이 걸리는데 연화도를 들러 목적지인 욕지도의 작은 항구로 배가 들어선다. 욕지항은 우리나라 지도 모양을 한 작은 항구다. 욕지도는 아늑하다. 욕지도는 인근에 거느린 크고 작은 섬까지 합해 2천300여 명의 주민이 살아간다. 욕지도는 사방이 탁 트인바다와 넘실거리는 파도가 있는 해안 절경이 일품이다. 부두에서 출발해 야포 까지의 약 3km 정도의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동안 전형적인 어촌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동네사람들의 모습은 그저 정겹기 그지없다.

사량도 하도(下島) 칠현산(七絃山, 349m)에서 점점이 흩어진 다도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있다.
또 하나의 섬, 사량도는 남해안의 한려수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이 섬 상도와 하도에 흐르는 물길이 가늘고 긴 뱀처럼 구불구불한 형세에서 유래해 이 해협을 사량이라 불렀다고 한다. 항구에서 배로 약 30여
분 정도가 소요되는 이 섬은 눈길이 닿는 곳마다 한 폭의 그림이다. 약 천여명이 살고 있는 사량도는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뽑힌 옥녀봉을 비롯해 바위절벽을 등반하는 스릴을 느끼고 거의 모든 등산로에서 탁 트인 청정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 최근 등산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등산을 즐기는 이들은 정겨운 인사를 서로 나눌 정도로 여유롭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란 없다.


대양을 향해 흩어져 나간 한려수도의 수많은 섬 중에서도 가장 먼 바다에 자리 잡은 매물도의 장군봉에서 바라다본 소매물도와 등대섬은 산자락의 나무아래 허리춤으로 새로 낸 탐방로는 이런 풍광을 즐기며 걷는 멋진 길이 있어 흥미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특히나 지난 2007년 ‘가고 싶은 섬’사업이 시작되어 현재 문화 관광 명소로 바뀌었다. 시범사업지로 네 개 가 선정됐는데 매물도도 거기에 들어 도로, 탐방로, 선착장 등이 개선되어 이용에 편리
하다.

 

 

 


떠나오면 아련해지는 추억으로

 

이처럼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통영의 아름다움은 멀리 있어 더욱 그립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고향 같은 아련함을 주기도 하지만 언젠가 꼭 다시 찾고 싶은 고장이다.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로 우리를 유혹하는 통영은 혼자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해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족과의 여행이 제격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치 시원한 청량음료 한 모금을 마신 듯 즐거움을 주는 통영은 역사와 문화를 겸비한 도시로 착한 성품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 그 의미를 더해준다. 통영을 뒤로하고 온 지금 못 다 담아온 아련해지는 추억에 벌써 그리워진다.

 

 

 

 

 

글∙노호성  /  사진∙정병성
사진제공 ∙ 통영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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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보츠와나의 슈바이처 김정

그저 사람만이 중요할 뿐

 

 

 

 

 

 

이름도 생소한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와 보츠와나(Botswana)에서 인술을 펼쳤던,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의사였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부자였던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 김정.


김정은 1925년에 태어나서, 1950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외과 공부를 마쳤습니다.
1970년부터 정부파견의사로 서부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어퍼볼타(Upper Volta)로 불렸던 부르키나파소 가와병원(Burkinafaso Gawa Hospital)에서 4년간 근무하였습니다.
에어컨 안에서 뱀이 나오고, 자고 일어나면 신발 속에서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한 번도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없었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 남부 중앙 내륙에 있는 나라 부르키나파소에서 외과 의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곳은 평균 수명이 짧아 노동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빈곤층의 격증과 국력의 약화가 계속 진행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는 1973년부터 1990년까지는 남부 아프리카에 있는 보츠와나 프란시스타운 주빌리병원(Botswana Fransis Town Jubiley Hospital)에서 인술을 펼쳤습니다. 정년 퇴직으로 1986년 귀국하였다가 한 달여 만에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 무료로 자원봉사를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의료 봉사활동을 벌이고 민간외교관 역할까지 담당하다가 1999년 그곳에서 고귀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김정의 아들, 사진작가 김중만은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지구촌 가족》에서 그의 아버지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버지는 내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의사였다.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수술과 치료를 하면서 살았고,
와인을 즐기는 로맨티스트였다.


1971년 아버지가 정부파견의사로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이 기억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집은 양계장을 방불케 할 만큼 온통닭 천지였다.

아버지는 개인병원을 하셨는데, 가난한 환자들이 치료비 대신 닭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는 그저 ‘사람’만이 중요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로 떠났다.
가난한 외과의사 김정은 30여 년을 그렇게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와 보츠와나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소박하고 위대한 삶을 마쳤다.
나에게 아버지가 평생 쓰던 청진기 2대와 2,000달러의 유산을 남기고…….

 

 


 

 

의사 김정의 부인은 그의 남편과의 추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Dr. Kim은 1970년 아프리카 어퍼볼타 지역에 외과의로 파견 갔어요.
딱 2년만 하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현지의사 부족으로 불가피하게 계약을 연장하게 됐습니다.

이후 보츠와나로 재파견 되었고, 현지 생활에 정이 들어 계속해서 연장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1979년에는 Dr. Kim이 보츠와나 정부로부터 대통령수교훈장을 받았지요.

 

보츠와나의 경우 에이즈는 물론 야생동물로 인한 피해환자가 많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저희 둘째 아들은 현재 보츠와나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요.

 그곳에서 태어난 손주 김유순과 김규환도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쳤어요.

보츠와나 현지 주민들이 정이 많고 정직해서 그곳에 관한 추억이 참 많네요.

당시 보츠와나에 공설운동장을 건립하는데 Dr. Kim이 한국인으로서 5,000달러의 거금을 기부했던 기억도 납니다.

Dr. Kim은 1986년 정년퇴직하고 한국으로 복귀했지만,

한 달여 만에 다시 보츠와나로 돌아가 파견 당시 근무했던 병원에서 무료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Dr. Kim은 인턴으로 온 학생들을 데리고 독립적으로 의료행위를 할 수 있을 만큼 진료여건은 좋았어요.

 

특히 1970년 11월 4일 어퍼볼타로 파견됐을 당시

그곳에는 전기는커녕 수돗물조차 나오지 않는 열악한 국가였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생활하기에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요.

 

이후 파견된 보츠와나는 어퍼볼타와 달리 근무환경, 복지, 치안상태가 매우 안정적이어서 굉장히 좋았어요.

현지주민들의 의사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봉사활동에 대한 굉장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국가차원으로 정부파견의사를 기리는 단체나 조직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런 단체가 존재함으로써 정부파견의사가 현지,

혹은 한국 복귀 이후 겪는 고충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의사 김정의 부인과 원주민들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의연하고 올곧게 일생을 보냈지만, 는 물론 자식들의 국적도 한국으로 고집하여 현지에서 태어난 손자들이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쳐 언론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거주하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기념하여 병원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의사 김정은 오랫동안 아프리카에 있었기에 국내에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작고하고서 편안히 묻힐 유택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외국관광객을 위한 통역 안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부인은 그런 상황을 못내 아쉬워하였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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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카메룬의 슈바이처 김시원

카메론의 울려 퍼진 한국의 노래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
꼬마야 꼬마야 잘~가거라.


아프리카 카메룬(Cameroon)의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우리나라 동요가 울려 퍼집니다.
어린 아이들과 한국 사람들이 어울려 재미있게 고무줄놀이를 하는데,

그 나라 어린이들은 한국말로 노래를 잘도 부릅니다.

 


2001년. KBS 《한민족리포트》에〈닥터 김의 미라클 가방〉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야룬데 이슬람마을 어느 초등학교의 고아들을 찾은 의사 김시원과 한국의 자원봉사자들이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마음속의 사랑을 찾아 카메룬까지 왔다는 의사 김시원.

 


그는 1952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 공부를 마쳤고, 1986년 병원을 개업하였습니다. 평탄하면서도 행복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1991년 교통사고에서 기적처럼 살아나면서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제2의 삶을 결심하게 됩니다. 1993년. 아내와 세 딸을 설득해 의료기술과 시설이 낙후한 카메룬으로 향했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카메룬 야운데 의과대학부속 중앙병원(L'hospital Central de Yaounde)에 부임하여 2007까지 15년간 근무하였습니다.

 

 

각오는 하였지만, 너무 가혹하였습니다. 지독한 아프리카식 프랑스어는 차라리 고문이었으며, 한마디로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4개월 배운 프랑스 어로는 환자의 증상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수술실을 따라 다니며 조수를 자청하고 현지의사들과 가까워지려 했지만 철저히 찬밥 신세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는 끝이 없었습니다.....

 

 

 응급환자의 연락을 받고 수술실로 달려가면 마취의사는 아예 없고, 마취의사를 데려오면 수술실 간호사가 없어졌습니다. 겨우겨우 사람을 모아 놓으면 수술포가 소독되어 있지 않거나, 산소통을 보관함에 넣은 채 수간호사는 열쇠를 갖고 퇴근해 버린 다음이었습니다.

간호사 출신인 부인 서현숙 역시 수모 아닌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내로라하던 그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켰습니다. 눈 딱 감고 이 악물고,AIDS 환자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멋도 모르고 따라 온 금지옥엽 세 딸이 외국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언어문제로 3일 만에 쫓겨났으며, 병원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는 누가 슬쩍 가져가 버렸습니다.

 

 

의사 김시원은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버팀목이었던 아내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피나는 적응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환자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었고, 그들만의 프랑스 어에 귀가 열릴 즈음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아졌으며, 외과 의사들도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카메룬에서 최고의 의사라 자타가 인정하던 외과부장의 위암환자 수술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과도하게 절제하고 수술의 기본을 무시하는 엉터리였습니다. 그가 메스를 잡아 수술을 했고, 아무런 합병증세없이 봉합했습니다. 야운데병원에서는 어려운 췌장암 수술은 아예 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완벽하게 집도하였습니다.


수술실에는 수술기구가 없었습니다. 그는 수술기구가 담긴 가방을 메고 다녔으며, 그 가방에는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방을 열고 이것저것 꺼내 수술을 마치면, 사경을 헤매던 환자는 살아났습니다. 소위 기적의 가방이었습니다.

환자가 입원하려면 입원비는 물론 모든 경비를 먼저 내야 합니다. 죽어가는 응급환자라 해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살려놓으면 돈을 안내고 도망 을 간다고 하였습니다.

 

 

 ..일대 참상이었습니다..

 

의사인 그는 슬펐지만, 응급실과 수술실에는 장갑이나 소독약 그리고 간단한 수술기구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약품과 의료소모품은 너무 비쌌습니다.

 


KOICA에 그가 보고한 1994년 3/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진료, 치료환자 250여 명. 수술건수 110여 건 등.
진료환자, 수술건수 계속 증가. 진료 연 1,800여 명, 수술 300여 건. 총상이나 열상환자 증가.

경제난과 치안부재로 강절도 등의 증가가 원인. 충수염의 경우에도 병원에 오지 못하고 버티다가

복막염으로 악화되어야 오는 실정.

간호사도 없이 의과대학생인 조수 한명만 데리고 큰 수술도 해내야하는 실정임....


그들은 돈 몇 천 원이 없어 아파도 병원을 찾지 못했으며, 막다른 상황에서야 그를 찾아왔으나, 그때는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 고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불행과 고통을 덜어줄 방안을 모색하여 1998년 평소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뜻을 같이한 봉사자들과 별도 진료소를운영하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40여 명의 환자를 무료 진료하였고, 또한 벽지농촌과 오지를 찾았습니다. 아내는 간호사를 자처하였습니다.


카메룬의 의료인력은 주로 프랑스에 유학하였으나, 그 수는 극히 적었습니다. 야운데 중앙병원에서 배출시키는 전공의는 1년에 고작 4~5명에 불과하여 그는 의료 인력 양성에 적극 참여해 10여 년 동안 50여 명의 의사를 길러냈습니다.

 

 


그가 휴가와 보수교육 등으로 자리를 잠시 비웠습니다. 다시 만난 환자들이 아주 귀국해 버린 것으로 알고 많이 낙담하여 눈물을 글썽일 때, 이들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었었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음속의 진정한 사랑을 찾게 해준 것은 바로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그에게 더 소중하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카메룬 축구팀은 강호 아르헨티나와 루마니아를 꺾고 당당히 8강에 진출하였습니다. 카메룬 국기를 상징하는 녹색상의에 빨강과 노란색이 조화를 이룬 강렬한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들에게 세계인은 환호를 보냈습니다. 축구만은 강대국인 나라였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중부의 카메룬은 프랑스와 영국의 통치를 받다가 1961년 독립하였습니다. 부존자원이 풍부하여 수도 야운데는 비교적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나, 나라는 후진국이었습니다.


수술하다가 정전이 되면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랜턴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수술을 마쳤으나 마음이 불안하였습니다.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 가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카메룬 최대 병원 응급실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게다가 1997년 한국의 IMF환란으로 대사관이 철수하여 그는 KOICA 직원도 없는 그곳에서 교민들의 주치의와 보호자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15년의 세월을 뒤돌아봅니다.
카메룬의 푸른 신록과 붉은 땅이 환상으로 다가옵니다.
좌절을 극복하고 보람을 일궈냈습니다.
사랑을 찾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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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레소토의 슈바이처 김명호

아프리카 연가

 

 

 

 

 

아프리카의 오지 그리고 불안한 정국으로 혁명이 빈발하는 검은 땅에서 목숨 걸고 인술을 펼쳐온 한국인이 있습니다.


의사 김명호.


그는 1934년에 태어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외과를 공부하였습니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우간다(Uganda)와 계약의사로 근무하였으며, 1978년부터 정부파견의사로써 말라위(Malawi) 좀바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82년에 레소토(Lesotho)로 전임하였습니다.


그가 레소토로 오던 무렵은 국제정세가 복잡하였습니다.
1983년. 레소토는 중국과 러시아, 북한 그리고 동구권 공산위성국가들과 교류하고 경제, 기술협정을 맺은 후 1983년 한국과 외교관계를 중단하였습니다.


군사분계선을 두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실정에서 북한대사관 직원들과 마주치면서 생활한다는 것은 심리적 압박이었습니다. 국교단절로 대사관도 없는 상황에서 주 케냐 대사관이나 한국 우방국의 주 레소토 대사관에 신변 보호를 맡겨야 하는 상황 또한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외교가 단절된 상태에서 주재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정부파견의사에게 의료봉사라는 인도적인 활동 외에도, 주재국의 사회적인 상황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정부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서신으로나마 중국과 북한 등 공산권 국가들의 활동을 알리고, 또한 정부파견의사로서 성실하게 근무함으로써 주재국의 재계약 요청을 이끌어 내어 비수교국이라 할지라도 정부간 의사소통의 통로를 마련하는 등 그야말로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 보낸 1992년 1/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입원환자수 832명, 외과외래치료인원수 888명, 수술인원 609명이었다.
병명은 다양한데 두부외상, 갑상선비대증, 경부수낭, 경부임파선염, 경부농양, 기혈흉증, 농흉증, 식도암, 식도이물, 유방암, 양성유방종양, 장폐쇄증, 폐쇄성황달증, 충수염, 치핵, 치열, 치루 등 다양했다. 또한 항생제, 고가약품 부족, 응급실 X-Ray와 단층촬영기 등의 시설부족, 의사와 간호사 등의 인원이 부족하였다

 

 

▲ 지원물품 전달 기증식

 

외과의사가 전무한 상태에서 1년에 평균 600건 이상의 크고 작은 수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보람된 일은 그 자체가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 약 530km 떨어진 준사막지대인 모로토는 주민들이 외부사람들을 싫어하고, 자기가 살기 위하여 사람을 죄의식 없이 쉽게 죽이는 종족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물이 부족하고 가축을 방목하는 곳이라 위생상태가 매우 열악하고 특히 흙먼지가 많아 눈 질환이 심한 오지였습니다.

 

 이 지역은 마치 귀양지같이 소문났기 때문에 근무하겠다는 의사가 없어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170km 떨어진 수술할 수 있는 병원으로 환자를 후송해야만 했는데 도중에 환자들이 사망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수많은 환자를 수술했으며, 외과 환자뿐만 아니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안과 질환자들까지도 치료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적은 양의 약품으로 많은 환자에게 투약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했습니다.

환자 가운데 제왕절개수술 환자가 가장 많아 매일 3~4건의 수술을 했으며, 그밖에 교통사고로 두부손상과 골절환자도 많았습니다. 특히 헌혈을 하는 사람이 적어 혈액이 부족해 수술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뿌듯했고, 그 보람은 가늠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케냐(Kenya) 남부 보이라는 조그만 시골에 있는 120개의 병상을 갖춘 정부병원에서 외과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나이로비와 몸바사 간 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교통사고와 밀렵자 총격사고 환자 등의 응급수술을 했으며, 산부인과, 내과, 소아과 환자들도 진료했습니다. 그 지방 역시 외과전문의가 한 명도 없었기에 수많은 수술환자들로 항상 바쁜 일정을 보냈습니다.


말라위 좀바.
말라위는 아프리카 남동부에 위치하고, 좀바 남쪽으로는 모잠비크(Mozambique)를 맞대고 있습니다. 정부파견의사로 국위를 선양한다는 각오로 동부아프리카를 떠나 남부 말라위의 좀바라는 도시에 있는 350병상 규모의 정부병원에 부임하였습니다. 그 병원은 규모가 제법 큰 병원인데도 의사가 4명뿐이었으며, 그나마 전문의는 혼자뿐이어서 거의 매일 밤 응급환자를 수술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83년. 북한과 수교하는 바람에 레소토 정부가 일방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국교를 단절하여 갑자기 철수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으나, 레소토 보건성은 국교 단절은 정치적 문제이니 상관 말고 계속적인 환자 진료를 원했고, 한국정부에서도 외교상의 정도를 걷는다는 뜻에서 계속 남아 진료하라는 지시에 따라 아무런 신변 보장 없는 곳에서 묵묵히 3년 동안 근무하였습니다.


 

1986년. 레소토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나 친 서방정책으로 선회하며 국교가 재개되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외교 단절된 상태에서 근무하는데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다른 나라로 가려고 하였으나 혁명군사정부 최고위원회에서 다른 나라로 전근되는 것을 알고서 보건성에 지시, 나이로비 한국대사관에 의뢰하여 계속 근무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1995년 그가 KOICA에 보낸 서한입니다.


레소토에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2세 병원(Queen Elizabeth II Hospital)은 이 나라에 하나뿐인 종합병원인데도 불구하고 외과의 120개 병상이 고작이어서 항상 만원이다. 병상이 모자랄 때는 마루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수용할 때도 자주 있으며, 일반외과전문의들이 정형외과, 신경외
과, 비뇨기과까지 진료하고 있는 형편이다.

 

1995년. 그는 23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1986년. 정부는 그의 참된 의사로서의 국위 선양을 치하하며 수교훈장
숙정장을 수여하였고, 1995년 대한의사협회는 그의 살신성인적인 의료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표창하였습니다.
 

▲ 흙탕물을 긷고 있는 레소토의 어린이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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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니제르의 슈바이처 김대수, 조규자
멀고 먼 그곳에서


 

 

 

 아프리카.
추위는 없고 햇볕만 내리 쬐는 곳.

이글거리는 해를 머리에 이고, 자연의 문화와 인공의 문명이 공존하고대립하는 곳.
전설을 먹고 자란 거대한 바오밥나무 아래 원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노래를 하는 곳.
한 사람이 조그맣게 선창하면 뒤따라 불려지는 유장하면서도 경쾌한 선율이 검은 땅에 나지막이 깔렸다가는 흩어지고 그쳤는가 하면 다시 귓전을 울리는 곳.
삶과 죽음을 주관하였던 태양이 넓은 대지를 보랏빛으로 감싸면, 명상의 마당으로 바뀌는 곳.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사계절이 분명한 한국에서는 아프리카를 그저 막연히 낭만적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지구 육지 면적의 20%를 차지하는 광활한 대륙, 세계 인구의 15%인 10억 그리고 53개 독립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역 또는 국가별로 다양한 특성과 복잡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 아프리카입니다.

정부파견의사제도는 1968년에 감비아(Gambia)에 의료단원을 최초로 파견하면서 시작되었고, 그런 눈부신 활약은 2008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임상 경험이 풍부한 한국의 의사들은 주로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 개발도상국가로 파견되었습니다. 미개하였기에, 가난하였기에 아프리카에는 전체 파견 인원의 50%가 넘는 의사가 활동하였습니다.

한국과 니제르(Niger)는 1961년 정식수교를 맺었지만 주재공관을 개설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니제르에 파견된 의사들은 자연히 양국간의 교류나 친선 도모를 위한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1968년부터 1997년까지 19년간 정부파견의사 업무를 수행한 의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의사 김대수와 의사 조규자입니다.

그들은 사하라 사막 남쪽에 위치한 니제르에서 19년간 인술을 펼쳤습니다.
니제르의 수도는 니아미이며,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약 6배 정도이며, 프랑스에서 독립하였고, 공용어는 불어이지만 대부분 부족어를 사용합니다. 이슬람권의 영향으로 이슬람교도가 다수를 차지합니다. 가뭄이 심하므로, 많은 물을 섭취하여야 탈수를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11월~2월 사이 건기에는 아르마탕이라고 하는 황사가 사막으로부터 불어옵니다. 우기 때는 천지를 가를 듯 몰아치는 모래바람과 억수같은 비가 단 몇 분간에 걸쳐 쏟아 붓습니다. 불어오는 습한 찬바람,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지옥의 계절이 되기도 합니다. 이곳 주민들은 이 같은 흙먼지 바람과 태양열을 방지하기 위해 늘 뚤방이라는 긴 천으로 머리와 얼굴만 내놓고 다닙니다 .

김대수는 1935년 출생하여 1961년 고려대학교 의대에서 내과를 전공하고서 국립경찰병원 건강관리과장으로 재직하다가, 1968년 의료단원으로 파견되었고, 조규자는 1936년 출생하여 1961년 고려대학교 의대에서 이비인후과를 전공하고, 국립의료원 이비인후과 과장으로 재직하다가 1978년의료단원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의대 동기였던 부부는 외교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에서 젊음을 보낸 것입니다.

조규자는 그 세월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프리카 개척자로 첫 발을 디딘 남편은 니제르 대통령 디오리의 요청을 받고, 그 당시 국립의료원에 재직하고 있던 나를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나는 조국의 영예와 체면을 세우고자 1969년 첫발을 디딘 이후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이다. 니아미국립병원 결핵과장인 남편 곁으로 가서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세우고 그 당시 이름조차생소했던 니제르로 떠난 것이 바로 어제 같건만…….


△ 2000년 니제르 소재 국립종합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종족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백주에 살인과 약탈이 벌어지는 니제르에서 조국의 영예를 위해 일하는 그들 부부, 그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설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혹독하리만치 무더운 날씨와 무섭도록 번지는 전염병의 나라.
말라리아는 모든 지역에서 발생하고 각종 풍토병이 창궐하는 나라.
1991년부터 1994년까지의 의사 김대수의 활동보고서는 한마디로 비상사태였습니다.
분기별로 약 70명의 결핵환자가 입원하면 대략 20명이 죽어나가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현재 병원사정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결핵 입원환자들은 결핵약품에 내성이 생겨 만성화된 상태입니다. 어려운 경제적인 사정으로서 의약품의 부족, 검사실의 시약 부족 등 사망률은 상당히 높습니다.
현재 병원은 오래 전부터 의료장비 부족으로 인해 병원운영이 거의 마비된 상태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에서 갈수록 악화되다 보니 보건 분야에까지 심한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의약품의 부족상태는 물론 요즘 섭씨 40도 이상의 날씨에 뇌막염, 홍역, 기타 질병이 만연, 이미 1,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보건 분야 종사자까지도 위협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자주 있는 노조파업으로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거기에다 물가는 상승하고 파업으로 인하여 전기가 끊기고 수돗물이 나오지 않고 국민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공무원들의 근무태만 등 모두가 무관심 상태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의사 조규자의 보고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병원행정의 모순으로 마취의사가 없어 수술을 못하고, 7백만의 인구에 이비인후과 진료를 혼자서 당해내는데도(한 명의 니제르인이 있으나 출근도 잘 안함), 도와주는 인원이 없고 병원에 약품이나 기구는 완전히퇴폐함.
수개월간에 걸친 봉급지출 요망과 병원은 치료에 필요한 약품기구 등의 결핍으로 의사까지 전면파업에 들어가고 환자들을 포기하여, 이곳에 있는 저로선 환자들을 돌봐주려니 매우 힘들고, 공무원도 부분파업에 돌입했음.

입원환자에게 식사를 2개월간 못줄 정도로 병원의 경제적 사정이 매우어려움.
경제적 궁핍이 극단에 처함에 따라 강도 살인사건이 니제르 시내에서도 일어나 저녁에는 외출도 못하고, 응급환자 치료는 물론 약, 수술품 부족으로 환자치료에 막대한 지장이 있으며, 병원의 파업이 잦아 죽어가는 환자 앞에서 환자보호자 측과 신경전이 대단함.

 


△ 니제르 파견 당시 니아마 병원에서.


의사 김대수는 결핵퇴치에 힘써 환자수를 70% 이상 줄였고, 의사 조규자는 하루에 적어도 15건의 이물적출을 예외 없이 진행하며, 니제르 국민의 이비인후과 위생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니제르 정부의 신임을 받아 대통령가족의 주치의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치료나 수술을 해주고 나면 감사하다는 표시를 하는데, 마치 약 구입비나 교통비를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과 같은 그들의 순진한 동작을 보람으로 여기며, 의대생의 임상실습과 졸업생 심사위원 및 간호학교 강의 등 바쁜 일정도 소화하였습니다.

1995년. 의사 조규자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주년 총재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총재님.
안녕하십니까?
한해도 다 저물어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새로 다가오는 한 해를 좀 더 보람 있게 맞이하려고 하는 지금, 마음의 착잡함을 가라앉히며 이 글을 올립니다. 의학의 발전도 첨단에 이르러 병의 초기발견으로 완치가 가능한 현대의학에 맞추어, 본인의 혈뇨(현미경적)로 현지에서 검사 못하는,때문에 불란서로 가 수종의 병원검사로 소변에서 암세포가 발견된 관계로, 이에 따라 정밀검사를 하던 중 불란서의 계속되는 파업으로 검사는 지연되고, 니제르 행 비행기가 1주일에 1회밖에 없고, 1개월간 자리가 없다고(만원)하여 원래 모든 일에 철저한 Dr. Kim(부군)이 허락받았던 병가의 날짜가 완료되어 그대로 니제르로 돌아왔습니다.

본인은 니제르로 돌아와 정상적으로 계속 병원 근무를 무리하게 하고있으나, 부군 Dr. kim은 저의 건강 걱정으로 그동안 5kg의 체중이 감소되어 오히려 제가 보기가 곤란합니다. 좀 더 불란서에 눌러앉아 검사와필요에 따라 이에 치료까지 받았으면 마음도 편안하였겠지만, 체류기간이 짧아 매우 힘이 드는군요.

부인은 소변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지만 인술을 펼치기 위해 그냥 돌아와야 했으며, 다리가 골절이 되어 프랑스로 후송을 가거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2년간 치료기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남편도 척추골절이 생겨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의사 부부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냈고,항상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오늘날까지 어렵고 힘든 이곳 니제르에서 25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총과 사랑 때문이었다고 믿고 있다. 또한 매 주일마다 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례할 때 따뜻한 격려를 해주시던 니아미성당의 로마노주교님과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 주셨던 조국의 여러 친지 분들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기회를 통해 그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드리고 싶다.

의사 김대수는 1972년 대한민국 국가훈장 수교훈장 숙정장, 1973년,1982년,1988년 니제르 국가훈장, 1993년 제4회 상허대상, 1996년 제4회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습니다.의사 조규자는 1975년,1983년,1988년 니제르 국가훈장, 1982년 대한민국 국가훈장 수교훈장 숙정장, 1993년 제4회 상허대상, 1998년 KOICA 공로패, 1996년 제4회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힘든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 조국을 떠난 그들입니다.
이제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니제르는 아직도 그 때 그 시절을 못 벗어나며 세계 최빈국입니다. 청춘과 꿈과 야망을 모두 바친 김대수,조규자 부부의 어언 20년 세월을 되돌아봅니다.

대한민국의 영예를 떨쳤고, 니제르인의 생명을 지켰으며, 한국과 니제르 두 나라간의 상호협력 및 우의에 기여한 공로로 그들의 일생을 간추린다면 결례가 아닐까요.
멀고도 먼 그곳에서 숭고한 사랑의 인술을 펼친 그들 부부가 있어 오늘의 우리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 사택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니제르 파견 한국의료단 백용환, 김대수 의사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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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식사 후 느껴지는 춘곤증에 만사가 귀찮아
  지기 마련이지만 이 좋은 날씨를 귀차니즘에 흘려보내기엔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또 주말이면 어디
  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충만하지만 어디로 갈지 몰라 그저 방안에서 허송세월하기 일쑤이다. 지루
  함에 몸부림치는 가족들을 보면 안쓰럽고. 움직이자니 귀찮고, 숙소결정과 먹을거리까지 신경 쓸 일
  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러한 고민들을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불어 새로운 운치와 낭만까지 겸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누군가 “ 그런 곳이 정말 있나요? ” 라고 물어본다면  “  당장 자라섬 캠핑장으로 가세요!  ” 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유는 위의 사항들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가족, 친구, 연인 등 다양한 그룹이 자연 속에 몸을 맡기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에서 이국적인 경험을 할 수 있기에 더없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기기에 충분하다.

 


자라섬, 그 아득함으로

 

자라섬은 1943년 우리나라 최초의 발전전용 댐인 청평댐이 완공되면서 생긴 섬이다. 중도, 서도, 남도 등 3개의 섬과 2개의 부속 섬으로 이루어진 이 섬은 해방 이후 중국인들이 농사를 지었다는데서 ‘ 중국섬 ’ 으로 불리다가 1986년 “  자라목이라 부르는 늪산이 바라보고 있는 섬이니 자라섬으로 하자  ” 는 안이 가평군 지명위원회에서 채택되어  ” 자라섬 “ 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국적 낭만과 우리네 추억이 한가득

 

가끔 외국의 영화를 보다 보면 가족들끼리 오토캠핑을 즐기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바베큐와 와인을 즐기며 왁자지껄하는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 번쯤은 나도 저 화면 속의 인물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주5일 근무제도가 정착되면서 레저분야는 더욱 세분화 되고 전문화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캠핑문화도 다양한 부분으로 나뉘고 전문화되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텐트를 이용하거나 또는 캠핑전용 차량을 이용하고, 자연에서 먹고 쉬며 잠을 잔다. 바람 소리를 악단 삼고 하늘을 천장 삼으면 자연과 한 몸이 된다. 캄캄한 밤하늘에서 별을 헤는 낭만은 덤이다.

 

더욱이 나와 우리 가족이 함께 모든 것을 해결하며 야외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직접 배우고 체험할 수 있어 그 값어치는 더해진다. 또한 몇 가지만 숙지한다면 캠핑은 어려운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고, 자라섬 캠핑장은 캠핑에 필요한 편의시설들이 부족함 없이 갖추어져 있어 편리하게 이용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재즈와 드라마의 자라섬, ‘다양한 인프라 구축으로 더욱 즐거워’

 

서울을 떠나 약 40여 분 정도 지나면 여유로운 드라이브 코스를 거쳐 가평군에 들어선다.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탁 트인다. 한눈에 들어오는 산하(山河)는 한 폭의 동양화고 코끝에 닿는 신선함은 청량함 그 자체다. 초록의 자연과 파란 북한강의 하모니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러한 자연에 취할 때쯤이면 어느새 자라섬에 도착한다.

 

조금은 아쉽다. 이러한 생각이 들쯤이면 재즈의 섬이자 드라마의 섬인 자라섬이 나온다. 자라섬이 좋은 이유는 캠핑장 때문만이 아니다. 상상력과 추억을 더해주는 다양한 놀이가 즐거움을 선사하고, 다양한 체험은 어린이들에게 익힐 거리를 제공해 산교육의 장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장을 비롯해 동·서양의 식물 1만 8천여 종이 자라는 생태테마파크 이화원이 있어 여행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특히 매주 주말에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려 찾는 이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고 있다.

 

 

 

게으름과 맞바꾼 자유, 그리고 호텔 그 이상!

 

전국에 캠퍼들을 위한 다양한 캠핑장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게으르다면 절대 도전할 수 없는 레저문화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조금만 부지런하다면 보다 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특권이 주어진다. 단, 캠핑장에 들어선 다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놓고 자신의 귀차니즘을 최대한 발휘해도 좋다.

 

자라섬 캠핑장은 국내 최고·최대의 오토캠핑장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캠핑여행의 묘미는 독립적인 공간에서 자연과 접해 여가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28만3000㎡(8만5755평) 규모의 자라섬 오토캠핑장은 취사부터 샤워실까지 갖춰진 모빌 홈(통나무집) 40동과 캠핑트레일러 20동이 들어서 숙식은 물론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레저 차량이나 승용차를 곁에 두고 텐트를 이용해 야외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오토캠핑장 사이트 191면. 캐라반 사이트
115면이 준비돼 있다. 전기와 수도는 물론 들마루까지 갖춰놓아 불편함이 전혀 없다. 여기에 모험놀이공간, 조경테마공간, 인라인스케이트장, 다목적운동장, 수상카페, 공동세탁실과 샤워실 등 편의시설을 갖춰 오토캠핑을 위한 오아시스다.

 

한 마디로 자라섬 서도는 자연과 인간이 교류하는 친환경 여가공간이다. 호텔이나 펜션에 비해 경제적이고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어 어린아이들을 둔 가족단위의 여행으로는 최고라고 자부한다. 물론 호텔방안의 안락함과 편리함도 좋지만 여행의 값어치는 비교할 바가 아니며 충분히 거래할만한 가치가 있다.

 


캠핑 입문자들을 위한 제안 “당장 떠나라”

 

캠퍼로의 입문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준비할 부분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정보화시대인 만큼 집안에서 손가락 하나면 다양한 정보를 쉽게 습득할 수 있고 관련 동호회들이 온라인을 통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 실전에 필요한 정보를 배울 수도 있다.

 

또한 장비의 발달로 텐트부터 캠핑전용차량은 물론 그밖에 소소한 소품들까지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대여도 가능해 당장 떠나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텐트가 불편하다면 전국에 오토캠핑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어 펜션이나 호텔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온 식구들이 함께 즐기기에 좋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나와 우리가족이 함께 해결하며 야외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직접 배우고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유로운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캠퍼들 간 지켜야 할 매너와 배려는 기본이다. 더불어 다른 캠퍼들과 금세 친해질 수도 있다. 자연 아래 누구인들 금방 친구가 될 수 없겠는가.

 

또한 경력 있는 캠퍼들은 캠핑의 절반이 먹는 재미라고 말한다. 캠핑에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이다. 밑반찬은 준비해가되, 주 요리는 현장에서 만들어 먹어야 제맛이다. 평소 손에 물 한 방울 묻히기 싫어하는 남자들도 캠핑만 떠나면 발 벗고 나서서 음식을 만들게 된다. 캠핑에서는 요리도 하나의 놀이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 준비가 되었다면 “ 그대여 당장 떠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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