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않은 지병으로 저는 두 달 가까이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습니다. 제 몸 어딘가에 저도 모르는 돌멩
  이 하나가 숨어있었나 봅니다. 1.5cm밖에 안 되는 그 작은 돌멩이 하나에 쓰러진 저는 307호실이라는 새
  로운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가려 했던 것이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갑니다. 전 이곳에서 그동안 너무 익숙해서 차마 그 고마움을 몰랐던 인연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HD40인치 TV는 아니지만 저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오래된 TV라는 친구, 가끔씩 소화불량이 있는지 ‘쿵’ 하며 소리를 내는 낡은 냉장고 아주머니, 식사를 마치고 나면 이 방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넉넉한 의자 아저씨, 모든 것을 잊고 잠시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침대 부인…. 이들과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니 그들과 제가 은혜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하느라 사람에 시달기고 시간에 쫓기다보니 정말로 소중한 것을 망각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중 제일 미안한 인연은 제 아내였습니다. 결혼을 한 동반자라는 이유로 저는 아내에게 너무나 많은 요구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똑같이 직장 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집안 일은 당연히 아내의 몫이라 생각했습니다.

처가 일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함께하지 못하면서도 제 부모님께는 잘해주기를 은근히 원했고, 제가 일이 바쁘면 아무 말 없이 스스로 잘 살아주기를 바랬으며, 제가 힘들거나 지치면 무조건 제 편이 되어 위로해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저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사랑’이라는 콩깍지에 눈이 멀어 오늘도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병실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녁 먹는 것을 보고, 속옷을 챙긴 후 병실을 나서는 아내를 배웅하고 들어와 보니 아내가 놓고 간 편지가 보입니다.

  ‘  잠시 쉼을 선택한 당신에게! 바지런한 꽃들은 찬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모습을 다 드러냅니다. 봄 햇살 한 줌만 있어
     도 이렇듯 자연은 겨우내 잉태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네요. 여보!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멈춰 서서 자
     신이 온 길을 한동안 바라본다고 해요.


    너무 빨리 달려서 미처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기다리는 중이라는군요.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영혼을 돌아볼 줄
    아는 여유를 지닌 인디언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무것도 걱정 마시고 푹 쉬었다가 오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철없는 아내가.  ’


해가 지고 뜨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듯 아내와 저의 만남도 우주의 질서인 것 같습니다. 비록 남들처럼 호사를 누리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제 마음은 항상 아내 곁에서 함께 할것을 약속합니다. 아내를 비롯한 모든 인연들과의 은혜를 새롭게 깨닫게 해 준 돌멩이에게 새삼 고마움을 전하는 밤입니다.

조일국/ 전북 익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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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요즘 왜 이리 얼굴이 달덩이야?"


살찌는 것에 별 무감한 사람이라도, 이런말을 연거푸 듣게 되면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긴,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기를 두드리느라 손가락은 날로 섬섬옥수가 되어가지만, 나도 내 몸이 점점 무거워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해서, 지하철에서 내려 집까지 차를 타고 가던 거리를 걸어다니기로 했다. 역시나 처음 얼마간은 집에 도착하면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와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심장박동탓에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지나고 나니 점차 적응이 되었다. 그리고 참 오랜만에 걷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어느 한때 지겹도록 걸었었다는 생각과 함께 오래된 기억도 새롭게 했다. 아직 잔설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산허리를 지나 학교까지 무려 한시간 반 정도를 걸어 다녔던 오랜 기억이….

 

초등학교 시절 한 2년 정도를 난 왕복 3시간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산중턱에 자리잡았던 탓에 동행해줄 친구도 없이 혼자 걷는 것이 다소 지루했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힘들거나 아주 못할 것 같단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특히 겨울이면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내복을 껴입고 양말을 몇 켤레씩 신어도 이내 발가락이 곱아드는 것 같은 통증은, 이미 얼어버린 볼 사이로 눈물까지 찔끔 흘릴 만큼 고통스러웠다. 발을 동동 구르며 걸어다니곤 했으니 봄이 오는 소리가 남들보다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렇게 양말을 여러 켤레 신는 것이 추울 때는 땀때문에 발을 더 얼게 만든다는 사실도 모른채 그렇게 껴 신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산골의 봄은 참으로 더디게 왔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은 아직도 겨울이었고 4월쯤 되어야 비로소 바람이 순해지고 걸어가는 발걸음에도 생기가 돌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더디게 온 산골의 봄은 또 느닷없이 절정으로 치닫곤 했다. 순식간에 파랑 멍울만 들었던 꽃들은 노랗거나 진분홍빛의 꽃으로 금새 치장을 하고, 살벌했던 차가운 겨울바람이 내뿜었던 자리에 풋풋한 여린 풀내음을 풍기곤 했었다. 바로 어제까지 심심했던 길가에 마법처럼 단 하루만에 흐드러지게 피어버린 꽃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그다지 새롭거나 경이로울 것 없던 산골소년의 마음까지도 흥분시킬 만큼 장관이었다.

그런 날엔, 눈으로 꽃을 밟다보면 어느 샌가 집에 와있는 또 하나의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 시절 봄은 단순한 계절의 변화가 아닌, 힘들고 추운 겨울을 이겨낸 훈장처럼 어린 내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고, 나를 함 뼘 더 키웠던 듯싶다.

 

그리고 그 시절의 자양분이 결코 녹녹치 않는 지금의 시간들을 그럭저럭 보내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그때만큼 운치있고 아름다운 거리는 아니지만,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느 오늘도 열심히 걷는다.

김태훈/ 경기도 성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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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노인요양병원에 두 달 반째 입원해 계시던 친정어머니께서 결국 통증과 투병을 이기지 못한 채 끝내 여든 여섯으로 목숨을 거두었다. 내가 다섯 살 때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아버지를 여의고 오빠 두 분과 딸인 나를 키우느라 온갖 고생과 설움을 극복하면서 악착같이 살아오신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부모를 다 잃은 고아가 된 셈이다.

 작년 12월 새벽에 홀로 사시던 방에서 소변을 보러 일어났는데 평소에 잘 가던 화장실 방향을 잘못 
 알아 창문이 있는 문갑 쪽으로 일어서자마자 텔레비전에 부딪쳐 넘어지면서 엉치등뼈와 넓적다리가
 연결되는 고관절을 다쳤다.


연세가 고령이어서 수술해도 완치는 힘들며 혹시 마취했을 때 깨어나지 못하거나 기억상실이나 감퇴현상이 올 수도 있다기에 선뜻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었다.


가족들과 의논하고 최종 어머니와 상의 끝에 수술은 위험도가 높아 포기하고 병원에 입원해 중장기적으로 치료해 나가기로 결정하고 다친 지 한 달 만에 어머니를 입원시켜 드렸다. 여전히 통증이 심해 진통제를 놓고 약도 복용했는데 상당 기간 시간이 지났음에도 별로 차도가 없자 어머니는 실망하는 모습이 역력해지면서 마음이 약간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남편과 나는 “어머니, 마음을 굳게 하고 조급하게 여기시면 안 돼요. 원래 노인들의 병은 젊은이들처럼 빨리 낫지 않고 서서히 회복이 되거든요. 그러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낫게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해요. 마음이 약하면 병에 지는 법이랍니다.” 라며 병마와 싸워 이겨 나갈 것을 당부했다.

가래가 끓어오르며 호흡도 점차 가빠지면서 혹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지 은근히 염려가 되었는데

드디어 담당의사께서 “현 상태라면 이번 주일을 넘기기가 힘들 것 같으니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라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틀 전부터 간간이 산소호흡기를 대며 힘들게 호흡을 하더니 다음 날 오전 10시를 지나 숨을 거두고 한 많은 86년 평생을 일기로 운명하고야 말았다.


살아온 생애로서야 그리 안타까운 것이 없을지 몰라도 마지막에 제대로 치료를 못해 드리고 상처 부위의 고통과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안타까움을 당하게 한 자식으로서의 죄가 늘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병실에 입원시켜 놓고 내 할일은 하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남편은 직장을 마치면 자주 문병도 가고 식사도 억지로 시켜 드리곤 했는데, 딸인 나는 내 볼일 보고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너무나 죄송하다.

장례식장에서 펑펑 울어 댔지만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실 리도 없고 불효만 한 내 자신이 한스럽고 밉기만 했다.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 효도해야 한다는 속담도 있는데 이제는 돌아가 버렸으니 효도할 이가 없어 서글프기 그지없다.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화장하여 유골을 정관의 추모공원 내 유골함에 안치시켰는데 살아생전에 못한 부분을 이제부터라도 어머니가 편하고 좋은 곳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늘 가슴에 안고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살아 있을 때 효도하고 잘 해 드려야 돌아가셔도 후회 없이 마음 편하게 보내 드릴 수 있다는 교훈을 이번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박옥희/ 부산시 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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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해마다 봄이 되면 손님이 찾아왔다.
 
오라는 말도 없었고 온다는 소식도 없이 찾아왔지만 오는 이도, 맞이하는 이도 으레 당연하듯이 받아들
  였다.

 

 

손님은 인사도 없이 자기 보금자리 짓기에 바빠진다. 지푸라기에 흙을 묻혀 우리 집 처마 밑에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작은 입으로 지푸라기를 한 올 한 올 찾아오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누가 집 짓는 걸 가르쳐줬기에 저렇게 밑그림도 그리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지을 수 있는지 대단하기도 하였다.

 

올해도 잊지 않고 손님이 찾아왔구나 하고 인식할 때 즈음엔 벌써 집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 때부터 우린 한 지붕 두 가족이 되었다.
솔직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세들어 사는지 모를 정도였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가 함께 살았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손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는 게 무척 반가웠다.

우리 집에 찾아올 때는 부부지만 새 보금자리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 커가는 걸 볼 수 있
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고 큰 행운이었기 때문이다.  새끼가 태어나면 조그마한 집에 얼굴만 빼곡히 들고서 입을 크게 벌리고 엄마 새가 먹이 가져오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엄마가 맛있는 것을 사서 들어오는 걸 기다리는 모습과 비슷했고, 엄마 새가 먹이를 가져오면 서로 먼저 먹겠다고 먹는 모습이 우리 인간들의 어린 아이들의 모습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연두색과 청록색의 잎이 한창일 때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마루에서 할머니 팔에 누워 어린 새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귀엽고 예쁘고 신기한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새들의 이야기 소리가 익숙해질 때 즈음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침부터 손님 부부가 큰 소리로 울어대며 우리 집 하늘 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먹이를 찾으러 가지도 않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우리 집 식구들은 왜 저러나 모두 마당에 나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당시 우리 집은 흙집이었는데 벽을 타고 뱀이 올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손님 부부는 자기 집 주변에 적이 온다는 것을 알고 새끼들 걱정에 저렇게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아침부터 우리 식구들은 벽을 타고 올라가는 뱀을 떼어내기 위해 연탄집게와 긴 막대기를 동원해 한바탕 뱀 수거 작전에 나섰다. 긴 막대기로 뱀을 쳐가면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뱀이 떨어지자 연탄집게로 뱀을 집었던 것이다.

호기심 많은 남동생은 그 뱀을
들어 올려 다시 오지 말라고 집 밖으로 한참을 걸어 나가서 멀리 밭에다 풀어주고 왔었다. 다행히 새끼들은 무사했고 다 커서 돌아갈 때까지 건강했다. 손님들은 새끼가 날아다닐 만큼 되면 다시 떠나려 했다. 또 아무 말도 없이 잘 지내라는 인사도 없이 혹은 잘 가겠다는 말도 없이 그냥 훌쩍 떠난다.

언제 또 올 거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내년 이맘때가 되면 다시 오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서운했지만 잘 가기를 바랐다.
흙집이었던 우리 집은 벽돌집으로 바뀌고 할머니랑 누워있었던 마루도 없어지고 흙 마당도 없어지면서 손님들도 우리 집을 찾아오지 않았
다.

오지 못할 사정이 생겼는지 아니면 더 좋은 보금자리를 위해 떠난 것인지 행여 우리 집이 바뀌어서 찾지 못하는 건 아닌지 이제 기다
려보아도 오지를 않는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우리 집 처마를 자기 집인 양 살았던 제비 가족들. 한 지붕 두 가족이 살아서 행복했던 어린시절. 청록색이 아름다운 이 계절이 되면 나는 그 가족들이 그리워진다.


 

정현주 /  전라남도 장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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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늦은 시간 전화벨이 울렸다.

궁금한 마음으로 수화기를 받자 "너 이놈! 네가 저절로 큰 줄 아니?" 하는 호통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작은아버지였다. "아버지도 자주 찾아뵙지 않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몸도 안 좋은 노인 양반이 얼마나 서운하시겠어, 손자도 보고 싶을 테고, 자주 찾아가 뵈어라" 하시는 것이었다. 순간 아버지를 찾아 뵌 지도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 휴일을 맞아 딸아이를 데리고 부모님 댁을 찾았다.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좋아서 할아버지 품에 안기는 딸아이와, 오랜만에 보는 손자가 예뻐서 번쩍 안아 드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동안 자주 찾아뵙지 않은 것이 못내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손자와 놀아주느라 정신이 없으신 아버지와는 일상적인 이야기만 간간이 나누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점심 후 잠깐 누운 것이 잠이 들었나 보다. 깨어보니 시간도 좀 흘렀고 또 한 주일을 시작하려면 준비할 것도 있어 집으로 돌아가려고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주방 가스레인지 앞에 분주히 움직이는 아버지가 보였다.

 

  궁금한 마음에  "아버지 뭐 하세요?" 라고 묻자

  대뜸 "식사하고 가라" 하시는 것이다.

  "내가 된장찌개 끓였다. 멸치도 갈아 넣고 생땅콩 가루도 넣어 구수할게다. 안 해서 그렇지 나도 찌개 잘 끓인다. 한번
   맛 좀 볼래?" 
하시는 것이 아닌가.


잠시 안 보여 운동 삼아 자전거 타러 가신 줄 알았는데 된장찌개를 끓이고 계셨던 것이다. 정말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뚝배기에 담긴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평상시 부엌일을 거의 안 하시던 분이 아들이 뭐가 예쁘다고 이것저것 갖은 재료를 넣은 된장찌개를 손수 끓이고 계실까 하는 생각을 하며 두부와 함께 국물을 한 수저 떠서 맛을 보니 구수하고 담백했다.

그렇지만, 가슴 저 밑에서 올라오는 뭉클하는 마음에 맛있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와의 사이에 놓여있는 '마음의 벽'을 허물 생각을 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먼저 그 벽을
  허물려고 하시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자식들의 양말이며 겨울 스웨터를 손수 뜨개질하여 만들어 주시는 자상한 분이었다. 하지만, 남의 의견은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성품 때문인지 벌인 사업마다 계속 실패를 했고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싫었고 시간이 갈수록 반항심이 커졌다.

그런 나의 불만을 아셨는지 언젠가 술을 많이 드신 날 '내가, 나 혼자 잘살려고 그런 줄 아니. 나쁜 놈! 애비 너무 미워하지 마라' 하시며 서운한 속내를 비치셨다.

 

이제는 나도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 살다 보니 아버지의 그 말씀을 조금은 이해하면서도 아버지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날 아버지의 애틋한 정이 담긴 된장찌개 맛은 그래서 더욱 잊지 못할 것이다.

 

장주현/ 서울시 광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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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조그마한 병원에 근무하는 병리사입니다.

 

  환자도 많고 검사도 많아서 늘 바쁘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곤 했죠. 정신없이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나면 
똑같은 다음날이 기다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그런 하루하루. 매일의 지친 일상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이 일 말고 또 무얼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1004라는 이름이 매일 아침 내게 안부를 묻는 메시시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궁금하기도 하고 내 주위에 매일 아침 내게 보낼만한 사람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짐작 가는 사람은 없었죠.


"아침은 꼬박꼬박 챙겨 먹어요. 그게 건강에 좋아요..."

"오늘 아침은 추우니깐 옷을 따뜻하게 입으세여..."


"상쾌한 아침입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아침에 받는 한통의 문자가 이렇게 행복하게 해주는지 그전엔 몰랐거든요.


얼마 후, 그 문자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장애인 전국체전 기간에 일일 도우미를 했었거든요. 처음에는 반은 강제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별 생각이 없었는데 끝나고 나니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더라구요.

한 아저씨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36세의 장애인 아저씨였어요. 뇌성마비를 앓고 있어서 휠체어를 몸 삼아 무척이나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지요.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면 달랐습니다. 게다가 숟가락질도 제대로 못하시면서 내가 밥 먹는 것까지 챙겨주셨어요.

도시락이 모자라서 밥을 못 먹은 적이 있었는데, 여기저기 얻으러 다니셨나 봐요. 땀이 범벅되어 저한테 도시락을 건네시며 쑥스러우신지 씩 웃으시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날 뻔했습니다.


몸은 제가 도움되었을지 몰라도 마음은 제가 오히려 도움을 받았습니다. 조그만 것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늘 불평만 했던 저에게 그 아저씨의 행동 하나하나는 저에게 감동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저에게 이렇게 감동을 주시네요. 불편한 손가락으로 저에게 문자 한통을 보내려고 남보다 몇 배는 힘드셨을 거예요.

항상 일상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고 무언가의 탈출구만을 찾아 헤매는 저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지네요. 내일 아침은 제가 문자를 보낼겁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안미현/전라북도 남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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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보다 조기축구를 더 사랑하는 남편. 건강이 최고라며 주말마다 거의 목숨 걸고 나가서 공을 차고 돌아온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어깨가 좀 결린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축구를 하다가 근육이 놀랬나 싶단다. 

 

 "오십견인가? 그게 요즘은 사십대에도 찾아와 사십견이라고도 부른다는데…."

 

남편은 계속 기침을 하면서 급기야는 가슴까지 결린다고 고통스러워했다. 불안한 마음에 병원에 가봤더니 뼈에 이상은 없고 근육에 약간의 염증이 있으니 마사지나 열심히 하란다.


다음날 아침, 화장대에 놓인 파스가 눈에 띄기에 옳다구나 싶어 막 출근하려던 남편의 와이셔츠를 걷어 올리고 정성스레 파스를 붙여 주었다.


"여보, 이게 건강파스예요~옹. 아내의 사랑이 듬뿍 담겨진거 알죠?"
  라며 내가 생각해도 제법 닭살 돋게 애교를 부려줬다.


아내의 친절한 '응급 서비스'를 받은 남편, 만족스런 얼굴로 회사로 내달린다. 저녁무렵, 남편이 좀 일찍 돌아왔기에 파스 효과 좀 봤나 물어봐야지 하면 쏜살같이 뛰어 나가 반갑게 현관문을 열어 젖혔다. 그런데 얼굴을 대하자마자 웃는 얼굴로 맞을 줄 알았던 남편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마디는

"이 파스 순 엉터리 아냐? 왜 더 아프냐?

라며 극도로 짜증 섞인 분통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예기치 않은 반응에 "그럴 리가, 파스가 오래된 건가?" 남편 옷을 걷어 올리고 파스를 확인하려던 나는 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곤 배꼽을 쥐고 폭소를 터트리고야 말았다.


남편의 등 피부에 붙어있어야 할 파스가 하늘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요즘 파스는 피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파스 윗부분에 보조 끈적이 덮개를 추가로 붙여 2중으로 부착하게 돼있다. 그런데 내가 그만 피부에 닿아야할 파스 부위를 보조 끈적이 덮개에 붙인 채 파스 겉면이 남편 피부에 닿게 해서 거꾸로 떡하니 붙여놓은 것이다.

"호호호호호. 이녀석이 왜 거꾸로 붙어있을까? 거 이상하네~. 호호호호호, 하하하하하"


나의 파안대소에 놀란 남편은 '이 마누라가 왜이래?' 하며 노려봤지만 한동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아이들도 상황을 확인하고서 "크크큭, 울 아빠 되게 억울하시겠다."라며 놀려댄다.

다음날 한약방에 가서 십전대보탕을 지어다 남편에게 바치고 나서야 남편의 억울함에 조금이나마 속죄(?)할 수 있었다.
직장 다니느라 힘든 모든 남편 여러분, 새해 건강하세요 ~옹!

 

권희숙/ 부산시 연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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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야, 귤 한 개 더 넣었다.”

이렇게 다정한 말을 해주시는 분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당연히 친정 엄마 아니면 시어머니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결코 아닙니다. 그럼 누구? 지금부터 이분에 대해 말씀 드리렵니다. 이분은 바로 ○○은행 앞 노점에서 과일을 팔고 계시는 할머니고요. 그 다정한 말은 바로 그분께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랍니다. 저랑은 인연이 꽤 되었지요.

사람들이 수시로 오고가는 은행 앞 고정된 자리에서 항상 계시기 때문에 그 은행을 자주 이용하는 저로서는 참새와 방앗간이 된 셈이죠. 저를 멀리서 보시곤 소리치는 한 말씀.

“오늘 포도 들어왔어! 아주 싱싱해! 한 바구니 가져가, 옛다! 오천 원만 받을게.”
하시며 내미는 거친손 끝에 걸쳐진 검은 봉지는 어느새 제 손에 들려 있지요.


“오늘 포도 들어왔어! 아주 싱싱해! 한 바구니 가져가, 옛다! 오천 원만 받을게.” 하시며 내미는 거친손 끝에 걸쳐진 검은 봉지는 어느새 제 손에 들려 있지요.

할머니 동작 정말 빠르죠? ‘사겠다. 안 사겠다.’말할 기회도 없이 그냥 씨익 웃으며 돈을 드리면 되는 거죠. 제가 볼 때 할머니 장사 수단이 엄청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꼭 하시는 말씀 “에미야! 작은 것 한 송이 더 넣었다.” 하시며 거친 손으로 주름 패인 이마를 쓸어 올리시며 저를 보는 표정은 두 얼굴의 모습이죠.

고마움 반, 미안함 반의 그 어색한 미소 있잖아요.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계신 할머니의 언제나 변함없는 뽀글파마와 그 웃을 듯 말 듯한 그 미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똑같은 모습에서 저는 제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곤 합니다.

어쩌다 한번인가 할머니께서 안 보이길래 ‘두리번 두리번’ 하자  “에미야! 나 여기 있다” 하시며 앉아계신 곳은 조금 떨어져 있는 노점친구 할머니의 채소 가게였습니다. 숨차게 뛰어올 거리는 아니었지만 숨을 헐떡이며 뛰어 오시어 하시는 말씀

“어제 딸기 사 갔잖아. 벌써 다 먹었어?”

저는 “아니요. 할머니가 안 보이시길래요.”

할머니는 “내일와. 내일 딸기 또 들어 올 거야. 오늘 것은 어제 팔던 거라서 덜 싱싱해.” 이 상황에서 저는 당연히 할 말이 없겠죠?

“할머니 많이 파시고요.” 하고 가면 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가슴 한편이 찡한 건 왜 인지.

할머니께서는 그다지 많지 않은 몇몇 과일을 팔고 계셨지만 또 한 가지의 과일이 있었다는 것을 저는 항상 느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먹을 수 없는 그런 과일이 더 있었지요. 그 과일은 바로 ‘정’ 이라는 과일이었습니다. 바로 할머니의 마음속에 담아두고 파는 과일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할머니께서 싸 주신 검정 봉지는 언제나 다른 봉지보다도 더 무겁게 느껴졌나 봅니다.

어느 날인가 급해서 막 뛰어가는 저를 보셨는지 제 뒤통수에 대고 할머니는 말씀하셨죠.

“은행 볼일 다보고 들려. 알았지?” 하고요. 그래서 제 발걸음을 또 망설여지게 하셨지요.

 “과일 집에 있는데요?” 하면
할머니께서는 “포도 다 먹었잖아, 오늘은 단감이 아주 맛나.”


하시며 저를 또 유혹하십니다. 정말 ‘귀여운 악마’ 같은 할머니의 유혹에 넘어가 오늘도 제 손에는 묵직한 단감봉지가 저희 집까지 따라 옵니다. 딸기, 수박, 포도, 사과, 감 그리고 귤…. 이렇게 봄부터 가을까지 싱싱한 과일을 먹을 수 있어 언제나 저는 행복하답니다.

하루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면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만났던 이들을 떠올려봅니다.

오늘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뽀글 파마머리의 할머니 모습…. 아마 꿈속에서도 저를 또 유혹하지 않을까요?

“에미야~” 하고 말입니다.

 

지영숙/ 강원도 원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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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을 실로 동여맨다. 어디서 본 가락대로, 일단 바늘을 콧김으로 소독한다고 소독
 하고 엄지손가락에 가져다 대는데…. 도저히 내 손가락은 못 찌르고 애꿎은 살만 슬슬 파내고 있다.

 

 

더부룩한 속을 부여잡고 소화제만 연거푸 먹어보지만, 소화제조차 얹히 공간 위에 더 얹혀졌는지 전혀 풀어주지도 못하고 머리조차 띵해졌다.

어린시절, 내가 체할라치면 할머니는 내 손가락을 따주셨다. 내 엄지손가락에 실을 동여매고, 바늘쌈지 안에서 제일 깨끗한 바늘 하나를 골라. 머리카락 속에 한번 쓱쓱 문지른 후 콧김을 쐬어 가차없이 손가락을 찌르셨다. 그럴라치면 그 시커먼 피와 함께 속이 뻥 뚫린 듯하던 신기한 경험.

 

그 경험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라 할머니 흉내를 내 보려는데 차마 내가 내 손가락을 못 따고 있는 것이다.


"아, 아, 싫어, 싫어…."


뭘 어떻게 먹었는지 단단히 체해 병원까지 다녀왔지만, 열도 좀체 내리지 않고 끙끙 앓는 보던 할머니가 바늘 쌈지를 챙기셨다.


"조금만 참아봐, 그럼 속이 시원해질 테니…."


아니, 속이 답답한데 왜 애꿎은 손가락을 따려는지, 차라리 배 어느 부분에 침을 꽂는 것이라면 이해하겠는데, 그 생뚱한 할머니의 처방에 적잖이 당황했다.
어쨌든, 어린 나는 할머니의 이 원시적인 처방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서 온갖 발버둥을 다 쳤지만 결국 사촌형들에게 붙잡혀 할머니께 손가락을 따이고 말았다.

"앙앙, 앙앙…."


몸도 아픈 데다 울고불고 하느라 정신이 없던 터라, 사실 아픈 줄도 몰랐었다. 손가락에서 나오는 시커먼 피가 무섭기도 하고 뭔가 당한 것 같은 분한 마음에 한참을 울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라? 갑자기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해지고 한참 오르던 열도 잡히는지, 머리가 개운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안 한다고 발버둥치던 방금 전의 내 모습이 생각나고, 할머니가 해주신 처방이 날 낫게 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더 아픈 척하면서 할머니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후, 난 속이 더부룩하거나 체한 것 같으면 할머니에게 손을 따달라고 했고, 할머니는 그런 내가 신기한 듯 웃으시면서 늘 하던 대로 제일 깨끗한 바늘 하나를 꺼내 내 손을 따주셨다.


이젠, 체할 때마다 내 손을 따주시던 할머니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맞벌이하던 부모님 대신 어린 나를 돌봐주시던, 내게는 엄마 같던 할머니가 총총히 떠나시던 날, 다 큰 손자는 되바라지게도 자신의 바쁜 일상을 핑계로 제대로 찾아 뵙지도 못했다.


따려다 못 따, 피부의 표피만 긁어낸 엄지손가락의 벌겋게 부은 자리를 보니, 왠지 마음이 먹먹해지고 가슴만 더부룩해진다. 그 더부룩함은 제대로 따지 못한 엄지 손가락 탓만은 아니었다.

 

김동은 / 서울시 송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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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미네 집으로 넘어가는 밭둑에 새로 꽃피운 조팝나무가 가득하다.

꽃 더미를 헤집으며 혼자 놀던 나는 기겁하여 놀라 뒤로 움찔 물러섰다.  갑자기 암탉 한 마리가 날개를 치며 튀어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놀란 건 그 다음이다. 덤불 밑의 우묵한 바닥에 여섯개의 알이 하얗게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종미네 닭이 낳은 게 틀림없었다. 제 둥우리를 두고 왜 여기다 낳았을까?'


 '종미네 집에 가서 알려줄까. 아냐, 이런 데다 낳은 걸 꼭 종미네 알이라고 할 순 없지.

 매일 하나씩 나을 테니 다음에 가져가?'

 

절반인 셋만 가져가기로 작정한 나는 살그머니 집어 들어왔다. 온기가 가득했고, 옷 앞자락에 주섬주섬 담았다. 갑자기 나타난 종미 아버지의 우악스런 손아귀에 뒷덜미를 움켜잡히는 섬뜩한 긴장 속에서 몇 걸음 옮기던 나는 끝내 발길을 돌려 알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말았다.

집으로 오긴 했으나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아까 본 여섯 개의 달걀뿐이었다. 어두워지길 기다려 다시 갔다. 조심하며 알이 있을 곳을 더듬었다. 밤인데도 암탉은 알을 꼭 품고 있었던 것이다. 억센 부리로 손등을 콕콕 찍으며 버티는 어미를 밀쳐내고 알 여섯개를 몽땅 뺏어 와버렸다. 조심스레 가져온 알을 헛간의 빈 항아리 안에 숨겨놓았다.


이튿날, 평소보다 일찍 서두른 나는 남들보다 앞서 학교로 향했다. 학교 앞 가게에서 돈 대신 달걀도 받아주는 걸 알고 있었다. 가게엔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이 항상 쌓여있다.

  어제부터 맨 앞에 보이는 풍선에서 눈이 떠나질 않았다. 풍선 뽑기.


남들이 못 뽑고 남은 커다란 풍선 몇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나를 꼬드긴다. 종이판에 동그란 표시가 있고 그걸 뜯으면 뒤에 적힌 번호가 씌어 있는데 그 해당번호 풍선을 갖는 것이다.

 

달걀 값 대신 받은 돈을 다시 건네준 나는 당당하게 숫자판을 떼어냈다. 하지만 가게 아주머니는 한쪽 귀퉁이에 보일 듯, 말 듯 붙은 초라한 풍선을 내주는 게 아닌가. 순간 난 멍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난 무엇에 단단히 홀린 것처럼 하루 내내 공부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야 난 알게 되었다. 주인이 미리 뒤의 번호를 들춰본 다음, 좋은 것의 번호는 미리 다 뜯어내 버렸다는 것을….


풍선이 아쉽긴 해도, 넉넉한 돈으로 모처럼 군것질까지 즐겼으나 턱없는 행복은 단 하루도 못 채우고서 깨졌다. 집에 돌아와 책 보따리를 풀어놓자마자 종미 엄마가 쫓아온 것이다.


" 너 종미네 달걀 훔쳤어? "


엄만  '아니오.' 란 당당한 대답이 나오리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거다. 확신에 찬 그 눈빛에 눌린 내가 죽어가는 소리로 부인을 했지만 이미 증거를 잡고 찾아온 종미 엄마의 다그침을 견뎌내기엔 너무 어리숙했다. 엄마한테 손목을 틀어 잡힌 나는 정신 못 차릴 만큼 두들겨 맞았다.

이튿날 엄마는 이웃동네까지 다니며 수탉 있는 집들을 찾아 알을 모아다 종미네를 주었고 세이레, 이십일을 지나 종미네 암탉은 검정, 노랑, 갈색 등 여러 색깔이 섞인 병아리 열다섯 마리를 깠다.

흔한 씨암탉 한 마리 못 키우는 형편 때문만 아니어도 그 뒤로 난 계란을 입에 대지 않는다. 먹는 그대로 되올라 오니 어쩔 수 없었다. 그 후 40여 년이 흘렀고 또 다시 조팝꽃 피는 계절이다. 지금도 내 동심의 흉터에 새살이 돋기는커녕 천형처럼 깊이 남아 지워지질 않고, 모르긴 해도 생명 다하는 날까지 난 달걀을 입에 넣지 못할 것 같다.

 

진상용/ 인천광역시 부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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