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모리타니아의 슈바이처  최상일

그러나 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10월이 막바지에 들면서 누아디부의 기온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사하라 서쪽 끝자락에도 계절이 바뀌고 한해도 막바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나라 밖에서의 일을 마무리하면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봅니다.

 

 

 

 

   처음 아프리카 땅에 발을 들였을 때는 벌써 13년 전의 일입니다.

 

종족분쟁이 한창이던 르완다 난민촌에서 온통 검은 얼굴 검은 몸에 유난히 흰 이빨의 낯설던 아프리카인들의 첫 인상이 기억납니다. 먹구름이 드리우고 비를 뿌리던 아름다운 키부호수 위로 하혈하던 산모를 모터보트에 태우고 절박한 심정으로 키를 잡고 후송하던 일의 기억도 선명합니다.

 

캄보디아에서의 2년은 주로 말라리아와 지뢰 그리고 험한 도로 사정에 얽힌 경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증상이 시작된 지 2~3일 만에 혼수상태에 빠져버리는 열대열 말라리아의 무서움과 산간마을 곳곳에서 수시로 불거져 나오는 지뢰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주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직도 크메르루즈 잔당의 영향 아래 있던 북부 산간지대를 유엔 안전 담당관의 인솔 하에 답사하던 일과 우기에 마을로 난 길이 뻘밭으로 변해버려 소달구지를 타고 진료소로 향하던 일의 기억도 새롭습니다.

 

사막의 나라 모리타니아는 참 메마르고 혹독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심성도 기후와 어느 정도 닮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특히 정착초기에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수술이 필요했던 응급환자들과 딴청을 피우는 팀원들 사이에서 느꼈던 당황스러움을 기억합니다.

양철지붕의 열기, 파리 떼의 성가심과 함께 빈민진료실 문을 기웃거리는 염소와 벽에 난 틈새로 들락거리던 고양이의 정경도 떠오릅니다. 조가비처럼 엎드린 누아디부 잿빛 시가지 사이로 석양이 지고 있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계속되어오던 한국정부의 제3세계 의사파견프로그램이 종료되기로 결정되면서 이제 귀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구촌 주민들을 위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동기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는 이곳에서의 활동에 큰 힘이 되어왔으며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보름 쯤 후면 그간 사용하던 책이며 세간을 컨테이너로 부칠 예정이며, 귀국날짜는 12월 4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서신이 모리타니아에서의 마지막 통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간 부족함이 많은 활동에 성원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건강한 활동 그리고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며, 한국에 도착하면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누아디부에서 최상일......

 

 

  2007년 11월 18일

 

모리타니아(Mauritania) 누아디부에서 의사 최상일은 자신의 활동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지원하였던 한국의 카페회원들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전합니다.


얼마나 고되고 얼마나 험하고 얼마나 혹독한 노정이었을까요.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의 편지는 자신의 험했던 역경을 담담히 회고하면서 서정성을 갖춘 낭만적인 문학미가 물씬 배어 있습니다.

1955년에 태어나 고교 시절부터 제3세계에 가서 봉사하는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는 카이스트 전기과에 진학했고,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덕연구단지에서 전자공학을 연구하면서도 꿈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부친의 병환을 계기로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30살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처자가 있는 가장의 몸으로 의대로 학사편입해서 39살에 부산 고신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부산의 외과병원에서 7년을 근무하였지만 한시도 자신의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침내 그는 자원봉사 자격으로 1994년 가족을 남겨둔 채 전쟁이 한창이던 우간다로 향했습니다.

20만 명이 수용된 난민캠프에서 2개월간 구호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캄보디아에서 2년간 유엔 자원봉사 의료단원으로 일했습니다.
킬링필드로 유명한 캄보디아, 그 중에서도 태국과의 국경지대인 북부 지역은 아직도 지뢰가 살아있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얻지 못한 극빈층이지뢰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말라리아 위험 지역일 뿐만 아니라 도로 사정도 워낙 좋지 않아 의료 사각지대였습니다.

유엔에서 추천한 비교적 안전한 지역 대신 스스로 이 지역을 택했습니다. 이유는 너무나 명료했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도 의사가 필요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왕복 4시간이 넘는 비포장도로는 소형트럭으로, 진흙탕은 소달구지나 오토바이로 약품 상자를 끌고 다니며 야전병원 의사처럼
환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2000년에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모리타니아 누악쇼트 국립병원으로 부임했습니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모리타니아, 의과대학이 없는 인구 약 300만의 사막국가는 전국에 외과의사가 30여 명에 불과하여 외과 질환으로 인한 수술적 치료가 어려웠습니다.

 

현지 외과의사가 꺼리던 대수술을 솔선수범함으로써 직접진료를 통한 의료기술 전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한편, 외과전공의를 교육하여 전문의를 배출하였습니다.

 

그가 KOICA에 보고한 2003년 1/4분기 활동내용을 간추리면, 전신 혹은 척추마취 하 수술을 113건, 국소마취 하 수술을 29건 시행하였습니다. 외래진료는 512명을 진료하였으며, 병실 대 회진은 12차례가 있었고, 야간 및 휴일 당직근무 총 22일이었습니다.
고군분투의 의료 활동이었습니다.

2005년 9월부터는 의료 환경이 끔찍하고, 외과의사도 절대 부족한 수도에서 500km 떨어진 누아디부 국립병원을 자원하였습니다.

진료 외에도 빈민지역민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무의촌 진료시술을 실시하는 등 ‘인간생활의 기본적 욕구’라는 뜻의 인도적인 BHN(Basic Human Needs)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였습니다.

 

 

  낡은 수술대 하나에 플라스틱 테이블 두 개가 있다.

 

천장의 떨어져 나간 나무판자 사이로 햇빛을 타고 들어오는 먼지바람으로 실내는 먼지투성이다.
“제가 보따리 장사입니다.”
최박사는 큰 가방 두 개에서 손 씻을 물이 담긴 10리터짜리 플라스틱 물통과 물주전자를 먼저 꺼냈다.

 

그리고 도시락 크기의 알루미늄 상자에 든 의료기구들과 진료기록을 위한 노트, 휴지 뭉치와 밴드를 꺼냈다.
파리 떼와 모래가 날리는 진료실. 수술대에 쌓인 먼지를 손수 닦아 내고 첫 환자를 맞았다.

야전병원보다 더 열악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0대로 보이는 한 남자의 38년간 지녀온 복부지방 혹 제거 수술이 시작됐다.
마취주사, 메스 선택, 약품 찾기, 수술 봉합, 소독…… 붕대와 밴드, 자르고 붙이기까지 모든 작업을 최박사 혼자서 했다.
수술 중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쳐낼 수 없었다.

 

“손이 하나만 더 있어도…….”
최박사는 “큰 수술 때는 집사람이 와서 도와준다.”고도 했다. 대부분의 의료장비와 약품은 KOICA에서 지원받지만, 간단한 소모품들은 자비로 구입했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들이닥친 두 번째 환자의 머리에 난 혹을 제거하고, 세 번째 환자의 이마에 난 혹을 제거했다.

세 환자를 수술하고 다른환자를 진료했다.

 

행장 스님의 《아프리카 대륙 자전거 종단기》에 실린 누악쇼트 서남쪽 ‘시지엠’ 지역의 빈민촌 진료소 장면을 그린〈사하라 ‘모래 늪’에서 만난 아름다운 의사 최상일〉의 한 장면입니다.

스님은 의사 최상일을 전쟁지역과 오지를 누비고 다니는 야전병원 체질이라 말합니다.

 

의사 최상일은 어떤 사람일까요.  독한 사람일까. 약한 사람일까요.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포연이 자욱한 전장이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두메든 가리지 않는 진정한 의사였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그곳에서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가 있었기에 그들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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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의 슈바이처  장기순

봉사는 내 생애의 가장 큰 보람

 

 

 

 

 

 

 

  한국이 오히려 외국같다

 

이 말은 의사 장기순이 1997년 유석창박사가 제정한 상허대상을 수상하기 위해 20년 만에 세 번째로 귀국하면서 고국을 낯설어 하며 한 이야기입니다.

1934년에 태어난 그는 1960년 전남대학교 의대를 졸업하였고, 광주적십자병원을 거쳐 충남 금산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했으며, 10여 년 동안 재산도 많이 모았습니다.


그는 1977년 의학전문지에 실린 아프리카지역 정부파견의사 모집광고를 보고 새 삶을 계획했습니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조국을 위해서는 이 만큼 일했으면 됐다. 이제 정말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일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처음엔 병원도 잘되고 아이들도 아직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 반대가 심했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오자며 가족을 설득했습니다.  계약기간인 2년만 근무하다 오기로 약속하였습니다.


1977년 겨울. 그는 부인과 세 자녀를 데리고 생면부지의 땅 아프리카 튀니지(Tunisie)로 떠났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남은 생애를 아프리카 환자들과 함께 지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에 인접한 튀니지

 

 

그곳에는 풍토병이 없고 의료수준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는 튀니지의 스팍스(Sfax) 대학병원 산부인과 의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곧 이동시술반 차량을 다섯 팀으로 꾸렸습니다. 이후 시골 구석구석을 돌며 하루 최고 20건씩 무료 불임시술을 했습니다.

그 후 10년간 총 7,000건의 복강경시술을 한 결과 가구당 7명의 자녀수가 평균 3명으로 줄어드는 성과를 냈습니다.

튀니지 국민들과 정부의 신임을 얻어 부임 6년째 되던 해 병원장에 취임했습니다.

 

아내가 이제 그만 고국으로 돌아가자고 몇 번이나 졸랐지만, 한 참 진행 중이던 가족계획운동을 중도에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1986년까지 10년 동안 고국에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일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그가 보고한 1986년 4/4분기 활동 결과입니다.

  산부인과 분야 질환 치료(치료인원 1,386명).
  난소낭종 제거술 1건, 자궁경관 낭종제거술 5건, 자궁외 임신수술 1건.

  자궁하수증 복원수술 1건, 계류 유산 제거술 31건, 유방농양 절제술 5건  

 
 
의약품 및 의료장비의 부족으로 의료 활동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580건의 복부소절개술에 의한 여성 불임시술, 9,000여건의 복강경을 통한 여성 난관 불임시술, 6만 천여 건의 산부인과 질환 진료수술, 10만 2천의 산부인과 환자 진료를 시행하였습니다.

정부파견의사 계약 기간도 끝났습니다.
그는 튀니지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한국에 있는 의사 월급의 50% 수준밖에 안됐지만, 그때만큼 보람 있고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더 험한 곳, 모리타니아(Mauritania)로 갔습니다.

 

사하라사막 서부의 신생국 모리타니아는 튀니지와는 달리 가난한 국가인데다, 일부다처제의 영향으로 가구당 8~15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처음 그가 모리타니아 수도에 있는 누악쇼트 국립병원에 부임했을 때는 의사들도 거의 없었고 의료장비도 청진기에 간단한 X-Ray 장비가 고작이었습니다.  국민들도 10살만 되면 결혼하기 시작해 보통 6~7명의 자녀를낳았습니다.

 

그는 장관을 찾아갔습니다.
가족계획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산아 제한 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더니, 이슬람국가로서의 풍습과 전통 운운하며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시술기구를 이용해 시범을 보여주며 설득해 마침내 정부의 지원을 받아냈습니다.
 
현지 원주민들은 그를 ‘독토르(Doctor) 장’이라 부르며 따랐고, 정부도 보건부 자문관으로 위촉했습니다.

 

낙태가 금지되었기에 아버지 없는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할 때,
의사 장기순은 자신의 성을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땅 모리타이니아에는 한국의 ‘장씨’ 성을 가진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의사 장기순은 모리타니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 선원 2,000여 명을 공휴
일과 주말을 이용해 10년간 무료 진료했습니다.
그곳에서 13년의 세월이었습니다.

 

23년간, 그의 튀니지와 모리타니아에서 인술활동은 고귀한 희생이었지
만,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어느 포털사이트 검색란에 '의사 장기순'을 쳐 보았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 중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 좀 찾아주세요.’라는 어느 중학생의 질문에 반갑게도 의사 장기순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1999년 정부는 의사 장기순에게 수교훈장 창의장을 수여했습니다.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다시 아프리카 모리타니아로 돌아가야 합니다.
후임의사가 갑자기 오지 않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은 아주 행복하다며 빈자리를 지키러 다시 간다고 하였습니다.

 

의사 장기순은 1988년 재외국민포상 대통령상, 1989년 대통령 표창,
1996년 적십자사 박애장 은장, 1997년 상허대상, 1999년 수교훈장 창의장을 수상하였지만, 요즘 사회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 중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에 더 깊은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장기순박사가 1989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고 있는 모습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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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룬의 슈바이처  장계만

  민간외교전선 이상없다

 

 

 

 

 

 

 

 

자식들이 아빠인지 몰라볼 만큼 새카맣게 탄 얼굴로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의사가 있었습니다.
의사 장계만.


 

그는 1945년에 출생하여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림대학교 한강성심병원에서 일반외과를 전공하였으며, 육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당시 외무부에 근무하던 친구의 추천으로 1977년 정부파견의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고국에 남겨둔 채 인술을 펴고자

아내와 함께 동경하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두툼한 겨울 잠바를 걸치고 파리를 경유하여 카메룬(Cameroon)에 도착했지만, 국제공항은 입국대가 턱없이 높아서 짐을 밟고 올라서서 입국 수속을 마쳐야 할 정도로 허름한 시외버스 정거장과도 같았습니다.

 

처량하고 쓸쓸하였으나 내심 마음을다잡고 한국대사관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미터기에 표시된 대로 요금을 건네는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무뚝뚝하던 택시운전사가 갑자기 긴장하더니 짐도 들어주고 사근사근 대하는 등 마치 VIP를 모시는 자세로 변한 것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프랑스 프랑과 카메룬 쎄파프랑(CFA)을 혼동하여 택시비의 100배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택시운전사가 내려 준 곳이 태극기가 펄럭이는 한국대사관이 아니라 인공기가 휘날리는 북한대사관이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비동맹권 아프리카 국가를 대상으로 한 외교 강화 추진 차원에서 1972년에 카메룬과 북한과의 수교가 이뤄졌습니다. 대한민국과 카메룬과는 1969년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여 왔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서로의 입장을 견지하는 등 양국은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택시는 다시 달렸습니다.
태극기를 보고 그제서야 그는 안심했습니다.
대사관으로 들어가 그의 입국을 당당히 알렸고, 다음날 오기로 했는데 벌써 도착하였다며 대사관 직원들은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카메룬 바멘다병원(Bamenda Provincial Hospital)과

수도 야운데보건소에서 2년간 외과과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한때 나이지리아 땅인 바멘다는 수도 야운데에서 서울~ 부산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영국 식민지로 있었기에 그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현지인들은 소위 카메룬과 서부아프리카에서 널리 쓰이는 크레올어(Creole Language), 또는 ‘비진잉글리쉬’라고도 하는 현지영어를 사용하는 데 처음에는 어색하였지만 잘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바멘다는 해발 2,000m로 항상 가을 같이 서늘하여 말라리아 환자가 없었습니다.

일반외과 과장으로 환자를 진료하는데, 특히 탈장과 화상환자가 많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였고, 수술은 책을 보며 연습하였습니다. 때 전공 중 그만둔 마취과 의술을 현지에 전수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탈장환자 수술을 하였는데 성공적이었습니다.

처음 수술할 때에 흑인은 피부가 까만데 속은 어떤 색깔일까 궁금하였지만 우리와 같았으며 피부 색깔만 달랐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너무 태연히 받아들였습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하여 환자는 의사를 한 번만 보고 죽어도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만큼 의사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고, 의사 장계만에 대한 존경은 하늘같았습니다.

 

카메룬 부통령은 바멘다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의사였기에 서로 대화가 통하였습니다.

언젠가 바멘다의 대 부족의 추장 동생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정성스런 치료로 완쾌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대문에서 현관 그리고 거실까지 빨간 카펫이 깔려 있어 당황하였습니다.

그때 추장은 고맙다는 인사를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왔고, 고마움의 표시로 추장의 딸인 공주까지 부인으로 맞이하라 하니, 옆에 있던 그의 부인이 황당하여 ‘You are bad!(나빠요!)’라고 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추장의 공식행사장에서는 모두가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였지만, 그의 부인은 한국식으로 허리만 굽히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만약 추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사람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닌 그곳에서 말입니다.

순간 의사 장계만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추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부인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부인에게는 추장과의 까다로운 격식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부통령과는 언제라도 통화가 가능하였고, 추장은 그들 부부를 은근히 떠받들었습니다.

민간 외교전선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곳의 전통의학이 독특하여 골절환자는 약초를 바르면 금세 나았습니다.

한번은 그의 친구인 미국보험회사 지사장이 교통사고로 뼈가 부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치료도 제대로 못해 주어 얼마 후 미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방문하였더니 멀쩡하였습니다.

그는 사무실에서 깁스도 안한 채로 회사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서 물어보니 어떤 풀즙을 발랐더니 통증 없이 아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경우를 그는 여러 차례목격하였습니다.

 

카메룬 사람들은 참 유순합니다.

그러나 한번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렸습니다. 근무하는 2년 동안 싸움이나 실랑이하는 것을 거의 못 보았는데, 한번 싸웠다 하면 도끼를 휘둘렀습니다. 사망 아니면 대형 사고였습니다.


카메룬은 인구 부족으로 인한 출산장려 정책이 활발하였습니다. 이슬람 사회가 아닌데도 일부다처제였습니다. 그런 정책 때문인지 심지어는 중,고등학생들까지 불타는 사랑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학생이 임신을 하면 경사였습니다. 취직을 보장받고 정부의 보조가 뒤따랐습니다.

때문에 카메룬의 산부인과 의사는 밤낮 없이 바빴습니다.


카메룬 사람들은 동양인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시절 카메룬에도 이소룡의 영화가 인기여서 동양인은 모두 장풍을 하는 줄 알고 겁냈습니다.

반갑다고 손을 잡으면 도망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1979년 1월 귀국하였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즐거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를 카메룬 사람들은 아쉬워하였습니다.

 

카메룬의 바멘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웃나라 가봉 랑바레네에서 생명외경의 신념으로 거룩한 인술을 펼쳤던 슈바이처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원주민들은 카메룬에도 슈바이처와 같은 의사가 있는데, 그가 바로 한국에서 온 슈바이처라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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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의 슈바이처  유민철

에티오피아의 아픔을 보듬다

 

 

 

 

 

 

 


아픔과 배고픔 그리고 슬픔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에티오피아(Ethiopia).


한때 솔로몬의 후손이라 자처하며 아프리카의 자존심이었던 에티오피아는 지금은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였고, 오늘도 뜨거운 태양 아래 기아와 질병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에는 아픔을 같이하고 사랑을 나누었던 성형외과 의사 유민철이 있었습니다.


그는 1941년에 태어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련의를 마쳤습니다.

1975년, 그는 아프리카 파견의사 모집에 지원했습니다.

인술에 목마른 곳에서 봉사하며 살고 싶었던 평소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가 갑자기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부모는 반대하였습니다.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아들의 뜻을 꺾을 수 없게 된 부모는 몇 년 만 있다가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부인과 다섯 살 난 딸, 세 살 난 아들이 동행하였습니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블랙 라이온(Black Lion) 국립의료원으로 파견되어 30년이 지난 2005년 정년퇴임하였습니다.

 

 

학생 기술 회진을 하고 있는 의사 유민철

 


그가 도착한 1975년은 하일레 셀라시에 왕정이 군부쿠데타로 무너진 직후였습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운 나라였지만, 경제는 끝없이 추락만 거듭하였습니다.

세계는 에티오피아를 도왔지만, 쿠데타가 터지고 나서는 에티오피아를 외면하였습니다.


공산화된 그곳의 현실은 혹독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몇 달 일하지도 못하고 쫓겨났으나 현지 의사의 도움으로 의료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1980년대까지 잇따라 내란과 분쟁을 겪으며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여 병원은 전상자들로 넘쳤습니다. 절단, 총알제거 수술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습니다.

 

1991년 공산 정권이 무너질 때는 집 근처까지 총탄이 날아왔습니다.

사관에서는 철수를 종용했지만, 그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평화는 찾아왔지만 병원은 또 다른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병원 내과환자 중 60%가 AIDS 환자인데다 낙후된 의료장비와 시설은 그를 항상 감염의 위험으로 내몰았습니다.

에티오피아는 AIDS환자가 3백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아디스아바바는 더욱 심해서 6명 중 1명이 감염자입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넘쳐나 AIDS 검사도 없이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화상을 입은 소말리아 난민 환자를 수술할 때였습니다.

환자에게 가벼운 마취를 한 뒤 수술에 들어갔는데, 환자가 그의 팔을 치는 바람에 피 묻은 수술 칼에 손을 베이고 말았습니다. 환자가 AIDS에 걸렸다면 그도 감염될 우려가 큰 것입니다.

환자의 피를 채취해 AIDS 검사를 요청했으나 하루 뒤 결과가 나오기까지 착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환자는 AIDS 감염자가 아니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선 싸구려 부탄가스를 쓰는 가정이 많아 가스폭발로 인한 화상을 입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구순구개열인 언청이가 흔할 뿐만 아니라 턱없이 부족한 의료시설로 종양이 생겨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말기에 이르러서야 의사를 찾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유일한 성형외과 전문의인 의사 유민철은 일상처럼 종양과 화상 그리고 언청이 환자의 수술을 맡았습니다.

 

주 6회 언청이 수술을 하였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끝이 없었습니다.

입천장이 바깥으로 드러난 환자, 얼굴이 기형인 환자를 수술했습니다.

수술 뒤 좋아하는 환자들을 볼 때면 그는 뿌듯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병원을 찾는 환자는 약값은 물론 수술 장갑이나 반창고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형편이었고, 이것마저 살 수 없는 환자도 흔하였습니다.

입원환자는 그나마 치료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일반 환자들이 여기 오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빈 병실이 나오기만 기다리다 죽어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가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 보고한 1996년 1/4분기 활동내용입니다.
 

분기별 600여 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거나 수술함.

선천성 질환 및 총상환자, 화상환자 등을 주로 치료함.

 

의료 활동상의 애로사항은 마취약, 고가 항생제 등의 부족과 위생 재료의 부족

그리고 AIDS 환자의 증가는 큰 문제점임.

 

 

장갑이나 반창고를 살 수 없는 극빈자에게 그는 장갑 등을 주었습니다.
연신 고마워하며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는 이들.

어떤 이는 나중에 찾아와 지푸라기가 묻은 달걀 10여 개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순박한 표정에서 그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맛보곤 했습니다.


아디스아바바 국립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레지던트 트레이닝을 맡아 200명이 넘는 외과 의사를 배출시켰고, 난민촌 방문을 통해 다수의 빈곤자 들에게 무료 의료 봉사활동을 실시하였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들과 고아원에 무료 진료와 지속적인 지원을 하였고, 의술만큼이나 신앙심도 깊었던 그는 노숙 아동, 전쟁 미망인을 지원하는 사회봉사 활동에도 헌신적이어서 ‘걸인의 아버지’라 불렸습니다.

 

에티오피아는 그에게 있어 삶 전체였습니다.

 

50년 전의 아시아와 비슷한 수준인 아프리카 지역은

50년 후에는 분명 우리 후손의 삶의 터요, 외교와 무역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를 돕는 일은 50년 후 세계무대의 주역이 될 우리 후손을 위한

외교의 시작인만큼 더 많은 이들이 앞장서 주길 바랍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에티오피아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정부와 민간차원의 인도적 지원을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1997년 그의 슈바이처 같은 감동적인 삶은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실렸습니다.

 

1982년 정부에서는 의사 유민철에게 수교훈장 숙정장을 수여하였고, 1994년에는 KOICA 총재 표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제7회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30년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그 오랜 세월을 에티오피아인으로 살았습니다.

30년 세월을 뒤로 하면서 어느 기자와 나눈 대화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제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를 떠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조선일보 97년 6월 23일자 기사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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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간다의 슈바이처  유덕종

받은사랑이 더 많기에, 사랑할 수 있었다

 

 

 

 

 

 

 

대학 입학 땐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인생을 어떻게 살더 라도 의미가 없어 보였죠.

어차피 의사가 될 거라면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졸업하기 전에 결심을 했죠.

아프리카로 가야겠다고, 가서 나보다 힘든 사람을 도와야겠다고요.

 

2010년 잠시 귀국한 유덕종이 모교인 경북대학교 웹진에 전한 서면 인터뷰 내용입니다.
유덕종은 1959년 출생하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아프리카 우간다(Uganda)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린 두 딸과 임신한 아내가 눈에 밟혔지만, 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캄팔라 물라고(Mulago) 국립병원에서 16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곳에서 머물며 캄팔라 마케레레(Makerere)대학에서 의학을 강의하며 진료도 계속하였습니다.

 

강의를 마친후 의과 대학생들과 함께

 

캄팔라 외곽에 의사가 처방한 약이 환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기초가 제대로 서 있는 병원을 세우려고 동분서주하는 의사 유덕종을 경북대학교 동문들은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습니다.

 

서른 셋, 의사로서의 앞날이 창창한 그가 처음 우간다 땅을 밟았다.

리고 그의 나이 쉰하나. 젊음도, 열정도, 꿈도 모두 그 땅에 바쳤다.

18년 동안 그를 붙든 것은 배고픔과 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그곳 사람들이었다.

 

 우간다의 열악한 의료상황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고 병원건립을 준비한 것만도 9년째.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이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는 폐결핵과 위암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은 뭔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하는 생각을 자주하였고, 의대에 들어가 크리스천이 되면서 아프리카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부터 아프리카에서 사는 문제를 상의했고, 동의를 받아 결혼했습니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그에겐 보람이고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들이 아플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모든 걸 다 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위로가 된다면 족하였다.

 

1992년 정부파견의사로 우간다에 도착한 그가 KOICA에 보낸 편지 일부분입니다.

 

저는 이곳에 도착하여 수도 캄팔라에 있는 물라고병원(Mulago Hospital)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병원인 물라고 병원의 시설이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곳의 재정상태가 엉망이라 기구와 약품이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입니다.

비싼 약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약도 없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환자를 지켜봐야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며칠 전 20세 밖에 되지 않은 환자가 당뇨혼수로 죽는 것을 보고 화가 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환자가 한국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걸어서 퇴원을 할 환자인데

속수무책으로 죽는 것을 보고 한동안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인구의 60%가 의사 한 번 만나 본 적이 없이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바짝 마른 결핵환자가 그를 보고 “Doctor, I am hungry.(선생님, 배고파요.)”라고 할 정도로, 환자들이 굶주려 죽어나가는 그곳의 병원은 차라리 난민촌이 었습니다.

 모기장만 있어도 말라리아 발병률을 60%가량 줄일 수 있지만, 모기장 구입도 큰 부담인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덕종은 한국의 앞선 의료기술과 의료기자재의 활용방법 등을 익혀 그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봉사에 나서리라 다짐하였습니다.


 1993년 7월.
 의사 유덕종은 어느 환자의 조직검사를 하다가 주사 바늘에 손이 찔렸습니다.

 끼고 있던 장갑에 피가 흥건히 고일 정도로 깊이 찔렸습니다.

 문제는 그가 AIDS환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치료약이 없는 천형…….

 

“순간 손가락을 잘라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그 상황에서

AIDS에 걸릴 확률이 3백분의 1이기 때문에 거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죠.”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까지 기다린 5개월간 그는 정상인이 아니었습니다.

 부부관계도 멀리하는 등 매사에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것을 깨달은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한 달 간은 정말 우울했습니다.

 

그러나 감염됐다 해도 5~6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동안 더 가깝게 AIDS환자를 치료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1994년 봄.
 이번에는 폐결핵이었습니다. AIDS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아프리카였기에 결코 간단한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큰딸 주은이가 뇌염에 걸렸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뇌염이 없지만, 일단 걸리면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명색이 의사라는 애비가 한다는 게 링거주사를 놓는 것뿐이었어요.
AIDS 때도, 폐결핵 때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는데, 막상 딸이 뇌염에 걸리자

‘왜 이곳에 왔나’하는 후회뿐이었습니다. 집 사람은 그저 울고 만 있었지요.”

1997년 8월 24일자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AIDS에 감염됐다 해도 몇 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동안 더 가깝게 AIDS환자를 치료할 수 있겠구나 하던 유덕종이였습니다.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던 환자가 완치된 후 퇴원하면서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입원환자의 80%가 AIDS 환자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AIDS 환자가 줄고 있는 나라가 우간다라며,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 아프리카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국에서 자리 잡은 대학 동기생과 비교해 본적이 없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부동산도 집도 없다. 하지만 그런 게 다가 아니다.

사람의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경제가 발전하면서 삶은 윤택해졌는지 모르지만 삶의 질은 퇴보한다는 인상이다.

 

내 눈길에 와 닿는 아프리카의 하늘은 아름답고, 힘과 용기를준다.

당신은 한국의 하늘을 가끔씩이라도 올려 보는가?

행복지수로 보자면 한국보다 아프리카 나라들이 더 높을지 모른다. 나는 행복하다.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행복한 의사 유덕종입니다.

 

우간다 캄팔라에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진료하는 유덕종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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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의 슈바이처  박형동, 서미라 부부

신앙의 힘과 생명 존중의 외경심으로

 

 

 

 

 

 

 

선교활동을 펴기 위해 1991년 8월 초 탄자니아로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가톨릭병원 일반외과장을 그만 둔 박형동(35)씨와 성남병원 정신과장인 서미라(34)씨 부부가 두 자녀와 함께

탄자니아 킬리만자로산 밑 인구 80만 명의 아루샤 기독병원에서 무료봉사하기 위해 출국한다.

 

 

그들의 장도를 격려하는 어느 신문 기사의 일부분입니다.
박형동은 1957년에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의대에서 일반외과를 공부하였고, 1991년부터 의료선교의 일환으로 탄자니아(Tanzania)에서 근무하다, 1993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신분이 변경되었습니다.

 

서미라는 1958년에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의대에서 정신병과를 공부하였고, 1991년부터 의료선교의 일환으로 탄자니아에서 근무하다, 1996년KOICA 정부파견의사로 신분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들은 부부였습니다. 그들이 몸담았던 병원은 킬리만자로 크리스천 메디컬센터(Kilimanjaro Christian Medical Center).

 

KCMC 중환자실에서의 진료모습


의사 박형동과 의사 서미라는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였으며, 평생의 동지였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났습니다.
부부의 어느 날 선언은 폭탄이었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로 간다. 의사보다는 선교사에 더 매력을 느낀다. 미련없이 떠나겠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이들 부부가 독실한 신자인줄은 알았으나, 막상 선교사로 떠날 줄은 몰랐습니다.

주위의 부러움을 받던 맞벌이 의사가 안정된 직업을 박차고 오지인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난다는 것은 그
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동부 인도양을 마주한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산이 있는 나라.
그들의 활동은 드넓은 아프리카 초원의 표범처럼 긍정적이며 역동적이었습니다.

 

의사 박형동은 일반외과 전문의였습니다.
탄자니아의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자 세스나기를 구입하여, 직접 몰고 하늘로 날아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호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신속히 사막을 날아가 최고의 의료 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를 제공하는 것에 착안하여, 경비행기를 타고 외과의사가 없는 지역을 순회 진료하면서 환자 수송에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탄자니아의 의료 상황도 여타의 아프리카 최빈국과 유사하였습니다.
불안한 전력 공급과 부족한 의료 장비는 물론 병원의 재정난으로 인한 마취약 부족으로 응급 수술 위주의 수술만 시행하였습니다.

 

수술을 하다가 불이 나가면 랜턴을 밝혀야 했습니다.
의사들의 협조가 부족하여 항상 갈등이 발생하였고, 생명 경시 등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좌절도 맛보아야 했습니다. 약품 밀반출과 금품수수 등의 부조리가 만연하였고, 병원도 항상 원조를 바라는 구태의연한 모습이었으며, 심한 부패와 불신으로 인하여 세계가 등을 돌렸습니다.

 

 

수술중 전기가 나가 후레쉬로 비춰가며 수술하고 있는 광경

 

 

그는 묵묵히 그의 본분을 지켰습니다.
그가 KOICA에 보고한 1993년 3/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치료한 환자는 약 400여 명으로 병명은 각종 외상, 화상, 위장질환, 혈관질환, 항문질환 등이다.

또한 위절제술, 소장대장절제술, 피부이식, 혈관외과수술 등 100여건의 수술을 집도하였다.

 

특히 그는 탄자니아 최초로 식도암 절제와 혈관 문합 그리고 흉부교감 신경절제수술 등을 시도하여 최신 의료시술을 선보였습니다.
매주 준의사 코스 수강생을 대상으로 외과학을 강의하였으며, 분기별 한차례씩 마사이족을 찾아 아픔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았으나 임박한 약품을 정가보다 싸게 구매하여 원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에는 브룬디(Burundi)와 르완다(Rwanda) 두 나라에서 발발한 내전과 부족간의 전쟁으로 탄자니아 서북쪽 국경지대에 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난민들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그는 UN이나 적십자기구 등에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난민수가 워낙 많아 세계 각국의 구호가 절실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예방 가능한 질환으로 죽어가는 환자가 많아 예방의학의 중요성도 주장하였고 보건소 건설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특히 심장센터 설립이 절실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르완다 난민 지원 프로젝트 활동 모습


 

 

의사 서미라는 신경외과 전문의였습니다.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에 의사를 파견할 때는 주로 Major과인 외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위주였습니다.

실제 탄자니아에서도 Minor과 전문의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탄자니아에서는 구순구개열인 언청이 등 성형수술이 필요한 환자수가 부지기수인데도 성형외과 전문의는한 명도 없는 상태였으며, 신경외과 전문의는 딱 한 명만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는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탄자니아의 정신질병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1994년. 3천2백만의 탄자니아 인구 가운데 전문적 정신치료가 요구되는 환자의 수는 70~80만 이상으로 추정되었는데, 아프리카는 미개발지역으로서 문화가 덜 발달하여 환경적인 스트레스가 적으므로 정신질환자가 적을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간질환자는 잘못된 문화적 관습과 가정불화 그리고 기생충의 만연으로 선진국보다 환자수가 2배이상 많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서미라 의사의 근무 모습

 

 

그가 KOICA에 보내온 1996년 1/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외래환자 분기당 외래환자는 450여 명. 카운슬링환자는 100여 명에 이르며 병명은 정신분열증, 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간질, 치매, 파킨슨증후군 등 다양하다.

의료 활동상의 문제점으로 정신과 약품구입의 어려움과 수입약품 대부분이 고가로 매매된다.

중증 정신질환자 수용시설 및 훈련인력이 부족하다.

정신질환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주재국과 주민의 반응이 호의적이나 정신과 의사의 태부족으로 훈련된

간호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KOICA에서 지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탄자니아 국민의 간질환자 실태 조사 및 진료 프로젝트를 실시하였으며, 세계적으로 치료를 요하는 간질환자의 수는 인구의 1~2%선으로 알려졌으나 탄자니아는 이보다 두 배가량 높은 3% 전후일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 원인으로 분만 시 뇌손상 후유증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열악한 교통시설로 인한 가정에서의 출산과 미비한 의료시설 및 여성할례 등 잘못된 관습으로 인한 산도손상에 기인하며, 기생충감염도 한 원인이라 지적하였습니다.

 

탄자니아 인구 중 약 백만 명 가까이가 치료가 요구되는 간질환자로 추정되며 이중 어떤 형태이든 투약을 받고 있는 환자 수는 불과 1%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그나마 약효가 떨어지는 페노바비탈에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탄자니아에 정신과 전문의가 불과 10명 내외인 것을 고려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의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의 수
는 불과 1천 명 내외일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정신질환자 인식증대와 정신과 위상 제고에 노력하였으며, 그의 부단한 노력으로 탄자니아에서 처음으로 정신과가 개설되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킬리만자로 영봉을 바라봅니다.

아프리카인의 성지라 일컬어지며, 적도 부근에 있으면서도 만년설로 덮여 있어 항상 번쩍거리는 산.
설산이 아프리카를 묵묵히 굽어보고 있습니다. 그들 부부는 그 산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강원도 산골에 들어와 있는 느낌 같아요.


젊음으로 버텼지만, 어찌 갈등과 좌절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힘과 생명존중의 외경심으로 탄자니아에서의 봉사활동을 성실히 수행하였습니다.

 

 

국민일보, 1997.7.11일자 「검은대륙에 심은 복음인술」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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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보츠와나의 슈바이처 김정

그저 사람만이 중요할 뿐

 

 

 

 

 

 

이름도 생소한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와 보츠와나(Botswana)에서 인술을 펼쳤던,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의사였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부자였던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 김정.


김정은 1925년에 태어나서, 1950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외과 공부를 마쳤습니다.
1970년부터 정부파견의사로 서부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어퍼볼타(Upper Volta)로 불렸던 부르키나파소 가와병원(Burkinafaso Gawa Hospital)에서 4년간 근무하였습니다.
에어컨 안에서 뱀이 나오고, 자고 일어나면 신발 속에서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한 번도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없었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 남부 중앙 내륙에 있는 나라 부르키나파소에서 외과 의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곳은 평균 수명이 짧아 노동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빈곤층의 격증과 국력의 약화가 계속 진행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는 1973년부터 1990년까지는 남부 아프리카에 있는 보츠와나 프란시스타운 주빌리병원(Botswana Fransis Town Jubiley Hospital)에서 인술을 펼쳤습니다. 정년 퇴직으로 1986년 귀국하였다가 한 달여 만에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 무료로 자원봉사를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의료 봉사활동을 벌이고 민간외교관 역할까지 담당하다가 1999년 그곳에서 고귀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김정의 아들, 사진작가 김중만은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지구촌 가족》에서 그의 아버지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버지는 내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의사였다.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수술과 치료를 하면서 살았고,
와인을 즐기는 로맨티스트였다.


1971년 아버지가 정부파견의사로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이 기억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집은 양계장을 방불케 할 만큼 온통닭 천지였다.

아버지는 개인병원을 하셨는데, 가난한 환자들이 치료비 대신 닭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는 그저 ‘사람’만이 중요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로 떠났다.
가난한 외과의사 김정은 30여 년을 그렇게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와 보츠와나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소박하고 위대한 삶을 마쳤다.
나에게 아버지가 평생 쓰던 청진기 2대와 2,000달러의 유산을 남기고…….

 

 


 

 

의사 김정의 부인은 그의 남편과의 추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Dr. Kim은 1970년 아프리카 어퍼볼타 지역에 외과의로 파견 갔어요.
딱 2년만 하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현지의사 부족으로 불가피하게 계약을 연장하게 됐습니다.

이후 보츠와나로 재파견 되었고, 현지 생활에 정이 들어 계속해서 연장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1979년에는 Dr. Kim이 보츠와나 정부로부터 대통령수교훈장을 받았지요.

 

보츠와나의 경우 에이즈는 물론 야생동물로 인한 피해환자가 많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저희 둘째 아들은 현재 보츠와나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요.

 그곳에서 태어난 손주 김유순과 김규환도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쳤어요.

보츠와나 현지 주민들이 정이 많고 정직해서 그곳에 관한 추억이 참 많네요.

당시 보츠와나에 공설운동장을 건립하는데 Dr. Kim이 한국인으로서 5,000달러의 거금을 기부했던 기억도 납니다.

Dr. Kim은 1986년 정년퇴직하고 한국으로 복귀했지만,

한 달여 만에 다시 보츠와나로 돌아가 파견 당시 근무했던 병원에서 무료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Dr. Kim은 인턴으로 온 학생들을 데리고 독립적으로 의료행위를 할 수 있을 만큼 진료여건은 좋았어요.

 

특히 1970년 11월 4일 어퍼볼타로 파견됐을 당시

그곳에는 전기는커녕 수돗물조차 나오지 않는 열악한 국가였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생활하기에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요.

 

이후 파견된 보츠와나는 어퍼볼타와 달리 근무환경, 복지, 치안상태가 매우 안정적이어서 굉장히 좋았어요.

현지주민들의 의사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봉사활동에 대한 굉장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국가차원으로 정부파견의사를 기리는 단체나 조직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런 단체가 존재함으로써 정부파견의사가 현지,

혹은 한국 복귀 이후 겪는 고충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의사 김정의 부인과 원주민들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의연하고 올곧게 일생을 보냈지만, 는 물론 자식들의 국적도 한국으로 고집하여 현지에서 태어난 손자들이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쳐 언론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거주하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기념하여 병원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의사 김정은 오랫동안 아프리카에 있었기에 국내에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작고하고서 편안히 묻힐 유택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외국관광객을 위한 통역 안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부인은 그런 상황을 못내 아쉬워하였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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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룬의 슈바이처 김시원

카메론의 울려 퍼진 한국의 노래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
꼬마야 꼬마야 잘~가거라.


아프리카 카메룬(Cameroon)의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우리나라 동요가 울려 퍼집니다.
어린 아이들과 한국 사람들이 어울려 재미있게 고무줄놀이를 하는데,

그 나라 어린이들은 한국말로 노래를 잘도 부릅니다.

 


2001년. KBS 《한민족리포트》에〈닥터 김의 미라클 가방〉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야룬데 이슬람마을 어느 초등학교의 고아들을 찾은 의사 김시원과 한국의 자원봉사자들이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마음속의 사랑을 찾아 카메룬까지 왔다는 의사 김시원.

 


그는 1952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 공부를 마쳤고, 1986년 병원을 개업하였습니다. 평탄하면서도 행복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1991년 교통사고에서 기적처럼 살아나면서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제2의 삶을 결심하게 됩니다. 1993년. 아내와 세 딸을 설득해 의료기술과 시설이 낙후한 카메룬으로 향했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카메룬 야운데 의과대학부속 중앙병원(L'hospital Central de Yaounde)에 부임하여 2007까지 15년간 근무하였습니다.

 

 

각오는 하였지만, 너무 가혹하였습니다. 지독한 아프리카식 프랑스어는 차라리 고문이었으며, 한마디로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4개월 배운 프랑스 어로는 환자의 증상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수술실을 따라 다니며 조수를 자청하고 현지의사들과 가까워지려 했지만 철저히 찬밥 신세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는 끝이 없었습니다.....

 

 

 응급환자의 연락을 받고 수술실로 달려가면 마취의사는 아예 없고, 마취의사를 데려오면 수술실 간호사가 없어졌습니다. 겨우겨우 사람을 모아 놓으면 수술포가 소독되어 있지 않거나, 산소통을 보관함에 넣은 채 수간호사는 열쇠를 갖고 퇴근해 버린 다음이었습니다.

간호사 출신인 부인 서현숙 역시 수모 아닌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내로라하던 그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켰습니다. 눈 딱 감고 이 악물고,AIDS 환자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멋도 모르고 따라 온 금지옥엽 세 딸이 외국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언어문제로 3일 만에 쫓겨났으며, 병원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는 누가 슬쩍 가져가 버렸습니다.

 

 

의사 김시원은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버팀목이었던 아내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피나는 적응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환자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었고, 그들만의 프랑스 어에 귀가 열릴 즈음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아졌으며, 외과 의사들도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카메룬에서 최고의 의사라 자타가 인정하던 외과부장의 위암환자 수술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과도하게 절제하고 수술의 기본을 무시하는 엉터리였습니다. 그가 메스를 잡아 수술을 했고, 아무런 합병증세없이 봉합했습니다. 야운데병원에서는 어려운 췌장암 수술은 아예 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완벽하게 집도하였습니다.


수술실에는 수술기구가 없었습니다. 그는 수술기구가 담긴 가방을 메고 다녔으며, 그 가방에는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방을 열고 이것저것 꺼내 수술을 마치면, 사경을 헤매던 환자는 살아났습니다. 소위 기적의 가방이었습니다.

환자가 입원하려면 입원비는 물론 모든 경비를 먼저 내야 합니다. 죽어가는 응급환자라 해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살려놓으면 돈을 안내고 도망 을 간다고 하였습니다.

 

 

 ..일대 참상이었습니다..

 

의사인 그는 슬펐지만, 응급실과 수술실에는 장갑이나 소독약 그리고 간단한 수술기구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약품과 의료소모품은 너무 비쌌습니다.

 


KOICA에 그가 보고한 1994년 3/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진료, 치료환자 250여 명. 수술건수 110여 건 등.
진료환자, 수술건수 계속 증가. 진료 연 1,800여 명, 수술 300여 건. 총상이나 열상환자 증가.

경제난과 치안부재로 강절도 등의 증가가 원인. 충수염의 경우에도 병원에 오지 못하고 버티다가

복막염으로 악화되어야 오는 실정.

간호사도 없이 의과대학생인 조수 한명만 데리고 큰 수술도 해내야하는 실정임....


그들은 돈 몇 천 원이 없어 아파도 병원을 찾지 못했으며, 막다른 상황에서야 그를 찾아왔으나, 그때는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 고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불행과 고통을 덜어줄 방안을 모색하여 1998년 평소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뜻을 같이한 봉사자들과 별도 진료소를운영하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40여 명의 환자를 무료 진료하였고, 또한 벽지농촌과 오지를 찾았습니다. 아내는 간호사를 자처하였습니다.


카메룬의 의료인력은 주로 프랑스에 유학하였으나, 그 수는 극히 적었습니다. 야운데 중앙병원에서 배출시키는 전공의는 1년에 고작 4~5명에 불과하여 그는 의료 인력 양성에 적극 참여해 10여 년 동안 50여 명의 의사를 길러냈습니다.

 

 


그가 휴가와 보수교육 등으로 자리를 잠시 비웠습니다. 다시 만난 환자들이 아주 귀국해 버린 것으로 알고 많이 낙담하여 눈물을 글썽일 때, 이들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었었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음속의 진정한 사랑을 찾게 해준 것은 바로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그에게 더 소중하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카메룬 축구팀은 강호 아르헨티나와 루마니아를 꺾고 당당히 8강에 진출하였습니다. 카메룬 국기를 상징하는 녹색상의에 빨강과 노란색이 조화를 이룬 강렬한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들에게 세계인은 환호를 보냈습니다. 축구만은 강대국인 나라였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중부의 카메룬은 프랑스와 영국의 통치를 받다가 1961년 독립하였습니다. 부존자원이 풍부하여 수도 야운데는 비교적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나, 나라는 후진국이었습니다.


수술하다가 정전이 되면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랜턴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수술을 마쳤으나 마음이 불안하였습니다.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 가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카메룬 최대 병원 응급실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게다가 1997년 한국의 IMF환란으로 대사관이 철수하여 그는 KOICA 직원도 없는 그곳에서 교민들의 주치의와 보호자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15년의 세월을 뒤돌아봅니다.
카메룬의 푸른 신록과 붉은 땅이 환상으로 다가옵니다.
좌절을 극복하고 보람을 일궈냈습니다.
사랑을 찾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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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레소토의 슈바이처 김명호

아프리카 연가

 

 

 

 

 

아프리카의 오지 그리고 불안한 정국으로 혁명이 빈발하는 검은 땅에서 목숨 걸고 인술을 펼쳐온 한국인이 있습니다.


의사 김명호.


그는 1934년에 태어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외과를 공부하였습니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우간다(Uganda)와 계약의사로 근무하였으며, 1978년부터 정부파견의사로써 말라위(Malawi) 좀바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82년에 레소토(Lesotho)로 전임하였습니다.


그가 레소토로 오던 무렵은 국제정세가 복잡하였습니다.
1983년. 레소토는 중국과 러시아, 북한 그리고 동구권 공산위성국가들과 교류하고 경제, 기술협정을 맺은 후 1983년 한국과 외교관계를 중단하였습니다.


군사분계선을 두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실정에서 북한대사관 직원들과 마주치면서 생활한다는 것은 심리적 압박이었습니다. 국교단절로 대사관도 없는 상황에서 주 케냐 대사관이나 한국 우방국의 주 레소토 대사관에 신변 보호를 맡겨야 하는 상황 또한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외교가 단절된 상태에서 주재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정부파견의사에게 의료봉사라는 인도적인 활동 외에도, 주재국의 사회적인 상황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정부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서신으로나마 중국과 북한 등 공산권 국가들의 활동을 알리고, 또한 정부파견의사로서 성실하게 근무함으로써 주재국의 재계약 요청을 이끌어 내어 비수교국이라 할지라도 정부간 의사소통의 통로를 마련하는 등 그야말로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 보낸 1992년 1/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입원환자수 832명, 외과외래치료인원수 888명, 수술인원 609명이었다.
병명은 다양한데 두부외상, 갑상선비대증, 경부수낭, 경부임파선염, 경부농양, 기혈흉증, 농흉증, 식도암, 식도이물, 유방암, 양성유방종양, 장폐쇄증, 폐쇄성황달증, 충수염, 치핵, 치열, 치루 등 다양했다. 또한 항생제, 고가약품 부족, 응급실 X-Ray와 단층촬영기 등의 시설부족, 의사와 간호사 등의 인원이 부족하였다

 

 

▲ 지원물품 전달 기증식

 

외과의사가 전무한 상태에서 1년에 평균 600건 이상의 크고 작은 수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보람된 일은 그 자체가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 약 530km 떨어진 준사막지대인 모로토는 주민들이 외부사람들을 싫어하고, 자기가 살기 위하여 사람을 죄의식 없이 쉽게 죽이는 종족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물이 부족하고 가축을 방목하는 곳이라 위생상태가 매우 열악하고 특히 흙먼지가 많아 눈 질환이 심한 오지였습니다.

 

 이 지역은 마치 귀양지같이 소문났기 때문에 근무하겠다는 의사가 없어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170km 떨어진 수술할 수 있는 병원으로 환자를 후송해야만 했는데 도중에 환자들이 사망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수많은 환자를 수술했으며, 외과 환자뿐만 아니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안과 질환자들까지도 치료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적은 양의 약품으로 많은 환자에게 투약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했습니다.

환자 가운데 제왕절개수술 환자가 가장 많아 매일 3~4건의 수술을 했으며, 그밖에 교통사고로 두부손상과 골절환자도 많았습니다. 특히 헌혈을 하는 사람이 적어 혈액이 부족해 수술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뿌듯했고, 그 보람은 가늠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케냐(Kenya) 남부 보이라는 조그만 시골에 있는 120개의 병상을 갖춘 정부병원에서 외과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나이로비와 몸바사 간 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교통사고와 밀렵자 총격사고 환자 등의 응급수술을 했으며, 산부인과, 내과, 소아과 환자들도 진료했습니다. 그 지방 역시 외과전문의가 한 명도 없었기에 수많은 수술환자들로 항상 바쁜 일정을 보냈습니다.


말라위 좀바.
말라위는 아프리카 남동부에 위치하고, 좀바 남쪽으로는 모잠비크(Mozambique)를 맞대고 있습니다. 정부파견의사로 국위를 선양한다는 각오로 동부아프리카를 떠나 남부 말라위의 좀바라는 도시에 있는 350병상 규모의 정부병원에 부임하였습니다. 그 병원은 규모가 제법 큰 병원인데도 의사가 4명뿐이었으며, 그나마 전문의는 혼자뿐이어서 거의 매일 밤 응급환자를 수술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83년. 북한과 수교하는 바람에 레소토 정부가 일방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국교를 단절하여 갑자기 철수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으나, 레소토 보건성은 국교 단절은 정치적 문제이니 상관 말고 계속적인 환자 진료를 원했고, 한국정부에서도 외교상의 정도를 걷는다는 뜻에서 계속 남아 진료하라는 지시에 따라 아무런 신변 보장 없는 곳에서 묵묵히 3년 동안 근무하였습니다.


 

1986년. 레소토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나 친 서방정책으로 선회하며 국교가 재개되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외교 단절된 상태에서 근무하는데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다른 나라로 가려고 하였으나 혁명군사정부 최고위원회에서 다른 나라로 전근되는 것을 알고서 보건성에 지시, 나이로비 한국대사관에 의뢰하여 계속 근무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1995년 그가 KOICA에 보낸 서한입니다.


레소토에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2세 병원(Queen Elizabeth II Hospital)은 이 나라에 하나뿐인 종합병원인데도 불구하고 외과의 120개 병상이 고작이어서 항상 만원이다. 병상이 모자랄 때는 마루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수용할 때도 자주 있으며, 일반외과전문의들이 정형외과, 신경외
과, 비뇨기과까지 진료하고 있는 형편이다.

 

1995년. 그는 23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1986년. 정부는 그의 참된 의사로서의 국위 선양을 치하하며 수교훈장
숙정장을 수여하였고, 1995년 대한의사협회는 그의 살신성인적인 의료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표창하였습니다.
 

▲ 흙탕물을 긷고 있는 레소토의 어린이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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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제르의 슈바이처 김대수, 조규자
멀고 먼 그곳에서


 

 

 

 아프리카.
추위는 없고 햇볕만 내리 쬐는 곳.

이글거리는 해를 머리에 이고, 자연의 문화와 인공의 문명이 공존하고대립하는 곳.
전설을 먹고 자란 거대한 바오밥나무 아래 원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노래를 하는 곳.
한 사람이 조그맣게 선창하면 뒤따라 불려지는 유장하면서도 경쾌한 선율이 검은 땅에 나지막이 깔렸다가는 흩어지고 그쳤는가 하면 다시 귓전을 울리는 곳.
삶과 죽음을 주관하였던 태양이 넓은 대지를 보랏빛으로 감싸면, 명상의 마당으로 바뀌는 곳.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사계절이 분명한 한국에서는 아프리카를 그저 막연히 낭만적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지구 육지 면적의 20%를 차지하는 광활한 대륙, 세계 인구의 15%인 10억 그리고 53개 독립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역 또는 국가별로 다양한 특성과 복잡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 아프리카입니다.

정부파견의사제도는 1968년에 감비아(Gambia)에 의료단원을 최초로 파견하면서 시작되었고, 그런 눈부신 활약은 2008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임상 경험이 풍부한 한국의 의사들은 주로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 개발도상국가로 파견되었습니다. 미개하였기에, 가난하였기에 아프리카에는 전체 파견 인원의 50%가 넘는 의사가 활동하였습니다.

한국과 니제르(Niger)는 1961년 정식수교를 맺었지만 주재공관을 개설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니제르에 파견된 의사들은 자연히 양국간의 교류나 친선 도모를 위한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1968년부터 1997년까지 19년간 정부파견의사 업무를 수행한 의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의사 김대수와 의사 조규자입니다.

그들은 사하라 사막 남쪽에 위치한 니제르에서 19년간 인술을 펼쳤습니다.
니제르의 수도는 니아미이며,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약 6배 정도이며, 프랑스에서 독립하였고, 공용어는 불어이지만 대부분 부족어를 사용합니다. 이슬람권의 영향으로 이슬람교도가 다수를 차지합니다. 가뭄이 심하므로, 많은 물을 섭취하여야 탈수를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11월~2월 사이 건기에는 아르마탕이라고 하는 황사가 사막으로부터 불어옵니다. 우기 때는 천지를 가를 듯 몰아치는 모래바람과 억수같은 비가 단 몇 분간에 걸쳐 쏟아 붓습니다. 불어오는 습한 찬바람,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지옥의 계절이 되기도 합니다. 이곳 주민들은 이 같은 흙먼지 바람과 태양열을 방지하기 위해 늘 뚤방이라는 긴 천으로 머리와 얼굴만 내놓고 다닙니다 .

김대수는 1935년 출생하여 1961년 고려대학교 의대에서 내과를 전공하고서 국립경찰병원 건강관리과장으로 재직하다가, 1968년 의료단원으로 파견되었고, 조규자는 1936년 출생하여 1961년 고려대학교 의대에서 이비인후과를 전공하고, 국립의료원 이비인후과 과장으로 재직하다가 1978년의료단원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의대 동기였던 부부는 외교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에서 젊음을 보낸 것입니다.

조규자는 그 세월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프리카 개척자로 첫 발을 디딘 남편은 니제르 대통령 디오리의 요청을 받고, 그 당시 국립의료원에 재직하고 있던 나를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나는 조국의 영예와 체면을 세우고자 1969년 첫발을 디딘 이후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이다. 니아미국립병원 결핵과장인 남편 곁으로 가서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세우고 그 당시 이름조차생소했던 니제르로 떠난 것이 바로 어제 같건만…….


△ 2000년 니제르 소재 국립종합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종족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백주에 살인과 약탈이 벌어지는 니제르에서 조국의 영예를 위해 일하는 그들 부부, 그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설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혹독하리만치 무더운 날씨와 무섭도록 번지는 전염병의 나라.
말라리아는 모든 지역에서 발생하고 각종 풍토병이 창궐하는 나라.
1991년부터 1994년까지의 의사 김대수의 활동보고서는 한마디로 비상사태였습니다.
분기별로 약 70명의 결핵환자가 입원하면 대략 20명이 죽어나가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현재 병원사정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결핵 입원환자들은 결핵약품에 내성이 생겨 만성화된 상태입니다. 어려운 경제적인 사정으로서 의약품의 부족, 검사실의 시약 부족 등 사망률은 상당히 높습니다.
현재 병원은 오래 전부터 의료장비 부족으로 인해 병원운영이 거의 마비된 상태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에서 갈수록 악화되다 보니 보건 분야에까지 심한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의약품의 부족상태는 물론 요즘 섭씨 40도 이상의 날씨에 뇌막염, 홍역, 기타 질병이 만연, 이미 1,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보건 분야 종사자까지도 위협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자주 있는 노조파업으로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거기에다 물가는 상승하고 파업으로 인하여 전기가 끊기고 수돗물이 나오지 않고 국민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공무원들의 근무태만 등 모두가 무관심 상태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의사 조규자의 보고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병원행정의 모순으로 마취의사가 없어 수술을 못하고, 7백만의 인구에 이비인후과 진료를 혼자서 당해내는데도(한 명의 니제르인이 있으나 출근도 잘 안함), 도와주는 인원이 없고 병원에 약품이나 기구는 완전히퇴폐함.
수개월간에 걸친 봉급지출 요망과 병원은 치료에 필요한 약품기구 등의 결핍으로 의사까지 전면파업에 들어가고 환자들을 포기하여, 이곳에 있는 저로선 환자들을 돌봐주려니 매우 힘들고, 공무원도 부분파업에 돌입했음.

입원환자에게 식사를 2개월간 못줄 정도로 병원의 경제적 사정이 매우어려움.
경제적 궁핍이 극단에 처함에 따라 강도 살인사건이 니제르 시내에서도 일어나 저녁에는 외출도 못하고, 응급환자 치료는 물론 약, 수술품 부족으로 환자치료에 막대한 지장이 있으며, 병원의 파업이 잦아 죽어가는 환자 앞에서 환자보호자 측과 신경전이 대단함.

 


△ 니제르 파견 당시 니아마 병원에서.


의사 김대수는 결핵퇴치에 힘써 환자수를 70% 이상 줄였고, 의사 조규자는 하루에 적어도 15건의 이물적출을 예외 없이 진행하며, 니제르 국민의 이비인후과 위생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니제르 정부의 신임을 받아 대통령가족의 주치의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치료나 수술을 해주고 나면 감사하다는 표시를 하는데, 마치 약 구입비나 교통비를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과 같은 그들의 순진한 동작을 보람으로 여기며, 의대생의 임상실습과 졸업생 심사위원 및 간호학교 강의 등 바쁜 일정도 소화하였습니다.

1995년. 의사 조규자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주년 총재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총재님.
안녕하십니까?
한해도 다 저물어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새로 다가오는 한 해를 좀 더 보람 있게 맞이하려고 하는 지금, 마음의 착잡함을 가라앉히며 이 글을 올립니다. 의학의 발전도 첨단에 이르러 병의 초기발견으로 완치가 가능한 현대의학에 맞추어, 본인의 혈뇨(현미경적)로 현지에서 검사 못하는,때문에 불란서로 가 수종의 병원검사로 소변에서 암세포가 발견된 관계로, 이에 따라 정밀검사를 하던 중 불란서의 계속되는 파업으로 검사는 지연되고, 니제르 행 비행기가 1주일에 1회밖에 없고, 1개월간 자리가 없다고(만원)하여 원래 모든 일에 철저한 Dr. Kim(부군)이 허락받았던 병가의 날짜가 완료되어 그대로 니제르로 돌아왔습니다.

본인은 니제르로 돌아와 정상적으로 계속 병원 근무를 무리하게 하고있으나, 부군 Dr. kim은 저의 건강 걱정으로 그동안 5kg의 체중이 감소되어 오히려 제가 보기가 곤란합니다. 좀 더 불란서에 눌러앉아 검사와필요에 따라 이에 치료까지 받았으면 마음도 편안하였겠지만, 체류기간이 짧아 매우 힘이 드는군요.

부인은 소변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지만 인술을 펼치기 위해 그냥 돌아와야 했으며, 다리가 골절이 되어 프랑스로 후송을 가거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2년간 치료기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남편도 척추골절이 생겨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의사 부부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냈고,항상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오늘날까지 어렵고 힘든 이곳 니제르에서 25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총과 사랑 때문이었다고 믿고 있다. 또한 매 주일마다 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례할 때 따뜻한 격려를 해주시던 니아미성당의 로마노주교님과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 주셨던 조국의 여러 친지 분들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기회를 통해 그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드리고 싶다.

의사 김대수는 1972년 대한민국 국가훈장 수교훈장 숙정장, 1973년,1982년,1988년 니제르 국가훈장, 1993년 제4회 상허대상, 1996년 제4회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습니다.의사 조규자는 1975년,1983년,1988년 니제르 국가훈장, 1982년 대한민국 국가훈장 수교훈장 숙정장, 1993년 제4회 상허대상, 1998년 KOICA 공로패, 1996년 제4회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힘든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 조국을 떠난 그들입니다.
이제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니제르는 아직도 그 때 그 시절을 못 벗어나며 세계 최빈국입니다. 청춘과 꿈과 야망을 모두 바친 김대수,조규자 부부의 어언 20년 세월을 되돌아봅니다.

대한민국의 영예를 떨쳤고, 니제르인의 생명을 지켰으며, 한국과 니제르 두 나라간의 상호협력 및 우의에 기여한 공로로 그들의 일생을 간추린다면 결례가 아닐까요.
멀고도 먼 그곳에서 숭고한 사랑의 인술을 펼친 그들 부부가 있어 오늘의 우리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 사택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니제르 파견 한국의료단 백용환, 김대수 의사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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