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선후배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고 늦게 들어왔다. 자정 다 돼서 잠자리에 들었다. 근래들어 가장 늦게 잔 것. 고향 사람들은 언제 만나도 좋다. 다음 모임 날짜도 미리 잡았다. 4월 15일. 약력으로 내 생일날이다. 오늘은 잠시 뒤 고향에 성묘하러 간다. 10번째 에세이집 '새벽찬가' 출간을 신고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매번 책을 낼 때마다 부모님께 알린다. 그러면서 같은 바람을 기도한다.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받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지금껏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감사한 마음이다. 9권의 에세이집을 내고, 10번째 책 출간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시골 출신이었기에 이처럼 여러 권의 책을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도 동심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말하자면 내 글의 진원지는 고향인 셈이다. 10권은 나름 의미가 있다. 당초 나의 목표이기도 했다. 까마득해 보였는데 여기까지 왔다. 뿌듯함도 느낀다. 고향에 누워계신 부모님도 좋아하실 것 같다. 나 역시 행복하다.


설날 고향 가는 열차 표 끊는 날이다. 6시부터 예매를 시작한다. 형님이 계신 세종에 차례 지내러 가야 하기 때문에 오송역 표를 끊는다. 오늘 못 끊으면 내일 끊어도 된다. 오송은 경부, 호남선이 모두 선다. 경부선은 오늘, 호남선은 내일 예매한다. 아들은 근무라서 함께 못 내려가고 나와 아내만 내려간다. 따라서 왕복 2장씩 끊으면 된다. 설 전날 오후 내려갔다가 차례를 지낸 뒤 점심까지 먹고 올라온다.


예전에 비해 교통편이 참 좋아졌다. 인터넷으로 예매하면 돼 굳이 역까지 안 가도 된다. 옛날에는 대부분 차를 가지고 내려갔다. 대전까지 가는데 대여섯 시간은 보통. KTX가 개통된 뒤로는 대전까지 1시간, 오송까지 50분이면 오케이. 6시 되자마자 접속해야 원하는 시간대를 끊을 수 있다. 표 끊는 것도 재미다. 스릴이 있다. 더러 허탕칠 때도 있긴 하다.





옛날에는 시골 출신들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경야독(晝耕夜讀)도 그런 데서 연유했다. 낮에는 논밭을 갈고, 밤에 등잔불 밑 에서 공부를 해 꿈을 이뤘다. 면 단위마다 그런 인물들이 심심찮게 나왔다. 동네 잔치가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도회지, 그 중에서도 부유한 가정 출신들이 빛을 본다. 시대가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70~80년 무렵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촌놈이 더 많았다. 숫적으로 우세하다 보니 서울 출신들은 소수로 전락했다. 단과대 학생회장이나 총학생회장도 거의 촌놈 몫이었다. 그래서 차림새는 비록 남루해도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이제는 농촌과 도회지의 개념이 모호해 졌다. 말투만 조금 다를 뿐이다.


회사에 출근했더니 난이 눈에 띄었다. '축하 합니다. 촌놈 아무개'라고 씌어 있었다. 일전에 인사를 나눈 이가 보낸 것. 성실하고 우직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난향과 함께 중첩됐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줄곧 활동해온 토박이 였다. 특히 촌놈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충청도 촌놈 이기에….





누구와의 만남은 즐거운 일이다. 사람은 부단히 사람을 만난다. 혼자서는 살 수 없어서다. 그런만큼 만남에 공을 많이 들인다. 만남을 통해 모든 것이 이뤄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혼도 그렇고, 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한 점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진지해야 한다. 참만남을 위해서다.


40년만에 시골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을 만났다.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대전에 갔다가 해후했다. 전화번호는 알고있던 터라 연락했다. 반가운 음성이 들렸다. 얼굴은 모르지만 몇 차례 통화하면서 대강의 소식은 알고 있었다. 무조건 약속장소를 정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도중 그렇게 설레일 수가 없었다.


조용한 찻집에 도착했다. 분위기가 고즈넉했다. 친구는 먼저 와 있었다. 50대라곤 둘 밖에 보이지 않아 바로 다가갔다. 어색할 줄 았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금세 동심으로 돌아갔다. 고향, 친구 근황 등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1시간 가량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언제 또 다시 만날 줄 모른다. 손을 흔들어 주는 친구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충남 보령. 그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녔다. 그리고 6학년 올라가면서 대전으로 전학을 갔다. 지금 고향엔 친인척도 없고, 부모님 산소만 있다. 그래도 고향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1년에 2~3번 내려간다. 언제가도 정겹다. 고향을 사랑하는 이유다.



글 / 오풍연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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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이것저것 꼼꼼히 적은 메모지를 가지고 마트에 가서 장을 봐서 시골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 댁을 갔다.
차를 넓은 마당으로 들이
밀어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어머니께서 문을 열고 나오셨다.
오는 자식 기다리시느라 문밖을 내다보기를 수차례 하신 것이
눈에 선하다.

 

짐을 내려서 일부는 냉장고에, 그리고 냉동냉장이 필요 없는 것들은 그냥 바깥에 정리하였다. 시골에 가면 내가 제일 먼저 돌아보는 코스인 넓은 뒤뜰에 가보니, 수년전에 뒤뜰에 심어놓은 산다래 나무에 생수병과 작은 비닐 주머니들이 과일처럼 달려있다. 벌써 꽃도 피지 않는 다래나무의 열매가 달릴 리도 없고, 또한 열매의 크기, 색깔, 모양을 내가 이미 알고 있고, 또한 다래나무의 열매를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더라도 지금 다래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 열매가 아니라는 것은 알수가 있을 정도로 이상한 풍경이었다.

“어머니 다래나무에 달아 놓은 게 뭐예요, 왜 달아 놓으신 거죠?”고 내가 물으니,

“응, 산다래나무의 수액이 몸에 그리 좋단다”하시

자식들에게 나눠서 먹게 하려고 그렇게 나무에 요란한 치장(생수병 큰것, 작은것, 비닐팩 여러개 등)을 하셨단다. 고로쇠 나무의 수액은 몸에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찾고 알려졌는데, 산다래나무의 수액을 마신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며칠째 모으셨는지 큰 프라스틱 페트병으로 2병과 작은 페트병 2병이 담겨져 있고, 산다래나무에 달려있는 생수병과 비닐팩에는 링거에서 떨어지는 방울 같은 작은 물방울이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

당신이 드실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수액을 받을 시도도 하지 않으셨을 어머니의 자식 사랑에 순간 가슴이 먹먹하게 되어 하마터면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보일 뻔 했다.

전기밥솥에 밥을 짓고 야채를 깨끗이 씻고 돼지목살을 굽고 하여 점심을 배불리 먹었다.

내 나이도 40대 후반. 돈 벌기 위하여 일하느라 살기 바쁘고 자식 키우고 하다보면 부모님이 기억날까 하는데...대한민국의 아버지가
되어보면 어머니가 더욱 그리운 심정이 된다는 것을 나는 산 경험으로 안다. 주말을 아내와 아이들과 놀면서 보내는 것도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지만, 어머니 댁을 방문하여 이야기 하고 식사하고 즐거운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면 그 가슴 벅찬 행복은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밤중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님 집에 들러 산다래나무수액이 든 병을 전하였다. 부모님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자식에게
사랑을 더 주지 못하여 안타깝고 자식은 끝까지 부모한테서 사랑을 받기만 하는 생각이 든다 .

 어머니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저희들 곁에 머물러 주세요.

 


권용원 / 경북 안동시 정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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