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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인간은 무궁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다 통나무는 무궁한 가능태다. 기둥으로, 책상으로, 땔감으로도 열려 있다. 통나무는 자신을 누구라고 단정 짓지 않는다. 쓰임이 무궁함을 아는 까닭이다. 천만금의 무게도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는 것은 통나무가 품은 무한한 가능성이 스스로를 밀어올리기 때문이다. 품지 않으면 뿜어내지 못하고, 차지 않으면 넘치지 못한다. 인간은 결코 머물지 않는다. 늘 어디론가 향하고, 무언가로 되어간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무궁한 가능태’다. 인간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만물은 변해간다. 화석조차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바위도 실은 어제의 그 바위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누구도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세상에서 번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 만물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 더보기
소유의 삶이냐?, 존재의 삶이냐?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철학자였던 에리히 프롬(Erich Fromm). 그는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산업화 사회와 물질적 풍요가 가져온 폐해를 지적하면서,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옮겨갈 것을 권하고 있다. 산업화 사회의 두 얼굴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산업화 사회에서 인류의 삶에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경제의 중심을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가족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삶의 기반을 농촌에서 도시로 바꾸었다. 대량 생산으로 원하는 물건을 싼 값에 구입할 수 있게 됐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돈이 넘쳐났다. 이에 따라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이 생겼다. 소위 물질만능시대였다. 그러나 어두운 그들도 있었다. 부모들이 모..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