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외국 관광객들이 우리나라를 찾아 음식과 문화를 경험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모로코인들의 모습이 등장했다. 한국에 놀러 온 이들은 놀이동산을 구경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바로 음식이었다. “할랄(Halal)이 아닌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그들의 전통 때문이었다. 결국엔 국내 할랄 식당을 찾아 음식을 주문하는 모습이 나왔고, 시청자들을 중심으로 할랄 음식에 관한 관심도 높아졌다.



무슬림인은 전 세계 인구의 30%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많다. 무슬림이 먹는 음식을 가리켜 ‘할랄 푸드’라고 한다. 할랄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허용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할랄 식품도 할랄이 허용한 음식을 말한다.


육류는 이슬람 종교 의식에 따라 도살된 것이어야 하는데 주로 염소고기나 닭고기, 소고기까지 허용하고 있다. 돼지고기나 다른 동물들은 금지된다. 원육 뿐 아니라 돼지 콜라겐 성분이 담긴 화장품도 허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돼지에 닿았던 칼이나 도마로 손질한 다른 식재료도 금지된다.



이렇게 금지된 음식은 ‘하람 푸드’라고 불린다. 무슬림들은 엄격한 종교적 기준으로 할랄을 지켜오는데, 설사 하람이라고 하더라도 모르고 먹은 경우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할랄 푸드를 먹는 무슬림 인구 증가세가 가팔라서 이들 식품 시장은 국내에서도 블루오션으로 꼽히기도 한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할랄푸드 시장은 2조 5,37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등 국가들은 한류에 관한 관심도 높아서 할랄 인증을 받은 한국 식품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할랄 인증을 받은 김치나 라면, 불고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해외여행이 늘어나면서 이들 국가를 방문했던 내 여행객들을 중심으로 한국인들의 할랄 음식 수요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엄격한 인증 절차를 거쳐야만 할랄 푸드로 인정받을 수 있어서 ‘할랄 푸드 = 건강식’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실제로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3년 할랄 개념을 ‘무슬림에 허용되는 것’이라는 기존 개념에서 확장해 ‘건강에 좋고 안전하며 양질인 재료’라는 뜻을 추가하기도 했다.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건강한 음식을 찾는 소비자까지 겨냥해 할랄 시장을 키우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여기에 국내 무슬림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할랄 푸드에 대한 인기를 높이고 있는 이유다. 



대표적인 할랄푸드로는 ‘후무스’가 있다. ‘중동의 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슬림들에게는 익숙한 식재료 중 하나다. 후무스는 병아리콩을 삶아 으깬 뒤에 참깨나 레몬즙, 올리브유 등을 섞어서 먹는 음식이다. 식물성 재료로 만들어져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채식 위주의 식습관을 즐기는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병아리콩에는 단백질뿐 아니라 엽산, 철분 등이 풍부하게 들어있고 칼로리가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동 사람들은 이 후무스를 빵에 스프레드처럼 발라서 먹거나 피타브레드(이스트로 밀가루를 발효시켜 넓적한 빵처럼 만드는 것)에 견과류, 토마토, 양파 등과 함께 곁들여 먹는다. 





      

    

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미래에는 행복해지리라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그러나 지금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주변을 맴도는 행복을 끌어안지 않았을 뿐 돌아보면 지금도 충분히 행복할

    이유가 가득하다.

 

 

         

    

 

 

 

 "당신은 왜 살아가죠?"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던져진다면, 대부분은 “행복하기 위해서요.”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목적이 있다면,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행복’이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도 미래에는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기에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삶에 어떤 행복도 느끼지 못하고 미래마저도 행복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왜 우리는 이다지도 행복에 집착하는 걸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곧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물을 찾듯이, 새들이 하늘을 날듯이, 사람은 저 깊은 속마음에서부터 행복을 추구한다. 그냥 그렇게 설계되었다. 어쩌면 태초에 조물주가 입력한 가장 중요한 유전자 암호가 곧 ‘행복실현의 욕구’가 아닐까?

 

실제로 행복하면 그만이다. 비록 높은 지위와 화려한 명예, 충분한 재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 앞에서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행복감은 삶의 완성품! 누구라도 행복한 사람을 가장 부러워한다. 행복이야말로 삶의 참된 의미요, 절대가치가 아닐 수 없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사실 이 질문은 매우 짓궂기 그지없다. 굉장한 실례다. 그저 친한 친구들에게나 할 수 있는 농담이다. 그런 실례를 무릅쓰고 필자가 이 질문을 던져 보니 선뜻 “맞소. 나는 행복하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보다 대답을 주저하거나 “글쎄요.”라는 대답이 훨씬 많았다. 어찌해서 우리는 ‘왜 사느냐?’는 질문에는 ‘행복하기 위함’이라고 쉽게 말하면서도 막상 ‘행복한가?’라는 질문에는 왜 확연히 대답하지 못하는 걸까?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미안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불행한 일이 적지 않다. 이 지구에는 전 세계 인구 73여억 명이 먹을 수 있는 두 배의 식량이 생산되지만, 아직도 인류의 1/6은 절대빈곤자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각종 질병과 사건, 사고, 전쟁이 늘 끊이지 않는다. 내가 그런 아픔의 당사자일 수 있고, 설령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내 이웃이 이와 같을진대 어떻게 내가 선뜻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곧 철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누구라도 위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위 질문은 곧 매우 큰 결례를 범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푸른 하늘을 보고 “하늘색이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누구라도 행복하고 나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행복을 굳이 말로써 드러낼 필요가 없다. 지극히 당연한 행복을 물어서 무엇하고, 내세울 건 또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내 행복을 꼭꼭 숨기거나 포기할 이유도 없다.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은 나만의 사정이 아니며, 우리 모두의 공통 관심사이며 보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다는 표현을 삼갈 수 있지만, 행복감만큼은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

 

 

 

 행복을 끌어안아야 행복하다

 

어느 날엔가 나는 50대의 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몹시 불행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든요.”

“혹시 지금 부인은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라, 떠난 사람에게 미안해서 행복을 멀리하려는 마음이 아닐까요?”

 

사람으로 태어나 생각할 수 있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본래 행복하지만, ‘행복을 끌어안느냐, 떨쳐내느냐’의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후자를 선택해서 곧잘 내 행복을 떨쳐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위대한 우리네 삶은 반드시 내 고집을 꺾고 나를 행복의 물결에 동참시킨다.

 

필자 역시 십여 년 전 사랑하는 혈연을 잃었다. 나는 행복할 수 없었다. 아니 행복하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사는 동안 외로움에 몸부림쳤고 아픔만 겪다가 하늘나라로 가 버린 혈육이지 않았던가. 더욱이 그 책임이 내게 있다는 생각에 나는 내 행복을 철저히 배격하고 거부했다. 나는 내 마음 둘레에 두꺼운 옹벽을 쌓고 행복의 요소들을 모두 차단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행복은 불과 수개월도 안 되어 내 마음 옹벽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소리 없이 파고드는 행복의 습격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토록 불행해지려고 굳게 다짐했지만, 행복의 에너지는 치밀하고 조용했고 거대했다. 나는 행복의 물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내 방어는 무력했고 내 저항은 초토화되었다. 완패! 나는 행복 앞에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게 행복이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었음을. 내 행복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일련의 사건들 역시 행복 덩어리일 수 있다. 행복하기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불행하다는 것은 착각일뿐

 

마음병을 앓고 있는 29살의 한 청년이 말했다.

 

“집에 있는데 자꾸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받게 해요. 특히 먹을 것 가지고 그러세요. 배가 불러서 더부룩하고 속이 울렁거리는데도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하시거든요. 왜 이토록 사소한 일로 제 삶이 불행해져야 하는 거죠?”

 

그는 불행한 게 아니었다. 불행의 이유를 붙인 것에 불과했다. 울고 싶을 때 누군가 뺨을 때려 주면 고맙지 않은가. 그는 스스로 뺨을 때릴 수 없었고 핑곗거리를 찾아내었다. 누구라도 불행하고 싶을 때, 이런저런 핑계를 댈 만한 일들이 보이면 얼른 그것을 부여잡는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되물었다.

 

“아직 어머님께서 젊으셔서 체력이 좋으시고, 치매도 없으시고 건강하게 살아계시잖아요. 지금의 이런 상황이 곧 행복 아닌가요?”

 

불행감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내가 행복을 멀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불행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혔을 뿐,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의 불행은 결국 행복에 겨운 소리였다. 그는 불행을 가장하여 행복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른 데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는 타인에게 뺨을 맞을 수도 있다.

 

 

  

마음을 비우면 행복이 온다

 

행복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상대가 불행하다고 주장할 때, 그의 말에 속아줄망정 결코 속지 않는다. 만일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다면, 사기와 절도, 폭력, 그리고 그 이상의 범죄일 뿐이다. 설사 누군가가 언어폭력을 휘두를지라도 내가 듣지 않거나, 흘려들으면 그만이다. 더욱이 가까운 사람들의 잔소리라면 ‘자장가로 들리는 사랑의 노래’가 아닐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행복의 요소가 없는 게 아니라, 행복을 느끼는 마음의 센서가 오작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기대치가 높음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마음병이다. 마음병은 마음의 센서를 고치면 된다. 그 방법이 곧 자기수양이다. 성현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자기를 수양하면 바로 해결된다.

 

현실보다 더 많이 바라는 생각이 곧 기대치가 높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허준 선생은 동의보감에서 ‘마음을 비우면 도와 합한다(虛心合道)’라고 하였다. 자기만족의 기대치를 내리는 게 곧 ‘마음 비우기’다. 분수를 잊은 채 남처럼 되려는 마음, 내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모습만을 좇는 마음이 문제다. 도(道)란 곧 지극한 행복! 마음을 비우면 본래부터 있었던 지극한 행복감이 즉시 회복된다.

 

 

  

마음껏 행복해도 괜찮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한 투쟁으로도 규정해 볼 수 있다. 선을 추구하는 철학, 사랑과 자비를 실현시킨 종교, 민주화에 대한 열정, 그 모두가 후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선각자들의 치열한 노력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들의 뜻을 따라 행복을 누려야 할 의무가 있다.

 

다만 선각자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음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내가 먼저 행복하고 그 행복한 에너지를 발판 삼아 다시금 다음 세대가 행복할 수 있도록 더 아름다운 자연을 남겨 주고, 기부문화에 솔선수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내가 지금의 행복을 거부하고, 또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내 삶을 희생하고, 다시금 그 후대의 누구도 나처럼 따라 한다면 도대체 누가 행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지금 마땅히 행복해야 하며, 기대치를 내려서 마음껏 행복해도 괜찮다.

 

글 / 황웅근 인의예지 심성계발원 대표

출처 / 사보 '건강보험 2월호'

 

   

 

로그인 없이 가능한 손가락 추천은 글쓴이의 또다른 힘이 됩니다

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기가 믿는 종교를 떠나서 종교시설은 사람들에게 저절로 경건함을 느껴지게 하는 장소가 된다. 각 종교 시설

          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는데, 불교에게서 그 특징을 찾으라면 자연과의 조화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절이 산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절에 가려면 대부분 약한 하이킹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혹자는 조선의

          억불정책 때부터 절을 산 속에 짓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은 지 무려 천 칠백여년 되는 강화도의 전등사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모양이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가던 진나라의 아도화상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그때가 381년이니 실로 엄청 오래 된 절이라 하겠다. 그러고 보면 강화도는 역사책 처음부터 자주 등장한다.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마니산이 있고, 전등사 가는 길에 만나는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또 팔만대장경도 강화도에서 만들어서 해인사에 보관했다고 하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정족사고도 있다.  그리고 강화도 곳곳에는 과거 해상경계를 담당했던 진과 돈대가 여러 군데 존재해서 외세침략에 대비하여 그 중요도를 짐작케 한다.

 

전등사는 김포 신도시를 지나 초지대교를 건너 새로 생긴 길을 따라가면 금방 도착한다. 아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걸어 올라갈 수 있는데, 조금 걸어 올라갔더니 이럴수가! 절 바로 밑에 또 주차장이 있다. 많이 걷기 힘든 분은 위쪽 주차장을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주차 요금은 같다).

 

 

 

 

일주문이 없는 전등사는 삼랑성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듯 길게 쌓여 위엄을 자랑한다. 곧 남문으로 올라오는 길과 만나서 수령이 오백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와 만나게 되는데, 이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게 된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예전에 세금으로 이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은행 스무 포대를 갖다 바쳐야 하는데, 기껏 모아봐야 열 포대 밖에 생산이 안 되었단다. 그래서 고민을 하던 중 전등사 스님 세 분이 은행이 열리게 하는 기도회를 연다고 하여 다들 모여서 구경을 하는데, 하늘에서 빛이 번쩍 하더니 스님은 보살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징수하던 관리들은 깨달음을 얻고 이후 은행나무에선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석가탄신일이 다가와서 화려한 등으로 장식해 놓은 대조루 아래를 지나서 경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웅보전이 보인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다소 작은 건물이지만, 광해군 때 재건되었다고 하는 조선 중기 건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공포는 화려한 다포계 방식이며 멀리 뻗은 팔작지붕과 우람하고 우뚝 선 살짝 배흘림기둥이 대웅보전을 더 아름답게 보여주게 한다. 이 대웅보전의 추녀 밑에는 아주 유명한 나녀(벌거벗은 여자)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여기에 전해지는 이야기 또한 재미있다.

 

광해군 때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가 인근 주막의 주모와 바람이 났는데, 도편수는 틈틈이 돈이 생기면 다 주모를 주고 일이 끝나면 같이 살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이 주모가 돈을 전부 들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허탈해진 도편수는 각 추녀 밑에 모두 다른 모양의 나녀를 조각해 두었다는데, 그 이유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단다. 하나는 벌거벗어 부끄럽게 하여 그 주모를 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처님을 모시는 건물의 지붕을 받치게 함으로 지은 죗값을 하게하고 자신은 용서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대웅보전 옆에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이 위치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여러 부처가 있고, 각 부처가 관장하는 영역이 다르다. 약사여래는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 해주고 재앙으로부터 구원해준다고 한다. 약사전의 건축 양식은 대웅보전과 거의 흡사하다.

 

 

 

 

약사전 옆에 위치한 건물은 명부전이다. 명부전 입구를 들어서면 사천왕이 좌우에 눈을 부라리며 서 있다. 그리고 지장보살이 가운데 있으며, 주변으로는 죽은 이를 심판하는 여러 왕들이 모셔져있다. 명부전은 모든 사람들이 극락에 가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복장마저 일반 수도승의 모습을 한 지장보살 이야기처럼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비는 곳이다. 그리고 흔히 죽은 이를 심판한다고 하면 염라대왕만 알기 쉬운데, 여러 왕들을 거치면서 여러 방면으로 죽은 이를 심판한다고 한다. 유명한 웹툰 “신과 함께(저승편)”을 보면 재미있게 잘 나와 있다.

 

 

 

 

 

약사전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삼성각이 나온다. 삼성각은 산신각(산신), 독성각(나반존자), 칠성각(북두칠성)을 하나로 합친 건물이다. 부처를 모신 절에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는 하다. 예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종교는 불교가 전부가 아니라 도교나 유교 등 많은 철학이 같이 들어와 있었는데, 여타의 종교가 그러하듯 조금씩은 기존 사상과의 융합을 통해 뿌리 내렸고, 삼신각도 그 중 하나이다. 얼마 전에 가 본 청평사에서도 그렇고 보통은 주된 건물들보다 조금 위에 위치하더라.

 

 

 

 

 

시선을 뒤로 돌려 올라왔던 대조전을 보면 옆에 종루가 있다. 기존에 있던 전등사 범종은 보물 제393호이기 때문에 종각에 따로 옮기고, 예불 때 실제로 치기위한 범종을 따로 종루에 두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종 뿐만아니라 다른 것들도 보인다. 바로 북(법고)과 나무로 만든 물고기(범어)와 청동으로 만든 구름모양의 판(운판)이 더 보인다. 불교에서는 소리를 통해서도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데 법고는 땅에 사는 중생을 범어는 물에 사는 중생을 운판은 하늘을 나는 중생을 범종은 지옥에 신음하는 중생을 구한다고 한다.

 

 

 

 

템플스테이를 하는 건물 아래쪽에는 절 건물 같지 않은 동굴(?)이 보이는데 무설전이라 하였다. 하나의 갤러리처럼 운영되는 이곳은 불교를 주제로 한 여러 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과거부터 불교는 미술의 발전을 낳았다. 건축으로, 조각으로, 회화의 방법으로 미술이 발전하는 가운데에는 불교의 영향이 컸다. 최근에는 이렇게 전등사에서 미술과 불교가 다시 만난 것으로 보였다.

 

 

 

 

사실 글의 처음에도 밝혔듯이 자연과 함께 위치한 전등사에서 볼거리는 건물들만이 아니었다. 입하가 코앞인 5월의 따스한 봄날, 강화도는 때늦은 벚꽃과 목련이 이제야 꽃비를 내렸고, 진달래와 앵두나무 등 알록달록 꽃들이 지천에 피어있어 봄 소풍 기분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주차장 인근에는 인삼으로 유명한 강화도답게 인삼막걸리와 도토리묵, 산채비빔밥 등 자연식 먹을거리로 했고, 주변 동막 해수욕장과 강화도 곳곳에 위치한 진과 돈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다 구경을 하는 기분도 상쾌했다. 요즘처럼 따뜻한 봄날엔 가벼운 등산과 알록달록 꽃구경, 고대 건축물 구경이 한꺼번에 가능한 전등사로 당장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로그인 없이 가능한 손가락 추천은 글쓴이의 또다른 힘이 됩니다

 

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도도한 피터팬 2013.05.31 16: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이전버튼 1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건강천사'는 국민건강보험이 운영하는 건강한 이야기 블로그 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공지사항

Yesterday1,620
Today166
Total2,151,109

달력

 « |  » 2019.1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