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는 공존의 미학이다. 받아서 행복해지고 주면서도 스스로가 풍요로워지는 윈윈의 방정식이다. 재능

          기부는 물질적 기부보다 소통의 의미가 더 강하다.재능은 나눔으로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의 탤런트가

          업그레이드 된다. 행복이란 파이를 키워가는 선순환사이클이다.진정으로 행복한 사회는 물질적 풍요와 나눔이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지역 갈등으로 몸살을 앓는 우리사회에 재능기부가 확산되는 것은 대한

          민국에 여전히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확산되는 공존의 바이러스...재능을 나누다

 

 ‘국민 엄마’ 김혜자씨.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기는 스타 배우다. 언젠가부터 인터넷에서 ‘김혜자’를 검색하면 연기보다 봉사라는 단어가 더 떠오른다. 그는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아프리카 오지를 돌며 환한 미소로 소외된 자들의 슬픔을 달랜다. 그의 재능은 연기가 아닌 따스한 마음이다. ‘국민 가수’ 조용필씨. 지난해 외로움이 짙게 밴 소록도를 춤추게 한 주인공이다. 1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돈되는’ 스케줄을 뿌리치고 이곳을 찾아 한센인(나환자)들의 허전함을 노래로 채웠다. 주민들은 흥에 겨워 춤을 추고, 감사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KAIST(카이스트)의 정재승 교수. 수년째 지방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과학강연을 하고 있다. 그가 트위터를 통해 ‘강연기부’에 동참해달라는 글을 올릴때마다 반응은 뜨겁다. 하루도 안돼 300여명의 지식인들이 지식기부를 하겠다는 뜻을 전해온다. 허드렛일이라도 시켜달라는 비과학도만도 100명을 넘는다. 대입준비에 쫓기면서도 수년째 장애인들을 돌보는 고교생, 봉사진료를 할때 더 에너지가 생긴다는 의사, 병원 로비에서 환자들에게 평온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재능기부로 우리사회에 빛을 비추는 주인공들이다.

 

 

 

더불어 행복해지는 선순환...사회를 밝히다

 

재능기부와 물질기부의 공통분모는 나눔이다. 다만 나눔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기부는 기부자와 수혜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선순환사이클을 확대시킨다. 기부로 물질은 줄어들지만 재능은 오히려 업그레이드된다. 강연기부를 하는 교수의 지식세계가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재능기부를 받은 자가 그 재능을 키워 누군가에게 다시 기부하면 세상의 행복은 그만큼 커진다.

 

재능기부의 영역도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가수는 노래로, 의사는 의술로, 지식인은 강연으로, 선수는 운동으로 이웃과 사회의 행복지수를 높인다. 음악 미술 교육 미용 의료 체육 등 따스한 마음만 있으면 자신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은 도처에 널려있다. 재능엔 높낮이가 없다. 다만 지구상 인구의 숫자만큼 다양함이 있을 뿐이다. 사회구조가 복잡하고 다양해지면서 물질보다 재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재능기부는 프로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작은 재능이 여럿 모이면 큰 재능 하나보다 더 강한 빛이 된다. 우리 모두 재능기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재능기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미지 업그레이드...품격을 높이다

 

 

재능을 나누든, 물질을 나누든 기부는 스스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인다. 이는 개인 단체 기업 국가 모두 마찬가지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기업들은 기부를 통해 회사의 이미지를 끌어올린다. 기업들이 재능기부에 앞장서는 것은 나눔을 통해 공생의 참뜻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런 실천이 기업의 이미지까지 높여주니 말 그대로 ‘일석이조’다. 글로벌 시대에 이미지 제고는 기업 마케팅의 최우선순위다.

 

재능기부는 개인의 품격도 높인다. 주변 사람이나 자기계발, 취미 등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다양한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고 이런 활동을 통해 키운 재능은 고유 업무의 효율성을 향상시킨다. 한마디로 재능기부를 통해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춰가는 ‘스마트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기 탤런트 차인표씨. 그는 해외의 불우 어린이들에게 베품을 주고 수십배의 행복으로 돌려받는다고 말한다. 그가 넉넉지 못한 사람들에게조차 좀더 나누는 삶을 살라고 당당히 말하는 이유다.  

 

 

 

기부가 넘치는 사회...국격이 달라지다

 

미국의 위상이 흔들린다는 얘기가 많다. 경제가 비틀대면서 달러가치도 수년째 하락세다. 버락 오바마 2기 행정부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위상이 있다. 바로 기부문화다. 미국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기부정신엔 후한 점수를 준다.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기부문화가 추락하는 미국의 이미지에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셈이다. 글로벌시대에 기부문화는 바로 그 나라 품격의 척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부를 넘어 국가와 국가로 재능기부를 넓히면 국제사회에서 ‘코리아 브랜드’는 명품이 된다.

 

폐허의 땅에서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의 10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한국은 분명 ‘경제성장의 롤모델’이다.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연일 한국을 배우려는 기업가와 관료들이 밀려온다. 참 자랑스런 일이다. 하지만 부자는 나눔, 관용, 배려등 부자다움이 있어야 진짜 부자다. 경제성장으로 부(富)는 커졌지만 나눔이란 미덕이 쪼그라든다면 한낱 졸부(猝富)에 불과할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퍼져나가는 ‘나눔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덮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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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즈베키스탄의 허준  김광락

단풍나무 그늘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하면, 병원 앞 두 그루의 우람한 단풍나무가 그를 반깁니다.
병원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있는 나무 그늘이 아름답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그 나무 그늘아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습니다.

 

 

 

  한의사 김광락

 

 그는 1961년에 태어나, 1987년 동국대학교 한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의사였기에, 한의학과의 연결은 자연스러웠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1987년부터 1989년까지 해병대 1사단에서 한의사 군의장교 1호로 근무하면서 영내에 한방진료소를 개설하였습니다. 제대 후 포항에서 한의원을 15년간 운영하면서 틈만 나면 미얀마(Myanmar)와 스리랑카(Sri Lanka) 등지로 단기해외봉사활동에 참가하였습니다.

 

 풍족한 삶을 누리면서, 그는 늘 베푸는 사랑을 떠올렸습니다.
 한의사 김광락은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한국,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에서 3년간 근무하였습니다.

 

 

 

  정부파견 한의사로 근무하면서 '글로벌 한의학'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

 

 그는, 처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병원을 세우게 된 역사를 돌이켜봅니다.

 

1996년 대한한의사협회 산하 KOMSTA(대한한방해외협력병원)는 우즈베키스탄 한국대사관 초청으로 타슈켄트 소재 국립 제1병원에 단기 의료봉사단을 파견한 것을 계기로 1997년 6월에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 병원을 개원했습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 내 병원 건물
1개동을 10년간 무상 임대하는 조건으로 병원설립이 정식 성사되어, 정부파견한의사들은 고려인과 우즈베키스탄 현지인 등 80여 명의 환자들을 매일 무료로 돌보았습니다.

 한때 환자들이 1년을 넘게 진료날짜만 기다리기도 했으나, 최근 진료시스템이 보완되었습니다.

 

 예약 환자가 6개월씩 밀려 있을 만큼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데, 이는 한의학이 외국인의 체질에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향후 FTA(자유무역협정)에 의한 시장개방과 함께 의료분야에 있어 해외시장 진출 시 그 성공가능성을 높여줄 것입니다.


 그는 한국의 KOICA 및 KOMSTA가 자랑스럽고, 그 봉사활동을 처음 시
작한 선배들의 마음과 노력에 다시 한 번 깊은 존경심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KOMSTA와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의 숭고한 사업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였습니다.

 

 한의사 김광락은 1년 평균 3,200여건의 진료를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150여건의 금연과 금주 및 금마약침 시술을 실시하여 높은 완치율을 보이며 환자들에게 지속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교육 분야에서는 타슈켄트 국립 제1의과대학생과 현지 의료진들을 대상으로 한의학 이론과 실습 강의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더욱이 척박한 땅에서 혹한의 시련을 극복하고 민족의 뿌리를 이어 온 고려인이 2십만여 명이나 거주하고 있는 이곳 우즈베키스탄에서 한의학이 단순히 의술을 펼치는 차원을 넘어 보건 분야 발전과 한국,우즈베키스탄 문화 및 경제협력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처럼 한국,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은 동포인 고려인에게는 향수를, 우즈베키스탄에는 국경 없는 무료의술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현지 보건과 의료 환경개선을 위해 힘쓰고, 현지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의학 강의 및 실습을 통한 교육을 실시하는 등 글로벌 한의학을 위해 부단히 활동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노무현대통령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활동하였던 민간단체 ‘사랑의 열매’로부터 긴급환자 수송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앰뷸런스 한 대를 지원받아 의료봉사 관계자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는' 봉사에서 '기르는' 봉사로의 전환을 말하다..

 

 한의사들이 수많은 우즈베키스탄 현지인과 고려인 환자를 돌보며 적지 않은 업적을 쌓았지만, 한의학 교육문제는 거의 방치되어 있는 점을 그는 주목하였습니다.

 

 매주 현지 의과대학생들과 관심 있는 병원직원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의사 등을 대상으로 침구학개론 수준의 한의학을 강의하고
있으나, 진정으로 내실을 기해야 될 시점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더욱이 자격증에 준하여 피교육생들이 임상허가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타슈켄트에도 무면허 침구사들이 의외로 많이 활동 중인 것을 보고 KOMSTA도 이제는 ‘주는’ 봉사에서 ‘기르는’ 봉사로의 발상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10년간의 계약기간이 만료되고 다시 시작될 10년간의 KOMSTA는 제2의 도약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더없이 중요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식량자급이 어려운 나라에 당장의 식량을 보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급한 문제일 것이지만, 궁극에는 식량을 스스로 재배하고 자원화해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을 가르쳐 주고, 더 나아가서는 식량을 받던 나라가 더 어려운 곳을 보살피거나 처음 식량을 제공해준 나라와 상호 발전의 파트너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식량문제를 한의학으로 바꿔 생각해 볼 때 지금까지 환자치료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부터는 새로운 10년 계획으로 젊은 우즈베키스탄 의사 혹은 고려인들을 교육하여 스스로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을 치료하고 한의학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시스템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교육을 받은 우즈베키스탄 의사 혹은 고려인 의사들이 언젠가는 선진 한의학을 보유한 한국을 찾을 것이며, 필요에 따라 한국의 한의사들이 우즈베키스탄에 병의원을 개설하거나 교육기관까지 설립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친선한방병원은 KOICA와 KOMATA 그리고 대한한의사협회로부터 연간 3,500여만 원을 지원받고 있으나, 담당 관계자들이 무료진료를 실시함에 있어 발생되는 병원운영비와 열악한 현지 병원환경을 개선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특히 1997년에 우즈베키스탄 정부로부터 10년간 무상임대 받은 것이 만
료 돼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폐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는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수가 날이 갈수록 급증할 만큼 호응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료장소의 협소함과 낙후된 의료시설로 인해 양질의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며, 특히 무상임대 기간 만료로 병원자체가 폐쇄된다면 예약대기중인 많은 환자는 물론 장기적으로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정부차원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향후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에는 침구학부가 공식적인 커리큘럼으로 승인될 예정이며, 보건복지부에서는 러시아어 한의학 교재 제작을 위해 지원키로 하는 등 우즈베키스탄에서 한의학을 통해 병원과 교육이 공존하는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한국국제협력단의 도움을 받아 금요특집으로 마련된 '한국의 슈바이처들' 시리즈가

 이번 회차를 마지막으로 끝맺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금요특집을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고 따뜻한 글로 사랑받는 건강천사 운영진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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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가을, 이제 갓 3개월 된 갓난쟁이 효재의 목이 무섭게 부풀어 올랐다.  기침하고 열이 나고 콧물이 흐르기에 그저

 감기인 줄만 알았던 집
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치료를 받고 목 부분이 가라앉은 다음에는 온몸에 발진이 일어났다.

 며칠 뒤 의사는 “면역력 이상이 의심된다.”고 했고 한 달
후에는 만성 육아종 질환이라는, 너무도 귀에 설은 진단명을 내놓았다. 

 부
푼 부위에 고였던 고름을 빼낸 후에 쌔근쌔근 잠든 효재의 얼굴은 그저 평안하기만 했다. 

 
엄마는 그 모습을 오래도록, 가만히, 들여다봤다
 



 

 

   3개월 갓난쟁이 목이 부풀어 오르더니...

 

“집안 어른이 후두암을 앓았던 가족력이 있어, 처음에 아무 이유 없이 목이 부풀어 오를 때에는 암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갓 돌도 안 된 아기가 암일 수는 없다고 의사가 잘라 말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안도를 했죠.

 그런데 한 달 후에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병명을 얘기하는데 그만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엄마 김은향(42세) 씨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명치끝이 뻐근해진다.

 당시 효재는 3개월을 갓 넘긴 갓난쟁이였다.

 큰아들 중현이에게 모유 수유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은향 씨는 둘째 효재를 임신하고 특별히 더 신경을 썼다.

 

 열 달을 기다려 처음 만난 효재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고, 모유 수유에 성공해 효재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일 때면 ‘이런 것이 지극한 행복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효재가 만성육아종질환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효재가 앓고 있는 만성육아종질환(Chronic Granulomatous Disease, CGD)은 반복적이고 치명적인 세균과 진균의 감염, 육아종 형성을 특징으로 하는 선천적인 유전성 면역결핍증이다.  25만 명당 한 명 정도로 발병하는 희귀질환으로 혈액 속에 순환하는 백혈구의 일종인 대식세포(먹는 세포)의 결함으로 발생하게 된다. 

 

 대식세포는 외부에서 몸 안으로 침입한 세균이나 박테리아 등을 잡아먹으며 죽이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만성육아종질환은 파괴된 대식세포로 인해 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때문에 세균 감염에 대한 선천적인 면역기능이 없거나 매우 희박해 감염성 질환에 자주 걸리게 된다.


 육아종은 암이 아니지만, 장이나 식도를 통해 전달되는 음식물의 통로를 막거나 신장과 방광으로부터 소변의 방출을 막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치료 방법이 달리 없는 상황에서 여러 질환들이 반복된다.  

 보고에 따르면 이 질환을 앓는 환자 대부분이 잦은 감염과 후유증으로 조기에 사망한다고 한다.

 30세 이전에 환자 사망률이 50%에 달하는 무서운 질환인 것이다.

 

 태어난 지 3개월 즈음에 병원을 찾았던 효재는 10개월여 동안 병원에 있다가 돌이 훌쩍 넘을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도 감기로, 혹은 사소한 다른 질병으로 병원을 찾기 일쑤였고 한 번 입원하면 서너 달이 기본이었다.

 어느 한 해는 8개월 동안을 병원에서만 보냈다.  그런 효재가 어느새 여덟 살, 초등학교 1학년이 됐다.

 

 

 

 

   하루 삼시 세끼 약을 달고 사는 아이

 

 만성육아종질환은 사람마다 병변이 달리 나타나는데, 효재는 유독 폐와 눈, 입, 항문 주변이 약하다.

 찬바람만 불어도 감기가 폐렴으로 번지고, 눈병이 잦은 탓에 시력이 나빠져 이미 안경이 두툼해졌다.

 항문 주변에도 커다란 농양이 버티고 있어 늘 좌욕을 해줘야 하고, 더욱이 입안이 항상 헐어 있다 보니 효재는 먹는 즐거움과 기쁨에도 영 서툴기만 하다.


 사소한 질환으로도 병원에 서너 달씩 입원하다 보니 효재는 이미 가슴 가까운 혈관에 동전만한 크기의 케모포트(중심정맥관)를 심었다. 처음엔 농도 옅은 항생제로 시작해 해를 거듭할수록 고단위 항생제를 투여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예의 그 또래가 갖고 있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활달하게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또래보다 다소 왜소한 효재가 그저 조금 더디 크는 아이일 뿐이다.

 

 이처럼 개구쟁이 같은 효재의 하루는 약을 먹는 것으로 시작해 약을 먹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매끼 밥을 챙기는 것만큼이나 약을 챙기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폐렴을 치료하는 약에 곰팡이를 치료하는 약, 위장 보호약까지 챙겨 먹는다.

 적게는 서너 알에서 많게는 예닐곱 알까지 한 번에 삼켜야 할 때도 있다.

 

 매끼 30세 이상 성인이 먹는 분량의 약을 먹다 보니 조그마한 위가 남아날 리가 없을 터.

 지난 7월에는 위에 탈이 나 여름방학을 꼬박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이 다시 독이 되어 효재를 공격하는 것이다.


 엄마 은향 씨는 그런 효재를 위해 집안을 더 깨끗이 청소하고, 옷을 더 자주 깨끗하게 빨고 음식에 더 신경을 쓴다.

 다른 엄마들도 똑같이 하는 일을 그저 ‘더’할 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죽하면 주변 사람들이 은향 씨의 하루는 효재 아침밥 먹이는 일로 시작해 효재 저녁밥 먹이는 일로 끝난다고 했을까.

 

“효재의 일상은 다른 사람들의 일상과 다릅니다.

 숨 쉬는 공기, 손에 닿는 것들, 먹는 것, 입는 것, 심지어 늘 생활하고 있는 이 집까지, 모든 것이 효재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어요.

어디에나 그 무엇에나 세균과 박테리아 등이 존재하니까요.

그런데도 씻고 닦고 먹이는 일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요.”

 

 

 

   "엄마, 난 다른 꿈을 찾고 있는 중이야"

 

 예전에 축구선수가 꿈이었다는 효재는 학교에 입학하면서 그 꿈을 마음속에서 지웠다.  은향 씨는 효재가 학교에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체력이 달리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효재 병원비 때문에 집을 줄이고 살림을 줄여 자주 이사를 하는 것보다 효재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거나, 이처럼 꿈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이 더 두렵다고 말하는

은향 씨.

 

 더욱이 은향씨는 다만 얼마라도 살림에 보태야겠다는 생각으로 얼마 전부터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효재를 위해 선택한 길이지만 효재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목에 가시처럼 박혀있다.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 한정돼 있다 보니 사실, 일자리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다.

 

 “부모가 뒷바라지해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효재가 자존감 있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자라면서 세상과 더 부딪힐수록 조금씩 좌절하고 자신감을 잃을까봐, 웃음을 잃을까봐 그게 가장 두렵습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은향 씨는 오랜만에 큰아들 중현이와 둘째 아들 효재를 데리고 집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효재야, 나무는 만지지 마, 손으로 낙엽을 줍지 말고. 낙엽은 발로 차면 먼지 나니까 조심해야돼.”

 

 엄마는 효재에게 다짐 아닌 다짐까지 받았지만, 이미 가을로 꽉 찬 공원에서 아이들은 곳곳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엄마의 걱정은 뒷전인, 그저 아홉 살, 여덟 살 개구쟁이 소년들이었다.

 문득 조금 전, 축구를 포기한 것 같아 속상해했던 엄마에게 효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아직 다른 꿈을 찾지 못했지? 꿈이 없는 건 아니야. 축구 말고 다른 꿈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만성육아종질환이란?

  외부의 세균이나 박테리아를 잡아먹는 역할을 하는 대식세포(백혈구의 일종)의 결함으로 발생하는 유전성 면역

 결핍 질환이다. 대개 1세 이전에 발견되지만 10대 이후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림프절 종창, 피부 염증, 열성질환,

 항문 주위 염증 및 농양, 만성설사 등이 주요 증상으로 나타난다.

  폐나 간, 뇌 손상이 동반되면 10세 이전에 사망하기도 한다.
 현재로선 감염 부위에 따른 항생제 치료가 전부지만 최근 완치가 가능한 치료방법들이 시도되고 있다.

 25만 명당 1명꼴로 발병하며, 국내에는 100여 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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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즈베키스탄의 허준  하동주

 어려운 시기의 고결한 열망

 

 

 

 

 

 

 

 

 

 

 

 

 

 

  김라리사 뻬뜨로브나와 신 아가피야입니다.


  한국한방병원집단에게 모든 환자를 위한 주의 깊고 친절한 태도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타슈켄트 시민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봉사활동하시는 닥터 하동주와

  김지연님께 특별히 고맙습니다.

  환자 대부분의 의견을 표현하면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의 고결한 노동과 우즈벡 국민을 도와주는 열망에 매혹됩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1997년 10월 10일.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한 환자가 한의사 하동주에게 쓰는 편지에는 감동과 고마움이 가득합니다.
  하동주는 1965년에 태어나, 1984년 원광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로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우즈베키스탄 ‘김병화 농장’ 보건진료소와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 병원에서 5년간 근무하였습니다.

 

한국,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 앞에서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중부에 위치하면서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80년의 지배에서 벗어나 1991년 독립하였습니다.

  병원체제는 구소련의 공산주의체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지역별로 선진국 의료체계를갖추었지만, 약품이 부족하고 의사가 없어 각종 질환으로 주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최초의 한국사람은 고구려 출신인 당나라 장군 고선지입니다.
  1,200여 년 전에 고선지 장군은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석국을 정복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바로 이 석국이 오늘날의 타슈켄트입니다. 그리고 구소련에 의해서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한인들의 일부가 지금의 타슈켄트 근방에 정착을 했고, 그 후손들의 상당수는 아직도 이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고려인 김병화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1905년 연해주에서 태어나서, 다른 한인들처럼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습니다. 그리고 강제이주 직후에 황무지에 물길을 열어놓고 수백만 평의 벌판을 논밭으로 개간하고 식량을 지원한 공로로 구소련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서 노력영웅훈장을 받은 인물입니다.

 

  김병화가 일했던 농장은 원래 ‘북극성 농장’이었는데, 1974년 김병화가 죽으면서 ‘김병화 농장’으로 변경됐습니다.

  김병화가 1940년부터 35년간 농장장으로 있을 당시에, 이 농장은 뛰어난 생산능력 때문에 구소련으로 부터 수차례 훈장을 받았습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우즈베키스탄을 방문 기념하여 ‘김병화 농장’ 보건진료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1996년에는 KOICA와 우즈베키스탄 진출 기업단체의 도움으로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 안에 한국,우즈베키스탄 한방병원이 10년간의 계약으로 개원하게 되었습니다.

 

  한의사 하동주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처음으로 의료 활동을 펼친 한국인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한방진료 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의 개원에 일조를 담당하였습니다.

  날로 늘어나는 환자로 인하여 진료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또한 제 때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여 만성화되고 고질화된 환자를 치료하는데 턱없이 부족한 의료장비 및 의약품으로 인하여 원만한 의료 활동이 힘들었습니다.

 

  저임금으로 인한 간호사 부족으로 한 명의 간호사로 매일 70여명을 진료하였고, 지원금이 부족하여 통역이 없는 관계로 정확한 의사전달이 안되었습니다.

  진료소 내에 난방시설이 작동되지 않아 항상 추웠습니다.

 

  그는 동포 및 현지 주민 대상의 무료 한방진료를 하였고, 대한한의사협회와 공동으로 우즈베키스탄 의료 봉사활동 실시 등 보건 수준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진정한 인술 실천으로 민간 외교사절로서의 양국 우호증진에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우즈베키스탄의 열악한 의료수준으로 인해 동포와 현지주민들에게 무료로 질병을 치료해주는 한방진료에 대한 선호가 나날이 높아지는데 기여하였습니다.

 

  ‘김병화 농장’ 보건소에서 하동주의 활약은 눈부셨습니다.
  그들은 치료를 받으면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초콜릿을 선물하였는데, 그 초콜릿을 간호사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맛은 달콤하였지만 마음만은 씁쓸했습니다.  백인계 러시아인 그리고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그를 아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감사의 편지를 씁니다.

 

 

 

  존경하는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 귀하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
  김병화 집단농장의 주민들은 당신께 글을 드리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즈베키스탄공화국이 독립한지 4년이 되었는데 이는 매우 짧은 기간 입니다.
  그러나 공화국은 그 동안 국민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현재 우리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위하여 까리모프 대통령은 여러 나라들과 국민들의 복지 향상을 위한 지원협정을 맺고 있습니다.  특히 까리모프 대통령과 각하 간에 맺은 정부간 국제협력 협정의 일환으로 하동주 한의사가 우리 집단농장에 왔습니다.

 

  진료를 시작한 이래 그는 환자들 사이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과묵하고 겸손하며, 환자를 대할 때는 주의를 기울이는 등 좋은 성품에 따뜻하고 양심적인 의사입니다. 그로 인하여 대한민국과 각하는 이곳에서 무한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하가 1994년 김병화 집단농장을 방문한 이래 각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각하는 우리 모두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각하가 김병화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이 곳 집단농장의 많은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각하가 해주신 모든 일들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의사와 많은 약품을 이곳에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작금 공화국의 경제상황과 특히 우리 집단농장 주민들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고려하여 우리는 각하가 우리를 도와주시고 추가로 약품을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동주 한의사가 가져온 약품이 벌써 다 쓰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능하다면 하동주 한의사가 보건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의료장비들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각하의 건강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합니다.

 

                                                                        김병화 집단농장 주민을 대표하여
                                                                                                의사 대표 황 나탈리

 

                                                                        마을 협회 대표 바바베코프
                                                                                                 집단농장 주민들

 

 

  어려운 상황 아래서 그의 의료 활동은 박애심과 인내심에서 우러난 결과입니다.  그리고 1997년 그는 정부파견의사 계약기간이 만료되지만,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근무연장사유서는 간곡하기까지 합니다.

 

 

 

  본인은 1995년 11월 21일자로 우즈베키스탄에 의료단으로 파견되어 ‘김병화 농장’과 타슈켄트 국립 제1 의과대학 병원에서 한방진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김병화 농장’에 한방진료소를 개설하여 근 2년여 동안 5,0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여

이들에게 적지 않은 호응을 얻었다고 사료되며, 또한 최근에는 본인의 의료 활동에 따른 호응에 힘입어 타시미의과대학과 대한한의사협회가 주최가 되어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을

개원하여 한방의료 활동을 통한 국위 선양에 일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위와 같은 점을 토대로 앞으로 2년 동안 근무를 연장시켜 그 동안 배웠던 이 나라의 언어와 풍습을 밑바탕으로 삼아 한방의료 활동을 통한 국위 선양과 아직 미비한 이 나라 의료제도 및 시설에 조금 더 이바지하고싶습니다.

 

 


  1995년. 한의사 하동주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습니다.
  비행기에는 시내버스처럼 지정된 좌석이 없었습니다. 빨리 뛰어가서 앉으면 되었습니다. 승객들은 비행기 안에서 매운 담배를 피웠고, 독한 보드카를 연신 마셔댔습니다. 술이 취해 큰소리로 이야기하다가 끝내 싸움까지 벌어졌습니다.

 

  난생 처음,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는 하늘 길은 너무 험하였습니다.
  가까스로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으려고 3시간을 기다렸지만 이방인에게 누구도 친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마중 나와 있던 대사관 직원이 입국심사장까지 들어와서야 우즈베키스탄 땅을 정식으로 밟을 수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 KOICA 정부파견한의사로 처음 발을 내딛은 한의사 하동주는 그곳에서 무녀리의 역할을 훌륭히 담당하였고, 그 열망은 밀알이 되어 타슈켄트에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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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강천사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사모아의 슈바이처  최영진

  남태평양 푸른바다처럼 행복했노라

 

 

 

 

 

 

 

 

 

 

 

 

 

 

 군대가 없는 나라.
 태고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섬나라.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작은 섬.

 

 사모아(Samoa)는 오세아니아 남태평양 서사모아 섬들로 구성된 입헌군주제 국가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령에서 뉴질랜드 통치령으로 바뀐 뒤 1962년 폴리네시아 민족국가 최초로 독립하였고, 1997년 서사모아에서 사모아로 나라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 곳에 소아과 의사 최영진이 정부파견의사로 20년간 봉사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최영진은 1948년에 태어나 1978년 가톨릭대학교 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대구에서 소아과를 개원하여 안정된 삶을 누리던 그는 45살 나이에 KOICA(한국국제협력단) 의료봉사단에 지원했습니다.

 슈바이처를 존경하며 인도주의 의사를 꿈꾸던, 어릴 적 그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병원과 집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려 할 때 반대도 있었지만, 그는 가족과 함께 1993년 서사모아로 떠났습니다.

 

 서사모아의 수도 아피아 사모아 국립병원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아과 의사로 인술을 펼쳤습니다.

 서사모아의 평균 가족 수는 8~13명입니다. 그 만큼 자녀수가 많고, 자연히 그를 찾는 어린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국립병원임에도 의료기기들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1kg 이하의 미숙아들이 많은 이곳에서 인큐베이터의 부족으로 모두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인공호흡기가 없어 위급한 신생아가 사망한 적도 많았습니다.

 

 이런 환경이지만, 그는 사모아의 어린이들이 언제나 건강하게 웃을 수 있도록 정성을 쏟았습니다.

 파견 초기에는 폐렴, 심장질환, 류머티즘 환자를 매일 30~40명 정도 진료하였습니다. 특히 기생충 감염과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 등을 치료하였습니다.

 

 턱없이 부족한 의료시설로, 섬 곳곳에는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 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인과 함께 봉사단을 조직하여 무의촌 진료를 시작하여 매달 한 번 사바이 섬으로 가, 마을을 돌며 시력이 약한 노인에게 안경을 제공하고 각종 필요한 의약품을 주면서 많은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서사모아 무의촌 순회진료 모습

 

 

 

 의사 최영진은 꼼꼼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분기마다 활동내용을 KOICA에 보고하였는데, 주재국의 일반정세와 특별사항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KOICA 남태평양 직원 신의철에게 <서사모아 사람들>이라는 내용으로 쓴 편지도 흥미롭습니다.

 

   처음 신생아실에서 아기들을 검진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아기의 엉덩이에서 몽고반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만나는 서사모아 사람들에게 사모아인과 한국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서사모아 사람들은 먼 옛날에 페루의 원주민들이 조류를 이용해 뗏목을 타고 이곳까지 이동해 왔으리라고 설명합니다.

 

   이들은 혈액만 한국인과 비슷한 것이 아니고 삶의 형태와 그들의 성질, 현대사까지도 비슷합니다.

   남의 앞을 지나갈 때는 꼭 몸을 숙이고 ‘토로우(죄송합니다)’하면서 지나가고, 밥을 먹을 땐 꼭 어른들이 먹은 후에야

   아이들이 먹습니다.

   어른들에겐 존경어가 따로 있고, 앉을 때도 양반자세로 앉고 꽃을 좋아해서 백일홍, 맨드라미, 봉숭아꽃들을 집 주변에

   항상 심고 머리에 꽃들을 꽂기도 합니다. 술도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도 좋아하고 춤을 추는 것도 남녀 모두 즐깁니다.

 

   이들의 전통의상은 라바라바라고 하는 치마 같은 옷인데, 우리 아들 다니는 학교도 교복이 청색 라바라바입니다.

   처음엔 그 옷 때문에 안가겠다고 우겼습니다.

   다행히 교장선생님이 청색반바지를 입어도 된다고 해서 몇 개월 입고 다니더니, 요새는 라바라바를 입으면서 자기가

   제일 세련되게 입는다고 웃습니다.
   저도 가끔 초대를 받으면 라바라바를 입고 갑니다. 제 집사람도 이 곳 전통의상을 물론 입지요.

 

  1, 2년이 다르게 발전하는 한국의 소식을 정부에서 보내주시는 신문을 통해서 읽으면서 어떤 때는 한국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이만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라바라바 한 장 두른 그의 환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길고 자세한 편지 여서, 전문을 다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의사 최영진의 자상하면서도 다정한 성품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사모아 어린이들 엉덩이의 몽고반점을 보고 한국과 사모아와 몽고 그리고 페루까지 열거하며 세계는 하나라는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닥터 초이’하면서 사모아인들은 그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보냅니다.
 사모아의 국왕이 인정하는 사모아 사람사모안’으로, 코리언의 사랑과 평화를 남태평양 푸른 바다에 펼쳤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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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팔라우의 슈바이처  윤성일

아름다운 팔라우에도 아픈사람은 많았다.

 

 

 

 

 

 

 

 

 

 

 

 

 

붉게 떠오르는 태양이 마이크로네시아 200여개 섬들을 일렁이게 합니다.
태평양 서쪽 끄트머리에 섬의 무리로 이루어진 나라.
바다 한가운데 흩뿌려진 섬들로 이루어진 인구 2만 명 정도의 작은 나라 팔라우(Palau).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과 가까워 1543년 이후 오랫동안 그들의 세력권에 있었고, 한때는 독일의 세력 아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각각 지배하다가 1994년 독립하였습니다.

특히 1914년부터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인 일제강점기시대에는 수많은 한국인이 징용으로 끌려와 공항, 항만 및 도로건설에 강제노동을 당하였으며, 수많은 동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팔라우에 한국의 일반외과 전문의 윤성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1952년에 태어나 1977년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를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1996년에 쌍용건설에 의해 시공된 팔라우국립병원에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인술을 펼쳤습니다.

 그 병원은 총 병상 수는 80병상으로 내과, 소아과, 외과, 정형외과 및 정신과 병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는 이 팔라우국립병원에서 정부파견의사로1996년부터 2004년까지 9년간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일반외과 전문의로 외과병동에서 근무하였으며, 의사는 원주민의사를 비롯하여 미국, 마셜, 피지, 미얀마, 필리핀, 바누아투인 등으로 구성되었고, 간호사도 원주민, 피지 및 JICA(일본국제협력기구) 소속 2명이 함께 하였고, 약사는 원주민과 호주 그리고 미국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유일한 종합병원인 팔라우국립병원에는 외과전문의가 그를 포함해 2명으로 폭주하는 외과진료 및 수술환자로 인해 평일에는 쉴 틈 없이 집도가 계속되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응급환자로 인해 병원근무가 빈번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전공은 일반외과이나 전공별 외과전문의가 없어 관련 수술 책자를 연구해가며 모든 외과수술을 수행하였습니다.  

 외과 진료뿐만 아니라 팔라우 정부에서 추진하는 청소년들의 알코올 및 마약관련 문제에 관한 예방 및 치료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팔라우 원주민 수련의사 8명에게 1996년부터 2004년까지 기본적인 외과수술 기술을 전수하였습니다. 원주민 수련의사에게 전문외과의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외국종합병원으로 환자후송에 소요되는 많은 비용을 절감하였습니다.
 1996년 3/4분기부터 2000년 3/4분기까지 그가 작성한 활동보고서에 의하면, 진료인원은 3,772명이었고 수술환자는 556명이었습니다.

 

 대형선박사고와 교량붕괴사고의 발생이 빈번하여 사망자와 중환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신경외과 및 흉부외과 환자 발생 시 진료에 필요한 단층 촬영기, 혈중가스측정기, 인공호흡기 등이 절실하였지만 그는 묵묵히 능숙하게 위급한 병상을 훌륭하게 지켰습니다.

 그의 8년간 근무로 팔라우국립병원 일반외과 및 외과 중환자실의 의료 수준이 현저히 개선되었습니다.

 

 

 

  1997년 3월 26일

 

 그리스 소속 화물상선이 파푸아뉴기니 항구를 출발하여 서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51세의 그리스인 선장이 갑자기 선혈을 토하며 의식을 잃었습니다. 응급처치를 요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부선장은 이 사실을 괌 병원으로 연락하고, 배를 괌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위장출혈증상이 악화되면서 의식소실증상이 현저하였습니다.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괌으로의 항해를 중지하고, 그가 근무하는 팔라우로 항로를 수정하였습니다.

 

 마침내 환자는 팔라우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위출혈 지혈을 위한 내과적인 치료에 역점을 두고 또한 수혈을 동시에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과적인 치료에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고 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환자혈액형이 AB네거티브로 혈액이 부족하여 괌 적십자사에 응급협조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내고 응급수술을 시행하였습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선장은 과거병력상 위출혈로 위 부분 절제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 위출혈은 과거 위장문합수술 부위의 출혈 때문이었습니다. 지혈수술로 출혈부위를 봉합하고서 혈액이 도착하여 수혈하였습니다. 환자 가슴에서 작동하는 KOICA에서 보내준 모니터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술 후에도 환자는 재출혈 소견을 보이고 또한 괌에서 받은 AB네거티브의 혈액도 다 떨어졌습니다.


 괌으로부터 다시 혈액이 도착하여 수혈하였으나, 추가의 혈액이 필요 하였습니다. 그러나 괌에서는 더 이상의 혈액을 구할 수 없어 일본적십자사에 긴급 혈액 요청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이러한 신속하고도 정확한 치 료과정 중 출혈증상이 호전되었고, 중환자실에서 활동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선장의 장인은 한국전쟁 그리스 참전용사였습니다.

 

 그는 이 환자를 통하여 세계화시대에서의 국제간 의료협력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하였습니다. 혈액을 항공편으로 보내준 일본적십자사, 괌적십자사와 괌병원 의사, 환자 수술을 도와준 필리핀과 팔라우의사, 바누아투 마취과 의사 그리고 원주민 간호사 특히 중환자실 의료장비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준 KOICA가 없었다면 화물상선 선장의 생명은 보장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의술에는 국경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는 미담이었고, 유능한 정부파견의사의 쾌거였습니다.

 

 

 

  의사 윤성일은 헌신적인 의료활동으로 팔라우 정부로 부터 신임을 얻었습니다.

 

의사 윤성일은 성실하고 헌신적인 의료 활동으로 팔라우정부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주민들에게도 명성이 널리 알려져 양국간 우호협력관계 증진 및 한국의 이미지를 높였습니다. 팔라우에서는 그를 ‘Dr.Yoon’이라 불렀습니다.

공무원들은 물론 팔라우 시내에서 그를 만나는 주민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의사 윤성일은 임기를 마치면서 KOICA에 보고서를 보냅니다.

  의료수준의 전반적인 향상으로 의료파견의사의 보수교육과 파견근무중의 보수교육이 절실하며, 파견의사는 파견국 의사

  및 외국인 의사와의 선의의 경쟁으로 종래 일반적인 한국의 의료수준을 후진국에서 하향적으로 지원한다는 사고 자체를

  전환하여야 한다.

  파견 전에는KOICA의 지정병원에서 파견의 전공 이외의 출산과 분만, 외상 성 골절 치료와 두개골과 흉부외과 외상환자 등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외상치료의 집중교육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섬에서 살아가는 다정하고 순박한 팔라우 국민들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이른바 대동아전쟁시기에는 수많은 한국인이 이국땅의 고혼이 되어 우리에게는 슬픔의 역사를 묻어야 했던 섬나라 입니다.

 

아름다움과 슬픔이 공존하는 팔라우에서 의사 윤성일의 성실하고도 유능한 의료지원활동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인 한국의 위상을 그들에게 오롯이 전하였고, 그가 받은 존경과 사랑은 징용으로 스러져간 한국인의 원혼을 한껏 달랠 수 있었습니다.

 

팔라우 현지 신문기사 자료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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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강천사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카자흐스탄의 허준  이정열

  시인 한의사

 

 

 

 

 

 

 

 

 

 

 

 

 

 

여태 뭐 했어!
귓전을 때리는 소리에 놀란다.
아내의 지청구에 나는 무너진다.
어디 무너지는 게 공든 탑뿐이겠는가.
추억은 세월의 사리가 되어 쏟아진다.

‘너에게 내가 전부였으면’
오래 전 나에게 온 쪽지 한 장
책갈피에서 떨어진다.
아프지만 단호한 손길로
그 전부를 구겨서 버린다.

이제 겨우
한걸음 나갔을 뿐이다.


 시인이며 한의사인 이정열이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 한의사 자격으로 카자흐스탄(Kazakhstan)으로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면서 쓴 시의 일부분입니다.

 환자에게 봉사하는, 환자를 사랑하는 의료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이제껏 쌓아 온 공든 탑은 단호한 손길로 구겨 버립니다.
 그는 의료봉사의 발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아프지만 과감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시인 한의사 이정열...

 

 이정열은 1960년에 태어나, 1986년 원광대학교 한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한의대를 다니면서 원광대문학회에서 시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상지대학교에서 임상학 강의도 하였고, 서울에서 한의사로 일하던 그는 부도 쌓았고 명성도 이루었습니다. 한의사이면서 시인이었던 그는 환자를 돈으로만 보아온 지금까지의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봉사를 자원했습니다.


 인술의 근본을 새롭게 배우고 싶었고, 진정으로 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자신의 온 정성을 쏟고 싶었습니다.

 그는 파견되기 전에 카자흐스탄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중 알마티에 거주하는 고려인 시인 이 스타니슬라브의 우슈토베에 관한 시를 읽고 감동받았습니다. 그는 중앙아시아 작가회의에 참가하여 《고려문화》에 여러 차례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은 정든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슈베토, 눈물의 유배지로 강제이주 당하였습니다.

 그는 흩어진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원형 격인 그곳을 찾아 잡초처럼 다시 일어난 고려인들과 의료혜택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경제성장 본거지로 급속히 떠오른 카자흐스탄에는 고려인 10만여 명과 1990년대 초부터 기회를 찾아 몰려든 한인동포 3,000여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부파견한의사로 카자흐스탄에 파견되다...

 

 드디어 2006년 KOICA의 정부파견한의사로 한국 · 카자흐스탄 친선병원에 부임하여 3년간 재임하였습니다.
 한국 · 카자흐스탄 친선병원은 2000년 KOICA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개원 당시 알마티의 여러 시립병원에 흩어져서 진료하고 있던 한방과, 외과, 내과의 한국 해외파견 의사를 중심으로 개원하였습니다.

 

 2002년 알마티시청으로 병원 운영권이 이관된 후에도 의사가 꾸준히 늘어나 치과, 방사선과, 임상병리과, 신경과, 척추교정과 등에서 15명의 현지 의사들과 함께 진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운영권이 시청으로 넘어간 후에는 늘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에게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민족과 국적을 떠나 똑같은 환자였습니다.

 KOICA의 특성상 현지인 위주의 병원이 될 수밖에 없지만, 먼 이역만리에서 기쁨의 씨줄과 슬픔의 날줄을 엮어가고 있는 교민들도 진료하였습니다.

 

 그는 통역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원주민 환자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러시아어를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고려인들을 위한 정기순회 진료를 정례화 하였습니다.

 

 

 

  우슈토베에서의 무료진료 그리고 고려인...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최초로 정착한 우슈토베.

 알마티에서 420km 떨어진 길을 자동차로 7시간이나 직접 운전하면서 우슈토베로 달렸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가도 가도 황량한 벌판. 길은 멀었고 너무나 거칠었습니다. 어떤 때는 튀는 돌에 자동차의 연료통이 구멍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가다보면 우슈토베가 마치 푸른 섬처럼 그에게 다가왔으며, 그곳에서 고려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신고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의 옛 모습을 오롯이 지켰습니다.

 

 조국의 풍속과 습관에 따라 집을 지었고, 논밭을 일구었고, 추석과 설을 보냈습니다. 먼 길을 달려그곳에 도착하면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은 그를 반겼습니다. 긴 여정의 피곤함이 싹 사라졌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한국의 과거로 달려간 듯 평온한 느낌에 행복하였습니다.

 

 그곳의 고려인들은 물론 체첸족과 쿠르드족 등 현지인 2,900명에게 침과 부항 그리고 뜸을 사용해서 한방진료를 무료로 실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부파견한의사로서 정해진 일만 하지 괜히 일을 벌이지 말라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마음고생도 하였습니다.

 

 카자흐스탄은 사회주의 잔재가 남아 있어 의사의 근무시간을 하루 3시간으로 제한하였습니다.
 그런 의료 현실에서 한의학의 인기는 당연히 높았습니다. 그가 한국 · 카자흐스탄 친선병원 전체 수입의 70%를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비를 들여 우슈토베의 무료진료를 꾸준히 수행하였고, 마침내 한국대사관도 지원에 나섬으로써 정식 프로그램으로 정착시켰습니다. 마침 부산대학교 의대를 나와 해외 협력의사로 합류한 젊은 내과의사 황상현이 흔쾌히 힘을 보태면서 그의 무료 진료는 가장 성공적인 봉사 프로그램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한방진료에 대한 우슈토베 현지인 반응도 매우 좋았습니다.

 아버지가 소련시절 노력영웅이었다는 신 리사는, 그의 일행이 무료진료를 시작한 이후 한방의 뛰어난 효과를 체감한 현지인들이 지역병원 찾기를 꺼리게 되는 현상이 생겨났다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이런 봉사활동을 하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어 고려인이란 것이 자랑스럽다고 하였습니다.

 

 

 

  3년간의 파견활동을 회상하다....


 그는 자신을 돌아봅니다.

 

 보은 차원에서 시작했지만 제가 많이 배웁니다.
 우슈토베에는 고려인과 사나운 체첸인 그리고 기구한 처지의 독일 민족까지 수많은 민족이 말이 잘 안 통해도 몇 시간을 공감하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평화롭습니다.

 

 가난하지만 갈등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죠. 탈레반과 9·11테러 같은 건 여기선 싹 틀 수 없어요.

 우슈베토의 고려인 사회는 내게 다시 시인의 꿈을 안겨준 오래된 미래였습니다.

 

 2011년. 제7회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을 개최하였던 카자흐스탄.

 그는 정부파견한의사로서 카자흐스탄에서의 3년간의 세월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특히 아픔의 과거를 간직한 채 척박한 황무지, 고립된 우슈베토에서의 내 나라 내 겨레 고려인들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그는 강조합니다.

 

 따스한 정에서 우러난 인술을 펼치는 것보다 더 높고 숭고한 외교활동은 없습니다.

 

 


카자흐스탄 일간지 베체르니이 알마타에 실린 의료장비 기증식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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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강천사

 

 

 

 

  처음에는 얼음공주인 줄 알았다.

 잘 웃지 않았고 눈이 마주치면 입을 삐죽거리다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빠 품에 안겨서는 윗니 두 개를 드러내며 곧잘 웃었고,

 뽀로로 노래에는 금세 미소 지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알고 보니 현아는 그냥 낯가림이 심한 거 였다.

얼굴이며 손이며 온몸이 딱지와 부스럼으로 덮여 있는 것을 빼면,

현아는 더도 덜도 아닌, 딱, 두 살배기 아이 모습 그대로였다.

그것도 웃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운.

 

 

 

  무릎 아래 피부가 벗겨진 채 세상에 나오다 

 

 현아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다.

 윗니 아랫니도 이제 막 나기 시작했고, 모유를 먹다 얼마 전부터 이유식을 먹기 시작했다.  기저귀 떼는 연습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 이제 막 하기 시작한 일’ 이 대부분인, 아직 두 돌도 채 되지 않은 아기였다.

 

 “날이 추우면 감기가 걸릴까, 기어 다니다 혹은 걸어 다니다 어디 부딪히지는 않을까,

 넘어져 다치지 않을까, 아무거나 주워 먹어 탈이 나지는 않을까.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다 똑같은 마음일 거예요.

 귀한 내 아이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잖아요. 건강한 아이도 그럴

진대 현아는 아프니까 더…….”

 

 엄마 박효민 씨(33세)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현아네 집에는 아기가 있는 여느 집에서 볼 수있을 법 한 기저귀나 분유통, 장난감 보다 드레싱과 소독제, 연고, 밴드, 붕대, 손수건 등이 더 많았다. 드레싱 약품이 아예 한쪽 벽면을 빼곡히 메울 정도였다.

 

 외출복보다는 잠옷이나 내의류가 더 많다는 것도 다른 풍경이었다.

 몸 이곳저곳에 물집이 잡히고 고름이 차면 하루에도 몇 번씩 소독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현아에게는 어찌 보면 당연한 풍경이었다. 장난감보다 소독제가 더 필요하고, 예쁜 옷보다 부드럽고 편안한 옷이 더 필요했다.

 

 “제 뱃속에 있을 때 현아는 무척 건강했어요. 발길질이 어찌나 센지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죠. 집 근처 산부인과에서 자연 분만하고, 현아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무릎 아래 피부가 벌겋게 벗겨져 있는 거예요. 얼마나 놀랐던지, 바로 큰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믿고 찾아간 병원에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기저기 피부가 벗겨져 수포가 생기고 고름이 차는 범위는 넓어지는데 원인을 모르니 진단을 할 수 없고 병명도 알 수 없었다.  마땅히 쓸 약도, 치료법도 딱히 없었다. 

 그저수포를 터뜨려 고름을 짜내고 드레싱해주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보름여가 지났을 때 현아는 수포성 표피박리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진단을 받은 후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마땅한 약도, 치료법도 없었다. 효민 씨는 병원에서 드레싱 하는 방법을 배워 현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명을 알았는데도 치료법이 없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죠.   병을 호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감염을 막기 위해 매순간 피부를 소독하고 드레싱 해줘야 한대요.

  우리 몸 어느 곳 하나 피부로 덮이지 않은 곳이 있나요?

  그러니까 현아는 몸 어느 한 곳 마음 놓을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거예요. 어제는 얼굴에, 오늘은 손에 물집이 잡히고, 내일은 입안이 헐어요. 정한 시간도, 정한 때도 없어요.”

 

 

 

  두 살도 안 된 아이, 스스로 고통을 참아내다.


 현아가 앓고 있는 수포성 표피박리증후군은 피부를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을 생산하는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피부 단백질을 만들지 못해 생기는 질환이다.

 

 출생 때부터 피부가 벌어져 수포가 생기고 반흔, 점막 침범을 보이며, 손가락·발가락 융합, 식도 유착까지 생긴다.

 미국에는 5만여 명이 앓고 있고 국내에는 통계조차 따로 없는 드문 질병이라고 한다.

 수포가 생기는 위치에 따라 표피 내에 형성되는 단순성, 투명판에 형성되는 경계성, 기저판 바로 아래에 형성되는 이영양성으로 나뉘는데, 현아는 이영양성 중에서도 증상이 심한 열성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집을 터뜨려 고름을 짜내고 소독하고 습윤밴드며 붕대를 감다보니

엄마,아빠는 이제 어느 의료진 못지않게 능숙해졌다.

 

 “얼굴을 할퀴더라도 손을 싸놓지 않았어요. 통풍이 되면 더 나을까 싶어서요. 

  그런데도 현아는 벌써 두 발과 왼손이 모두 붙어버렸어요. 그나마 오른손이 아직 괜찮고요.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현아이기에, 아빠 김재훈 씨(34세)는 남들 하는 건 다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돌잔치도 성대하게 치렀고 사진도 더 자주, 더 많이 찍어줬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지, 얼마나 예쁘게 자라고 있는지를 매 순간 놓치지 않고 기록해 현아가 자라면 다 얘기해 줄 참이다.


 “현아가 또래보다 의젓해요. 자기가 아픈 걸 아는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조심하고 위험한 행동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손을 싸놓지 않아도 얼굴을 할퀸 적이 많지 않을 정도니까. 그런데, 그게 더 마음이 아파요. 아기들이 스스럼없이 넘어지고 부딪히고 다치면서 자라야하는데, 오히려 두 살 배기가 알아서 조심하니까 그게 더 안타까워요.”

 

 재훈 씨는 두 돌도 채 안된 아이가 고통을 참고 울음을 삼키는 것 같다 싶으면 그만 하릴없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더욱이 현아가 자랄수록 이 같은 순간은 더 많아질 것이다.

 

 이가 나기 시작하면 치아가 썩지 않도록, 잇몸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더 신경 쓰면서 치과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시력이 형성될수록 통증과 과도한 눈물과 분비물이 생길 수 있어 정기적으로 안과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는 자다가 무심결에 눈을 비벼 눈 안쪽이 벗겨졌는지 하루 종일 눈을 뜨지 못한 적도 있었다.

 먹을거리가 다양해지면 식도 협착도 조심해야할 것이다.

 

 현아가 자랄수록 엄마, 아빠의 걱정은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너무 평범해 정작 그 비범함을 깨닫지 못하는 모든 일상이 현아에게는 결과를 알 수 없는 도전이고 모험이 될 것이다.

 아이가 자라는 것조차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은 또 어떠하랴.

 재훈 씨와 효민 씨는 제발 심장이 딱딱해지기를, 어떤 일에도 초연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의기소침하지 않고 또래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현아를 만나러 갔던 날, 엄마 효민씨는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얼마전, 현아가 갑자기 열이 올라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과 회사를 오가며 무리한 탓이었다.

 

 “그동안 친정 엄마에게 현아를 맡기고 저도 직장을 다니며 맞벌이를 했는데, 퇴원하는 대로 사직서를 제출할까 해요.   

  현아 때문에 수시로 일을 쉬었고 지금은 제가 아프다고 몇 주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솔직히 직장 동료들 눈치도 보이고요, 친정엄마도 몸이 편찮으신데다 저도 쉬이 몸이 회복될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맞벌이할 때도 힘들었는데 현아 아빠 혼자 벌어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효민 씨는 이래저래 마음이 편치 않다.

 수포성 표피박리증후군이 산정특례 대상 질병이긴 해도, 연고며 습윤밴드, 소독제, 붕대 등 드레싱에 필요한 것들이 소소한 듯 보여도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면 금방 바닥을 드러내기 일쑤이고, 조금만 열이 올라도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현아 병원비를 대기에, 외벌이로는 감당키 어렵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현아가 방긋 방긋 웃어주고 품에 폭 안기면 그 순간 만큼은 아무 고민도, 아무 걱정도 없어지고 마냥 행복해요.

 아프다는 것 말고는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현아가 기죽지 않고 의기소침하지 않고 또래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씩씩하게 자라주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재훈 씨는 저 멀리 가을 하늘을, 아주 오래도록 올려다봤다.

 선선한 가을이 이리 반가울 때가 또 있었을까.

 종일 에어컨을 틀어놔도 여지없이 물집이 생기고 곪는 여름은 현아에게 정말 고역이었다.

 재훈 씨나 효민 씨가 가을을 기다린 건 비단 높은 하늘과 단풍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영양성 수포성 표피박리증후군이란?
  수포성 표피박리증은 피부를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을 생 산하는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피부 단백질을 만들지 못해 생기는 질환이다. 이영양성은 기저판 바로 아래에 수포가 형성되는 것인데 태어날 때부터 심한 수포가 발생하고 반흔, 점막 침범을 보인다.

 우성보다 열성형이 증상이 심해 손가락, 발가락이 붙거나 식도 협착이 나타나기도 한다. 드물지만 지속적인 상처로 인해 피부암이 생길수 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고 장애를 입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주위의 관심과 도움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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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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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의 허준  이우혁

  산 설고 물 선 우즈베키스탄에서

 

 

 

 

 

 

 

  

  예전부터 봉사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사실 지금껏 한국에서 쌓아온 한의사로서의 입지가 조금 아쉽긴 했지만,

  정리하고 나니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지더군요.

 

 2003년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으로 떠나며 가진 민족의학신문과의 인터뷰입니다.

 

 

  한의사 이우혁은...

 

1966년에 태어나 경산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부터 4년째 운영해 오던 한의원을 과감히 정리하였습니다.

2003년부터 2년간 정부파견한의사로 한국 ·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 근무를 지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1997년 포항에 있는 시골의 한 폐교를 임대해 친구와 함께 한의원을 개원하였습니다.  

 3년간 암환자 등 주로 난치병 환자들을 진료하게 되면서 그곳 사람들의 어려운 환경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습니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어려운 분들에게 자신이 가진 의술로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순수한 바람으로 정성스레 돌보았는데, 진료를 받은 사람들이 감사의 뜻으로 전화를 걸어오거나 손수 음식까지 장만해 올 때는 따스한 정을 느꼈습니다.

 

 특히 네팔(Nepal)에 있는 한 병원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치료 한 번 받으려면 하루나 이틀씩 걸어와야 하고, 돈도 없고 의사도 없어 사소한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더욱 체계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003년 우즈베키스탄 파견의사를 지원했습니다...

 

 2003년 대한한의사협회 홈페이지에서 우즈베키스탄에 파견할 의사의 자리가 몇 달째 비워져있다는 글을 보게 되고, 처음에는 낯선 곳에서의 생활을 염려하던 아내와 자녀들을 설득하였습니다.

 

 한의사 동료들이 그동안 쌓아온 것이 아깝지 않으냐며 어리둥절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든 갈 수 있는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그동안 한국에서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에 대한 미련과 집착 때문에 결정을 쉽게 못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중부에 위치하면서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1991년 독립하였습니다. 수도는 타슈켄트이며 공화제로서 구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이슬람교도들이 다수였습니다. 지역별로 병원이나 보건소가 있었지만 시설이 허술하고 의사가 없어 각종 질환으로 환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한의사 이우혁은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의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장으로서 진료업무와 현지직원 관리 그리고 병원경영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무료로 진료하는 병원이어서 항상 환자로 넘쳐 났습니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치료할 환자를 한 번에 예약을 받았기 때문에 예약하는 날은 수천 명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어 병원직원 모두가 나서서 예약을 받느라 진땀을 빼야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진료와 원무가 분리되어 의사는 진료만 하면 되었지만, 우즈베키스탄은 한국이 아니었습니다. 병원장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잡다한 업무들이 곤혹스러웠습니다.  예약되지 않은 환자들이 찾아와 막무가내로 생떼를 쓰거나, 고위직의 엉뚱한 진료 청탁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군에서 받은 훈장을 내밀며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진료소에 보낼 약품을 KOMSTA(대한한방의료봉사단)으로부터 어렵게 지원받았는데, 세관에서 이유도 없이 일 년 가까이 통관을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세관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가져다주면 기다리라 하고, 또 다른 서류가 필요하다고 해서 가져다주면 또 다른 핑계를 대며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무능한 공무원인지 부패한 세관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나라 국민을 치료해 주고 무상으로 나누어 줄 약품 통관에 딴죽을 걸었습니다. 결국 법원의 힘을 빌려 약품을 찾아야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적응해야 하는 건 한의사 이우혁만이 아니였습니다...

 

 이우혁의 정신적인 버팀목으로 사랑의 힘을 실어주었던 아내와 2남 1녀의 자식들도 우즈베키스탄의 어려운 생활에 적응하여야 했습니다.  그가 거주하였던 지역은 비교적 좋은 동네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기와 가스공급이 부족하였습니다.  난방이 끊겨 자다가 일어나 벽난로에 장작불을 지피면서 길고 긴 겨울밤을 지새웠고, 예고 없이 정전이 되면 촛불을 켜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색다른 환경을 감내할 수 있었지만, 불편한 것은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전기가 나가면 불평도 없이 촛불에 의지하여 학교 숙제를 즐겁게 하는 아이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국민소득 1,000달러 정도의 그곳에서의 생활은 예측이 없었습니다.    자동차에 기름은 항상 가득 채우고 다녀야 했는데, 주유소에서는 기름이 떨어지면 영업을 며칠씩 하지 않았습니다. 기름을 구하지 못하면 허가 없이 파는 곳에서 몇 배의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도처에 슈퍼마켓이 있는 한국과는 양식을 구입하는 것도 달랐습니다. 

 

 처음 한 달 정도 임시로 아파트에 살 때였습니다. 그들은 주식으로 리뾰슈까라는 둥글고 넓적한 빵을 먹는데, 한번에 20~30개가량을 구입했습니다. 가방 가득 빵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마치 빵을 팔러 다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위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큰 가방에 빵을 가득 들고 가는 것을 보고서 빵을 몇 개 사려고 하였습니다.  

 아주머니는 영문을 몰라 웃고,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생떼를 쓴 꼴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돈을 안받고 빵 세 개를 주었습니다.  나중에 만났을 때 돈을 드리려 하였지만 한사코 받지 않은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였습니다.

 

 

 

  산 설고 물 선 이국땅이었지만 보람도 아쉬움도 많았습니다.

 

타슈켄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떨어진 시골 병원에서 한 달 정도 이동 진료를 하였는데, 그 지역은 구소련시절의 협동농장이 많이 있었습니다. 스탈린 독재시절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돈 벌러 도시로 나가고 노인들이 농사짓고 손자들을 키우며 아픈 몸을 이끌고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병원시설은 처참할 정도 여서 입원하면 오히려 없던 병도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 의료진이 도착하니 지역 주민들이 너무나 좋아하였습니다.

 타슈켄트에서 1,200km 정도 떨어진 누크스에 한방진료소가 있어 고려인 의사를 교육시켜 진료하고 있었는데, 1년에 한두 번씩 의사교육과 진료를 위해 출장을 갔었습니다. 이 지역은 아랄해가 마르면서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인구가 자꾸 줄어들고 희귀난치병으로 살기 힘든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랄해에서 날아오는 소금이 눈이 온 것처럼 토양을 뒤덮고 있어 농사짓기도 어렵고, 소금이 지하수를 오염시켜 피부병과 눈병 그리고 각종 내과질환을 유발하였습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치료할 수 있는 환자는 한정되어 있고 의약품도 부족하여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풍부한 부존자원을 갖추고 있어 한국과의 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국민복지와 교육문화에는 여력이 없었습니다. 

 

 2004년 12월, 생필품과 먹을 것을 사서 병원직원들과 함께 고아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자금은 우즈베키스탄 사람이 아닌 외국인이 치료받으면서 기부금으로 주고 간 것을 1년 동안 모은 것이었습니다.  고아원에서 기부 받은 물건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터라 아이들에게 직접 전달하기로 사전약속을 하고 갔습니다.

 

 아이들과 점심을 먹고 선물을 나누어 주려고 하니, 원장이 나중에 자기들이 전달하겠다고 그냥 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직접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신발도 신겨주고 모자도 씌워주고 과자도 건넸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고아원을 나설 때, 원장과 직원들의 차가운 눈빛이 마음을 씁쓸하게 하였습니다.

 

한국,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 앞에서 (이우혁원장 오른쪽에서 3번째)


 2년간의 정부파견 한의사로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 근무를 무사히 마친 한의사 이우혁은 그 시절을 이렇게 돌아봅니다.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은 아픈 몸과 마음을 보듬어 주는 대한민국정부의 파견의사를 환영하고 좋아하지만, 정부는 국민이 원하는 바를 모른 체하고 있어서인지 별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금은 그 당시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기억들은 다 잊고 즐겁고 좋은 추억만이 남아있어 가끔 그 때가 그립다.

 

 그리고 환자들에게 좀 더 잘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좋은 일을 더 많이 했더라면 보람이 있었을 것을 하며 아쉽다. 기회가 주어져 다시 파견된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2008년부터 정부파견의사제도가 폐지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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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강천사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페루의 슈바이처  문장호

  가난한 인디오의 만병통치약

 

 

 

 

 

 불가사의한 잉카문명을 꽃피웠던 나라, 페루(Peru).  아름다운 절경에 잉카인의 슬픔을 담았던 마추픽추.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잉카제국의 후예 인디오들은 옛 제국의 영화는 뒤로하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여 까야오 지역과 같은 빈민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1992년 페루 대통령 후지모리 방한을 기념하기 위해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서 총 15개의 병원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까야오의 제1병원을 시작으로 꼬마스 제2병원, 아마존지역의 제3병원 그리고 안데스지역의 제4병원 등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세운 까야오병원은 저렴한 비용으로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서 이른 새벽부터 환자들은 줄을 서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에서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의료혜택이 있을 리 만무하였으며, 있다고 해도 이들의 생활 수준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곳들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까야오병원은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곳입니다.

 

 

 

이 병원을 지켰던 의사 문장호.

 

그는 1955년에 태어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비뇨기과 전문의였던 그는 한국에서 유능한 의사로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그는 KOICA의 정부파견의사로 가족과 함께 1993년 페루 리마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안정된 서울생활을 정리할 때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2년을 약속하고 도착한 곳 페루. 그 때 페루는 경제위기에다 좌익게릴라들 때문에 걸핏하면 전기가 끊기는 등 어수선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의사인 그도 결코 안전할 수 없었던 곳에서의 생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밤새 울고 투정하는 아이들을 달래며 그가 쉽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의사로서 목표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 페루 의료원에서 비뇨기과와 내과를 담당하여 외래환자 진료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비뇨기과 전문의지만 외과수술이나 소아과 진료를 할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일단 그를 찾아온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파견 기간 동안 5만 명에 가까운 환자를 진료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결핵환자 전담 진료 병동 건립 및 리마시 외곽 빈민 부락에 대한 순회 진료사업 등 열 개가 넘는 의료단 소규모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한국, 페루 의료협력사업 현장 관리 및 지역 전문가의 역할을 하였으며, 민간 외교사절로서 국위 선양 및 양국간 우호관계 증진에 기여하였습니다.

 

 까야오병원은 교민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습니다.

 언어의 장벽 앞에 병을 키우기 일쑤인 이민 1세대들. 그들에게 그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전화상담을 받으며 멀리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늦은 밤 식탁을 수술대로 내줘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언제나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그는 그들의 주치의임을 자처하였습니다.


1994년 11월. 그가 KOICA 총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정주년 총재님께.


  지난 봄 새로 부임하시면서 보내주신 격려 편지에 답신도 못 드린 채, 이번에 새로이 공로패와 함께 보내주신 서신을 읽게

  되니 송구스러운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페루의 제가 근무하는 병원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후지모리 대통령의 한국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 KOICA에서 건설

  하여 이곳 정부에 기증한 병원으로서, 파견의사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손에 의해 건설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병원운영도 완전히 궤도에 올라, 금년 7월 이미 개원 1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렀으며, 현재 치과의사와 임상병리

  의사를 포함하여 의사 6명 외에 간호사, 의료기사, 행정직원 등 20여 명이 함께 근무하고 있으며, 월 진료인원 2,000~2,500

  명, 연인원 3만 명에 육박하는 진료실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페루의료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현지주민들 뿐만 아니

  라, 이 지역의 한국인 선원들 그리고 교민들까지도 멀리서 찾아와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까야오보건청 산하의 일차 진료기관이기 때문에 입원과 수술이 안되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처음에는 일종의 텃세라고도 할 수 있는 현지 의사들의 견제도 받았으며, 우리가 지어준 병원인데도

  불구하고, 운영권이 이미 이곳 보건청 소속이기 때문에, 개인진료실을 내주지를 않아 애로가 많았으나, 대사관의 협조와

 또한 어떠한 이해관계 없이 단지 도움을 주기 위하여 파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결과, 출근 4개월이 지나서야

  개인진료실을 확보했습니다.

 

   이제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저에게 진료하기 위해 병원문도 열기 전에 아침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는 안면 있는 환자들의

 인사를 받을 때는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게다가 Project의 일환으로 지원해주신 X-Ray 장비나, 임상병리검사장비 덕분에

 일차 진료기관으로서는 이 지역의 다른 보건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 또한 흐뭇합니다.

 

 

 주로 까야오와 꼬마스병원에서 진료를 하던 그는 페루생활에 적응이 되면서 누구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페루의 사회구조는 양극화가 심하여, 원주민이나 빈민계층과 일부 부유층에 대한 의료시설 및 혜택의 차이가 매우 심하였습니다.  빈민계층을 위한 보건소를 포함한 공공의료기관이나 사회보험병원들은 시설도 빈약하고 환자들이 많아 끝없이 기다려야 했으며, 의료진들 역시 박봉에 따른 의욕감소와 무성의로 일관하였습니다.

 

 반면에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시립병원들은 진료수준이나 시설도 미국이나 유럽 못지않았으며, 따라서 진료비 자체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번 진료만 받는데 90달러, 정상 분만비용이 2,500달러, 또는 단순한 맹장수술이 3,000달러 등 상식선에서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빈민촌의 순회 진료였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선교사의 도움으로 히까마르까를 포함한 몇 개 빈민지역의 진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전혀 의료혜택이 없고 철저하게 소외되어 사는 사람들. 가끔 진료를 가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그는 오히려 작은 일이 더욱더 그들에게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들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들의 땅을 제공하며 상주진료소를 세워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999년 그는 리마시 변두리 비타르테지역 빈민가에 작은 병원을 지었습니다. 사재를 털고 현지 동포들의 도움을 조금씩 모았습니다.

준공테이프를 끊던 날, 그는 부인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내의 말없는 격려가 없었다면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타르테 빈민촌에 병원을 짓고 나서 그는 더 바빠졌습니다. 까야오 제1의료센터에서 정상근무를 마치고 1주일에 두 번씩 오후에 이 곳 병원으로와 무료진료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페루 친구들을 여러 명 사귀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현지 자원봉사자들입니다. 그들은 교대로 시간을 내어 비타르테병원을 지켰습니다.

 

 그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꼬 마스지역 보건소 최초로 정관수술을 시행하여 모자보건사업에 기여하였습니다. 또  그는 항상 빈민촌의 부족한 병원시설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조만간 다시 일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습니다.

 

 

 1993년. 안정된 서울생활을 접고, 가족들과 2년을 약속하고 도착한 곳 페루에서 의사 문장호는 10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지만, 귀국하지 않았습니다.

 

2009년 5월.《서울경제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에 따라 대사관 측은 본국에서 아직 타미플루가 도착하지도 않았으며, 예방백신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흘려


 야만 했다. ‘동포사
회의 주치의’로 불리는 한,멕병원의 문장호 박사도 ‘인플루엔자(H1N1)의 백신은 아직 없다.’고 확인해 주면

서 ‘타미플루는 치료약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의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지금도 그는 중미 멕시코에서 동포사회와 가난하고 병든 원주민의 주치의로서 사랑의 인술을 펼치고 있을 것입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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