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즈베키스탄의 허준  김광락

단풍나무 그늘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하면, 병원 앞 두 그루의 우람한 단풍나무가 그를 반깁니다.
병원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있는 나무 그늘이 아름답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그 나무 그늘아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습니다.

 

 

 

  한의사 김광락

 

 그는 1961년에 태어나, 1987년 동국대학교 한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의사였기에, 한의학과의 연결은 자연스러웠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1987년부터 1989년까지 해병대 1사단에서 한의사 군의장교 1호로 근무하면서 영내에 한방진료소를 개설하였습니다. 제대 후 포항에서 한의원을 15년간 운영하면서 틈만 나면 미얀마(Myanmar)와 스리랑카(Sri Lanka) 등지로 단기해외봉사활동에 참가하였습니다.

 

 풍족한 삶을 누리면서, 그는 늘 베푸는 사랑을 떠올렸습니다.
 한의사 김광락은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한국,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에서 3년간 근무하였습니다.

 

 

 

  정부파견 한의사로 근무하면서 '글로벌 한의학'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

 

 그는, 처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병원을 세우게 된 역사를 돌이켜봅니다.

 

1996년 대한한의사협회 산하 KOMSTA(대한한방해외협력병원)는 우즈베키스탄 한국대사관 초청으로 타슈켄트 소재 국립 제1병원에 단기 의료봉사단을 파견한 것을 계기로 1997년 6월에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 병원을 개원했습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 내 병원 건물
1개동을 10년간 무상 임대하는 조건으로 병원설립이 정식 성사되어, 정부파견한의사들은 고려인과 우즈베키스탄 현지인 등 80여 명의 환자들을 매일 무료로 돌보았습니다.

 한때 환자들이 1년을 넘게 진료날짜만 기다리기도 했으나, 최근 진료시스템이 보완되었습니다.

 

 예약 환자가 6개월씩 밀려 있을 만큼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데, 이는 한의학이 외국인의 체질에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향후 FTA(자유무역협정)에 의한 시장개방과 함께 의료분야에 있어 해외시장 진출 시 그 성공가능성을 높여줄 것입니다.


 그는 한국의 KOICA 및 KOMSTA가 자랑스럽고, 그 봉사활동을 처음 시
작한 선배들의 마음과 노력에 다시 한 번 깊은 존경심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KOMSTA와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의 숭고한 사업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였습니다.

 

 한의사 김광락은 1년 평균 3,200여건의 진료를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150여건의 금연과 금주 및 금마약침 시술을 실시하여 높은 완치율을 보이며 환자들에게 지속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교육 분야에서는 타슈켄트 국립 제1의과대학생과 현지 의료진들을 대상으로 한의학 이론과 실습 강의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더욱이 척박한 땅에서 혹한의 시련을 극복하고 민족의 뿌리를 이어 온 고려인이 2십만여 명이나 거주하고 있는 이곳 우즈베키스탄에서 한의학이 단순히 의술을 펼치는 차원을 넘어 보건 분야 발전과 한국,우즈베키스탄 문화 및 경제협력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처럼 한국,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은 동포인 고려인에게는 향수를, 우즈베키스탄에는 국경 없는 무료의술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현지 보건과 의료 환경개선을 위해 힘쓰고, 현지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의학 강의 및 실습을 통한 교육을 실시하는 등 글로벌 한의학을 위해 부단히 활동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노무현대통령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활동하였던 민간단체 ‘사랑의 열매’로부터 긴급환자 수송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앰뷸런스 한 대를 지원받아 의료봉사 관계자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는' 봉사에서 '기르는' 봉사로의 전환을 말하다..

 

 한의사들이 수많은 우즈베키스탄 현지인과 고려인 환자를 돌보며 적지 않은 업적을 쌓았지만, 한의학 교육문제는 거의 방치되어 있는 점을 그는 주목하였습니다.

 

 매주 현지 의과대학생들과 관심 있는 병원직원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의사 등을 대상으로 침구학개론 수준의 한의학을 강의하고
있으나, 진정으로 내실을 기해야 될 시점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더욱이 자격증에 준하여 피교육생들이 임상허가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타슈켄트에도 무면허 침구사들이 의외로 많이 활동 중인 것을 보고 KOMSTA도 이제는 ‘주는’ 봉사에서 ‘기르는’ 봉사로의 발상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10년간의 계약기간이 만료되고 다시 시작될 10년간의 KOMSTA는 제2의 도약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더없이 중요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식량자급이 어려운 나라에 당장의 식량을 보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급한 문제일 것이지만, 궁극에는 식량을 스스로 재배하고 자원화해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을 가르쳐 주고, 더 나아가서는 식량을 받던 나라가 더 어려운 곳을 보살피거나 처음 식량을 제공해준 나라와 상호 발전의 파트너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식량문제를 한의학으로 바꿔 생각해 볼 때 지금까지 환자치료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부터는 새로운 10년 계획으로 젊은 우즈베키스탄 의사 혹은 고려인들을 교육하여 스스로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을 치료하고 한의학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시스템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교육을 받은 우즈베키스탄 의사 혹은 고려인 의사들이 언젠가는 선진 한의학을 보유한 한국을 찾을 것이며, 필요에 따라 한국의 한의사들이 우즈베키스탄에 병의원을 개설하거나 교육기관까지 설립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친선한방병원은 KOICA와 KOMATA 그리고 대한한의사협회로부터 연간 3,500여만 원을 지원받고 있으나, 담당 관계자들이 무료진료를 실시함에 있어 발생되는 병원운영비와 열악한 현지 병원환경을 개선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특히 1997년에 우즈베키스탄 정부로부터 10년간 무상임대 받은 것이 만
료 돼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폐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는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수가 날이 갈수록 급증할 만큼 호응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료장소의 협소함과 낙후된 의료시설로 인해 양질의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며, 특히 무상임대 기간 만료로 병원자체가 폐쇄된다면 예약대기중인 많은 환자는 물론 장기적으로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정부차원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향후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에는 침구학부가 공식적인 커리큘럼으로 승인될 예정이며, 보건복지부에서는 러시아어 한의학 교재 제작을 위해 지원키로 하는 등 우즈베키스탄에서 한의학을 통해 병원과 교육이 공존하는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한국국제협력단의 도움을 받아 금요특집으로 마련된 '한국의 슈바이처들' 시리즈가

 이번 회차를 마지막으로 끝맺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금요특집을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고 따뜻한 글로 사랑받는 건강천사 운영진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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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강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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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의 허준  하동주

 어려운 시기의 고결한 열망

 

 

 

 

 

 

 

 

 

 

 

 

 

 

  김라리사 뻬뜨로브나와 신 아가피야입니다.


  한국한방병원집단에게 모든 환자를 위한 주의 깊고 친절한 태도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타슈켄트 시민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봉사활동하시는 닥터 하동주와

  김지연님께 특별히 고맙습니다.

  환자 대부분의 의견을 표현하면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의 고결한 노동과 우즈벡 국민을 도와주는 열망에 매혹됩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1997년 10월 10일.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한 환자가 한의사 하동주에게 쓰는 편지에는 감동과 고마움이 가득합니다.
  하동주는 1965년에 태어나, 1984년 원광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로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우즈베키스탄 ‘김병화 농장’ 보건진료소와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 병원에서 5년간 근무하였습니다.

 

한국,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 앞에서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중부에 위치하면서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80년의 지배에서 벗어나 1991년 독립하였습니다.

  병원체제는 구소련의 공산주의체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지역별로 선진국 의료체계를갖추었지만, 약품이 부족하고 의사가 없어 각종 질환으로 주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최초의 한국사람은 고구려 출신인 당나라 장군 고선지입니다.
  1,200여 년 전에 고선지 장군은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석국을 정복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바로 이 석국이 오늘날의 타슈켄트입니다. 그리고 구소련에 의해서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한인들의 일부가 지금의 타슈켄트 근방에 정착을 했고, 그 후손들의 상당수는 아직도 이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고려인 김병화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1905년 연해주에서 태어나서, 다른 한인들처럼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습니다. 그리고 강제이주 직후에 황무지에 물길을 열어놓고 수백만 평의 벌판을 논밭으로 개간하고 식량을 지원한 공로로 구소련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서 노력영웅훈장을 받은 인물입니다.

 

  김병화가 일했던 농장은 원래 ‘북극성 농장’이었는데, 1974년 김병화가 죽으면서 ‘김병화 농장’으로 변경됐습니다.

  김병화가 1940년부터 35년간 농장장으로 있을 당시에, 이 농장은 뛰어난 생산능력 때문에 구소련으로 부터 수차례 훈장을 받았습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우즈베키스탄을 방문 기념하여 ‘김병화 농장’ 보건진료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1996년에는 KOICA와 우즈베키스탄 진출 기업단체의 도움으로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 안에 한국,우즈베키스탄 한방병원이 10년간의 계약으로 개원하게 되었습니다.

 

  한의사 하동주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처음으로 의료 활동을 펼친 한국인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한방진료 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의 개원에 일조를 담당하였습니다.

  날로 늘어나는 환자로 인하여 진료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또한 제 때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여 만성화되고 고질화된 환자를 치료하는데 턱없이 부족한 의료장비 및 의약품으로 인하여 원만한 의료 활동이 힘들었습니다.

 

  저임금으로 인한 간호사 부족으로 한 명의 간호사로 매일 70여명을 진료하였고, 지원금이 부족하여 통역이 없는 관계로 정확한 의사전달이 안되었습니다.

  진료소 내에 난방시설이 작동되지 않아 항상 추웠습니다.

 

  그는 동포 및 현지 주민 대상의 무료 한방진료를 하였고, 대한한의사협회와 공동으로 우즈베키스탄 의료 봉사활동 실시 등 보건 수준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진정한 인술 실천으로 민간 외교사절로서의 양국 우호증진에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우즈베키스탄의 열악한 의료수준으로 인해 동포와 현지주민들에게 무료로 질병을 치료해주는 한방진료에 대한 선호가 나날이 높아지는데 기여하였습니다.

 

  ‘김병화 농장’ 보건소에서 하동주의 활약은 눈부셨습니다.
  그들은 치료를 받으면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초콜릿을 선물하였는데, 그 초콜릿을 간호사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맛은 달콤하였지만 마음만은 씁쓸했습니다.  백인계 러시아인 그리고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그를 아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감사의 편지를 씁니다.

 

 

 

  존경하는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 귀하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
  김병화 집단농장의 주민들은 당신께 글을 드리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즈베키스탄공화국이 독립한지 4년이 되었는데 이는 매우 짧은 기간 입니다.
  그러나 공화국은 그 동안 국민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현재 우리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위하여 까리모프 대통령은 여러 나라들과 국민들의 복지 향상을 위한 지원협정을 맺고 있습니다.  특히 까리모프 대통령과 각하 간에 맺은 정부간 국제협력 협정의 일환으로 하동주 한의사가 우리 집단농장에 왔습니다.

 

  진료를 시작한 이래 그는 환자들 사이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과묵하고 겸손하며, 환자를 대할 때는 주의를 기울이는 등 좋은 성품에 따뜻하고 양심적인 의사입니다. 그로 인하여 대한민국과 각하는 이곳에서 무한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하가 1994년 김병화 집단농장을 방문한 이래 각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각하는 우리 모두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각하가 김병화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이 곳 집단농장의 많은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각하가 해주신 모든 일들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의사와 많은 약품을 이곳에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작금 공화국의 경제상황과 특히 우리 집단농장 주민들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고려하여 우리는 각하가 우리를 도와주시고 추가로 약품을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동주 한의사가 가져온 약품이 벌써 다 쓰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능하다면 하동주 한의사가 보건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의료장비들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각하의 건강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합니다.

 

                                                                        김병화 집단농장 주민을 대표하여
                                                                                                의사 대표 황 나탈리

 

                                                                        마을 협회 대표 바바베코프
                                                                                                 집단농장 주민들

 

 

  어려운 상황 아래서 그의 의료 활동은 박애심과 인내심에서 우러난 결과입니다.  그리고 1997년 그는 정부파견의사 계약기간이 만료되지만,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근무연장사유서는 간곡하기까지 합니다.

 

 

 

  본인은 1995년 11월 21일자로 우즈베키스탄에 의료단으로 파견되어 ‘김병화 농장’과 타슈켄트 국립 제1 의과대학 병원에서 한방진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김병화 농장’에 한방진료소를 개설하여 근 2년여 동안 5,0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여

이들에게 적지 않은 호응을 얻었다고 사료되며, 또한 최근에는 본인의 의료 활동에 따른 호응에 힘입어 타시미의과대학과 대한한의사협회가 주최가 되어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을

개원하여 한방의료 활동을 통한 국위 선양에 일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위와 같은 점을 토대로 앞으로 2년 동안 근무를 연장시켜 그 동안 배웠던 이 나라의 언어와 풍습을 밑바탕으로 삼아 한방의료 활동을 통한 국위 선양과 아직 미비한 이 나라 의료제도 및 시설에 조금 더 이바지하고싶습니다.

 

 


  1995년. 한의사 하동주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습니다.
  비행기에는 시내버스처럼 지정된 좌석이 없었습니다. 빨리 뛰어가서 앉으면 되었습니다. 승객들은 비행기 안에서 매운 담배를 피웠고, 독한 보드카를 연신 마셔댔습니다. 술이 취해 큰소리로 이야기하다가 끝내 싸움까지 벌어졌습니다.

 

  난생 처음,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는 하늘 길은 너무 험하였습니다.
  가까스로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으려고 3시간을 기다렸지만 이방인에게 누구도 친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마중 나와 있던 대사관 직원이 입국심사장까지 들어와서야 우즈베키스탄 땅을 정식으로 밟을 수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 KOICA 정부파견한의사로 처음 발을 내딛은 한의사 하동주는 그곳에서 무녀리의 역할을 훌륭히 담당하였고, 그 열망은 밀알이 되어 타슈켄트에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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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모아의 슈바이처  최영진

  남태평양 푸른바다처럼 행복했노라

 

 

 

 

 

 

 

 

 

 

 

 

 

 

 군대가 없는 나라.
 태고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섬나라.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작은 섬.

 

 사모아(Samoa)는 오세아니아 남태평양 서사모아 섬들로 구성된 입헌군주제 국가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령에서 뉴질랜드 통치령으로 바뀐 뒤 1962년 폴리네시아 민족국가 최초로 독립하였고, 1997년 서사모아에서 사모아로 나라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 곳에 소아과 의사 최영진이 정부파견의사로 20년간 봉사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최영진은 1948년에 태어나 1978년 가톨릭대학교 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대구에서 소아과를 개원하여 안정된 삶을 누리던 그는 45살 나이에 KOICA(한국국제협력단) 의료봉사단에 지원했습니다.

 슈바이처를 존경하며 인도주의 의사를 꿈꾸던, 어릴 적 그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병원과 집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려 할 때 반대도 있었지만, 그는 가족과 함께 1993년 서사모아로 떠났습니다.

 

 서사모아의 수도 아피아 사모아 국립병원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아과 의사로 인술을 펼쳤습니다.

 서사모아의 평균 가족 수는 8~13명입니다. 그 만큼 자녀수가 많고, 자연히 그를 찾는 어린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국립병원임에도 의료기기들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1kg 이하의 미숙아들이 많은 이곳에서 인큐베이터의 부족으로 모두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인공호흡기가 없어 위급한 신생아가 사망한 적도 많았습니다.

 

 이런 환경이지만, 그는 사모아의 어린이들이 언제나 건강하게 웃을 수 있도록 정성을 쏟았습니다.

 파견 초기에는 폐렴, 심장질환, 류머티즘 환자를 매일 30~40명 정도 진료하였습니다. 특히 기생충 감염과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 등을 치료하였습니다.

 

 턱없이 부족한 의료시설로, 섬 곳곳에는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 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인과 함께 봉사단을 조직하여 무의촌 진료를 시작하여 매달 한 번 사바이 섬으로 가, 마을을 돌며 시력이 약한 노인에게 안경을 제공하고 각종 필요한 의약품을 주면서 많은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서사모아 무의촌 순회진료 모습

 

 

 

 의사 최영진은 꼼꼼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분기마다 활동내용을 KOICA에 보고하였는데, 주재국의 일반정세와 특별사항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KOICA 남태평양 직원 신의철에게 <서사모아 사람들>이라는 내용으로 쓴 편지도 흥미롭습니다.

 

   처음 신생아실에서 아기들을 검진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아기의 엉덩이에서 몽고반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만나는 서사모아 사람들에게 사모아인과 한국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서사모아 사람들은 먼 옛날에 페루의 원주민들이 조류를 이용해 뗏목을 타고 이곳까지 이동해 왔으리라고 설명합니다.

 

   이들은 혈액만 한국인과 비슷한 것이 아니고 삶의 형태와 그들의 성질, 현대사까지도 비슷합니다.

   남의 앞을 지나갈 때는 꼭 몸을 숙이고 ‘토로우(죄송합니다)’하면서 지나가고, 밥을 먹을 땐 꼭 어른들이 먹은 후에야

   아이들이 먹습니다.

   어른들에겐 존경어가 따로 있고, 앉을 때도 양반자세로 앉고 꽃을 좋아해서 백일홍, 맨드라미, 봉숭아꽃들을 집 주변에

   항상 심고 머리에 꽃들을 꽂기도 합니다. 술도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도 좋아하고 춤을 추는 것도 남녀 모두 즐깁니다.

 

   이들의 전통의상은 라바라바라고 하는 치마 같은 옷인데, 우리 아들 다니는 학교도 교복이 청색 라바라바입니다.

   처음엔 그 옷 때문에 안가겠다고 우겼습니다.

   다행히 교장선생님이 청색반바지를 입어도 된다고 해서 몇 개월 입고 다니더니, 요새는 라바라바를 입으면서 자기가

   제일 세련되게 입는다고 웃습니다.
   저도 가끔 초대를 받으면 라바라바를 입고 갑니다. 제 집사람도 이 곳 전통의상을 물론 입지요.

 

  1, 2년이 다르게 발전하는 한국의 소식을 정부에서 보내주시는 신문을 통해서 읽으면서 어떤 때는 한국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이만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라바라바 한 장 두른 그의 환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길고 자세한 편지 여서, 전문을 다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의사 최영진의 자상하면서도 다정한 성품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사모아 어린이들 엉덩이의 몽고반점을 보고 한국과 사모아와 몽고 그리고 페루까지 열거하며 세계는 하나라는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닥터 초이’하면서 사모아인들은 그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보냅니다.
 사모아의 국왕이 인정하는 사모아 사람사모안’으로, 코리언의 사랑과 평화를 남태평양 푸른 바다에 펼쳤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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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강천사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팔라우의 슈바이처  윤성일

아름다운 팔라우에도 아픈사람은 많았다.

 

 

 

 

 

 

 

 

 

 

 

 

 

붉게 떠오르는 태양이 마이크로네시아 200여개 섬들을 일렁이게 합니다.
태평양 서쪽 끄트머리에 섬의 무리로 이루어진 나라.
바다 한가운데 흩뿌려진 섬들로 이루어진 인구 2만 명 정도의 작은 나라 팔라우(Palau).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과 가까워 1543년 이후 오랫동안 그들의 세력권에 있었고, 한때는 독일의 세력 아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각각 지배하다가 1994년 독립하였습니다.

특히 1914년부터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인 일제강점기시대에는 수많은 한국인이 징용으로 끌려와 공항, 항만 및 도로건설에 강제노동을 당하였으며, 수많은 동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팔라우에 한국의 일반외과 전문의 윤성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1952년에 태어나 1977년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를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1996년에 쌍용건설에 의해 시공된 팔라우국립병원에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인술을 펼쳤습니다.

 그 병원은 총 병상 수는 80병상으로 내과, 소아과, 외과, 정형외과 및 정신과 병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는 이 팔라우국립병원에서 정부파견의사로1996년부터 2004년까지 9년간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일반외과 전문의로 외과병동에서 근무하였으며, 의사는 원주민의사를 비롯하여 미국, 마셜, 피지, 미얀마, 필리핀, 바누아투인 등으로 구성되었고, 간호사도 원주민, 피지 및 JICA(일본국제협력기구) 소속 2명이 함께 하였고, 약사는 원주민과 호주 그리고 미국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유일한 종합병원인 팔라우국립병원에는 외과전문의가 그를 포함해 2명으로 폭주하는 외과진료 및 수술환자로 인해 평일에는 쉴 틈 없이 집도가 계속되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응급환자로 인해 병원근무가 빈번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전공은 일반외과이나 전공별 외과전문의가 없어 관련 수술 책자를 연구해가며 모든 외과수술을 수행하였습니다.  

 외과 진료뿐만 아니라 팔라우 정부에서 추진하는 청소년들의 알코올 및 마약관련 문제에 관한 예방 및 치료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팔라우 원주민 수련의사 8명에게 1996년부터 2004년까지 기본적인 외과수술 기술을 전수하였습니다. 원주민 수련의사에게 전문외과의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외국종합병원으로 환자후송에 소요되는 많은 비용을 절감하였습니다.
 1996년 3/4분기부터 2000년 3/4분기까지 그가 작성한 활동보고서에 의하면, 진료인원은 3,772명이었고 수술환자는 556명이었습니다.

 

 대형선박사고와 교량붕괴사고의 발생이 빈번하여 사망자와 중환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신경외과 및 흉부외과 환자 발생 시 진료에 필요한 단층 촬영기, 혈중가스측정기, 인공호흡기 등이 절실하였지만 그는 묵묵히 능숙하게 위급한 병상을 훌륭하게 지켰습니다.

 그의 8년간 근무로 팔라우국립병원 일반외과 및 외과 중환자실의 의료 수준이 현저히 개선되었습니다.

 

 

 

  1997년 3월 26일

 

 그리스 소속 화물상선이 파푸아뉴기니 항구를 출발하여 서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51세의 그리스인 선장이 갑자기 선혈을 토하며 의식을 잃었습니다. 응급처치를 요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부선장은 이 사실을 괌 병원으로 연락하고, 배를 괌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위장출혈증상이 악화되면서 의식소실증상이 현저하였습니다.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괌으로의 항해를 중지하고, 그가 근무하는 팔라우로 항로를 수정하였습니다.

 

 마침내 환자는 팔라우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위출혈 지혈을 위한 내과적인 치료에 역점을 두고 또한 수혈을 동시에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과적인 치료에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고 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환자혈액형이 AB네거티브로 혈액이 부족하여 괌 적십자사에 응급협조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내고 응급수술을 시행하였습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선장은 과거병력상 위출혈로 위 부분 절제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 위출혈은 과거 위장문합수술 부위의 출혈 때문이었습니다. 지혈수술로 출혈부위를 봉합하고서 혈액이 도착하여 수혈하였습니다. 환자 가슴에서 작동하는 KOICA에서 보내준 모니터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술 후에도 환자는 재출혈 소견을 보이고 또한 괌에서 받은 AB네거티브의 혈액도 다 떨어졌습니다.


 괌으로부터 다시 혈액이 도착하여 수혈하였으나, 추가의 혈액이 필요 하였습니다. 그러나 괌에서는 더 이상의 혈액을 구할 수 없어 일본적십자사에 긴급 혈액 요청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이러한 신속하고도 정확한 치 료과정 중 출혈증상이 호전되었고, 중환자실에서 활동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선장의 장인은 한국전쟁 그리스 참전용사였습니다.

 

 그는 이 환자를 통하여 세계화시대에서의 국제간 의료협력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하였습니다. 혈액을 항공편으로 보내준 일본적십자사, 괌적십자사와 괌병원 의사, 환자 수술을 도와준 필리핀과 팔라우의사, 바누아투 마취과 의사 그리고 원주민 간호사 특히 중환자실 의료장비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준 KOICA가 없었다면 화물상선 선장의 생명은 보장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의술에는 국경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는 미담이었고, 유능한 정부파견의사의 쾌거였습니다.

 

 

 

  의사 윤성일은 헌신적인 의료활동으로 팔라우 정부로 부터 신임을 얻었습니다.

 

의사 윤성일은 성실하고 헌신적인 의료 활동으로 팔라우정부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주민들에게도 명성이 널리 알려져 양국간 우호협력관계 증진 및 한국의 이미지를 높였습니다. 팔라우에서는 그를 ‘Dr.Yoon’이라 불렀습니다.

공무원들은 물론 팔라우 시내에서 그를 만나는 주민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의사 윤성일은 임기를 마치면서 KOICA에 보고서를 보냅니다.

  의료수준의 전반적인 향상으로 의료파견의사의 보수교육과 파견근무중의 보수교육이 절실하며, 파견의사는 파견국 의사

  및 외국인 의사와의 선의의 경쟁으로 종래 일반적인 한국의 의료수준을 후진국에서 하향적으로 지원한다는 사고 자체를

  전환하여야 한다.

  파견 전에는KOICA의 지정병원에서 파견의 전공 이외의 출산과 분만, 외상 성 골절 치료와 두개골과 흉부외과 외상환자 등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외상치료의 집중교육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섬에서 살아가는 다정하고 순박한 팔라우 국민들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이른바 대동아전쟁시기에는 수많은 한국인이 이국땅의 고혼이 되어 우리에게는 슬픔의 역사를 묻어야 했던 섬나라 입니다.

 

아름다움과 슬픔이 공존하는 팔라우에서 의사 윤성일의 성실하고도 유능한 의료지원활동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인 한국의 위상을 그들에게 오롯이 전하였고, 그가 받은 존경과 사랑은 징용으로 스러져간 한국인의 원혼을 한껏 달랠 수 있었습니다.

 

팔라우 현지 신문기사 자료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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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카자흐스탄의 허준  이정열

  시인 한의사

 

 

 

 

 

 

 

 

 

 

 

 

 

 

여태 뭐 했어!
귓전을 때리는 소리에 놀란다.
아내의 지청구에 나는 무너진다.
어디 무너지는 게 공든 탑뿐이겠는가.
추억은 세월의 사리가 되어 쏟아진다.

‘너에게 내가 전부였으면’
오래 전 나에게 온 쪽지 한 장
책갈피에서 떨어진다.
아프지만 단호한 손길로
그 전부를 구겨서 버린다.

이제 겨우
한걸음 나갔을 뿐이다.


 시인이며 한의사인 이정열이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 한의사 자격으로 카자흐스탄(Kazakhstan)으로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면서 쓴 시의 일부분입니다.

 환자에게 봉사하는, 환자를 사랑하는 의료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이제껏 쌓아 온 공든 탑은 단호한 손길로 구겨 버립니다.
 그는 의료봉사의 발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아프지만 과감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시인 한의사 이정열...

 

 이정열은 1960년에 태어나, 1986년 원광대학교 한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한의대를 다니면서 원광대문학회에서 시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상지대학교에서 임상학 강의도 하였고, 서울에서 한의사로 일하던 그는 부도 쌓았고 명성도 이루었습니다. 한의사이면서 시인이었던 그는 환자를 돈으로만 보아온 지금까지의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봉사를 자원했습니다.


 인술의 근본을 새롭게 배우고 싶었고, 진정으로 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자신의 온 정성을 쏟고 싶었습니다.

 그는 파견되기 전에 카자흐스탄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중 알마티에 거주하는 고려인 시인 이 스타니슬라브의 우슈토베에 관한 시를 읽고 감동받았습니다. 그는 중앙아시아 작가회의에 참가하여 《고려문화》에 여러 차례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은 정든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슈베토, 눈물의 유배지로 강제이주 당하였습니다.

 그는 흩어진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원형 격인 그곳을 찾아 잡초처럼 다시 일어난 고려인들과 의료혜택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경제성장 본거지로 급속히 떠오른 카자흐스탄에는 고려인 10만여 명과 1990년대 초부터 기회를 찾아 몰려든 한인동포 3,000여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부파견한의사로 카자흐스탄에 파견되다...

 

 드디어 2006년 KOICA의 정부파견한의사로 한국 · 카자흐스탄 친선병원에 부임하여 3년간 재임하였습니다.
 한국 · 카자흐스탄 친선병원은 2000년 KOICA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개원 당시 알마티의 여러 시립병원에 흩어져서 진료하고 있던 한방과, 외과, 내과의 한국 해외파견 의사를 중심으로 개원하였습니다.

 

 2002년 알마티시청으로 병원 운영권이 이관된 후에도 의사가 꾸준히 늘어나 치과, 방사선과, 임상병리과, 신경과, 척추교정과 등에서 15명의 현지 의사들과 함께 진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운영권이 시청으로 넘어간 후에는 늘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에게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민족과 국적을 떠나 똑같은 환자였습니다.

 KOICA의 특성상 현지인 위주의 병원이 될 수밖에 없지만, 먼 이역만리에서 기쁨의 씨줄과 슬픔의 날줄을 엮어가고 있는 교민들도 진료하였습니다.

 

 그는 통역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원주민 환자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러시아어를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고려인들을 위한 정기순회 진료를 정례화 하였습니다.

 

 

 

  우슈토베에서의 무료진료 그리고 고려인...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최초로 정착한 우슈토베.

 알마티에서 420km 떨어진 길을 자동차로 7시간이나 직접 운전하면서 우슈토베로 달렸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가도 가도 황량한 벌판. 길은 멀었고 너무나 거칠었습니다. 어떤 때는 튀는 돌에 자동차의 연료통이 구멍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가다보면 우슈토베가 마치 푸른 섬처럼 그에게 다가왔으며, 그곳에서 고려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신고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의 옛 모습을 오롯이 지켰습니다.

 

 조국의 풍속과 습관에 따라 집을 지었고, 논밭을 일구었고, 추석과 설을 보냈습니다. 먼 길을 달려그곳에 도착하면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은 그를 반겼습니다. 긴 여정의 피곤함이 싹 사라졌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한국의 과거로 달려간 듯 평온한 느낌에 행복하였습니다.

 

 그곳의 고려인들은 물론 체첸족과 쿠르드족 등 현지인 2,900명에게 침과 부항 그리고 뜸을 사용해서 한방진료를 무료로 실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부파견한의사로서 정해진 일만 하지 괜히 일을 벌이지 말라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마음고생도 하였습니다.

 

 카자흐스탄은 사회주의 잔재가 남아 있어 의사의 근무시간을 하루 3시간으로 제한하였습니다.
 그런 의료 현실에서 한의학의 인기는 당연히 높았습니다. 그가 한국 · 카자흐스탄 친선병원 전체 수입의 70%를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비를 들여 우슈토베의 무료진료를 꾸준히 수행하였고, 마침내 한국대사관도 지원에 나섬으로써 정식 프로그램으로 정착시켰습니다. 마침 부산대학교 의대를 나와 해외 협력의사로 합류한 젊은 내과의사 황상현이 흔쾌히 힘을 보태면서 그의 무료 진료는 가장 성공적인 봉사 프로그램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한방진료에 대한 우슈토베 현지인 반응도 매우 좋았습니다.

 아버지가 소련시절 노력영웅이었다는 신 리사는, 그의 일행이 무료진료를 시작한 이후 한방의 뛰어난 효과를 체감한 현지인들이 지역병원 찾기를 꺼리게 되는 현상이 생겨났다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이런 봉사활동을 하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어 고려인이란 것이 자랑스럽다고 하였습니다.

 

 

 

  3년간의 파견활동을 회상하다....


 그는 자신을 돌아봅니다.

 

 보은 차원에서 시작했지만 제가 많이 배웁니다.
 우슈토베에는 고려인과 사나운 체첸인 그리고 기구한 처지의 독일 민족까지 수많은 민족이 말이 잘 안 통해도 몇 시간을 공감하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평화롭습니다.

 

 가난하지만 갈등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죠. 탈레반과 9·11테러 같은 건 여기선 싹 틀 수 없어요.

 우슈베토의 고려인 사회는 내게 다시 시인의 꿈을 안겨준 오래된 미래였습니다.

 

 2011년. 제7회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을 개최하였던 카자흐스탄.

 그는 정부파견한의사로서 카자흐스탄에서의 3년간의 세월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특히 아픔의 과거를 간직한 채 척박한 황무지, 고립된 우슈베토에서의 내 나라 내 겨레 고려인들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그는 강조합니다.

 

 따스한 정에서 우러난 인술을 펼치는 것보다 더 높고 숭고한 외교활동은 없습니다.

 

 


카자흐스탄 일간지 베체르니이 알마타에 실린 의료장비 기증식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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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엮어 출판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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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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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의 허준  이우혁

  산 설고 물 선 우즈베키스탄에서

 

 

 

 

 

 

 

  

  예전부터 봉사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사실 지금껏 한국에서 쌓아온 한의사로서의 입지가 조금 아쉽긴 했지만,

  정리하고 나니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지더군요.

 

 2003년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으로 떠나며 가진 민족의학신문과의 인터뷰입니다.

 

 

  한의사 이우혁은...

 

1966년에 태어나 경산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부터 4년째 운영해 오던 한의원을 과감히 정리하였습니다.

2003년부터 2년간 정부파견한의사로 한국 ·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 근무를 지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1997년 포항에 있는 시골의 한 폐교를 임대해 친구와 함께 한의원을 개원하였습니다.  

 3년간 암환자 등 주로 난치병 환자들을 진료하게 되면서 그곳 사람들의 어려운 환경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습니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어려운 분들에게 자신이 가진 의술로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순수한 바람으로 정성스레 돌보았는데, 진료를 받은 사람들이 감사의 뜻으로 전화를 걸어오거나 손수 음식까지 장만해 올 때는 따스한 정을 느꼈습니다.

 

 특히 네팔(Nepal)에 있는 한 병원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치료 한 번 받으려면 하루나 이틀씩 걸어와야 하고, 돈도 없고 의사도 없어 사소한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더욱 체계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003년 우즈베키스탄 파견의사를 지원했습니다...

 

 2003년 대한한의사협회 홈페이지에서 우즈베키스탄에 파견할 의사의 자리가 몇 달째 비워져있다는 글을 보게 되고, 처음에는 낯선 곳에서의 생활을 염려하던 아내와 자녀들을 설득하였습니다.

 

 한의사 동료들이 그동안 쌓아온 것이 아깝지 않으냐며 어리둥절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든 갈 수 있는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그동안 한국에서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에 대한 미련과 집착 때문에 결정을 쉽게 못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중부에 위치하면서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1991년 독립하였습니다. 수도는 타슈켄트이며 공화제로서 구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이슬람교도들이 다수였습니다. 지역별로 병원이나 보건소가 있었지만 시설이 허술하고 의사가 없어 각종 질환으로 환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한의사 이우혁은 타슈켄트국립 제1의과대학교의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장으로서 진료업무와 현지직원 관리 그리고 병원경영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무료로 진료하는 병원이어서 항상 환자로 넘쳐 났습니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치료할 환자를 한 번에 예약을 받았기 때문에 예약하는 날은 수천 명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어 병원직원 모두가 나서서 예약을 받느라 진땀을 빼야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진료와 원무가 분리되어 의사는 진료만 하면 되었지만, 우즈베키스탄은 한국이 아니었습니다. 병원장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잡다한 업무들이 곤혹스러웠습니다.  예약되지 않은 환자들이 찾아와 막무가내로 생떼를 쓰거나, 고위직의 엉뚱한 진료 청탁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군에서 받은 훈장을 내밀며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진료소에 보낼 약품을 KOMSTA(대한한방의료봉사단)으로부터 어렵게 지원받았는데, 세관에서 이유도 없이 일 년 가까이 통관을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세관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가져다주면 기다리라 하고, 또 다른 서류가 필요하다고 해서 가져다주면 또 다른 핑계를 대며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무능한 공무원인지 부패한 세관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나라 국민을 치료해 주고 무상으로 나누어 줄 약품 통관에 딴죽을 걸었습니다. 결국 법원의 힘을 빌려 약품을 찾아야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적응해야 하는 건 한의사 이우혁만이 아니였습니다...

 

 이우혁의 정신적인 버팀목으로 사랑의 힘을 실어주었던 아내와 2남 1녀의 자식들도 우즈베키스탄의 어려운 생활에 적응하여야 했습니다.  그가 거주하였던 지역은 비교적 좋은 동네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기와 가스공급이 부족하였습니다.  난방이 끊겨 자다가 일어나 벽난로에 장작불을 지피면서 길고 긴 겨울밤을 지새웠고, 예고 없이 정전이 되면 촛불을 켜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색다른 환경을 감내할 수 있었지만, 불편한 것은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전기가 나가면 불평도 없이 촛불에 의지하여 학교 숙제를 즐겁게 하는 아이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국민소득 1,000달러 정도의 그곳에서의 생활은 예측이 없었습니다.    자동차에 기름은 항상 가득 채우고 다녀야 했는데, 주유소에서는 기름이 떨어지면 영업을 며칠씩 하지 않았습니다. 기름을 구하지 못하면 허가 없이 파는 곳에서 몇 배의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도처에 슈퍼마켓이 있는 한국과는 양식을 구입하는 것도 달랐습니다. 

 

 처음 한 달 정도 임시로 아파트에 살 때였습니다. 그들은 주식으로 리뾰슈까라는 둥글고 넓적한 빵을 먹는데, 한번에 20~30개가량을 구입했습니다. 가방 가득 빵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마치 빵을 팔러 다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위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큰 가방에 빵을 가득 들고 가는 것을 보고서 빵을 몇 개 사려고 하였습니다.  

 아주머니는 영문을 몰라 웃고,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생떼를 쓴 꼴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돈을 안받고 빵 세 개를 주었습니다.  나중에 만났을 때 돈을 드리려 하였지만 한사코 받지 않은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였습니다.

 

 

 

  산 설고 물 선 이국땅이었지만 보람도 아쉬움도 많았습니다.

 

타슈켄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떨어진 시골 병원에서 한 달 정도 이동 진료를 하였는데, 그 지역은 구소련시절의 협동농장이 많이 있었습니다. 스탈린 독재시절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돈 벌러 도시로 나가고 노인들이 농사짓고 손자들을 키우며 아픈 몸을 이끌고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병원시설은 처참할 정도 여서 입원하면 오히려 없던 병도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 의료진이 도착하니 지역 주민들이 너무나 좋아하였습니다.

 타슈켄트에서 1,200km 정도 떨어진 누크스에 한방진료소가 있어 고려인 의사를 교육시켜 진료하고 있었는데, 1년에 한두 번씩 의사교육과 진료를 위해 출장을 갔었습니다. 이 지역은 아랄해가 마르면서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인구가 자꾸 줄어들고 희귀난치병으로 살기 힘든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랄해에서 날아오는 소금이 눈이 온 것처럼 토양을 뒤덮고 있어 농사짓기도 어렵고, 소금이 지하수를 오염시켜 피부병과 눈병 그리고 각종 내과질환을 유발하였습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치료할 수 있는 환자는 한정되어 있고 의약품도 부족하여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풍부한 부존자원을 갖추고 있어 한국과의 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국민복지와 교육문화에는 여력이 없었습니다. 

 

 2004년 12월, 생필품과 먹을 것을 사서 병원직원들과 함께 고아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자금은 우즈베키스탄 사람이 아닌 외국인이 치료받으면서 기부금으로 주고 간 것을 1년 동안 모은 것이었습니다.  고아원에서 기부 받은 물건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터라 아이들에게 직접 전달하기로 사전약속을 하고 갔습니다.

 

 아이들과 점심을 먹고 선물을 나누어 주려고 하니, 원장이 나중에 자기들이 전달하겠다고 그냥 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직접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신발도 신겨주고 모자도 씌워주고 과자도 건넸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고아원을 나설 때, 원장과 직원들의 차가운 눈빛이 마음을 씁쓸하게 하였습니다.

 

한국, 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 앞에서 (이우혁원장 오른쪽에서 3번째)


 2년간의 정부파견 한의사로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한방병원 근무를 무사히 마친 한의사 이우혁은 그 시절을 이렇게 돌아봅니다.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은 아픈 몸과 마음을 보듬어 주는 대한민국정부의 파견의사를 환영하고 좋아하지만, 정부는 국민이 원하는 바를 모른 체하고 있어서인지 별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금은 그 당시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기억들은 다 잊고 즐겁고 좋은 추억만이 남아있어 가끔 그 때가 그립다.

 

 그리고 환자들에게 좀 더 잘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좋은 일을 더 많이 했더라면 보람이 있었을 것을 하며 아쉽다. 기회가 주어져 다시 파견된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2008년부터 정부파견의사제도가 폐지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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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페루의 슈바이처  문장호

  가난한 인디오의 만병통치약

 

 

 

 

 

 불가사의한 잉카문명을 꽃피웠던 나라, 페루(Peru).  아름다운 절경에 잉카인의 슬픔을 담았던 마추픽추.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잉카제국의 후예 인디오들은 옛 제국의 영화는 뒤로하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여 까야오 지역과 같은 빈민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1992년 페루 대통령 후지모리 방한을 기념하기 위해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서 총 15개의 병원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까야오의 제1병원을 시작으로 꼬마스 제2병원, 아마존지역의 제3병원 그리고 안데스지역의 제4병원 등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세운 까야오병원은 저렴한 비용으로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서 이른 새벽부터 환자들은 줄을 서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에서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의료혜택이 있을 리 만무하였으며, 있다고 해도 이들의 생활 수준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곳들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까야오병원은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곳입니다.

 

 

 

이 병원을 지켰던 의사 문장호.

 

그는 1955년에 태어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비뇨기과 전문의였던 그는 한국에서 유능한 의사로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그는 KOICA의 정부파견의사로 가족과 함께 1993년 페루 리마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안정된 서울생활을 정리할 때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2년을 약속하고 도착한 곳 페루. 그 때 페루는 경제위기에다 좌익게릴라들 때문에 걸핏하면 전기가 끊기는 등 어수선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의사인 그도 결코 안전할 수 없었던 곳에서의 생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밤새 울고 투정하는 아이들을 달래며 그가 쉽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의사로서 목표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 페루 의료원에서 비뇨기과와 내과를 담당하여 외래환자 진료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비뇨기과 전문의지만 외과수술이나 소아과 진료를 할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일단 그를 찾아온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파견 기간 동안 5만 명에 가까운 환자를 진료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결핵환자 전담 진료 병동 건립 및 리마시 외곽 빈민 부락에 대한 순회 진료사업 등 열 개가 넘는 의료단 소규모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한국, 페루 의료협력사업 현장 관리 및 지역 전문가의 역할을 하였으며, 민간 외교사절로서 국위 선양 및 양국간 우호관계 증진에 기여하였습니다.

 

 까야오병원은 교민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습니다.

 언어의 장벽 앞에 병을 키우기 일쑤인 이민 1세대들. 그들에게 그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전화상담을 받으며 멀리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늦은 밤 식탁을 수술대로 내줘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언제나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그는 그들의 주치의임을 자처하였습니다.


1994년 11월. 그가 KOICA 총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정주년 총재님께.


  지난 봄 새로 부임하시면서 보내주신 격려 편지에 답신도 못 드린 채, 이번에 새로이 공로패와 함께 보내주신 서신을 읽게

  되니 송구스러운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페루의 제가 근무하는 병원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후지모리 대통령의 한국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 KOICA에서 건설

  하여 이곳 정부에 기증한 병원으로서, 파견의사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손에 의해 건설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병원운영도 완전히 궤도에 올라, 금년 7월 이미 개원 1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렀으며, 현재 치과의사와 임상병리

  의사를 포함하여 의사 6명 외에 간호사, 의료기사, 행정직원 등 20여 명이 함께 근무하고 있으며, 월 진료인원 2,000~2,500

  명, 연인원 3만 명에 육박하는 진료실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페루의료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현지주민들 뿐만 아니

  라, 이 지역의 한국인 선원들 그리고 교민들까지도 멀리서 찾아와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까야오보건청 산하의 일차 진료기관이기 때문에 입원과 수술이 안되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처음에는 일종의 텃세라고도 할 수 있는 현지 의사들의 견제도 받았으며, 우리가 지어준 병원인데도

  불구하고, 운영권이 이미 이곳 보건청 소속이기 때문에, 개인진료실을 내주지를 않아 애로가 많았으나, 대사관의 협조와

 또한 어떠한 이해관계 없이 단지 도움을 주기 위하여 파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결과, 출근 4개월이 지나서야

  개인진료실을 확보했습니다.

 

   이제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저에게 진료하기 위해 병원문도 열기 전에 아침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는 안면 있는 환자들의

 인사를 받을 때는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게다가 Project의 일환으로 지원해주신 X-Ray 장비나, 임상병리검사장비 덕분에

 일차 진료기관으로서는 이 지역의 다른 보건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 또한 흐뭇합니다.

 

 

 주로 까야오와 꼬마스병원에서 진료를 하던 그는 페루생활에 적응이 되면서 누구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페루의 사회구조는 양극화가 심하여, 원주민이나 빈민계층과 일부 부유층에 대한 의료시설 및 혜택의 차이가 매우 심하였습니다.  빈민계층을 위한 보건소를 포함한 공공의료기관이나 사회보험병원들은 시설도 빈약하고 환자들이 많아 끝없이 기다려야 했으며, 의료진들 역시 박봉에 따른 의욕감소와 무성의로 일관하였습니다.

 

 반면에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시립병원들은 진료수준이나 시설도 미국이나 유럽 못지않았으며, 따라서 진료비 자체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번 진료만 받는데 90달러, 정상 분만비용이 2,500달러, 또는 단순한 맹장수술이 3,000달러 등 상식선에서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빈민촌의 순회 진료였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선교사의 도움으로 히까마르까를 포함한 몇 개 빈민지역의 진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전혀 의료혜택이 없고 철저하게 소외되어 사는 사람들. 가끔 진료를 가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그는 오히려 작은 일이 더욱더 그들에게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들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들의 땅을 제공하며 상주진료소를 세워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999년 그는 리마시 변두리 비타르테지역 빈민가에 작은 병원을 지었습니다. 사재를 털고 현지 동포들의 도움을 조금씩 모았습니다.

준공테이프를 끊던 날, 그는 부인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내의 말없는 격려가 없었다면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타르테 빈민촌에 병원을 짓고 나서 그는 더 바빠졌습니다. 까야오 제1의료센터에서 정상근무를 마치고 1주일에 두 번씩 오후에 이 곳 병원으로와 무료진료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페루 친구들을 여러 명 사귀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현지 자원봉사자들입니다. 그들은 교대로 시간을 내어 비타르테병원을 지켰습니다.

 

 그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꼬 마스지역 보건소 최초로 정관수술을 시행하여 모자보건사업에 기여하였습니다. 또  그는 항상 빈민촌의 부족한 병원시설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조만간 다시 일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습니다.

 

 

 1993년. 안정된 서울생활을 접고, 가족들과 2년을 약속하고 도착한 곳 페루에서 의사 문장호는 10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지만, 귀국하지 않았습니다.

 

2009년 5월.《서울경제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에 따라 대사관 측은 본국에서 아직 타미플루가 도착하지도 않았으며, 예방백신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흘려


 야만 했다. ‘동포사
회의 주치의’로 불리는 한,멕병원의 문장호 박사도 ‘인플루엔자(H1N1)의 백신은 아직 없다.’고 확인해 주면

서 ‘타미플루는 치료약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의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지금도 그는 중미 멕시코에서 동포사회와 가난하고 병든 원주민의 주치의로서 사랑의 인술을 펼치고 있을 것입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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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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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의 허준  김현탁

  사랑의 마음을 전하다.

 

 

 

 

 

 

 

 초등학교 6-2학기 도덕교과서에 어느 한의사의 미담이 실려 있습니다.

 고려인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치료해 준 은인에게 쓴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소녀는 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류머티즘이 편도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였기에, 그 소녀는 엉뚱하게 편도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류머티즘 증상은 개선되지 않고 붓는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 학교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온 한의사에게 20여 회에 걸친 봉독치료인 벌침주사를 맞은 후 거뜬하게 나아 다시 등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정부파견한의사 김현탁입니다.

 

 


 그는 1962년에 태어나, 1987년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한의원을 하면서 환자와 돈이 연결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약을 먹어야하는 환자에게 약을 권했을 때, 환자는 약을 팔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시골이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약을 먹지 않고 병을 나을 수 있는 방법인 침과 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침으로 한의원은 명성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에 돌연히 한의원을 그만둘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간간히 시간을 내어 차가 다니지 않는 시골로 의료봉사를 하러 다녔고, 여름휴가 때 휴가 대신 에티오피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등 해외의료봉사를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느꼈던, 대가와 연결되지 않는 인술을 베풀고 싶다는 생각을 현실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누구의 평가보다 나 스스로 나를 평가했을 때 떳떳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행복감으로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한 생을 살면서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삶보다 남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삶이 행복한 삶일 것 같았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 모집기사를 읽었을 때, 그는 기쁜 마음으로 참가하였습니다.

 

 KOICA 지원 아래 KOMSTA(대한한방의료봉사단)가 활발히 활동하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겐트 국립 제1의과대학의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 한방병원에서 1998년부터 2002년까지 4년간 근무하였습니다


출국을 준비하면서 우즈베키스탄에는 화장지가 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는 이삿짐의 절반이 휴지였다고 합니다.

생필품이 턱없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처음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몇 달 동안은 식료품 및 생필품을 사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많은 민족이 살았고 그들의 음식문화가 모두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시장, 러시아시장, 고려시장 등 각 민족의 먹을거리가 다르고 파는 품목이 달라 하루는 고려시장에서 두부를, 하루는 러시아시장에서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하루는 독일시장에서 유제품을 사기위해서 다니는 색다른 경험을 하였습니다.

 시장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러시아어이었는데, 그들은 각기 자기 민족어를 시장에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각각 다른 민족들의 생활상을 경험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 곳의 아픔을 차근차근 보듬었습니다.

 

 사회주의국가인 구소련의 지배를 받으며 세계적인 의료수혜를 받던 백인계 러시아 사람들로 하여금 한방치료는 첨단치료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독립 이후, 치료를 한 번도 제대로 못 받았다.

 

 그곳에서의 의료체계는 1차 진료기관(보건소)과 2차 진료기관(시립병원) 그리고 3차 진료기관(대형병원)으로 상당히 선진화된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지원받던 것이 단절되고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해 의료시설은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병이 나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무료로 운영하는 한국,우즈베키스탄 한방병원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갔습니다.

 과다한 항생제복용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침이나 뜸이 한국 사람들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습니다.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이 호전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한방병원의 신뢰도는 점점 높아갔습니다. 자연히 보건당국 및 의과대학에서 한국한의학에 대한 관심도도 지대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국 의서를 번역하여 전통의학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한의학교재를 만들고, 의과대학에 한의학과를 개설하여 한의사를 양성하여 주민들을 치료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는 타슈겐트 국립 제1의과 대학생에게 매주 두 시간 씩 한의학 강의를 하였고, 대학 부속병원 원장 및 의사들에게 침구학 강의를 하였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은 한국과 일본을 같은 수준의 나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위상은 옛날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5년에 걸쳐 연인원 약 6만여 명의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전체 인구의 10%가 러시아인인데, 내원 환자의 80% 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타타르의 환자일 정도로 그들은 한의학치료에 대한 관심과 신뢰가 지대하였습니다.

 

 한의학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아 뇌성 마비환자가 내원해 치료해 달라고 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그는 희망적인 말로 환자를 따듯하게 위로하였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신통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하루는 병원입구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사색이 된 아이를 안고서 살려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습니다. 아이는 급체로 얼굴은 샛노랬고, 사지는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아이의 명치끝에 장침을 놓자, 한 시간 가량 안정을 취한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씩씩하게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엄마가 울면서 그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라신이 선생님을 우리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치료할 때는 통역사가 옆에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통역사가 환자에게 통역해 주는 동안 치료방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과 말은 안 통했지만, 성실한 의술을 사랑의 마음으로 전하였습니다.

 

 그곳의 전통의학은 물리요법이 위주가 되어 숯치료와 물치료 그리고약초 연기치료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물치료는 물속에서 디스크 환자의 척추를 만지는 것으로, 특이한 물리요법이었습니다.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한국에서 가져간 벌의 독인 봉독으로 치료하였습니다.
 봉독치료를 할 때,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인과 외국인의 체질이 달라서인지 한국인은 침 맞은 부위가 금방 부어오르는데, 그들은 피부에 별다른 반응이 없어 매일 시술할 수 있었습니다.

 

 바다가 없는 내륙지역이라 해산물이 부족하여 요오드 결핍으로 갑상선 질 환자들이 증가했지만 약품이 없었습니다. 구소련 시절에는 식품에 요오드를 첨가하여 섭취해 왔었으나 연방 해체 후 요오드 부족현상이 심각했습니다.
 불쌍한 그들에게 빨간 소독약인 소위 머큐로크롬은 만병통치약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빈민촌의 엄마가 자기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울면서 순서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병원입구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요오드 성분이 들어있는 옥도정기를 달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자기 동네 아이가 상처가 나서 옥도정기를 발랐는데 나았고, 배가 아플 때도 나았다며 제발 옥도정기를 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맨 윗쪽에 위치한 카라칼팍스탄 누크스 한방 진료소를 찾아 순회 진료 및 이동 진료를 실시하였습니다.

 

그가 거주하던 타슈켄트에서 1,200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는 누크스에서 갈 때나 돌아올 때는 항상 마음이 짠해서 발걸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든 아랄해는 바다의 염도를 적절히 유지하였는데, 소비에트연방시절 댐을 건설하여 아랄해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을 목화밭으로 비틀었기에 아랄 해에서는 소금꽃만 날렸고 그들의 짜디 짠 생활은 처참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인 리뾰시카나밀빵 하나를 물에 풀어 끓여서 다섯 식구가 한 끼니를 때우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여름에는 신도 안 신고 너나 할 것 없이 팬티 한 장 달랑 걸치고 돌아다녔습니다. 순회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숙소 문 앞에 모여들어 그에게 제발 타슈켄트로 데려가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월급으로 한국 돈 2,000~3,000원만 줘도 된다고 하였고, 어떤 아이 엄마는 자기 아들을 그냥 데리고 가서 심부름시키고 밥만 먹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른조차도 월급은 필요 없으니 문지기라도 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너무나 불쌍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5년에 걸쳐 환자들을 보면서 환자의 체격과 말투와 의복을 한번 보고서 어느 민족인지 그리고 민족의 음식습관에 따라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가난한 우즈베키스탄 할머니가 4번 이상 재사용한 꼬질꼬질한 검은 비닐봉지에 버터 대신 양 기름을 사용해 만든 빵을 감사하게 그는 받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나 올 때의 우즈베키스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봉사활동을 마치고 이제는 돌아와 대전의 어느 한의원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파견의사활동에 대한 여러 번의 텔레비전 출연요청에 대하여 정중히 거절하였고, 당연히 할 일을 하였다고 오히려 그런 시간을 갖게 된 것에 대하여 고마워할 뿐이었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그때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합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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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페루의 슈바이처  김일경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남아메리카 중부 태평양 연안의 나라. 위대한 잉카제국을 탄생시킨 페루(Peru).

페루는 아메리카 남부에서 유일하게 고대 문화유산을 꽃피웠습니다.

1532년 에스파냐에 정복되었다가 1824년 독립하였습니다. 스페인의 가혹한 폭정에 분노하여 1780년 농민반란을 일으켰던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의 이야기를 주제로,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가 된다던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라는 가요는 안데스인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철새는 날아가고>라는 엉뚱한 내용으로 소개되었지만, 페루하면 잉카문명보다 이 노래가 먼저 떠오릅니다.

지금도 서울의 어느 지하철 공간을 총총 걸음하다 보면 인디오 전통복장인 숄과 판초를 입은 페루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연주하는 안데스 전통악기 께나와 싼뽀니아의 경쾌하면서도 비장한 음률에 삭막한 도시인의 심사가 시나브로 촉촉해집니다.

 

1935년에 태어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환갑의 나이로 1995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페루로 간 한국인이 있습니다. 

 

치과의사 김일경. 

 그는 5년간 꼬모스 제2 의료센터에서 근무하였습니다.

 

1996년 KOICA에 보냈던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총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페루 리마 꼬모스 제2병원에 근무하는 정부파견 치과의사 김일경입니다.

 

   세계 많은 나라에 지원하시느라고 노고가 많을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간혹 이곳 페루에 대하여 사정을 잘 파악하시겠지만, 저로서는 근무하면서 느낀 점을 총재님께 말씀드리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리마에서 북쪽을 향하여 약 1시간정도 벗어나면 시내와는 전혀 달리한 빈민촌이 눈에 들어오고, 국도라고 하지만 소규모 시장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복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도로입니다.

  이곳 제2병원 꼬모스는 신흥도시로서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하여 다소 위험하지만 근무처에 들어서면 우리 대한민국 정부의 고마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병원건물이 있고 모든 장비, 기계 등 KOICA에서 보내주신 시설에 제 자신도 놀랄 정도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고 이곳 원주민들은 저만 보면 감사한마음을 몸짓으로 표시하곤 합니다.

 

  이곳 페루 리마에는 일 년에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아 나무 잎새들은 먼지로 더더기를 입은 것처럼 모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이슬비가 내리는데 반가워서 밖으로 나가 비를 맞고자 하면 얼굴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은 콕콕 찌르는 듯한 매서운 감이 있어서 원주민들에게 물으면 잉카문명의 종식의 눈물비라고들 하여 더더욱 마음 쓸쓸하게 합니다. 


 

 

 

 

 

 

 

 

 

 

 

 

 

 

 

 

그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페루의 아픔을 치료하였습니다.

 

 연평균 치과진료인원이 약 4,200여 명이었으며 지역주민 구강위생 프로그램을 실시하였고, 현지 의료진에 대한 선진치과의료 기술을 전수하였으며, 한국과 페루 의료협력사업의 현장관리 및 중간역할 그리고 국위선양 및 민간 외교사절로서의 양국간 관계증진에 기여하였습니다.


 사회사업활동에 참여하여 사회봉사와 격지 및 오지주민 보건상태 개선 등을 목적으로 한 NGO단체인 HAPECO(Humanitario Amistad Peru y Corea)의 창립멤버였고, 그 활동의 결실로서 설립된 리마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지카마르카 자선병원에서 원주민 의료진과 협조하여 진료단을 구성, 순번제로 주 2회 진료봉사를 수행하였습니다.

 

 마침내 꼬모스 관내 30여 개 보건소 중에서 수년째 진료실적 1위를 고수하여 페루 보건청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오지의 주민을 찾아 갈 때는 따로 진료소가 없어서 타고 간 소형트럭 짐 칸에서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번듯한 진료실은 그에게 사치였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꼬모스의 한 주민은 갓 태어난 자신의 딸의 이름을 이 지역에 병원을 지어준 한국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덕실’이라는 한국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였습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병원에 초대하여 유모차 등 선물을 전달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이 병원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지으려고 대사관에 이름에 대해 문의하는 등 한동안 한국 붐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한국과 페루 사이의 비자 면제 협정으로 한국인 범법자들의 무분별한 유입에 따른 사고와 그동안 페루에 진출했던 거친 한국선원들에게 시달려왔던 주민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결핵 전담 진료실을 조성하였습니다. 전염성이 강한 활동성 결핵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매일 일반 환자 및 감수성이 높은 소아환자들과 함께 같은 건물에서 진료를 받아 감염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1998년 소규모 프로젝트 사업비 전액을 별도 진료실 건축에 지원하였습니다.  이후로 결핵환자들은 따로 진료를 받음으로써 일반 환자들의 감염 위험성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년 크리스마스 파티 및 산타할아버지 행사에는 병원직원들 뿐만 아니라 동포들을 초대하여 병원직원 자녀 및 한인자녀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양국간의 우의를 다졌습니다.

 

 1963년 한국과 국교를 맺은 페루에 남다른 애정이 깊었던 그는 여러 가지 개선점을 제시합니다.

   최초 파견시 현지 언어에 대한 충분한 연수가 필요하고, 장기 근무자의 경우 전문분야에 대한 재교육 및 연수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국제학회참석 등의 지원이 절실하며, 또한 소외된 환경에서 근무하는 만큼 재충전을 위한 일정시간이 있어야 한다.

 

  특히 KOICA의 지원 사업이나 연수생파견에 대한 추천에 있어서 수혜기관을 페루정부에 일임하여 미국이나 일본 등 기타 선진국의 대량 원조물자에 함께 섞여 우리 측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혜택을 주기보다는, 이왕이면 정부파견의사단과 관련이 있거나 계속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곳에 혜택을 줄 수 있도록 지정하여 조치하는 것이 사후관리도 용이하고 원조 효과 및 연수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의료직은 전문직으로서 직접 현지인 환자들을 오랜 기간 접하여 노하우와 언어능력이 축적되었기에 정년에 관계없이 업무수행능력에 의해 근무연장의 허락여부가 평가되었으면 좋겠다 

 

 

 

 

 

 

 

 

 

 

 

 

 




아래와 같은 그의 건의 사항은 보다 구체적입니다.

   KOICA에서 실시하고 있는 의료협력사업이나 무상원조사업은 국제사회에서 지위향상과 함께 우리 의료기자재 및 국산품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나 기타 선진국의 물량지원에 비하면 원조 규모가 양적으로 열세이다. 따라서 물적 지원만 하는 것보다는 의사, 치과의사, 봉사단원 등 인적자원의 지원을 통해 협력사업의 사후관리 및 원조효과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홍보효과 역시 극대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꼬모스 제2 한국 · 페루 의료센터에는 정부차원에서 건축된 병원 본 건물 외에 1994년 개원당시 한인들의 모금으로 건축된 한인의료진을 위한 별도 진료병동이 유지되고 있다. 또한 이 진료병동에는 KOICA에서 기증형식으로 원조한 치과용 의자(Unit Chair) 및 치과 X-Ray 장비를 비롯한 고가의 각종 치과장비가 설치되어, 지난 5년간 현지의 인근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한인사회에도 양질의 치과진료를 제공하여 많은 호평을 받아왔다.

 단순한 의료협력의 차원을 떠나서 어렵게 마련된 이러한 진료병동, 의료시설 유지관리차원에서도 후임 의료진의 배치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페루정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많은 어려움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따라서 이를 위해 가난퇴치, 질병퇴치, 거리아동 돕기 등을 목표로 설립된, 현지의 자생적인 민간단체 또는 NGO(비정부 기구)의 많은 역할이 있다. 이에 대해서 현지 사무소나 공관을 통한 적절한 평가를 통해 지원이 가능하면 좋겠다.

 

  현지 NGO에 대한 지원은 대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은 의욕들을 가지고 일을 하므로, 사전평가와 사후관리만 잘한다면 소규모 지원으로도 효율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치과 의사 김일경.

평화를 사랑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남들은 개업 일선에서 은퇴 할 나이에 젊은이도 하기 힘든 결정을 하고 페루로 떠난 그에게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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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카자흐스탄의 허준  김동선

  알마티의 하늘 아래

 

 

 

 







 

 

 

 그에게 슬픈 역사가 담긴 어느 고려인 동포의 아픔이 찾아옵니다.

바쁜 일정으로 눈코 뜰 새 없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국대사관의 영사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한 환자를 부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싹 마른 노인이었습니다. 처음 본 순간, 김동선은 그를 꼭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석도인.
경남 합천군 용주면 버드실마을이 고향이었습니다.


일제강점하, 막 결혼한 그의 형에게 징병통지서가 날아들었고, 집은 한마디로 초상집이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형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머나먼 전장 사할린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사할린에서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카자흐스탄까지 떠돌았습니다.

 

그는 고향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한국에서 온 청년 한의사 김동선의 옷자락에 매달렸습니다.

 

“내 고향에 좀 데려다 달라."

 

여느 동포와 다른 정확한 발음이었습니다. 한시도 고향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김동선은 결심하였습니다.

 

바쁜 한국 출장길이었지만, 합천군 용주면 사무소 호적계를 찾았고, 수소문 끝에 마침내 그의 조카를 찾아냈습니다.

부산에서 온 그의 조카는 아버지 대신 사할린으로 떠난 작은아버지를 가물가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온 김동선은 이 사실을 알렸고, 조카들의 사진도 보여주고, 통화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후로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는 매일 김동선을 찾아와 아이처럼 졸랐습니다.

결국 한국의 조카들이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조카와 마지막으로 통화할 때 울먹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향에 가고 싶은데, 안되냐…….”

거기에 물러 설 김동선이 아니었습니다.
합천군수에게 간곡한 편지를 썼습니다.

비행기표는 내가 부담할 터이니 고향에서 그가 체류하는 동안 보살펴 줄 수 없겠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2월에 편지를 썼는데 3월이 가고 4월이 다 지나가도 합천군에서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 날은 5월 5일이었습니다.
우연히 한국대사관에 들렀더니, 어느 직원이 합천군수로부터 온 행정우편을 김동선에게 전하였습니다.

급히 뜯어보았습니다. 언제라도 환영이니, 담당자와 상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1997년 3월 합천군에서 발송된 편지였는데, 외교행낭 속에 묻혀 있다가 그제야 빛을 본 것입니다.

 

김동선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하였습니다.

급히 그의 집으로 달려가 보니 러시아인 부인에게서 낳은 14살 아들이 아버지 주검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김동선은 장례식만이라도 한국식으로 치러 드리고 싶었습니다.

관에 빨간 천을 씌우고 붓이 없으니 굵은 매직으로 명정을 썼습니다.


‘대한민국 석도인지구’


그날은 5월인데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진눈깨비가 하염없이 날렸습니다.

 

 

한국 · 카자흐스탄 친선병원 의사들과 함께(맨 오른쪽 김동선)

 

 

김동선은 1964년에 태어나, 1989년 대구한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 광산 김씨 종택인 쌍벽당이 그가 자란 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보수적이었지만, 그는 외국을 동경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개방적인 성격이었습니다.

 특히 역사학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청년이었습니다.

 

 

대학시절에 대구 비산동에서 주말의료봉사를 했습니다.

봉사라기보다 모순을 개혁하고 싶다는 갈망이었고, 올 곧은 선비정신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구에서 한의원을 개원하여 부도 많이 쌓았습니다.

 

 

1994년 여름. 한국에서는 약사법분쟁이 가열되었습니다.그의 고민은 더 심해졌고, 출구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를 모집한다는 신문 공고를 보는 순간, 운명적으로 ‘내 길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교사로 근무하던 아내에게 그 뜻을 이야기하자 아내는 ‘3일의 시간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3일 후, ‘당신이 원한다면 하자.’고 대답하였습니다.

 

1995년 출국 준비를 분주하게 서두르고 있었는데, 건강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지만, 장례를 마치고 예정대로 카자흐스탄(Kazakhstan) 알마티 국립아카데미학술원병원에 부임하였습니다.  1999년까지 알마티 제5시립병원에서 이전 근무하다가 2000년 귀국하였습니다.

 

유목민의 후손인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의 인구는 약 150만 명 정도이며 이중 동포는 2만 명가량입니다.

1993년과 1994년에 한의사들이 알마티를 방문해 무료진료봉사활동을 펼쳤고, 동포 등 현지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카자흐스탄정부는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의사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했으며, 그동안 인도적인 차원에서 의사들을 해외에 파견해 온 KOICA가 그 요청을 받아들여 한의사 김동선이 파견되었던 것입니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 북부에 위치하며, 카스피해에서 몽골 접경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입니다. 1991년 구소련의 해체로 카자흐스탄공화국으로 독립했습니다. 약 120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로 종교는 이슬람교와 러시아정교가 다수를 차지합니다.

 

정국 불안으로 치안이 취약하여 외국인에 대한 신변안전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고, 특히 돈을 많이 가지고 다닌다는 한국인에 대한 테러가 빈번하였습니다. 생계형 범죄로 의사뿐만 아니라 의사가족들의 안전도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도둑이 들어 비싼 의료기구들을 가져가는 바람에 진료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가족들과 입주한 집은 대학기숙사로 부엌은 밖에 있었습니다. 든 것이 한국과 달랐습니다.

 

아내가 우유를 사러 다녔지만 구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그들이 손으로 주물럭주물럭 짜서 널브러진 그릇에다 파는 생우유를 사다 먹었습니다.  그리고 뭉텅이 고기를 사다가 뼈를 발라 얼렸다가 썰어서 삼겹살을 구우며 가족의 건강을 챙겼습니다.

아내는 지금도 그 시절을 그립다고 하는 현모양처입니다.


그는 진료에 정진하였습니다.

 

임상 경험은 짧지만 의술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아직 젊은 만큼 봉사정신을 발휘하여 한의학을 카자흐스탄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에 처음으로 파견된 정부파견의사로서 자부심과 성실함을 한시도 잃지 않았습니다.

 

진료실의 난방이 원활하지 못하여 겨울철 환자 치료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매 분기 심장질환, 요통질환, 각종 관절계질환, 부인과질환 등 2,200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현지 환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시술했던 금연침에 대한 효과가 입소문을 타게 되어 이에 대한 요청이 급증하여 하루 5~6명 정도의 금연침 시술을 하였습니다. 구스따나이, 끄즐오르다, 우스토페, 아띠라우, 우스찌까메노고로스 등지로 년 3~4회 순회 진료를 하였습니다.

 

 

당시 식량이 부족하여 굶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먹는 네모난 빵을 많이 사 놓고 치료를 받고서 하나씩 가져가도록 하였는데, 빵 때문에 치료받으러 오는 환자도 많았습니다.

 

카자흐스탄인과 터키인 그리고 강제 이주된 고려인에 이르기까지 100여 민족으로 구성된 카자흐스탄은 중국과 인접했기 때문인지 침술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으나 말이 잘 안 통해 진료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색을 보고 진맥과 청진기 등을 통해 환자를 진단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는데, 유능한 고려인 간호사 김옥남의 도움으로 해결했습니다.

 

한약재 등 필요한 약재는 한국에서 왔으며, 기본적인 진료장비와 함께 KOICA에서 소규모 프로젝트 지원비로 연간 만 달러를 지원해주었습니다.그밖에 대구한의대와 대구시한의사회 그리고 대한한의사협회에서도 지원해줘 진료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몰려드는 환자들을 다 돌보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알마티 제5병원에서는 의과대학생을 대상으로 한방을 특강하였고, 보건성 및 정부 관계자들의 환자진료에 관한 요청이 쇄도할 정도로 호응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한의학》이라는 서적을 영어로 옮기고 러시아어로 편역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는 1996년 1월 폐결핵을 진단받습니다. 

 

그곳에서 겨울에 할 수 있는 운동은 스키가 거의 유일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스키장에 가보지 않았는데, 스키를 배워 겨울철 건강유지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스키장에서 심하게 넘어졌는데, 왼쪽 가슴이 아파 며칠 후 엑스레이를 촬영하였습니다. 결과는 반대쪽인 오른쪽 폐에 결핵이 발견되었습니다.

 

하루에 120~13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며 무리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으로 후송되어 여러 가지 검사를 실시하였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3개월 정도 휴식하라고 권고 받았지만, 석달치 약을 챙겨가지고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주일 정도 쉬었지만, 밀려드는 환자를 보고 자신의 건강을 챙길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른쪽 가슴에 맺혀있던 망울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주위의 강력한 권유로 결핵요양원으로 가야만 하였습니다.

알프스처럼 풍광 좋은 바라보예 옥제트페스요양원에서 하루 종일 아무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환자들과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들과 정을 나누며 ‘세상은 참 묘한 것이다. 내가 이런 곳에서 이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 이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는구나’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인정의 나눔과 생명의 섬김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습니다.  뜨거운 감동이 번졌습니다. 한의사로서의 사명감도 느꼈습니다.

한 달 보름간의 요양이 끝나고 결핵도 완치되었습니다.

 

 

 

그의 성실하면서 정확한 의술은 소문에 소문을 탔습니다.

1997년 8월 12일 어느 중앙 일간지에 실린 그의 기사내용을 간추려 봅니다.

  부와 명예를 버리고 인술 3년째인 카자흐스탄 한의사 김동선씨.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에 사는 미하일로바 지나이다 할머니는 요즘 기분이 아주 좋다. 수년 동안 시달리던 원인모를 두통이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온갖 병원을 다 돌아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병원에선 간단한 진료만 하고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몇 달 전 이웃 사람이 한국에서 온 의사가 용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의사가 있다는 국립과학원 부설병원을 찾았다.

  말도 없이 손목을 잡고 뭔가를 생각하던 의사는 몸 이곳저곳에 가는 바늘을 꽂기만 했다.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기를 며칠, 이제 두통은 잊고 지낸다


  한국국제협력단의 해외파견 의료단원으로 지난 1995년 1월 이곳에 온 한의사 김동선씨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처음 진료를 시작할때 그를 찾는 환자는 하루 1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고국에서의 정신없던 하루를 생각하면 왜 이역만리 먼 이곳까지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감쪽같이 병을 고쳐내는 명의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갈수록 환자들이 늘어나 올해 초에는 하루 130여 명의 환자를 돌보기도 했다.  초인적인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최근 들어서야 진료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환자수를 하루 30여 명으로 제한해 그런대로 환자를 차근차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정부파견한의사 임무가 끝난 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갑니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에게 ‘독또르 김’이라 불리던, 그는 언제나 KOICA의 존재에 대하여 뜨거운 갈채를 보냅니다.
만약 정부파견한의사제도가 계속 시행된다면, 그는 언제라도 다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동아일보(1995.2.2일자) 한의사 김동선 관련 기사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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