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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TV&영화 속 건강

최불암과 육영수, 그리고 담배 소송

 

 

 

 

     배우 최불암 선생과의 술자리는 언제나 유쾌하다. 술을 참 맛있게, 그리고 정도껏 먹기 때문에 함께 하는 사람이 즐겁다.

     술잔을 나누는 틈틈이 펼치는 이야기의 주제는 대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기쁨에 관한 것이다. 매우 교훈적인 메시지를

     지니고 있음에도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구수해서 지루한 줄 모르고 듣게 된다.

 

 

 

 

 

40여년전, '수사반장' 박 반장이 금연한 이유

 

그는 술은 즐기지만, 담배는 피지 않는다. ‘좋은나라 운동본부’라는 TV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금연을 실천했다고 했다. 그도 한때는 흡연 애호가였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들려준 담배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 내가 ‘수사반장’(드라마)에서 박 반장 역할을 할 때 30대였거든. 젊은 나이에 반장 역할을 하며, 뭔가 수사반장의 격에 맞는 그럴듯한 것을 고안했는데, 그게 코트(트렌치코트)와 하얀 손수건이야. 그리고 담배 네 개비를 피워 무는 거였지.”

 

그에 따르면, 흰 손수건은 범인을 용서하는 맑은 심성을 상징했다. 담배는 극의 상황 전환용으로 피웠다고 한다. 극의 도입부 때, 사건이 풀리지 않을 때, 범인을 잡았을 때, 마지막으로 범행동기가 밝혀질 때 등 네 번이었다. 

 

“그런데 박 반장이 담배를 피지 않게 되는 일이 벌어져. 어느 날 저녁에 집에 있는데, 아내가 청와대 부속실에서 전화가 왔다며 수화기를 바꿔주더라고. 도대체 누굴까, 하며 전화를 받았지. ‘저 육영수예요. 안녕하셨어요, 최불암씨.’ 저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 ”

 

뜻밖에 전화를 걸어온 육 여사는 친근하고도 차분한 특유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저 양반(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수사반장’을 보다가 박 반장이 담배를 물기만 하면 따라서 피워요. 저 양반이  담배 피우는 건 괜찮은데, 국민들도 따라 피울 테니까 담배 피우는 장면을 좀 줄이는 게 어떨까요.”

 

그 뒤 ‘수사반장’ 에서는 박 반장의 흡연 모습이 사라졌다. 그런 일이 벌어진 게 1972년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건보공단 담배소송, 국민의 참된 건강을 위한 첫걸음

 

건강보험공단이 담배 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득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흡연으로 인해 좀먹는 국민들의 건강이 걱정돼서 TV 연속극의 주인공 배우에게까지 직접 전화를 걸어서 흡연 장면 자제를 당부한 영부인. 그 간절한 마음이 40여년의 세월을 건너서 오롯이 전해져 온다. 국민건강을 책임지는 건보공단의 담배 소송 결심도 그 절실함에서 맥락을 함께 한다.

 

담배 회사를 상대로 한 이번 소송 결정 과정에서 관련 소관 부처인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가 반대했다고 한다. 기재부가 반대하는 것은 담배 회사인 KT&G의 지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부는 “부담스럽다”는 이유를 댔다고 하는데, 정부 부처 중에 ‘갑 중의 갑’인 기재부에 맞서기가 어려워서일 것이다. 

 

일각에서는 건보가 이길 수 없는 소송을 제기하며 쓸 데 없는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들은 소송비를 낭비해 건보 재정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소송비 낭비를 걱정하는 것은 말 그대로 기우에 불과하다. 소송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흡연 경각심이 높아지면 그로부터 얻어지는 국민 건강 증진 효과는 실로 막대할 것이다. 승·패소의 문제는 이 시점에서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앞으로 법리 다툼이 치열하게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흡연자 개인이 낸 소송에서 담배 회사에 진 것은 흡연이 질환에 미치는 직접적 관계를 입증하지 못한 탓이었다. 건보는 자료를 철저히 준비해놨다고 한다. 흡연이 암 등 질환에 미치는 인과 관계를 분명히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담배 회사는 “흡연자들이 자유 의지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묻는 것은 억울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건보 측은 “담배 회사는 담배의 중독성을 조장해 흡연자로 하여금 쉽게 금연하지 못하게 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번 소송의 핵심은 흡연 폐해로 인해 국민 건강을 해치는 것에 대한 배상금을 담배회사가 물어내는 것이다. 담배회사는 건강증진기금을 내고 있는데 흡연 피해 책임을 또 묻는 것은 이중 과세라는 입장이지만, 건보 측은 흡연자가 담배를 구입할 때 부담하는 비용을 담배회사가 걷어서 대신 내고 있을 뿐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이번 소송을 이끌고 있는 건보공단 김종대 이사장의 블로그 ‘김종대의 건강보험 공부방’을 들여다보면 믿음이 간다. 담배소송에 대한 당위성과 해외 사례 등을 연재하며 소송에 철저하게 대비해 온 것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흡연 강요의 역사에 획기적 전기 마련

 

물론 이번 싸움이 쉽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도 담배 회사가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내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담배 회사가 막강한 자금과 조직을 갖추고 소송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쓴 책 ‘담배의 사회문화사’를 보면 담배회사들의 흡연 마케팅이 역사적으로 집요한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담배 회사들은 정부 권력의 비호 아래 흡연을 촉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여성들에게 흡연을 권하기 위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할 권리가 있다’는 페미니즘 시위를 이용할 정도였다. 

 

담배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조선 광해군 때였는데, 이후 담배를 더 많이 피우게 하기 위한 공급자들의 마케팅은 교묘하고도 줄기차게 이뤄졌다. 이 책에서 열거하는 흡연 촉진 역사의 일부만 들춰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담배 회사가 “흡연은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이 얼마나 궤변인지를. 

 

지하다시피 담배 소송은 흡연 강요의 역사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흡연 습관 강압에 대한 독립의 깃발을 세우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과 캐나다 등에 이어 한국이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국민의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공공기관이 나선 것은 초유의 일이어서 새 장을 여는 의미가 각별하다.  

 

새 역사를 여는 일이 항용 그렇듯 거칠고 힘든, 무엇보다 시간이 걸리는 싸움이 될 것이다.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가 필요한 이유다. 새삼 궁금해진다. 이미 40여 년 전에 흡연이 국민 건강에 미치는 해악을 직시하고 있었던 육영수 여사가 담배 소송 소식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글 / 문화일보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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