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많은 분이 일상 속에서 벗어나 쉽게 자연과 접촉할 수 있는 취미활동으로 플라워 레슨을 많이 받고 있는데요. 


비용이 부담되거나 작품을 만드는 것이 어려워 보여서 선뜻 도전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초보자들도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리스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안개꽃 리스 만들기 재료



안개꽃 한 단, 리스 틀, 글루건, 꽃 가위, 철사, 마 끈


꽃과 철사, 리스틀 등은 꽃시장에서, 글루건이나 기타 부재료들은 1,000원 샵 같은 곳에서 저렴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사진 속 안개꽃은 각각 한 단입니다.


먼저 리스 틀에 붙일 꽃 뭉치를 만들어야 하는데요.


1. 꽃 뭉치 만들기



먼저 위 사진과 같이 꽃가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나누어 준 뒤, 꽃가지를 모아 한 다발을 만듭니다. 




그 뒤 철사로 묶어주면 되는데 꽃이 마르면 부피가 줄어들어 풀어질 수 있으니 가능한 세게 두세 번 정도 꼬아서 묶습니다. 남은 철사와 꽃가지는 적당한 길이로 잘라주면 됩니다.



2. 글루건으로 리스 틀에 붙이기



이제 한 단을 다 작업했으면 리스 틀에 꽃 뭉치를 붙여주어야 하는데요. 




꽃 뭉치 뒤에 글루건으로 글루를 바른 뒤 리스 틀에 붙이면 되는데 붙이면서 빈 곳이 생기면 채워나가는 식으로 붙이면 됩니다.




리스틀 세 가지 사이즈 중 가장 큰 것으로 노란 안개꽃 리스를 만들었더니 한 단을 다 썼지만, 여유분이 없어서 풍성함이 덜하네요. 


분홍 안개꽃 한 단으로는 중간 사이즈와 가장 작은 사이즈 두 가지를 만들었는데 꽃이 좀 남아서 리스 만들 때 꽃 양 참고하시길 바라요.



3. 리스 걸이 끈 달기 



드디어 마 끈을 쓸 차례입니다. 리스 틀 가지 사이에 두 지점을 정해 사진과 같이 묶어주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묶어서 벽에 걸어주면 되는데 레이스 리본 등이 있다면 리스에 달아주어도 예쁩니다. 




다 완성된 안개꽃 리스입니다. 안개꽃이 색도 다양하고 말라도 그 모습 그대로 유지돼서 집에서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하기 좋은데요.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은 일거양득인 리스 만들기 활동으로 지친 마음과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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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강천사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좋을 지인이 함께할 것 같은 소박하고 편안한 이 차 마시는 자리의 티 세트는 빛의 색채를 중요시했던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의 대표 화가 모네의 그림이다.


클로드 모네 / 티 세트/1872/출처: Wikimedia


현대에서도 건강에 관심이 커지고 차(茶)의 효능이 과학적으로 증명되면서 건강을 위해 차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한 잔의 차를 통해 얻는 휴식과 정신적 여유 때문에 행복한 마음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차는 즐거움의 목록이며, ‘현대문화의 아이콘’으로 불리기도 한다. 


차(茶)는 차나무의 어린잎을 달이거나 우려낸 물을 말한다. 우리 주변의 차는 모두 다 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엄밀히 말하면 ‘카멜리아 시넨시스’ 가 아닌 것에서 만들어진 차는 차가 아닌 대용 차이다. 차는 한 가지 식물, 중국의 동백나무인 ‘카멜리아 시넨시스’잎을 이용한 차만 차인 것이다. 


‘카멜리아 시넨시스’잎


차(茶)는 발효 정도에 따라 6대 차로 구분되는데, ‘녹차, 백차, 황차, 청차(우롱차), 홍차, 흑차(보이차)’이다. 


이 중에서 홍차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어 음용되는 차로서 차 소비량의 80%에 이른다. 홍차의 주요 산지는 중국의 기문과 인도의 다즐링, 아쌈, 닐기리 지역 그리고 스리랑카의 우바, 캔디 지역과 케냐, 탄자니아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국가로 그중에서 ‘다즐링’(인도), ‘우바’(스리랑카), ‘기문’(중국)은 세계 3대 홍차에 속한다. 


세계인이 선호하는 차이지만, 이름은 동. 서양이 다르게 부른다. 동양에서는 우려낸 수색이 붉은색에 가까워 홍차(紅茶)라고 부르나, 서양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해 가는 동안 습하고 높은 온도 때문에 갈색의 찻잎이 검은색으로 변해 블랙 티(Black Tea)라고 부른다. 서양에서 래드 티(red tea)는 루이보스 차(rooibos tea)를 의미한다


캐서린 왕비/출처: Wikimedia


차의 시작은 중국이지만,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으로 홍차가 소개되었다. 세계 최대의 홍차 소비국이 된 영국이 홍차 문화를 형성하게 된 동기를 만든 사람은 1662년 영국 국왕 찰스 2세와 결혼한 캐서린 포르투갈 공주이다. 


캐서린 공주는 차와 설탕을 가져왔고, 포르투갈에서 했던 것처럼 오후에 티타임을 가지면서 영국에서 차가 급속히 전파되었다. 


 

The Cup of Tea/1879/Metropolitan Museum of Art           mary cassatt/tea/1880/ Museum of Fine Arts, Boston                    


차를 마시는 모습을 그린 메리 카사트(mary cassatt)는 미국의 인상주의 여류화가로, 초기 생애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다. 인상주의의 대가 드가를 만나 친분을 쌓았고, 인상파 화가들과 전시회를 했으며, 여인들의 일상을 즐겨 그렸다. 


그녀의 그림처럼 혼자이든 다른 사람과 있든, 언제 어느 때라도 좋은 것이 티 타임이다. 


홍차는 항산화 작용과 함께,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고 피로 해소에 좋아 어떤 사람들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는 차라고 할 수 있다. 홍차는 녹차보다 향을 오래가고 녹차와 달리 생강, 우유, 레몬 등을 가미해서 마셔도 홍차의 원래 맛에 손상이 가지 않아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홍차를 배합에 따라 분류해 보면, 단일 종류의 찻잎만을 사용한 스트레이트 티(Straight tea), 두 종류 이상의 찻잎을 블렌드(배합)하여 제조한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프린스 오브 웨일스 등의 블렌디드 티(Blended tea), 향신료(계피, 정향 등)나 과일(망고, 사과 등), 또는 꽃잎 같은 첨가물로 향을 낸 얼 그레이 홍차 등을 가리키는 플레이버리 티(Flavoury or flavoured tea. 향 첨가 차)로 분류할 수 있다.


미 보스턴 차 사건을 그린 석판화/나다니엘 쿠리에/1846/출처: Wikimedia


16세기 영국인들은 알코올 소비가 하루 1인당 3ℓ 기록이 나올 정도로 심했는데, 홍차를 마심으로써 알코올을 식탁에서 밀어내었다. 18세기 초 홍차의 인기가 점점 높아져 영국은 홍차의 최대 소비 국가가 되었고, 새로운 차 문화가 생겨났다. 그러나 ‘보스턴 차 사건’과 ‘아편전쟁’의 큰 사건도 겪었다.


‘보스턴 차 사건(1773)’은 영국 본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한 미국의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 위장하여 배에 몰래 들어가서 차(茶) 342상자를 바다에 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미국 독립 전쟁을 일으켰고 영국에게서 독립하게 되었다.


‘아편전쟁’(1839~1842)은 영국 왕 조지 3세가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아편을 중국에 팔게 되었다. 많은 양의 아편 유입으로 중국의 반발이 있어 두 나라 간 전쟁이 일어났으나,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중국은 불평등 조약인 난징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으며, 서구 열강에게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차 수입의 한계를 느낀 영국은 인도 아쌈(Assam) 지역에 대규모의 다원을 개척하였고, 영국은 홍차를 전 세계에 정착시켰다. 영국은 차뿐 아니라 도자기도 함께 발전시켜 본차이나 등 도자기로도 유명한 나라가 되었다.


차가 일상이 된 영국인들은 다양한 티 타임을 가진다.


19세기 영국에서는 하루 2회 식사가 일반적이어서 영국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마시는 breakfast tea부터 시작해서 afternoon tea, high tea 등 잠들기 전까지 티 타임을 가졌다.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는 아침을 먹고 공복을 참지 못한 후작부인 안나 마리아가 시녀가 들고 온 차와 함께 가벼운 식사를 한 것이 시초다. 다양한 티타임은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 차 문화로 자리 잡았다.


티타임/1911/ 판지 위에 유채/ 필라델피아 미술관


이 작품은 프랑스 입체주의 화가 ‘장 메쳉제’가 그린 ‘티 타임’이다. 찻잔을 기울이며 앉아 있는 여인을 정면과 측면 등 여러 각도에서 본 후 다시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입체주의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리는 작품이다. 1911년 매년 가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며 진보적인 제작을 목표로 조직된 젊은 미술가들의 전시회인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 처음 발표되었다. 


우리는 입체파 화가 하면 피카소와 브라크를 떠올리고 ‘장 메쳉제’의 이름이 낯설지만,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에는 ‘장 메챙제’의 명성이 아주 높았다고 전한다. ‘장 메쳉제는 동료 화가 ’글레이즈‘와 논문 ‘입체주의에 관하여(Du Cubisme)’를 발표한 미술이론가로도 유명하다.



영국인에게 차는 “집에서 즐기는 소풍과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홍차는 영국인의 생활에 잘 스며들었고 삶을 변화시켰다. 정겨운 티타임을 통해 다양하고 윤택한 자신만의 풍경들을 화려하게 꽃 피워 내었다.


가끔 커피보다 홍차 잎 한 스푼으로 마음의 쉼터를 만드는 티타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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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강천사




‘파스칼’은 “일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의 선택이다. 그런데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우연이다.”라고 했다. 


미술계에서도 잘 나가던 직업을 버리고 화가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 있다. 1866년 러시아 태생으로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전공한 법학자였던 그는 한 미술전시회에 참석한 후 자신의 직업을 바꾸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미술이론가이며, 추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칸딘스키’의 이야기다. 


모네/건초더미, 해잘녘 /캔버스 유채/1891/시카고 예술재단


1896년 모스크바의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한 칸딘스키는 어느 작품 앞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이제껏 보았던 사실적인 형체가 아닌 시간과 빛의 변화에 따라 물체의 색을 순식간에 표현한 모네의 연작들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에 분노의 마음도 일었다. 


“자연의 법칙과 조화 속에 그림을 그리고 생활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운명을 갈망하지 않는다”는 모네가 그린 작품은 들판에 쌓아둔 ‘건초더미’였다. 이 그림의 주제는 나중에 작품 목록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 일은 칸딘스키의 기억 속에 충격으로 오랫동안 남아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 후 그는 1896년 모스크바 대학교 교수직을 반납하고 독일의 아즈베 미술학교, 뮌헨 왕립 미술학교에서 전문적인 미술수업을 받았다. 그는 당시 활동했던 화가들의 화풍을 두루 익히고 청기사파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독일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사물을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대신 이미지를 추상화했고 1910년 최초의 추상화를 발표하게 되면서 추상화의 선구자, 예술 이론가로 20C 주요 예술가로 불리게 되었다. 



잘 나가는 직업을 어떻게 쉽게 바꿀 수 있었을까?


칸딘스키는 그의 회고록에서 모네의 작품을 통해 잠자고 있던 그림에 대한 욕망이 자신에게 숨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칸딘스키/구성8/ 1923년/캔버스에 유채/140X201cm/미국 구겐하임 미술관


칸딘스키는 ‘구성 8’에서 “색채 중 색조는 음색, 색상은 가락, 채도는 음의 크기를 연상시킨다.”라며, 경쾌한 리듬은 굴곡이 큰 선으로, 조용한 리듬은 완만한 선으로 표현했다.


그는 악기마다 독특한 음색이 있는 것처럼 색채도 독특한 느낌을 나타내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알아냈다. 


칸딘스키/인상 Ⅲ/ 1911년/캔버스에 유채/ 뮌헨시민미술관


'인상 Ⅲ'의 부제는 '콘서트'이다. 칸딘스키가 친구인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콘서트에 다녀온 후 그린 작품이다. 쇤베르크는 현대 음악의 거장으로 서양 고전음악의 전통을 파괴하고, 무조(無調) 음악을 창시한 작곡가다. 


자신의 작품을 음악이라고 한 칸딘스키는 회화에서도 음악처럼 선과 색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콘서트에서 들었던 곡을 노란색으로 표현하였다. 


칸딘스키가 44세가 되었을 때 외출에서 작업실로 돌아온 그의 시선을 끈 작품이 있었다. 해 질 녘 내부에서 뿜어 나오는 빛으로 가득한, 색채와 형상이 조화롭게 표현된 이 작품에서 형체가 아닌 색채만으로도 감정이 전달된다는 것을 느꼈다. 이를 통해 물질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거꾸로 보게 된 작품이었는데, 이것은 좀 전에 그렸던 자신의 그림이었다. 똑바로 놓인 그림보다 더 아름답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칸딘스키는 이 대단한 발견을 시작으로 점, 선, 면, 색채의 단순화 과정을 거쳐 기하학적인 추상화를 완성했고 20세기 미술사의 혁명을 이루었다. 


칸딘스키/무제/1910/수채화/ 파리 퐁피두국립현대미술관


칸딘스키는 자신들의 미술이 정신적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추상미술을 진행했지만, 관객들은 난해함에 힘들어할 때가 있다. 현대미술이 불친절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알아보기 힘들었던 모네의 그림에 충격을 받았던 칸딘스키는 일반인들이 추상미술이 어렵다고 투덜거리게 만든 순수 추상의 세계를 연 장본인이 된 것이다.


그는 모네의 작품에서 색과 형체들이 변화하는 것을 집중해서 보았고, 그러한 것들이 잠재된 자신의 예술적 능력으로 밝혀내기를 간절히 바랐고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운명이 카드를 섞고 우리가 승부를 겨룬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칸딘스키가 운명을 선택한 후 그 승부에 열정을 다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훌륭한 작품들을 오래도록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와 좀 더 관심 어린 눈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예술을 창작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대상의 외형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고

그 형태에 내재된 정신을 시각적으로 옮기는 것이다.


"예술가란 자연의 형태를 빌어서 표현한 내적 감정에

자신들의 목적을 실현하고 정신을 키우는 것이다" 

-칸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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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강천사





선물로 받아온 바질 씨앗을 작은 화분에 옮겨 심었다. 5일 정도 지났을까. 모래알 만한 초록의 싹이 ‘톡’하고 터지더니 이후 매일 쑥쑥 자라고 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서 두고 물을 꾸준히 주니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저녁 퇴근 후 베란다 블라인드를 내리며 ‘오늘은 바질이 얼마나 자랐나’ 확인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회색의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색인만큼 그리너리 색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는 사람들이 많다. 비용이나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적은 노력으로 싹이 움트는 것도 볼 수 있다. 



집 안에서 화분을 기르거나 베란다에 ‘미니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도시 외곽으로 떠나 ‘주말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한 창 붐이던 시기가 있었다. 



이것과 비교하면 홈 가드닝은 바로 자신의 집에서 작은 식물을 가꾸는 것만으로도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초보여도 좋다. 최근에는 원예에 자신 없는 사람들을 위해 흙과 씨앗, 화분 등 필요한 것들을 키트로 구성해 판매하는 곳도 생겨났다. 




처음 홈 가드닝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인테리어 열풍이 불면서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으면서 내 집 장만에 부담을 느낀 사람들이 전세나 월세로 주거 형태를 돌리고 있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집을 수리하는 것 대신 ‘셀프 인테리어’를 통해 집 안 작은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초록의 화분이나 디자인 식물 액자 등이 각광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심각해진 미세먼지 문제로 집안 내에서 공기청정에 효과가 있는 화분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스투키

초보자라면 햇빛과 물에 덜 예민한 화분을 골라보자. 최근 공기정화 기능으로 유명해 진 ‘스투키’는 곧게 뻗은 줄기로 공간을 넓어 보이게 한다. 



햇빛을 많이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베란다가 아닌 집 안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산세베리아 종류와 같지만 일반 산세베리아의 3배에 달하는 음이온을 발생하고 냄새 제거와 전자파 차단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조한 환경에도 강하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물을 주면 된다. 잎에 수분을 저장하는 식물이기 때문에 맨눈으로 봤을 때 잎이 쪼그라들면 물이 부족하다는 신호다. 



*벵갈고무나무

농촌진흥청은 실내에 식물을 놓았을 때 미세 먼지를 줄이는 데 벵갈고무나무가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실내에서는 햇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장소에 둬야 한다. 또 환기를 시켜주는 것이 좋다. 화분의 흙이 마르면 물을 흠뻑 주되 자주 줄 필요는 없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흙 상태를 체크하고 물을 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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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강천사






2월이면 떠오르는 그림. 세상에서 가장 많이 불리우는 이름의 화가, 동양인들이 특히 더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 나무'이다. 한쪽 귀를 자르고 권총자살을 한 비운의 천재로 어떤 삶의 확신도 없었던 초라했던 이 화가에게도 잠깐이지만 봄이 환하게 피어 오른 때가 있었다.


1890년 2월. 그가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내적인 고통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그 감정들을 그림으로 표출해내고 있을 때,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동생 테오가 자신의 첫 아기 탄생을 알리면서 형처럼 끈기와 용기를 지닌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이름을 형의 이름으로 지었다고 전해왔다.



<꽃피는 아몬드 나무/ 빈세트 반 고흐/유채/73.5 X 92cm /반 고흐 미술관>



고흐는 생을 마칠 때 까지 668통에 이르는 편지를 주고 받았던 영혼의 동반자이며, 적극적인 후원자인 동생의 편지에 너무나 기뻤다. 한편으로,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조카에게 평탄치 않은 자신의 삶이 전해질까 두려워 거절했으나, 결국은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조카의 방에 걸어줄 그림을 그린다.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며 무한한 사랑을 조카에게 보내고 싶은 고흐는 봄이 오기 전 다른 나무보다 먼저 꽃이 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려 보냈다. 이 작품은 고흐가 그렸던 이전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생명을 의미하는 이 그림에서는 그 당시 고흐를 대변하는 치열한 삶과 깊은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역동적이고 거친 붓자국은 전혀 느낄 수 없고 대체로 부드럽고 평화로운 느낌이다.



              
어느 작가나 마찬가지지만 작가의 삶을 알지 못하면 작품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흐로트 쥔데르트에서 목사와 화상이 많은 집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책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소년으로 자랐다. 그래서인지 고흐가 남긴 편지글을 보면 화가가 되지 않았으면, 작가가 되고도 남는 글 솜씨다.


첫 직장을 헤이그에 있는 삼촌의 미술상에서 시작했다. 20세 때 그는 런던의 사무소로 전근을 갔고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에겐 약혼자가 있어 사랑을 이루지 못했고 그 후에도 실연의 경험이 있다. 네덜란드로 돌아와서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입학을 못하고 정식 학교가 아닌 전도사 양성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보리나주 탄광촌으로 전도하러 갔으나 그 곳에서 '광신' 오해로 전도사직을 발탈 당한다. 되는 일이 제대로 없었던 고흐가 27세에 마지막으로 택한 직업이 화가의 길이다.




<출처: 아를의 붉은포도밭/고흐/1888/푸슈킨 미술관>



그러나 고흐는 생전에 한 작품밖에 팔지 못할 정도로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1888년 아를에서 제작한 <아를의 붉은 포도밭>은 보색관계의 빨강. 청록과 노랑이 함께 표현된 작품으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일하고 있는 농부들의 분주한 모습을 수평선과 호선구도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1890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열린 레벵 전시에 출품했고, 그 곳에서 400프랑에 팔게 된다.




<렘브란트/야경/1642/네덜란드 왕립박물관>


<고흐/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반고흐 미술관>



고흐의 일생 37년 중 그림을 그린 기간은 10년이다. 붓을 들었지만 독학으로 그림에 입문한 고흐는 처음에 17C 바로크시대의 대표화가인 렘브란트와 19C 바르비존 파의 대표화가 밀레의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80년부터 85년까지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시기에는 스스로 농민화가로 부를 만큼 농부. 광부 등 척박한 환경의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인상파와 일본 판화 우끼요에의 영향을 받아 밝고 생기있는 후기의 그림에 비해 초기의 작품들은 전체적인 색감이 어두운 편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감자를 먹는 사람들>로 힘든 하루를 이겨내고 감자를 먹는 농부들을 그렸는데, 땅을 일구어 온 정직한 모습을 강조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색감과 명암이 뚜렷한 기법으로  렘브란트의 <야경>과 비교해보면 분위기가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밀레/1850/보스톤 미술관>


<고흐/1889/해프트 컬렉션>



고흐가 특히 존경한 화가는 농민들의 고달픈 모습을 품위있게 그려낸 밀레였다. 밀레는 (1814~1875)는 19세기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농부였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농부들의 고달픈 일상을 그린 농민화가로 명성이 높았다.


대표작으로 <씨 뿌리는사람>(1850), <이삭 줍기>(1857), <만종>(1859) 등이 있다. 고흐는 밀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밀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농민들에 초점을 맞추어 자연의 풍경과 함께 노동의 가치를 표현하는 ‘밀레’의 작품과 정신이 자신과 잘 맞는다는 생각으로 밀레를 존경하며 그의 그림을 많이 모사하였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밀레의 판화작품을 보고 1981년도에 똑같이 드로잉 했으나, 1889년도에 고흐가 그린 <씨 뿌리는 사람>은 밀레 풍이 아닌 자신만의 기법으로 표현했다. 1889년에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요양 중이었므로, 원화보다는 이전의 판화 작품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높다.



<고흐의 자화상/1889>


<별이 빛나는 밤/ 1889년/뉴욕현대미술관>



고흐는 간절히 바라던 화가 협동조합도 고갱과의 생활에서 귀를 자르는 사건으로 끝이 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정신이 황폐한 가운데서도 그림은 계속 그렸고 이 기간 동안 그린 작품 중 고흐의 대표작들이 많다.



<'꽃피는 아몬드 나무' 일부>



테오가 아기의 탄생을 알렸을 때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있었으나, 그가 보낸<꽃피는 아몬드나무>에서는 격정적인 붓터치는 찾아볼 수가 없고 평화로움과 환희만이 넘친다. <꽃피는 아몬드 나무>에 새 생명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듬뿍 담아 보냈다.


고흐에게 조카의 탄생 소식은 새 봄을 알리는 아몬드 나무처럼 기쁨이 넘치는 듯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기쁨으로 승화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삶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지금 내 작품이 팔리지 않지만, 언젠가는 내 그림들이 그림을 위해 사용된 물감보다, 그

리고 내 인생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날이 올 것이야." -1988년 10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가난에 갇혀 모든것이 뜻대로 되지 않은 상황속에서도 자신의 예술세계 구축을 위해 붓을 놓지 않았던 고흐, 꿈을 놓지 않았던 그가 <꽃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린지 5개월 후인 1890년 7월 29일, 정신적 고뇌를 이기지 못하고 권총 자살을 했다. 그는 800여점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스케치한 작품들을 남기고 다시는 아름다운 꽃과 하늘을 보지 못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모두에게 잊혀지고, 고흐의 작품은 동생 테오에게 상속되었으나 6개월 뒤 테오도 사망했다.




테오에게 고흐의 작품을 상속받은 아내 요한나는 고흐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테오의 아들 빈센트 빌렘은 고흐가 남긴 많은 작품들을 세계의 주요 미술관에서 순회 전시하며 고흐를 전 세계에 알리면서 고흐의 꿈에 날개를 다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1901년 3월 17일, 고흐가 세상을 떠나고 11년이 지난 봄,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이 전시된 이후, 세상 사람들은 삶과 그림이 일치가 되어 큰 감동을 주는 고흐의 작품들을 보고 삶을 모두 예술에 바친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1960년에 빈센트 반 고흐 재단이 설립되었고, 1973년에는 반 고흐 미술관이 개관 되었다. 고흐는 서양 미술사 중 가장 위대한 화가로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1890년 2월에 그린 <꽃피는 아몬드 나무>의 그림처럼 생전에 그토록 갈망하던 고흐의 봄이 펼쳐진 것이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지만, 그림을 꿈꾸고 끊임없이 그린 ‘고흐’처럼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봄은 반드시 온다.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고 하듯이 견디기 힘든 고통도 잘 이겨내면 희망의 다리가 되는 것이다.




글 / 우경주 미술 인문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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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살고있는 제주도의 가옥은 100여년이 된 돌집이다. 제주도 특유의 전통으로 안거리 밖거리 문화가 있는 이곳은 과거 부모 자식이 한 울타리 안에서 따로 살면서 집이 두채로 나눠져있다.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밥도 잠도 생활도 따로하던 과거 풍습이 주된 이유였다. 그런 문화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바로 필자의 집중 하나다. 이곳은 나무로 된 마루바닥과 함께 아궁이실이 아직도 남아있는 전통가옥을 그대로 유지한다. 겨울철 따뜻한 온돌 아랫묵에서 몸을 녹이고 구운 고구마에 시원한 동치미국물을 마시던 옛 추억을 떠올리기 딱 좋은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고유의 난방방식을 갖고있다. 온돌을 빼고는 우리의 주거문화를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방바닥의 달궈 불을 지피던 곳은 아궁이로 아궁이에서 만들어진 열이 방바닥 구석구석을  나가면서 온돌의 따뜻함을 유지했다. 보통 연기가 빠져나가기 전까지 아궁이에서 뜨거운 열기가 바로 전달되는 곳은 두껍게 구들을 깔고 열이 늦게 전달되는 윗목은 얇은 구들을 놓는다.





이 온돌의 역사는 아주오래다. 우리나라 최초의 온돌방식은 기원전 4~기원후 1세기 연해주 남부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문헌상에선 서기 500년 초 글에서 발견되며 가장 널리 사용한 나라는 고구려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조선시대를 지나 집 전체가 온돌방으로 꾸며지기 시작한 것은 1528년 즈음으로 기록돼 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땐 온돌은 방바닥을 골고루 덥혀줘 습기가 차지않고 화재에서도 비교적 안전하다. 한번 뜨거워진 구들장은 오랜 시간 방바닥을 따듯하게 데워준다. 연기나 재 등도 방에 남지 않아 청결한 생활까지 가능하다.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다른 전통문화는 많이 사라져있지만 아궁이를 비롯해 온돌문화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아있는 것이다.





어떤 전문가들은 온돌을 가장 이상적인 난방시스템으로 꼽기도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온돌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방안을 데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온도조절 역시 쉽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열효율로는 30%에 불과해 열손실이 크고 나무를 때야 해서 연료소비가 많다는 단점도 있다.




이미 현대에서도 온돌침대가 유행하듯 온돌은 이미 건강을 위한 오랜 전통문화하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돌은 돌과 흙을 가열하면서 원적외선을 방사한다. 이러한 원적외선은 체내에 흡수돼 온도를 상승시키고 땀과 각종 노폐물을 밖으로 배출해 병치료를 돕는다.





이 같은 온열요법은 말초혈액순환 개선 신진대상 촉진, 진통, 근육긴장의 저하 등에 작용하고 관절류머티즘, 신경통, 근육통 등 각종 만성염증과 피로회복까지 효과를 보인다. 또 온돌은 허리를 보호하고 자세를 교정시키면서 근육을 이완시키면서 건강한 척추를 보호하게 한다. 이러한 탁월한 효과에 온돌이라는 단어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수록될 만큼 그 인기가 높다. 이러한 온열요법은 암치료시 병행하면 치료효과를 극대화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추운 겨울밤 온돌바닥에서의 옛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라면 선조들의 지혜에 감사하면서 온돌체험을 해보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글 / 김지환 프리랜서 기자(전 청년의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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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기획을 하는 윤 차장에게는 점심시간에도 곧잘 손님이 찾아온다. 식사를 주문하면서 자연스럽게 반주로 소주 한 병을 시킨다. 어느새 다가온 퇴근 시간. 오늘은 부서 송년회가 있는 날이라 술자리로 냉큼 달려갔다. 윤 차장은 부장님이 주는 술을 거부하지 못하고 계속 술잔을 비워갔다. 누군가가 2차, 3차를 외치며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다음날, 윤 차장은 술이 덜 깬 상태로 출근해서 졸다가 김 과장에게만 살짝 말하고 조용히 사우나로 향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발표한 '2013년 국민영양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주류 섭취량이 백미에 육박할 만큼 높다고 한다. 특히 직장인이 많이 분포된 30~40대 경우는 하루 맥주 섭취량이 116.18g 소주는 62.20g인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를 합치면 178.47g으로 한국인 주식 재료인 백미(156.03g)보다 많은 양이다. 이는 우리가 매일 먹는 밑반찬인 배추김치(77.61g)의 2배가 넘는 수치다. 그렇다면 올해의 우리나라 술 소비 상황은 어떨까. 통계청이 발표한 올 2분기(4~6월) 우리나라 가계 동향에 따르면 사교육비, 식비, 의복비 등 사적 소비가 모두 줄었는데도 술과 담배 지출은 전년 대비 7.1%가 늘었다고 한다.





경제 불황 등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술 소비가 이렇게 늘어난 데는 혼술족(혼자 술 마시는 사람)의 증가를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최근 잡코리아가 조사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인남녀 10명 중 7명이 혼술을 하고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음주하는 주된 이유는 역시 친목 도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회식이나 모임에서 빠지지 않는 술! 과연 사람들은 정말 술로 관계가 단단해지고 있을까.




"한국의 음주문화는 폭력적이다." 이 말은 우리나라가 아닌 중동의 알자지라 방송에서 지난 2월 방영한 기획 영상 내용이다. 이 방송에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술 권하는 사회, 술을 함께 마셔야 제대로 통한다고 생각하는 여기 이곳 대한민국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





멀고 먼 외국에서도 꼬집을 정도로 우리나라 음주 실태가 고질적인 사회 문제가 된 것은 폭음하는 문화 때문이다. 지난 2012년 미국 뉴욕타임스의 해외판인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한국은 알코올 소비에서 세계 13위지만, 폭음에서는 세계 1위다."라며 "한국 사람들은 술을 함께 먹어야 친해진다는 생각에 폭탄주를 만들어 원샷을 외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해외의 비판적 보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술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어느새 연말이 되니 "한번 만나야지?"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나돈다. 만남 대부분에는 술이 함께 한다. 술로 친목을 다진다는 의도는 나쁘지 않지만 실제로는 술로 소통을 외치다 도를 넘어선 음주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도 많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과해지면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든다. 그렇다면 '과하다'는 기준은 어느 정도의 양일까.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시한 고위험 음주량은 알코올 도수 17%인 소주를 기준으로 남자 9잔, 여자 6잔 이상이다. 남자 14.9잔, 여자 9잔 이상이면 고위험군보다 위 단계인 매우 위험군에 속한다. WHO가 권장하는 주종별 적정 음주량은 남자 소주 5.9잔, 여자 2.9잔 정도다. 맥주라면 200ml로 남자 5.6잔, 여자 2.8잔이다. 대체로 술자리가 깊어지면 이 같은 적정량을 훌쩍 넘게 된다. 스스로 절제하지 않으면 술로 인한 문제가 있는 상황에도 어쩔 수 없이 쉽게 노출된다.





특히 연말은 각종 음주 관련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시기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음주운전 사고다. 국민안전처와 도로교통공단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최근 5년간 연평균 교통사고 사상자는 34만 명으로 그중 14.4%가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상자였다. 이중 아침 출근 시간대에 일어난 음주운전 사고도 약 10%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날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쭉 마시고 술이 채 깨지도 않은 상태에서 운전해서 일어난 사고였다.




연말연시가 되면 전국의 지구대 파출소에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길거리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들어온다고 한다. 과음하고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진 취객들이 대부분이다. 누군가가 신고를 해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면 다행이지만 그마저도 안 되면 추위나 범죄에 노출되어 건강상, 재산상의 피해를 보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이 실수해도 "술이 죄지, 사람이 무슨 죄냐."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술에 너그러운 문화가 음주 소비를 줄이지 못하고, 다시 또 폭음하는 문화로 이끄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술 없는 송년회'가 인기를 끌었다. 술 대신 식사를 하거나 문화공연을 같이 보는 송년회다. 술로 하는 소통도 좋지만, 핵심은 좋은 사람과 좋은 대화를 나누는 송년회다. 좋은 사람들과 모여 한해의 수고를 서로 격려해주는 마음만 있다면 송년회는 그로써 충분한 게 아닐까.



글 /  건강보험 '사보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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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함께하는 곳에는 리더가 존재한다. 학교에는 교장이 있고, 회사에는 사장이 있다. 회(會)에는 장(長)이 있는 법. 공식적인 조직이 아니어도 리더는 존재한다. 가정에는 가장이 있고, 심지어 친구들끼리 모였을 때에도 리더가 있다. 모두가 인정하고 따르는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존재한다. 리더가 이렇게나 많지만 존경받는 리더는 얼마나 될까? 존경받는 리더와 그렇지 못한 차이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존경받는 리더가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리더에게 입조심을 한다. 심지어 리더가 되기 전에 같은 처지에서 활발하게 의견을 주고받던 사람들까지도 그렇다. 리더가 이런 틀을 깨려고 애쓰더라도 쉽지 않다. 평생을 어른에게 입조심하고 살아왔는데 한 순간에 바뀌기가 쉽겠는가. 반대로 주변 사람들이 리더에게 다가가서 이야기를 하고 의견을 제시하려고 하면 리더가 불편해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고 일을 추진해도 크게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굳이 피곤하게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소통의 부재가 지속되면 조직은 어려움을 겪는다. 리더는 일방적으로 조직을 끌 수밖에 없고, 조직원은 리더를 존경하지 않게 된다. 계속 쌓이는 불신, 그리고 소통의 부재는 끔찍한 참사를 일으키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1997년 괌에 대한항공 여객기가 추락한 사건을 꼽을 수 있다. 이 사건을 조사하던 가운데 미국항공청은 핵심 원인으로 기장과 부기장 사이의 소통의 부재였다. 공군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 많은 항공업계의 특성상 기장(선임)의 지시를 부기장(후임)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고, 부기장의 보고에 기장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일어난 참사였다고 결론내렸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든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표현처럼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은 아닐까?


엘리자베스 뉴턴이라는 미국의 심리학자는 간단한 실험을 진행했다. 두 명의 참가자를 짝지은 후 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알 만한 노래’의 목록을 주면서 여기 있는 노래의 리듬을 떠올리며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게 했다. 목록에 있는 것은 학교종이 땡땡땡, 나비야 나비야처럼 정말 익숙한 노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 리듬을 듣고 어떤 노래인지 맞춰보라고 했다. 심리학자는 실험을 진행하기 전 탁자를 두드리게 될 사람들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런 노래를 두드린다면 상대가 얼마나 맞힐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대답은 평균 50%였다. 자신이 두드리는 리듬을 듣고 반 정도는 맞힐 거라 예상했다. 멜로디 없이, 리듬만을 듣고 맞혀야 하지만 너무나 쉬운 노래였기 때문이다. 실험이 시작되었다. 과연 상대는 리듬만을 듣고 얼마나 맞혔을까? 결과는 2.5%였다! 무려 20배 이상이나 잘못 예측을 했던 셈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속으로 가사와 멜로디를 생각하면서 두드렸기에 상대방도 쉽게 맞힐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저 ‘탁탁탁탁’ 소리만 들릴 뿐 도통 무슨 노래인지 맞히지 못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도 알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라고 한다. 교사는 자신이 알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조금만 알려줘도 다 알 것이라고 착각하고, 직장 상사는 부하 직원에게 대충 말해 놓고 다 전달했다고 착각한다. 자신이 아는 것을 상대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통터져 하는 것은 지식의 차이가 가져다 준 저주일 뿐이다.




이심전심은 가까운 사이에서 사랑, 미안, 감사, 서운 등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가까운 사이라면 어느 정도 안다는 의미다. 조직에서 가질 마음 자세는 아닌 것이다. 조직에서는 정확하게 의사표시를 하고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더군다나 요즘엔 가족이나 부부 등 가까운 사이에서도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하는 시대인데, 리더와 조직원이 조직을 위해 꼭 필요한 소통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리더와 조직원 사이의 소통이 열쇠는 리더가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리더를 존경할 수밖에 없다. 또한 소통의 장이 마련되었을 때 조직원은 리더에게 자세히 상황을 전달하고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 리더는 조직원과 달리 큰 그림을 보느라 세부적인 것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세세히 보고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리더의 태도가 고압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 압도되어 소통을 꺼리고 뒤돌아서서 리더를 욕하기만 하면, 나중에 본인이 리더가 되더라도 존경받는 리더는 되기 어려울 수 있다. 소통,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조직의, 리더의 시급한 과제다.



글 / 강현식 심리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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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살고있는 제주도 시골 마을에는 변변한 식당 하나 없다. 24시간 편의점을 가려해도 차를타고 2km는 이동해야 하는 곳이다. 사실 마을이 작은 탓에 학교라고는 전교생 90명이 전부인 초등학교 하나뿐이다. 때문에 학교 주변에 학원은커녕 공부방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학원에 치이고 책과 씨름하며 지내는 여느 아이들과는 다르게 자연 속에서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컸던 탓에 필자는 이러한 외진 농촌마을이 너무 마음에 든다.





하지만 어느 날 필자의 10살 된 딸과 7살 된 아들이 '국술원'이라는 곳을 다니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인근마을 단 하나있는 체육관인데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전통무술 중 하나란다. 아마도 또래 친구들이 검은 도복을 입고 유치원이며 초등학교 교실을 왕래하니 내심 부러운 눈치였나보다. 그렇게 국술원이라는 체육관에서 아이들이 운동을 시작한지도 벌써 6개월째. 활쏘기며, 발차기며 자신감을 키우며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에 그래 필자는 다행이라고 외친다. 사실 돌이켜 보니 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30여년전 부터 남자여자 가리지 않고 태권도나 합기도를 배웠던 걸 생각하니 건강한 신체와 정신에는 무술이라는 배경이 밑바탕에 깔려 있던게 아닌가 싶다.




예부터 문과 무관으로 나뉘며 무예의 중요함은 오래전부터 강조돼 왔다. 이는 동양인 중 특히 한국인이 갖는 지리적인 여건과 사상이 오래시간 다져온 결과일 것이다. 고대로부터 외세의 침략이 잦았던 한반도는 무술이라는 힘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무술의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한국의 전통무술을 궁중무술, 불교무술, 사도무술 등 크게 3가지로 분리된다. 궁중무술을 말 그대로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왕가를 호위하기 위해 전투에 필요한 호국무술이었다.


그들은 검술, 궁술, 승마술, 특수 족술, 수기술, 던지기와 비각술 등을 익히며 동양최고의 무예인으로 거듭났다. BC1세기경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대립관계 속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의 무인들은 지식과 무예의 균형을 이뤘으며 그 예가 바로 신라의 화랑도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가 이어지면서 한교라는 무인은 '무예통지'라는 한국의 전통무술을 집대성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또 서기 1790년 정조왕은 이덕무를 통해 '무예도보통지'라는 책을 저술케 해 참 무술인을 성장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다.





불가에서는 도를 닦는 방법 중 하나로 무술을 선택했다. 신체와 정신을 닦으며 경지에 이르는 노력이 선행된 것이다. 이들은 수많은 외세 침략에서 서산대사나 서명대사를 비롯한 많은 승병들이 앞장서 나라를 구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사도무술은 무인가문이나 사대부가문에서 전통적으로 전수되어온 무술을 말한다. 이는 BC 2000여년 전 부터 AD900여년 대까지 약 3000여년 간 끊임없이 연마되어왔다. 고조선시대 사도무술에서 쓰였던 무기는 석검, 석창, 석부, 강사(활) 등으로 중요 무예기예는 투석술, 사락술(흙,모래 던지기) 등이 있다.


고려왕조에 이르기까지 사도무술을 지속 발전됐지만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에서 금지시키면서 맥이 끊기는 위기도 맞았다. 그러나 깊은 산 속이나 가정에서 비밀리에 유지 전수되면서 수많은 의병 무술인들이 일본군에 대항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지기도 했다.




중국은 무협영화로 큰 인기를 얻을 만큼 무술에 대한 관심과 저변확대가 활발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 국민들도 무술을 근간으로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다지거나 정신을 수양 하는게 보편화 돼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다양한 문파로 발전해 오늘날 130여개에 달할 만큼 번성했다. 중국 무술은 근대화를 거치면서 민족적인 성격을 다졌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무술은 태극권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상 생활속에서 운동이자 여가 활동으로 활용된다. 중국 국가 체육위원회는 1956년 24식 간화 태극권을 만들어 보급했고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팔괘장은 이른바 장풍이라고 부르는 장법의 변화와 보법의 전환을 통해 원을 그리며하는 무술로 주먹을 쥐지 않고 편 상태서 많이 사용된다. 무협영화에서 가장 많이 소개가 된 소림 무술은 허날성 쑹산의 소림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때때로 승려들은 전쟁에 참여하면서 나라를 도왔고 국가의 보호아래 독자적인 무술양식을 정립해 전통을 이어나갔다. 1949년 이후 중국 무술은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일정한 체계로 통일돼 운동종목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겪는다. 또 영춘권의 엽문이나 절권도의 이소룡 등을 소재로한 영화가 대중의 큰 사랑을 받으면서 중국은 물론 전 세계적인 무술 붐을 일으켜 큰 관심을 모으는 중이다.




현대에서도 무술은 일상이 될 만큼 대중화가 돼 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태권도를 비롯해 합기도, 택견, 당수도, 국술원 등은 이미 수 많은 학생들이 수련하고 있을 만큼 큰 인기도 얻는다. 또 최근에는 묻지마 범죄나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가 잇따르면서 호신술을 배우기 위한 여성들의 관심도 늘고있다. 경호무술, 특공무술 등이 모두 현대에 와서 발전한 무술을 한 부분이다. 무술은 크게 정신과 신체의 단련에 주안점을 둔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일대종사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몸과 정신은 하나이며 오랜 동양철학을 담아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의학적으로도 점차 입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호주의 중국계 가정의 폴 램 박사는 1997년 관절염환자를 위한 태극권 12동장을 만들어 호주, 홍콩, 유럽, 미국 등지를 돌며 전파에 나선바 있다. 미국의 웨스턴대 패트리셔 애들러 박사도 10주간 관절염 노인들에게 태극권을 수련케 한 결과 관절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기능을 회복했다고 보고했다. 이렇듯 무술은 기본 동작만으로도 어린이나 노인들에게도 건강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혈중 엔톨핀 증가로 인한 관절통증 감소는 물론 심혈관 기능의 강화 지구력 향상, 근력 향상에 이어 정서안정까지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다만 지나친 것은 모자람 못하다는 말처럼 규칙적이며 적당한 운동과 휴식, 그리고 알맞은 균형의 식단까지 이어진다면 누구나 건강한 삶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글/ 김지환 자유기고가(전 청년의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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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친들과 크고 작은 행사를 즐긴다. 주로 내가 초대하는 형식이다. 거창할 것도 없다. 회사로 오시라고 해 차 한 잔 대접하고, 식사를 함께 한다. 내가 사는 모습도 보여드리기 위해서다. 물론 졸저도 한 권씩 드린다. 그동안 의미 있는 행사는 두 번 했다. 3333번째 페친 및 4444번째 페친과의 만남. 똑같은 조건을 내밀었다. 여의도 콘래드호텔 아트리오에서 점심을 대접하고, 책을 드리겠다는 것.


하지만 두 분 모두 지방에 계서서 그같은 계획은 실천하지 못했다. 대신 내가 대전, 부산에 내려가 그분들을 각각 만났다. 조웅래 맥키스 컴퍼니 회장님과 정주영 기아대책 부산본부장님이다. 지금은 두 분 모두 절친이 됐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까 팔로어가 1105명이다. 이번엔 1111번째 팔로어와 똑같은 행사를 할까 한다.





그러나 어떤 분이 1111번째 팔로어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페친의 경우 내가 확인이 가능한데 팔로어는 딱 누구라고 단정짓기 어렵다. 대신 나를 팔로우하는 분이 확인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 분이 확인하면 가능할 것 같다. 그런 다음 연락을 주시면 좋겠다. 그 다음 행사는 2222번째 팔로어다. 나는 이처럼 숫자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더러 행운을 가져다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마침내 1111번째 팔로어가 나왔다. 그런데 어느 분인지 모르겠다. 앞서 1111번째 페친께는 콘래드호텔 아트리오에서 점심을 대접하고 책을 한 권 드리겠다고 약속드린 바 있다. 내가 아무리 찾아봐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페친은 확인이 가능하다. 현재 페친 5000명, 팔로어 1111명이다. 6100여명과 소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의 가장 큰 재산이기도 하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며칠 전 결혼식장에서도 한 페친을 만났다. 서울지검 특수부에 근무하는 수사관이었다.





"혹시 오풍연씨 아니세요". 그 분이 먼저 나를 알아봤다. 페이스북과 똑같다고 하셨다. 얼굴도 어디서 본 듯하다고 했다. 나도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했다. 나는 솔직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워낙 많은 분들과 교류를 하다보니까 결례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분이 바빠 차 한 잔 나누지 못해 아쉬웠다. 결혼식장이나 상가집에서 종종 이런 일이 있다. 페친들이 먼저 나를 알아보는 것이다. 내가 사진도 종종 올려 낯설지 않은 것 같았다. 페이스북은 이처럼 엄청난 파급력도 갖고 있다. 페북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자료를 보니까 전 세계 페이스북 사용자가 16억5000만명에 이른다고 했다. 두세달 전까지만 해도 자료를 인용해 15억9000만명이라고 강의를 한 바 있다. 그 사이 6000만명 가량 늘었다고 할까. 머지않아 20억명에 도달할 것. 왜 페이스북을 해야 하는지 더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페이스북은 대단한 SNS다. 전 세계인이 흥분하는 까닭이다. 향후 5~10년은 페이스북이 세계를 지배할지도 모른다. 나는 페북 강의를 하면서 3가지를 강조한다. 첫번째 재미(fun)가 있다고 얘기한다. 자기가 포스팅하는 것도 그렇지만 페친들이 올린 글이나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두번째 돈(money)이 된다. 내가 지금 신문사에 다시 들어온 것도 페이스북 덕이다. 한 페친이 단 댓글 한 줄이 계기가 됐다. 세번째 정보(information)가 있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매력이다. 이런 장점이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무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페북을 하지 않는다며 자랑삼아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무식한 사람이오" 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제 페북 활동은 당위다.





요즘 내 특강에서 가장 호응이 좋은 쪽은 SNS다. 80분 강의 중 20분을 SNS에 할애한다. 실제로 내가 SNS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강의도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 나이 또래(50대 중후반)에게 SNS는 다소 생소하다. 20~40대 젊은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왜 그런 것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조건 해야 한다. 이유를 대면 하지 못한다. 페이스북을 예로 들어보자. 창시자 마크 저커버그는 우리 나이로 33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세계 여섯 번째 부자다. 그의 재산만 50조원. 우리나라 최고부자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12위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페이스북이 돈도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열광한다. 내 페친 5000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때론 주위의 부러움도 산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바로 페이스북에 입문해라.



글 / 오풍연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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