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릉에 사는 한 젊은이가 조나라 수도 한단에 가서 대도시 걸음걸이를 배웠답니다. 그런데 그 나라 걸음걸이를 채 배우기도 전에 옛 걸음마저 잊었다네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엉금엉금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 갈 수밖에요. ≪장자≫ 추수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삶이란 게 그렇습니다. 남의 길이 멋져 보이고,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남의 키가 높아 보입니다. 그래서 내 길을 주춤거리고, 남의 떡을 넘보고, 발끝으로 서려고 합니다.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 그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동물들은 늘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장자는 우리에게 ‘발끝으로 걷지 말라’고 합니다. 발끝으로 걸으면 키는 좀 커보이겠죠. 한데 그런 부자연스런 걸음으로 몇 보나 걷겠습니까. 이치에 어긋나는 건 대개 그 끝이 흉합니다. 누군가 ‘삶은 주막’이라고 했습니다. 비유가 참으로 맛깔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정거장입니다. 정거장은 출발점이자 도착지이고, 길이 갈리는 교차로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갈림길에서 서성댑니다. 확신이 부족해서 머뭇거리고, 못가는 길이 아쉬워 되돌아보고, 남의 길이 좋아보여 곁눈질을 합니다. 당신만 그런 건 아닙니다. 저도 그렇고, 그도 그렇습니다. 루소는 ≪에밀≫에서 “항상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간은 결코 인간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비뚤어 풀어보면 인간은 모두 ‘방황하는 동물’이라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가 뭐래도 당신의 걸음걸이가 최고입니다. 당신의 스타일, 당신의 꿈이 제격입니다. 그게 바로 당신 삶이기 때문입니다. “밝음을 가리고 가려서 나의 갈 길을 그르치지 마라. 내 가는 길 물러났다 돌아갔다 하며 나의 발을 다치지 않게 하라.” ≪장자≫ 인간세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길을 간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아마 그건 거짓을 걷어내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자문해봅니다. 어둠이 밝아지고, 좁음이 넓어지고, 작은 앎이 큰 앎이 되는 게 참된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길에는 자연의 길(天道)이 있고, 사람의 길(人道)이 있다. 억지 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의 길이고, 억지로 번거로워지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 자연의 길이 군주이고, 사람의 길이 신하다. 그런데 자연의 길과 사람의 길이 서로 멀어지고 있다. 살펴봐야 할 일이다.” ≪장자≫ 재유편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장자는 “천도는 남는 데서 덜어 부족한 곳을 채워주고, 인도는 부족한 곳에서 빼앗아 넘치는 곳을 더 넘치게 한다”고 꼬집습니다. 저에겐 이익만 좇아가는 소인배들을 겨냥해 내리치는 죽비소리로 들립니다. 속세와 너무 뒤섞으면 길이 흐려집니다. 흐려지면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면 길이 더 흐려집니다. 장자는 “세상은 길을 잃고, 길은 세상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돈에 얽매인 자, 명예를 좇는 자, 권세에 매달리는 자가 세상에 넘쳐난다는 한탄으로 들립니다.





속세를 사는 인간이 속세를 등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삶이 반드시 고상한 것도 아닙니다. 장자는 백이숙제의 정절을 높이 사지 않습니다. 그 어느 것도 목숨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속세에 매인 삶에도 따끔한 경계의 시선을 보냅니다. 장자는 세상사의 부침에 일희일비하지 마라고 합니다. 의연히 가고, 의연히 오라고 합니다. 삶을 받아도 기뻐하고, 삶을 잃어도 그러라고 합니다. 어려운 주문입니다.


세속에 너무 밝으면 삶이 고달픕니다. 눈이 너무 밝으면 시야가 흐려지고, 귀가 너무 밝으면 소리가 흐려지고, 탐심이 너무 밝으면 마음이 흐려집니다. 흐려지면 길을 잃습니다. 세속에서 조금 거리를 둬보십시오. 그럼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이지도, 남의 키가 높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내 떡이 맛있고, 내 걸음으로 편히 걷습니다.





삶의 소소한 선택의 결과가 바로 오늘입니다. 삶의 자잘한 선택의 결과가 바로 지금의 당신입니다. 그 선택들이 쌓여 내일이 되고, 내일의 당신이 됩니다. 선택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당신 삶에 조언가는 많습니다. 그래도 최종 결정권자는 여전히 당신입니다. 누구도 당신 삶을 대신 살아주지 못합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왕이면 이웃과 더불어가는 길, 당신의 자아가 빛나는 길, 더 풍요로워지는 길을 걸어보십시오. 누구나 잠시 빌려 걷는 길입니다. 답답하고 좁은 길에서 헤매지 말고, 당신만의 큰 길을 걸어보십시오. 당신 삶에 응원자는 참으로 많습니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겸손은 야심가의 위선이거나 노예근성의 비굴함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 그의 눈에 비친 겸손은 다소 비아냥적이다. 하기야 겸손이 인간의 본능은 아닌 듯도 하다. 맹자는 인간의 심성이 본래 선하다는, 이른바 성선설(性善說)의 근거로 사양지심(辭讓之心)을 꼽는다. 인간은 남에게 양보하고, 겸손하고자 하는 성품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겸손은 일종의 ‘가면’이다. 겸손은 뭔가를 얻으려는 속셈으로 스스로를 일부러 낮추는 행위다. 맹자가 옳은지, 스피노자가 옳은지 정답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마찰이 사유의 공간을 넓힌다. 그게 철학이 인류에게 선사한 귀중한 선물이다.

  

 

과욕은 불행을 잉태한 씨앗

 

사실 세상은 겸손한 자보다 야심가들이 주도한다. 전쟁도, 물질도, 혁신도 세상의 역사는 대부분 야심가들이 쓴다. 그러니 어찌보면 세상의 역사는 야심가들의 스토리다. 어떻게 전쟁을 승리해 영토를 넓히고 권력을 키웠는지, 어떻게 기업을 일궈 막대한 돈을 벌었는지, 어떻게 창의적 아이디어로 혁신을 선도했는지에 관한 얘기다. 그러니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청춘에게 울림을 주는 메시지다.

 

삶은 구함의 연속이다. 물질을 구하고, 명예·권력을 구하고, 사랑을 구하고, 인기를 구한다. 구함은 희비가 갈리는 교차점이다. 그 교차점에서 누구는 환호하고, 누구는 좌절한다. 욕구는 맥주의 거품 같은 것이다. 거품 빠진 맥주는 고유의 맛을 잃는다. 욕구는 삶에 맛을 내주는 또다른 거품이다. 욕구 없는 삶은 거품 빠진 맥주만큼이나 밋밋하다. 

 

만이불일(滿而不溢). ‘가득 차면서도 넘치지는 말라’는 뜻으로 효경에 나오는 말이다. 차면서도 넘치지 않는 것은 말만큼 쉽지 않다. 욕심은 만족을 꺼린다. 구해서 얻어도 또 구하고 싶어한다. 영혼의 허기는 과한 욕심의 틈새에 끼어든다. 그 허기가 수시로 불행을 끌고 온다. 과욕은 불행을 잉태한 씨앗이다. 만족이 멀어지면 불행은 그만큼 가까워 진다. 세상에 불행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만족 앞에 높고 단단한 장벽을 세워두기 때문이다. 성숙한 삶은 높고 두터운 장벽을 허물고 무언가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비워야 보이는 것들

 

명품연기는 차지만 넘치지 않는다. 과함의 억제가 바로 프로연기다. 세상사의 이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겸손이 지나치면 비굴해 보이고, 관심이 과하면 간섭이 되고, 용기도 선을 넘으면 만용이 된다. 그러니 멈춰야 할 선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바로 삶의 품격이다. 높이 오르면 주변을 살피고, 배움이 많으면 교만을 낮추고, 가진 게 많으면 베품을 생각하고, 욕망이 지나치면 가치를 고민해야 한다. 만이불일(滿而不溢)은 공자의 과유불급(過猶不及)과 길이 통한다. 춘추좌전은 ‘교만하면서도 망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驕而不亡者, 未之有也)고 꼬집는다. 

 

살다보면 넘치고 싶은 충동이 수시로 마음에 펌프질을 해댄다. 분노를 토해내라고, 맘껏 헐뜯어보라고, 자신을 좀 과장하라고,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가지라고…. 하지만 급박한 충동의 펌프질엔 맞대응을 피해야 한다. 그 땐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잠잠함으로 그 충동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면 스스로가 보이고, 길이 밝아진다. 흔히 마음공부는 뺄셈이라고 한다. 세상엔 비워야 보이는 것들이 널려 있다. 지혜도 채움보다는 비움에서 온다. 잠잠함과 비움은 지혜가 자라는 최적의 토양이다.

 

  

넘칠수록 낮아지는 (格)

 

급하고 넘칠수록 사람의 격(格)은 그만큼 낮아진다. 그러니 꾸지람을 해도 견뎌낼 높이를 재봐야 하고, 물질을 탐해도 취한 경로가 선(善)한지 고민해야 하고, 친구를 만나도 과한 인맥이 오히려 영혼을 혼탁하게 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삶은 교차로다. 어디로 가고, 언제·어디서 멈출 지를 항상 곱씹어봐야 한다. 원래 뿜어내는 향기보다 우러나는 향기가 더 그윽하고 멀리 가는 법이다. 삶의 향기도 마찬가지다.

 

겸손도, 용기도, 욕심도 도를 넘지 않는 게 좋다. 그게 균형이고, 그게 성숙이다. 채우되 넘쳐 흘려버리지 않는 것이 충만한 삶, 격있는 삶이다. 눈물이 지나쳐도, 분노가 지나쳐도, 나무람이 지나쳐도, 걱정이 지나쳐도 지나친 건 넘치지 않고 꽉 채워진 것만 못하다. 공자의 과유불급이 시대를 초월한 명언인 이유다. 과함이 없는 삶이 우아하고 향기를 우려낸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삶은 가끔 되돌아 보는 것이 좋다. 그래야 현재의 스스로가 잘 보이고, 미래도 더 밝아진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함이다. 과거는 살아 갈 미래의 지혜를 넌즈시 던져준다. 그러니 역사는 현재학이자 미래학이다. 하지만 과거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누구는 과거에 담긴 참 뜻을 읽지만, 누구는 그 의미를 자신의 입맛대로 각색한다. 과거를,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제각각인 이유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에 힘을 좀 빼야한다. 그게 바로 성숙이다. 고집의 유연화는 비굴함, 연약함이 아니라 배려의 공간을 그만큼 넓히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고집이 더 단단해지는 사람이 있다. 고집에도 일종의 관성이 생기는 탓이다. 경험이란 것이 때로 아이러니하다. 경험은 세상을 넓혀 주는 망원경이지만 경험에만 매몰되면 오히려 시야가 좁아진다. 경험이란 편린들은 간혹 잘못된 믿음이나 신념을 바윗돌처럼 단단하게 만든다. ‘내가 경험해 봐서 아는데…’는 때로 스스로를 한정짓는 올가미다. 몇몇 경험으로만 단정짓기에는 세상의 이치가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성숙은 일종의 나잇값이다. 나이에 걸맞게 생각하고, 나이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나이에 걸맞다’함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균형을 잡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너무 자기 잇속만 챙기면 육체는 성숙해도 정신은 미숙한 셈이다. 용기와 배려, 관용, 더불음 등은 대표적 ‘성숙지표’다. 과욕은 정신은 물론 육체 건강도 해친다. 어찌 보면 정신의 균형이 바로 건강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고,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는 얘기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창한 맹자는 모든 사람의 본성은 착하지만 지나친 욕심이 그 본성을 가린다고 했다. 선한 본성의 인간이 사는 세상에 악이 넘치는 이유를 과욕으로 설명한 것이다. 

 

 

 

거울은 형상을 비춘다. 거울을 마주하면 자신의 얼굴이, 스스로의 스타일이 드러난다. 그러니 겉모습이  궁금하면 누구나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며 애를 태운 ‘질투의 여왕’ 거울만이 진실을 말하는 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거울은 진실하다. 그러니 외형에 자신이 없으면 거울 마주하기가 영 불편하다. 우리사회에 성형이 늘어나는 것은 거울 앞에 설 때의 불편함을 덜어보려는 것이다. 

 

거울이란 발명품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물은 인간의 형상을 비춰주던 ‘자연의 거울’이었다. 인간은 물에 비친 얼굴에서 외형의 더러움을 보고 그 물로 그 더러움을 씻어냈다. 인간에게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깨달음의 근원, 더러움을 씻겨주는 정화수인 셈이다. 그러니 물은 늘 인간 마음을 비유한다. 잔잔한 호수로 마음의 평온을 노래하고, 성난 파도로 격노한 심성을 암시한다. 명경지수(明鏡止水)는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을 일컫는 상징어다. 물은 고요해야 비춰지는 형상이 비툴리지 않는다. 마음 또한 고요해야 내면이 더 깊게, 더 투명하게 비쳐진다. 그러니 도도히 흐르는 물은 세상사의 많은 이치를 담는다.

 

 

 

물(거울)로 외면을 살핀다면 내면은 무엇에 비쳐볼까.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 묵자(墨子)는 ‘물을 거울로 삼지말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라’(不鏡於水 而鏡於人)로 깨우친다. 거울에 비춰보면 얼굴 하나쯤은 보이겠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스스로의 길흉화복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세 사람이 걸으면 그 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고 했다. 장점을 배우고, 단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면 모두가 스승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결국 누군가의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타인이라는 거울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묵자·공자의 말씀이 아니라도 세상엔 사람만한 거울이 없다. 나는 누군가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고, 누군가는 나를 통해 그 스스로를 들여다본다. 사람이라는 거울도 유리라는 거울만큼 거짓이 없다. 호주머니에 숨겨둔 송곳처럼 언젠가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니 ‘나’라는 거울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수시로 살펴봐야 한다. 혹여 내가 닮고 싶은 형상이 아닌, 반면교사로 누군가의 삶에 깨달음을 주는 존재라면 그것만큼 슬픈 것도 없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로그인 없이 가능한 손가락 추천은 글쓴이의 또다른 힘이 됩니다
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불안장애를 겪은 환자들은 어느 날 불안장애가 갑자기 찾아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안장애가 찾아올 만한 원인이 반드시 존재한다.  현대의학에서는 불안장애를 뇌기능의 이상으로 보는 경향이 많으나 필자는 한의학적 음양관과 전통의 성리학적 시각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밤이 오는 것이 무서워요,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아요”

 

 60대 후반의 한 여성분이 불안장애로 방문했다.  그분은 갑자기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매우 초조해했고 불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다 외웠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기억하려니 더 힘들어요. 어떻게 된 거죠?” 그뿐만이 아니었다.  “밤이 오는 것도 무서워요. 곧 추운 겨울이 올 텐데, 더욱 불안해서 못 살겠어요.”  자세히 진찰을 해보니 치매와는 달랐다. 기억력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진단결과 불안장애였다.

 

 동양의 대표적인 성리서인 근사록에 보면 ‘마음은 이성과 감정을 통섭한다(心統性情者也).’라는구절이 있다.  마음은 이성과 감정의 복합체로 파악하고 있다.

 불안장애는 얼핏 감정병으로 보인다. 그냥 불안한 정도를 넘어, 생활에 심각한 저해를 주는 것이 불안장애다. 

 그렇다면 그러한 불안장애는 어디에서 출발할까?

 

 

 

 

 있는 그대로를 부정하는 생각에서 불안장애가 시작된다.

 

 다름 아닌 생각이 불러온다.  한의서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는 ‘생각하면 기가 맺힌다.(思則氣結)’라고 했다.

 생각을 하면 기가 결하고 기가 맺히면 온갖 질병들이 생겨난다. 불안장애 역시 이와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어떤 생각이 병을 만들어 내는가? 다름 아닌 존재 부정이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만을 내세우고 집착할 때 그 생각의 결과 불안이 증폭돼서 발병한다.

 

 불안장애는 감정적 장애다 또 불안장애와 불안감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불안 그 자체가 문제 될 수는 없다.  본래 삶은 불안정하기에 우리는 쉽게 불안을 느낀다.

 

 그런 불안은 정상적이다. 불안하기에 우리는 친구를 찾고, 가족을 형성하여 서로 의지하고 사랑한다.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기에 닥쳐올 수 있는 어려움에 미리 대비하여 예방할 수도 있다.

 

 만일 사람이 불안하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불안을 못 느끼는 불안불감증이라는 장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안은 정상반응이며, 불안이 증폭된 불안장애가 문제일 뿐이다.

 

 

 

 

 생각이 잘못되면 감정이 뒤틀어지며 장애가 온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방 심리에서는 마음을 ‘생각(이성)+감정(믿음)’으로 이해한다. 

 또 생각이 선행하고 감정이 뒤따르는 것으로 본다. 생각이 잘못되면 감정이 뒤틀어지며 장애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불안이라는 감정을 일으킬까? 

 

 우선 우리의 삶과 자연의 구조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연 그대로의 세상은 두 세상이 함께 공존한다.

 낮과 밤이 존재하고 여름과 겨울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듯이 우리들의 심리 세계 역시 이와 같다. 그래서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장점과 단점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심지어 무의미하더라도 그 또한 하나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현실에 없는 것을 욕심부릴때 불안이 증폭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늘 선택의 상황에 직면한다. 

 가깝게는 식사 때도 한식을먹어야 할지, 양식을 먹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결혼이든 재혼이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 역시 이 사람을 만날지 저 사람을 만날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선택상황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가 주는 혜택은 잊는 게 마땅하다.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원한다면 어떨까? 

 

 이렇게 현실에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욕심이다.  욕심을 부릴 때 불안이 증폭된다. 존재를 부정하는 생각이 불안장애를 일으키는 방아쇠로 작용하고 있다

 

 불안장애의 증상은 감정으로 나타나지만, 그 원인은 잘못된 생각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감이 밀려온다면 내 생각이 과한 부분이 없는지, 너무 한쪽으로 흐르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게 좋다.

 젊은이든 노인이든 전화번호를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밤이 오고 겨울이 오는 것 역시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원하지 않은 세상이 온다면 맞춰서 적응하면 그만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세상과  항상 싸우려 한다면 그 싸움에서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불안이 밀려온다. 

 더우기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없음을 이미 안다면 더욱 불안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불안장애의 증상

   ■ 마음이 뭔가에 쫓기거나 늘 초조하다.                ■ 근심과 걱정이 많다.
   ■ 불안하여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 충동조절이 되지 않고 쉽게 화가 난다.
   ■ 무슨 일이 일어날 듯 두렵다.

 

 


   불안장애의 예방책

 


  1. 생각의 폭 넓히기 .
..
 
  삶의 지혜가 담긴 경전과 마음의 양식이 되는 좋은 책들을 읽는다.

  2. 마음의 평화와 삶의 믿음 키우기 ...
 
정기적인 명상, 혹은 건전한 종교 생활을 한다.

  3. 원만한 인간관계 형성하기 ...
 
  내가 먼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한다.

  4. 번잡한 생각 줄이기 ...
 
  원예나 주말농장 다니기, 걷기, 등산, 수영 등과 같은 레저 활동을 즐긴다.

  5. 심리적 안정성 확보 ...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취한다

 

 


글 / 황웅근 인의예지 심성계발원 대표 ·흰구름한의원장

 

 


 

 

 

 

 로그인 없이 가능한 손가락추천은 글쓴이의 또다른 힘이 됩니다 

 

 

 



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전버튼 1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건강천사'는 국민건강보험이 운영하는 건강한 이야기 블로그 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공지사항

Yesterday1,550
Today531
Total2,017,259

달력

 « |  » 2019.8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