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속된 세상이다. 마음도 거칠고, 입도 거칠다. 세상은 이익으로 만나고 이익 때문에 헤어진다. 재물 모으는 데만 마음을 쓰는 장사꾼, 잔재주만 부리는 원숭이가 날로 늘어난다. 


이득을 다투니 마음이 불안하고, 시기가 그득하니 남의 떡이 커 보인다. 생명을 중히 여기는 자는 외물로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생명이 이익보다 훨씬 중함을 아는 까닭이다.



이익만 좇으면

잔꾀와 거짓이 생겨난다


맹자가 양혜왕을 찾아간 얘기로 ≪맹자≫가 시작된다. 


양혜왕이 맹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대인께서 먼 길을 오셨으니 저희 나라에 어떤 이익을 주시겠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왕께서는 어찌 이익만을 말씀하십니까. 인의(仁義)가 먼저지요. 왕이 국가 이익만을 취하고, 대신이 가문 이익만을 취하고, 선비가 개인의 이익만을 취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하필왈리(何必曰利), 맹자는 이익을 구하는 양혜왕에게 어찌 인의는 묻지 않고 이익만을 말하느냐고 한다. 그건 왕을 겨냥한 나무람이자 이익만을 좇는 속세를 향한 꾸짖음이다.


마음이 늘 이익에만 있으면 잔꾀가 늘고 거짓이 생겨난다. 바르고 곧은 길보다 사특하고 굽은 길을 걷는다. 삶이 외물에 끌려다니고 밖이 안을 이긴다. 



열자는 내기의 비유로 이익에 흔들리는 인간을 꼬집는다. 기왓장을 걸고 내기를 하면 잘하다가 은 고리를 걸고 하면 겁을 내고, 황금을 걸면 정신이 멍해진다. 기교는 같지만, 마음이 이익에 있는 탓이다. 


밖의 물건을 중히 여기는 자는 늘 마음을 졸인다.

“죄로는 지나친 욕심이 가장 크고, 화로는 족함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크며, 허물로는 취하려고 애쓰는 것이 가장 크다. (도덕경)”


노자는 족함을 모르는 게 바로 가난임을 일깨운다. 



이득을 보면

의로움도 생각하자


권력에도 이익이 따르고 명예에도 이익이 따른다. 인간은 이익이 없는 길은 좀처럼 가지 않는다. 이익에는 긴 줄을 선다. 그럴듯한 명분도 한 꺼풀만 벗겨내면 그 안에 이익이 웅크리고 있다. 한데 이익에는 다툼이 따른다. 형제간의 다툼, 심지어 부부간의 다툼에도 이익이 끼어있다.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군자도 곤궁함이 있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왜 없겠느냐. 다만 군자는 그걸 견디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별의별 짓을 다 한다.” 


이익 앞에선 체면을 가리지 않는 게 보통 사람이다. 세상에 보통 사람 아닌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익만을 좇으면 근본이 흐려진다. 인간은 얻기를 근심하고, 얻고 나면 잃을까를 근심하다. 공자는 “진실로 잃을까를 걱정하면 못 하는 짓이 없다”고 했다. 


공자는 능히 얻지 못할까 근심하지 말고, 그 이득이 의로운지를 살피라 한다. 견리사의(見利思義), 이득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라. 이 네 글자에는 이(利)를 보는 공자의 생각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는 취하되 의롭지 않으면 버려라. “혼인에 재물을 논하는 건 오랑캐의 도다. 군자는 그런 풍속이 있는 마을에 들어가지 않는다. (소학)” 중국 수나라 사상가 문중자의 말이다.     



만족할 줄 모르면

늘 부족하다


제환공이 관중에게 물었다. 

“부유함에도 끝이 있소.” 


관중이 답했다. 

“물이 없는 곳은 물이 끝나는 곳입니다. 부유함의 끝은 그 부유함에 스스로 만족하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만족하면서 그칠 줄 모른다면 부유함의 끝은 없다고 해야겠지요.” 



인간은 욕심의 끝자락을 좀처럼 놓지 못한다. 그 끝자락에 걸려 넘어지고 다쳐도 다시 일어나 또 매달린다.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그릇, 그건 바로 욕심이라는 그릇이다. 채워지지 않으니 늘 부족하다.


만족을 모르면 늘 구하며 산다. 다투고 시기하고 남의 것을 훔쳐본다. 마음에 즐거움이 없고 영혼이 말라간다. 


증자가 자하에게 물었다. 

“어째서 살이 쪘습니까.” 


자하가 답했다.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이지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자하가 뜻을 밝혔다. 


“저는 집에서는 선왕들의 의로움을 기꺼워했고, 밖에서는 부귀의 즐거움을 기꺼워했소. 그 둘이 마음에서 싸울 때는 몸이 야위었는데 지금은 선왕의 의로움이 이겨 살이 찐 것이오.” 


≪한비자≫ 유로 편에 나오는 얘기다.   



그가 누군지 궁금한가. 그럼 그가 뭘 얻으려고 애쓰는지를 봐라. 얻으려 애쓰는 게 바로 그다. 당신이 누군지 궁금한가. 그럼 당신이 뭘 얻으려고 애쓰는지를 봐라. 


노자는 “만족할 줄 알면 치욕 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의로운 이익을 취하라. 의롭지 않고 부하다면 한 번쯤은 당신을 돌아봐라. 천한 이익을 취하려 잔꾀를 부리지 마라. 잔 이익을 좇느라 당신의 길을 잃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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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삼키는 큰 물고기는 작은 갈래의 흐름에서 헤엄치지 않는다. 큰 고니는 높이 날고 더러운 연못에 내려앉지 않는다. 그들의 꿈이 원대하기 때문이다.” 


≪열자≫에 나오는 문구로, 구름을 타고 다녔다는 열자의 꿈이 얼마나 웅대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허황한 듯하면서도 그 안에 뜻이 가득한 것, 그게 도가(道家)의 묘미다. 



뭍에서

배를 부릴 수는 없다


높은 것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아래가 깊다. 우뚝 선 나무는 뿌리가 깊고, 우러름을 받는 지식인은 아는 게 깊다. 치솟은 빌딩은 지하가 깊고, 고고한 사상가는 철학이 깊다. 



깊지 않으면 높아지지 못한다. 깊지 않고 높은 것, 그게 바로 사상누각이다. 수시로 흔들리고, 언제든 무너진다. 깊어진다는 건 양심의 씨앗, 앎의 씨앗, 생각의 씨앗을 켜켜이 쌓아가는 수양이다. 촘촘히 쌓아서 깊어지는 것, 그게 진정한 높아짐이다.


장자는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우지 못한다”고 했다. 주머니가 작으면 큰 것을 담을 수 없고, 두레박이 짧으면 깊은 물을 퍼 올릴 수 없다(관중). 벌집에는 고니 알을 담을 수 없고(회남자), 땅을 깊이 파야 시원한 샘물을 얻는다(채근담). 



스스로가 커야 큰 것을 담는다. 메추리는 결코 황새 알을 품지 못한다. 깊어야 높아진다. 건물을 세우고 지하를 파는 건축가는 없다. 채워야 넘친다. 밑이 뚫리면 한 치짜리 대롱에도 물을 채울 수 없다. 


종자기의 물에는 기껏 겨자씨나 지푸라기밖에 띄우지 못한다. 아무리 근사한 배라도 물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뭍에서는 결코 배를 띄울 수 없다. 당신 삶에도 물을 채워라. 배를 띄우고, 꿈을 띄우고, 세상도 띄우는 그런 깊이로 물을 채워라. 한 방울씩 채워도 조금씩 깊어진다.



깊이 갈아야

수확이 풍성해진다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 과거를 답습하고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면서 적당히 땜질식으로 살아가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연암 박지원은 만년에 병풍에다 이 글을 써넣고 “천하만사가 모두 이 여덟 자로 무너진다”고 했다. 연암의 둘째 아들 종채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담은 ≪과정록≫에 나오는 얘기다. 



유가나 도가의 궁극적 지향점은 ‘평천하’다. 다만 거기에 이르는 방법론이 다를 뿐이다. 공자·맹자로 대표되는 유가는 배우고 익혀서 거기에 닿으라 하고, 노자·장자가 선봉인 도가는 비워서 거기에 이르라 한다.


장자의 비움은 크게 담기 위한 수양이다. 장자의 낮춤은 높아지기 위한 지혜다. 고을 하나 다스릴 만한 깊이로 나라를 맡으면 모두가 불행하다. 개인이 불행하고, 국가도 불행하다. 뭍에서 배를 끌면 몇 보 움직이기도 버겁다. 물에서 수레를 끌면 몇 발짝 나아가기도 힘들다. 



누구나 높아지기를 원한다.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을 탓하는 건 ‘나는 무능하다’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걸 비움으로 포장하는 것 또한 자기기만이다. 


문제는 당신의 진짜 키다. 당신은 한 자짜리 키로 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는가, 아니면 수십 자 당신의 키로 세상을 당당히 내려다보는가.



끝보다 뿌리를 봐라


참 농사꾼은 땅에 정성을 쏟는다. 대충 뿌리면 대충 열리고, 깊게 갈면 튼실한 열매로 보답한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깊어야 담고, 깊어야 띄운다. 누구나 재주가 다르다.


한비는 “무릇 좋은 말과 수레가 있더라도 종놈에게 부리게 하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만 왕량(王良)이 부리면 하루에 천 리도 갈 수 있다”고 했다. 



웃음거리가 되고 천 리를 가기도 하는 것은 말과 수레가 달라서가 아니다. 그건 재주의 뛰어남과 졸렬함의 차이 때문이다. 내가 깊어야 남도 부린다. 가랑잎 하나 달랑 띄울 깊이, 햇볕 한 번 들면 바로 마르는 깊이로는 담을 수도 없고 부릴 수도 없다. 


급히 이룬 것은 급히 사라진다. 순간에 솟은 것은 순간에 무너진다. 뿌리가 없는 화병 속 꽃은 금세 시든다. 뿌리 얕은 나무는 잔바람에도 쓰러진다. 물이 얕아지면 놀던 고기도 떠나간다.


속히 이루려고 서둘지 마라. 뭍에서 배를 띄우지 마라. 얄팍한 마음으로 남의 생각을 저울질하지 마라. 자신의 공을 뽐내면서 남을 업신여기지 마라. 모두 자신의 깊이를 얕게 하는 어리석음이다. 올려다볼 때는 바닥이 단단한지를 먼저 살펴라.



장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맘껏 높아지라고. 맘껏 꿈을 펴라고. 그러면서 묻는다. 당신은 얼마나 깊으냐고. 혹여 뭍에서 배를 띄우느라 끙끙대지는 않느냐고. 지푸라기 몇 개 띄울 물로 세상을 논하고 있지는 않으냐고. 


높아지기만을 바라는 세상이다. 깊이를 보지 않고, 바닥을 무시하고, 기둥을 간과하고 오직 끝단의 높이에만 매달리는 형국이다. 


너도나도 올려다만 볼뿐 아래를 보지 않는다. 아래가 깊으면 저절로 높아진다는 단순한 이치를 모르는 탓이다. 바다를 꿈꾸는가. 그럼 먼저 물을 채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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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스승이다. 누군가 당신을 배우고, 당신 길을 걷고자 한다. 당신을 닮고, 당신을 따르고자 한다. 


따르는 줄이 길다면 당신이 아주 근사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당신은 반면교사다. 누군가는 당신이란 거울로 자신의 허물을 비춰본다. 


당신은 참스승인가, 아니면 당신의 허물로 남의 허물을 비추는 거울인가. 당신의 자녀가 당신을 닮아간다면 반길 일인가, 꺼릴 일인가. 이왕이면 참스승으로 살자. 누군가의 길이 되고, 꿈이 되는 그런 삶을 살자. 



큰 스승은

회초리를 들지 않는다


그윽하면 오래 머물고 고요하면 절로 맑아진다. 높으면 푸르러지고 넓으면 깊어진다. 골짜기의 난초는 두루 향을 풍길 뿐 나를 알아달라고 목을 빼지 않는다. 그윽한 자태로 머물 뿐 나를 봐달라고 목청을 높이지 않는다. 


군자는 난을 닮았다. 그윽이 덕에 머물고, 고요히 뜻에 머문다. 세상을 향해 요란스레 외치지 않는다. 큰 것은 담담하다. 바다는 고요하고, 태산은 늘 그 자리다. 


큰 부모는 자식에게 윽박질하지 않는다. 회초리를 들지 않고 스스로 모범이 된다. 모범으로 가르친 자식은 세상을 살면서 어긋남이 적다. 무언지교(無言之敎), 노자는 큰 가르침은 말이 없다고 했다.



빈 깡통이 시끄럽고, 빈 수레가 요란하다. 물이 얕으면 자갈조차 소리를 내며 떠내려간다. 속이 비어서 시끄러운 줄 모르고, 아는 게 많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짐이 가벼워서 덜컹대는 줄 모르고 많이 실은 때문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니 세상이 요지경이다. 행동으로 깨우치는 자가 진정 큰 스승이다. 


몸소 실천하지 않는 가르침은 헛된 교훈일 뿐이다. 작은 가르침은 빈말을 세상에 흔들어대고, 큰 가르침은 행함으로 세상에 모범을 보인다. 


작은 지식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큰 지식은 자신을 스스로를 닦으려 한다. 세상 어디서나 작은 게 시끄러운 이치다. 



군자는

타산지석으로 옥을 간다


다른 산의 거친 돌로 자기의 옥을 간다(他山之石 可以攻玉). 《시경》소아편에 나오는 시의 한 구절이다. 


소인은 군자에게도 배우지 못한다. 군자는 소인에서도 배운다. 세상 만물 모두가 군자의 스승이다. 스승이 많으니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진다. 


타산지석은 소인이고, 옥은 군자다. 군자는 타산의 거친 돌을 숫돌로 삼아 자기의 옥을 간다. 타인의 하찮은 언행이나 허물을 자기를 다스리는 거울로 삼는다. 


덕이 부족한 자를 보면 자신의 인품을 되돌아보고, 앎이 부족한 자를 보면 자신의 학문을 되돌아본다. 그러니 사방이 모두 스승이고, 세상이 큰 배움터다. 성인은 일정한 스승이 없다 했다.      



소인은 남을 탓하고, 군자는 자기를 나무란다. 주자는 “안이 차면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이 비면 밖으로 객기를 부린다”고 했다. 


안이 차면 세상 보는 눈이 여유롭고, 안이 비면 세상 보는 눈이 날카롭다. 수시로 치르고, 수시로 찔린다. 소인이 목소리가 큰 데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소인은 용기와 만용의 구별이 서투르다. 만용을 용기로 착각한다. 진짜 가짜의 구별 또한 어설프다. 가짜를 진짜로 믿고, 사이비로 세상을 어지럽힌다. 소인은 언변에 혹하고, 포장에 혹한다. 한데 사이비는 언변과 포장, 이 둘을 즐겨 쓴다.



당신은

스승이면서 제자다


세상의 인정은 생각보다 가볍다. 굶주리면 아부하고 배부르면 떠난다. 이익 앞에서는 너절한 태도로 굽신거리고, 손해다 싶으면 의로움까지 냉정하게 팽개친다. 


물론 깊은 인정도 있다. 후한 시대 설포(薛包)는 상당한 재산가였다. 어느 날 조카가 재산을 나눠달라고 하자 늙은 노비는 자기가 데리고 있겠다며 말했다. “이 사람들은 나와 일한 지가 오래되어 네가 부리기 어려울 것이다.” 


황폐한 땅과 기울어진 농막은 자신이 갖겠다며 말했다. “이것들은 내가 젊었을 때 관리한 것이어서 정이 깊다.” 



남루한 그릇과 물건은 자신이 취하겠다며 말했다. “이것들은 평소에 쓰던 것이어서 내 몸과 입에 편하다.”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다. 흰색끼리 모이면 검은색을 흉보고, 검은색끼리 모이면 흰색을 비웃는다. 그게 세상의 인정이다. 


누가 당신을 참스승으로 부른다 해서 당신이 참스승이 되는 건 아니다. 악은 악을 선으로 부른다. 


사특한 자는 당신에게 붙어 사욕을 취하려고 당신을 참스승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중요한 건 누가 당신을 참스승이라고 하느냐다. 


인간은 모두 누군가의 스승이며 누군가의 제자다. 당신은 누구의 스승인가. 반면교사의 스승인가, 정면교사의 스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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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에서 주저앉지 마라. 정상은 바로 그 너머에 있다.


숨은 8부 능선에서 가장 가쁘다. 닿을 듯 닿지 않고, 되돌리기엔 흘린 땀이 아까운 바로 그 지점이다. 고지를 밟는 자와 포기하는 자는 여기서 갈린다. 아홉 길 산을 만드는 일도 한 삼태기 흙에서 어긋난다. 고지는 고비 몇 보 앞에 있다. 숨이 차다는 건 정상이 멀지 않았다는, 희망이 가까워진다는 신호다.



조금만 더 버텨봐라


맹자는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고자 할 때는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그의 근골을 피곤케 하고, 그의 창자를 굶주리게 한다”고 했다. 심신을 지치게 하고 뜻이 어긋나게 함으로써 의지를 단련시키고 능력을 키우려는 하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견디고 피는 꽃이 아름답다. 매화는 추위를 견디고, 난초는 적막함을 견디고, 국화는 뙤약볕을 견디고 꽃을 피운다. 대나무는 사철 비바람을 견디고 꿋꿋이 선다. 인간이 4군자를 좋아하는 건 그들이 견뎌낸 ‘꿋꿋함’을 아는 까닭이다. 그게 쉽지 않음을 아는 연유다.


무릇 일에는 고비가 있다. 큰일일수록 고비는 더 험하다. 난관도 천만 갈래다. 섣달 매화꽃 향기는 뼈를 애는 추위를 견딘 선물이다. 견딘 만큼 더 멀리 향을 뿜어낸다. 그건 “나는 추위를 견뎌냈다”는 ‘자기선언’이다. 



공자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고 했다. 세상사 뒤돌아봐야 아는 게 참으로 많다. 만물은 극에 이르면 반전한다(物極則反). 어둠은 빛으로, 추위는 더위로 세상사는 끝없이 유전한다. 삶은 매 순간 달라지고, 무언가로 변해간다. 고비를 넘어야 꿈에 닿고, 허물을 벗어야 새로운 세상을 본다. 


혹여 지금 당신은 고빗길에 서 있는가. 지치고 두렵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가. 그럼 한 번만 더 용기를 내봐라. 조금만 더 견뎌봐라. 당신은 용기로 시작했다. 그러니 끝도 용기로 맺어라. 추위를 견디고 향기를 뿜어내는 섣달 매화를 그려봐라.



두려움에 지지 마라


두려움은 악마들이 즐겨 쓰는 무기다. 사람에게 두려움만 심어놓으면 싸움은 ‘백전백승’이다. 물론 악마가 전승을 챙겨간다. 두려움은 암세포만큼이나 증식이 빠르다. 스스로 퍼져가고, 스스로 강해진다. 두려움이 벽을 치면 인간은 한 발도 못 나간다. 


그러니 높아지기 전에 미리 허물어야 한다. 그게 용기다. 그게 희망이다. 공자는 “산을 만들 때 한 삼태기를 쌓지 못하고 그만두는 것도 내가 그만두는 것이고, 평탄한 땅에 한 삼태기를 붓고 나아가는 것도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세상만사 결국은 ‘나’다. 내가 나아가고, 내가 물러난다.



고빗길에선 잠시 멈춰도 된다. 숨을 골라도 된다. 하지만 너무 뒤를 돌아보지는 마라. 뒤돌아볼수록 걸음걸이가 꼬인다. 인생은 앞으로 가는 여정이다. 숱한 고비를 넘는 산행이다. 정상에 오른 자와 중턱에서 내려온 자가 산에서 본 세상 풍경은 너무 다르다. 


산에 정상은 무수하다. 모든 꼭대기에 오를 필요도, 오를 이유도 없다. 다만 당신이 간절히 이르고 싶은 어딘가가 있다면 그땐 힘을 내봐라. 힘껏 내디디고, 두려움에 맞서라. 고비에서 주저앉지 마라. 잊지 마라. 고비 몇 보 앞에 닿고자 하는 ‘그곳’이 있다는 사실을. 



강을 건너야 바다에 이른다


“어부들은 바다의 위험과 폭풍우의 괴력을 잘 안다. 그런데도 그게 바다로 나서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된 적은 없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인간이 위대한 건 위험을 무릅쓸 줄 아는 용기라고 강변한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불굴의 어부 산티아고의 입을 빌려 “바다에는 이 세상처럼 친구도 적도 있지만, 인간은 결코 쉽게 패배하는 존재가 아니다”고 되뇐다. 그건 자신에게 용기를 심으려는 주문이다.



한 걸음을 내디뎌도 당신 걸음이고, 한 걸음을 물러서도 당신 걸음이다. 당신 걸음은 오롯이 당신 것이다. 고비에서 앞으로 나아갈지, 뒤로 물러설지의 선택 역시 온전히 당신 몫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삶에는 무수한 고비가 있고, 고비마다 물러서면 당신은 결코 개울을 벗어나지 못한다. 개울을 건너야 강에 이르고, 강을 건너야 바다에 닿는다.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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