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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살아가는 이야기

그 겨울, 어머니의 사랑으로 말린 나의 속옷들의 추억

 가을비 한 번에 속옷 한 벌이라고 했지만 그 시절은 왜 그리도 일찍 추웠을까. 마당가 오동나무가 그 많던
 잎들을 된서리 한 번에다 털어버릴 때쯤, 사람들은 겨울옷을 찾아 입어야한다. 그리곤 봄까지 벗어버리질
 못했다. 벗고 나면 온몸이 썰렁하고 허전해서 견디기 힘든 것이다.



 

워낙 높고 깊은 골짝마을이라 바깥 날씨야 그렇다 해도 우풍 심한 방안도 바깥이나 진배없이 지독한 칼바람이 스며들었다. 방 윗목의 수수깡 동가리에 쌓아둔 고구마가 봄까지  가지 않고 얼어 썩어나간다. 걸레도 개숫물도 얼어버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방 한가운데 놓인 질화롯가에 빙 둘러앉아 불을 파헤쳐서 우리 여섯 남매의 열두 개, 고사리 손은 서로 밀쳐내고 끌어다 대주며 곱은 손을 녹이곤 한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한테 아쉽게 자리를 내주거나 다시 뺏기도 하며….


4남 2녀. 그 서열 중간에 두 살 터울로 어정쩡하게 낀 언니와 나는 머슴애들 틈에 치어서 있는 듯, 없는 듯이 자랐다. 그러다보니 딸들이라 해서 여자 속옷을 얻어 입겠다는 욕심도 언감생심이었다. 가을 추수 마치고 여윳돈 생기면 장마당에 나가 치수 상관없이 여섯 벌을 사다 방바닥에 펴놓은 걸 각자 골라 입으면 되었다.

 

장마에 채마밭 무올라오듯이 쑥쑥 크는 애들 키를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거니와 정강이까지 올라가든, 끝이 길어 몇 번 접어 올리든 불평이 통하지 않았다. 긴 겨울추위를 견뎌낼 수 있는 걸로도 모두 행복해했다.

 

마당 끝의 오동나무와 문간기둥을 가로질러 맨 빨래줄이 끊어질까봐 불안할 정도로 가득 널어놓은 빨래는 한낮에도 땡땡 언 채로 고드름 길게 늘이며 여러 날을 두고 말랐다. 단 한 벌뿐인 옷을 빨고 나면 허전한 속살을 홑옷으로 감추며 어서 마르길 기다린다.

 

 

숱하게 삶아 대서 고무줄이 힘없이 늘어지는 후줄그레한 내복. 내일 당장 입어야 할 사람들 것만이라도 우선 걷어 들여 밤늦도록 등잔불 곁에 바짝 당겨놓고 화로에 말리시던 엄마모습. 그래도 안되면 이불 밑에라도 깔아 말리지만 아침까지도 눅눅한 채라 그냥 입고 학교를 가는 때도 여러 번이었다.

 

워낙 신장이 크지 않은 이유도 있었겠지만 애들 입던 옷이 최종적으론 엄마 차지였다. 여러 벌에서 이리 잘라 잇대고 저리 뜯어내 깁고 또 기운 층층 각색 내복은 그야말로 옷이라기보다 들판의 허수아비조차 남사스럽다고 벗어던질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모두 겨울에 낳게 됐는데 어머니는 산후조리를 돌봐주러 오시면서 두꺼운 속옷을 사오셨다. 사실 처녀적 이후로는 습관이 안돼서 내복을 잘 입지 않았고 정이나 추우면 얇은 거를 입던 터라 몸에 부기만 빠지면 갑갑하다고 벗어버려 두꺼운 내복 입을 일이 없어지곤 했다.

 

이사를 하려고 장롱 속을 정리하는데 그동안 안입고 둔 두꺼운 내복 몇 벌이 눈에 띄었다. 짐을 줄일 겸 버릴까하다가 친정어머니 생신에 내려가는 김에 갖다 드리면 요긴히 입으실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나이는 못 속이는구만. 이젠 그런 내복을 입어야 견디겠지? ”  곁에서 남편이 속도 모르는 소리를 한다.
  “ 시골 엄마 갖다 드리려구 그래. 촌에서 한 번씩이라도 입고 버리게. ”  그러자 남편 목소리가 대뜸 한 옥타브 올라갔다.
  “ 이사람, 정신이 있나. 장모님은 평생 남 입던 헌옷이나 입으셔야 돼? 그거 당신이 나중에라도 입고 젤 좋은 걸로 두어 벌 

    사다드려.”

  그 말이 내 가슴을 무섭게 쳤다.

 

 

그렇다. 왜 엄마는 아무거나 입어도된다는 고정관념을 가졌을까. 아마 평생 그렇게 살아오시는 모습만 보아 와서 내 잠재의식 속에 뿌리박혀 버렸을 거였다. 우리남매가 한 벌씩만 보내드려도 여섯 벌을 넉넉히 껴입을 테니 이번 겨울은 추위를 타지 않게 해드려 한다.

 

속옷이 얇아서가 아니라 무심하기만한 자식들 때문에 느낄, 뼈에 싸늘한 추위를 막아드려야지. 이 글 시작하기 전에 모처럼 드린 전화 한통이 그나마 군불 한 아궁이 더 때신 만큼은 되시려나. 평생 의지하던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시고 오늘밤도 홀로 춥게 주무실 어머니. 오물조물 여섯 새끼들 한 이불속에다 가로 세로 모아 놓고 긴 밤 지켜주시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다.


박정순(인천시 동구 송현동)



 있늘 이 형님 만의 비법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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