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1848~1903)의 1897년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에서 출발하자.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고갱은 정신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었떤 것으로 전해진다. 딸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한 고갱은 자살을 결심하고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 마지막 작품을 남기기로 한다. 원근법도 무시한 이 불안한 구도의 대작(大作)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림설명> 그림의 오른쪽 아래, 잠든 아기를 세 명의 여인이 둘러싸고 있다. 여인 두 명의 피부는 희고 한 명은 검다. 고갱은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림은 현대 인류가 맞닥뜨린 딜레마와 묘하게 연결된다.

 

 

 

 

<사진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구글 베이비'>

인도의 한 대리모 공장. 얼굴이 검은 인도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 갓 태어난 아기는 백인이다. 이 아기를 만들어낸 난자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다니는 젊고 아름다운 여대생의 것. 의사는 탈진한 인도 여자의 품에서 아기를 끌어내 미국에서 온 부유한 불임 부부에게 안겨준다. 인도 여자는 운다. 부부는 행복한 표정으로 잔금을 치르고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스라엘 여성 감독 지피 브랜드 프랭크가 2009년 발표한 다큐멘터리 <구글 베이비>의 한 장면이다. 현재 인도 대리모 산업의 규모는 연간 1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산업이 번성하면서 대리모들은 '아기 공장'으로 불리는 기숙사에서 모여 살기도 한다.

 

 

 

 

잉태와 출산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적어도 근대 이전까지는 그랬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에 대한 인류 전반의 공감대는 긴 인류사를 지배해 온 여성 혐오와 차별의 역사를 뛰어넘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급속하게 발달한 유전공학과 생식공학은 '그래도 자궁은 경이롭다'는 공고한 관념을 완전히 뒤엎었다. 생의학 기술 발달 초기만 해도 여성은 임신 여부와 시기를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 존재로 부상하리라고 여겨졌다. 인류는 아이의 성별을 선택할 수 없고 폐경기 이후에는 임신할 수 없는 생물학적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리라는 환상에 들떴다. 그러나 이 기술들은 결과적으로 여성의 생식통제력을 빼앗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모체는 철저하게 도구화됐다. 제3세계 여성이 대리모로, 서구 백인 여성이 난자 제공자로 각자의 자리에서 분업화된 노동을 시작했다. 생명체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도 자유롭게 처분 가능한 상품이 되었다. '대지'의 모성적 이미지가 서서히 사라진 것도 이 시기다. 여성적 감수성은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일부 여성학자들은 유전공학과 생식공학을 신체에 대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강탈하는 요소라고 분석한다.

 

 

 

 

 

어쨌든 이렇게 잉태와 출산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게 된 인류에게 재앙이 닥친다. 다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이야기로 돌아가자. 서기 2027년. 인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불임이 된다. 마지막으로 태어난 18세 소년이 폭탄 테러로 숨지자 전 세계는 절망한다. 폭력과 무정부주의에 휩싸인 런던은 광신적인 폭력주의자들이 장악한다. 이 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다. 한 흑인 이민자 소녀가 임신한 것. 왜 하필 흑인 이민자인가. 비로소 정치가 개입되는 대목이다. 영국 본토인으로부터 차별에 시달리던 영국 내 이민자 반정부 집단은 이 소녀를 자신들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도구로 이용키로 한다. 오늘날 대리모 기술의 정치적 논리와 꼭 닮았다.

신성한 행위였던 잉태는 이제 원하는 유전자를 가진 아기를 얻기 위한 기술적 수단으로 변모했다. 당초 대리모 기술은 단순히 아이를 원하는 불임 부부를 위해 고안됐지만 이제는 맞춤 제작된 아이를 갖고자 하는 세계 부자들의 욕망의 도구가 됐다. 얼마전 영국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과 중국에서는 많은 대리모 에이전시가 성업 중이다. 특히 산아제한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중국에서는 약 10만 달러(우리돈 1억 1100만원)를 미국 대리모 에이전시에 내면 중국 내 1자녀 정책에 걸리지 않고 '똑똑하게 디자인 된' 아이에게 미국 시민권까지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대리모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민권을 가진 자녀를 통해 미국으로의 가족이민을 계획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 시민권자는 21세가 되면 부모를 위해 영주권 발급을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의 불임병원과 대리모 에이전시들은 중국어로 된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중국어가 가능한 직원을 채용할 정도다. 무엇보다도, 이 같은 방법을 통해 미국 국적의 아이를 갖게 되면 합법적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미국으로 빼돌려 관리할 수 있기 떄문에 정치적 정쟁의 타깃이 될 수 있는 중국 주요 인사들이 대리모 기술을 선호한다고 한다. 주로 아이비리그 출신 유전자를 선택하고, 일부는 취향에 따라 키가 큰 금발 여성의 유전자를 고르기도 한다. 원하는 성별을 지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전병 없는 건강한 아기를 갖기 위한 유전자 선별은 기본이다

 

 

 

 

 

결국 자신의 아이가 동료들에 의해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녀는 도망친다. 그리고 감독은 영화를 종교 수난극으로 마무리 지어 버리면서 신 앞에 나약한 인간을 조롱한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회개파 사람들은 이 같은 재앙이 자신들의 오만 때문이었다고 오열한다. 주인공 테오가 총격적이 한창인 가운데 아기를 안고 조심스럽게 건물을 나오는 후반부 장면에서 군인들은 무릎을 꿇고 성호를 긋는다. 유토피아를 만들려던 인류의 오만이 결국 디스토피아를 초래했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영화는 끝난다.

인도 정부는 비자 규정을 개정해 해외 동성 커플과 동성애자가 대리모를 이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대리모와 아동보호를 위한 조력 생식 기술 관련법도 발의를 준비 중이다. 법안 초안에 따르면 모든 불임 치료 센터는 등록 후 규제 당국의 감독을 받아야 하고, 대리모에게는 보험이 제공돼야 한다. 뒤늦은 조치이지만, 자국이 세계 대리모 산업의 허브가 돼 가고 있는 현실을 위기로 인식한 결과다.

이 같은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대리모 산업이 멀지 않은 미래 인류의 중심 산업이 될 것은 명백해 보인다. 독일의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는 저서 <위대한 미래>에서 2050년쯤 되면 대리모는 정식 직업으로 인정받게 되며 동성애 커플의 30%가 자녀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따라 '맞춤 아기'가 보편화 돼 100년쯤 지나면 우수한 유전 형질의 인류만 남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똑똑한 사람들만 남은 지구는 낙원일까.

 

글 / 세계일보기자 조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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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차인표 씨. 그는 나눔으로 제2의 인생을 산다. 2006년 아내 신애라 씨의 등쌀에 떠밀린 인도 빈민촌 봉사.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손을 잡은, 그 짧은 순간이 그의 모든 것을 바꿔놨다. 인생도, 삶도, 가치관도 모두 변했다. 그는 “우리나라 아이들을 돕는 것은 생활이고, 다른 나라 아이들을 돕는 것은 봉사”라고 말한다. 그는 힘든 사람에게도 나눔을 권한다. 나눔이 주는 행복의 크기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누구나 걷고싶은 ‘행복의 시간’ 

 

탄생은 축복이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죽음은 평온이다. 그러니 삶은 탄생이란 축복과 죽음이란 평온 사이를 걷는 것이다. 그 사이를 걸으며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공통점은 있다. 누구나 행복의 시간을 걷고 싶어한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행복은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보다 훨씬 냉혹하다. 당연한 권리인 행복이 생각만큼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선뜻 ‘네’라고 대답하는 당신은 그리 많지 않다. 

 

인간은 돈, 명예, 권력, 지식, 인기, 건강, 쾌락 등을 추구한다. 추구한다는 것은 그것의 지향점이 행복과 닿아 있다. 그러니 돈이나 명예, 지식이나 권력은 행복이란 집합의 원소들이다. 이런 원소는 등가(等價)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건강이 절대적 행복이고, 누군가에겐 명예가 행복의 전부다. 누구는 돈에 매달리고, 누구는 권력을 좇는다. 명분은 모두 행복이다. 그러니 섣불리 ‘행복은 00다’라고 단언하는 건 인생을 그만큼 덜 살았다는 반증이다. 

 

 

채워가는 행복

 

채워가는 행복이 있다. 돈·명예·권력·지식으로 행복지수를 끌어올린다. 이건 끊임없이 욕망을 높여 가는 방식이다. 욕망이 채워지면 다시 더 큰 욕망을 꿈꾼다. 원래 욕망은 스스로 자제하지 않는다. 넘쳐도 넘치는 걸 모르는 것이 욕망이다. 그러니 채워가는 욕망은 그 끝이 없다. 언제나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채워가기 행복’을 폄하하는 건 곤란하다. 하루하루 만들어가는 행복도 나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인류 문명은 어쩌면 ‘채워가기’의 결과물이다.

 

돈은 어느 정도 채워야 행복해질까. 여기에는 답이 없다. 아니, 돈과 행복이 비례한다는 공식도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돈에서 행복이 나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돈에서 불행이 나오는 것 또한 맞는 말이다. 어찌 보면 돈은 행복에 중립적 변수다. 돈을 어떻게 추구하고,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돈과 행복의 방정식이 달라진다. 명예나 권력도 마찬가지다. 인성이 빠진 지식은 때로 치명적인 독이 된다.

 

 

비워가는 행복

 

비워가는 행복도 있다. 마음을 비우고, 물질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는 것이다. 이건 끊임없이 욕망을 낮춰가는 방식이다. 낮춰서 생긴 욕망의 공간엔 행복이 깃든다. 그러니 비움의 행복을 아는 사람은 비우고 또 비운다. 적게 먹고, 체중을 줄여 건강을 유지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비움은 채움보다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비움의 행복, 그 노하우를 터득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다. ‘나는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애쓰기보다 그것을 제한함으로써 행복을 구하는 방법을 배웠다.’ 평생 ‘행복’을 설파한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이다.

 

비움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물질을 비우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함은 감사의 공간을 크게 한다는 뜻이다. 사소함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은 마음이 그만큼 비워진 것이다. 감사는 행복의 둥지다. 감사가 커지면 행복의 덩치도 그만큼 커진다. 이건 분명한 삶의 이치다. 지금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면 스스로의 감사의 크기를 한번 재봐야 한다. 물질 그 자체를 줄이는 심플한 삶도 행복지수를 높인다. 옷장을 비우고, 음식을 줄이는 것도 일종의 비워가는 연습이다.

 

 

행복·건강지수 높이는 ‘비움’

 

채움과 비움. 어느 방식을 택하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채움으로만 살아가는 삶은 때때로 숨이 가쁘다. 휴식은 바쁜 일상의 숨고르기다. 비움은 욕망의 숨고르기다. 차인표 씨의 삶은 채움보다 비움이 더 큰 행복임을 시사한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내일이 먼저 올지 내생이 먼저 올지 아무도 모른다.’ 채우기에만 급급한 삶이라면 한 번쯤 되새겨볼 만한 티베트 속담이다.

 

모든 것은 연습이다. 운동선수가 감동을 주는 것은 금메달 은메달이 아니다. 그건 메달 뒤에 숨은 노력의 소중함이다. 그걸 알기에 꼴찌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비워가는 삶도 마찬가지다. 운동선수가 육체를 단련해 좋은 성적을 내듯, 꾸준히 마음을 훈련하면 행복이란 게임에서도 스코어가 쑥쑥 올라간다. 채워가는 삶으로 심신이 지쳤다면, 비워가는 삶으로 인생의 핸들을 조금 꺾어보는 것은 어떨까. 행복에도, 건강에도 좋은 ‘일석이조’의 노하우다.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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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에서 기자 노릇을 할 때, 지적장애 성인들의 자활 시설 ‘바다의 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수원시 이목동의 야산 자락에 자리한 이 시설은 지적장애인들의 부모들이 돈을 모아 만든 것입니다. 그곳에서 함께 생활하는 20여명의 남녀 지적장애인들은 저의 취재 방문을 무척 즐거워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환대가 고마웠으나 언행이 부자유스러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무래도 불편해서 자꾸 화장실을 들락거렸습니다. 그곳에서 장애인 생활교사로 일하고 있던 한 젊은이는 저의 그런 속내를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친구들은 다운증후군, 자폐증등을 앓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처음엔 어려워요. 하지만, 자꾸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저절로 통하게 됩니다.”




프랑스 영화 제8요일’(자꼬 반 도흐마엘 감독, 1996년작)을 DVD로 다시 보면서 그 젊은이의 말을 절로 떠올렸습니다. ‘제8요일’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소통 과정에서 생기는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세일즈 기법 강사인 아리(다니엘 오떼이유 분)와 다운증후군 환자 조지(파스칼 뒤켄 분)가 주인공입니다. 아리는 아내 줄리(미우 미우 분)와 별거 중입니다.

그는 아내와 재결합을 해서 사랑스런 두 딸과 함께 살고 싶지만, 줄리는 그의 차갑고 타산적인 모습에 너무 질렸던지라 좀처럼 마음을 돌리지 않습니다. 아내의 차가운 반응에 부닥쳐 마음이 어지러운 아리는 비 오는 밤길에 차를 몰고 가다가 지나가는 개를 치게 됩니다. 그 개의 주인이 바로 요양원에서 탈출한 환자 조지입니다.


아리는 조지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를 집으로 데려오는데, 조지는 초콜렛 알레르기로 발작을 일으키거나 만나는 여성마다 구애를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해서 아리를 기겁하게 만듭니다.
아리는 조지가 혐오스러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순수함에 매력을 느낍니다. 아리가 딸의 생일 선물을 전해주기 위해 아내의 친정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을 때, 그의 외롭고 슬픈 마음을 달래준 유일한 사람이 조지였습니다.


아리는 조지를 요양원으로 돌려보낸 후 무기력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지가 요양원 친구들을 모두 데리고 아리의 세일즈 강연장에 나타나고, 아리는 뜻밖의 상황인데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조지 일행과 함께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아리와 조지 일행은 줄리의 집 앞에서 폭죽을 터트리며 불꽃놀이로 딸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줄리와 딸들은 비로소 아리에게 얼어붙어 있던 마음을 녹이고 그에게 다가와 안기지요.

이 작품에서 조지 역을 했던 파스칼 뒤켄은 실제로 다운증후군 환자입니다. 연극무대에서 활동한 적이 있고, 자꼬 반 도흐마엘 감독과는 영화 ‘토토의 천국’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고 합니다. 그는 ‘제8요일’에 함께 출연한 다니엘 오떼이유와 함께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합니다.

아시다시피, 염색체 숫자 이상으로 나타나는 다운증후군은 운동장애 뿐 만 아니라 지적장애 현상을 초래합니다. 다운증후군 환자들은 비만 경향을 보이며, 눈꺼풀이 쳐지고 귀가 변형된 모습의 불균형적인 얼굴 특징을 나타냅니다. 영화 속 조지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조지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조지의 천진하고 순박한 모습 때문에 자주 미소를 짓게 됩니다. 영화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내레이터는 관객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 신은 여덟째날 빠진 것이 없나 확인한 후 조지를 만들었다. 참으로 보기 좋더라.’ 저는 내레이터의 말에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습니다.


저를 그렇게 만든 것은 물론 이야기의 힘이겠지만, 음악도 상당부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곳곳에 흐르는 샹송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엄마-Maman La Plus Belle Du Monde’는 조지가 꿈에 그리는 엄마의 자상한 목소리 처럼 관객의 마음을 감미롭게 어루만집니다.

 

 
이 영화를 좋은 작품이라고 추천하는 것은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또 얼마나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인지를 잘 담고 있어서입니다. 아리가 조지를 데리고 조지의 누나 집에 갔을때, 누나 부부는 반갑기보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자형은 조지에게 요양원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누나는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 조지야, 나도 너에게 할 만큼 했다. 나도 내 인생이 있다.”


중증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관객이라면 이 대목에서 조지의 누나와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 장면에서 장애인 자활시설 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 신부님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 장애인 문제는 개인, 가족이 책임져서는 안 됩니다. 사회와 국가가 전적으로 맡아서 보호해야 합니다.”
 

영화 속의 아리는 환한 표정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사람과 사람이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스스로에게 너그러움과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에 신의 은총을 입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말을 연구하는 한 선배에 의하면, '자(者)’는 ‘그 자가 여기에 왜 왔나’에서처럼 사람을 얕잡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러한 사람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학자, 연기자, 작곡자, 작자 등의 용례에서 ‘자’는 사
   람을 얕잡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장애인’을 ‘장애자’라고 부르면 왠지 비하하는 느낌이 납니다. 언중의 습관이 그렇게 굳어진 듯합니다. 그래
   서 언론에서는 ‘장애자’란 용어를 피하고 있습니다. 저도 장애자란 말은 쓰지 않습니다. 일부 언론인들은 장애인을 ‘장
   애우’라고 표현합니다. 좀 더 존중하는 뜻을 담고 싶어서이겠지요.

 

   그런데 이 용어의 사용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보통 사회집단이나 계층을 나타내는 단어는 1인칭, 2인칭, 3 인칭 모
   두의 표현이 가능해야 하나 ‘장애우’의 경우는 1인칭으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장애우다’는 표현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른 집단이나 계층과 달리 ‘장애인’만 유독 집단명사로 ‘장애우’
   라고 부르는 것이 시혜와 동정의 관점이 아닌지 헤아려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일원
   으로 편견없이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동료애를 지니는 것이겠지요.


장재선/ 문화일보 기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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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ennpenn 2010.08.27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우 교훈적인 영화로군요~
    기회가 있으면 한번 보고 싶습니다.

  2. killerich 2010.08.27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저도 감동깊게 봤던 영화네요^^..

  3. *저녁노을* 2010.08.27 1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을이두 보고 싶어지네요.ㅎㅎ
    함께 사는 우리니 말입니다.

    잘 보고 가요.

  4. 또웃음 2010.08.27 1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게요. 장애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봐야겠어요.
    장애자나 장애인도 결코 낮춤말이 아닌데 말이죠.

  5. mami5 2010.08.27 1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두 기회가 있으면 보고싶네요..
    함께하는 우리라고 생각하며...

  6. 새라새 2010.08.27 2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뭉클해지고 감동이 밀려오는 영화인것 같네요..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확률은 61:1입니다.”
“의사 선생님, 확률이 높은 건가요?”

“네. 확실한 건 양수검사를 받으셔야 알 수 있습니다.”

아내는 임신 4개월로,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갔던 병원에서 의사가 우리 부부에게 한 말이다.
뱃속의 아기는 다운 증후군,
속칭‘몽고’라고 하는 병에 걸릴 확률이 61대 1이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께 정상 수치가 어느 정도냐고 묻자 1200대 1이라고 한다.

몇 년 전 대학교를 다닐 때 봉사활동으로 다녀왔던 보육원의 다운 증후군 아이들 얼굴이 떠
올랐다. 순간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멍해지며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양수 검사 날짜를
받고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우리 부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백미러에
보이는 아내는 울지도 못
하고 멍한 표정으로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일이 우리 부부에게 생기다니…’


집에 도착해서 아이를 위해 아내가 짜고 있던 배냇저고리를 보자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아
내를 돌아보니 내가 들고 있는
배냇저고리를 말없이 응시하더니 이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며칠 뒤 수 만 가지 생각으로 우리 부부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을 때 아내가 한마디 말을했다.

“그냥 키워요. 우리 아이인데…”

우리 부부의 사랑으로 잉태한 생명, 우리를 찾아온 축복, 하늘이 우리에게 준 선물… 하지만 며칠 동안 나를 괴롭힌 건 현실
이었다.
장애아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자식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하는 말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닌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양수 검사도 안 받겠다던 아내에게 검사를 받고 확진을 받아야 준비도 해야 할 것 아니냐는
말로 설득해 겨우 병원에 도착했다.
양수 검사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 검사 실패
후 두 번째 검사도 실패하면 며칠 후 다시 받아야 하는데 다행히 성공했다.
이제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됐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간 우리 부부는 인터넷을 통해 여러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61대 1이라는 수치가 굉장히 높은 확률
이라는 것과 장애아를 키우는 것은 부모의 평생을 바쳐야
하는 일이라는 것 등이다.

“우리 아들놈한테 마누라 뺏기겠네.”
“나도 우리 애한테 당신 뺏길 거 같은데?”

아직 우리 아이를 못 보아서일까? 제법 농담도 하면서 우리 부부는 양수 검사 결과 날을 기
다렸다.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숨기려는 나와는 달리 아내가 배냇저고리를 마저 짜는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검사 결과 날 며칠 전, 밖에 나와 있는데
문자가 왔다.


“정상이래”

다른 일 다 제치고 후다닥 들어간 집에서 아내가 배냇저고리를 들고 나를 반겨주었다.


“우리 재엽이 입을 옷 다 완성됐어. 예쁘지?”

“그래 예쁘다. 너무 예쁘다…”

5개월 뒤, 우리 아기인 재엽이는 뭐가 급했는지 3주 일찍 태어났다. 그것도 제왕절개로.
배냇저고리 입은 모습이 너무 귀여운
우리 아들.
언제나 알게 될까? 배냇저고리에 담긴 엄마의 사랑을, 엄마 아빠의 눈물을.

백승훈/ 경기도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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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라새 2010.07.03 16: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음을 따뜻하게 먹으니 하늘도 도우셨나봐요^^
    앞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행복한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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