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카메룬의 슈바이처  장계만

  민간외교전선 이상없다

 

 

 

 

 

 

 

 

자식들이 아빠인지 몰라볼 만큼 새카맣게 탄 얼굴로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의사가 있었습니다.
의사 장계만.


 

그는 1945년에 출생하여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림대학교 한강성심병원에서 일반외과를 전공하였으며, 육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당시 외무부에 근무하던 친구의 추천으로 1977년 정부파견의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고국에 남겨둔 채 인술을 펴고자

아내와 함께 동경하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두툼한 겨울 잠바를 걸치고 파리를 경유하여 카메룬(Cameroon)에 도착했지만, 국제공항은 입국대가 턱없이 높아서 짐을 밟고 올라서서 입국 수속을 마쳐야 할 정도로 허름한 시외버스 정거장과도 같았습니다.

 

처량하고 쓸쓸하였으나 내심 마음을다잡고 한국대사관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미터기에 표시된 대로 요금을 건네는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무뚝뚝하던 택시운전사가 갑자기 긴장하더니 짐도 들어주고 사근사근 대하는 등 마치 VIP를 모시는 자세로 변한 것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프랑스 프랑과 카메룬 쎄파프랑(CFA)을 혼동하여 택시비의 100배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택시운전사가 내려 준 곳이 태극기가 펄럭이는 한국대사관이 아니라 인공기가 휘날리는 북한대사관이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비동맹권 아프리카 국가를 대상으로 한 외교 강화 추진 차원에서 1972년에 카메룬과 북한과의 수교가 이뤄졌습니다. 대한민국과 카메룬과는 1969년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여 왔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서로의 입장을 견지하는 등 양국은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택시는 다시 달렸습니다.
태극기를 보고 그제서야 그는 안심했습니다.
대사관으로 들어가 그의 입국을 당당히 알렸고, 다음날 오기로 했는데 벌써 도착하였다며 대사관 직원들은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카메룬 바멘다병원(Bamenda Provincial Hospital)과

수도 야운데보건소에서 2년간 외과과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한때 나이지리아 땅인 바멘다는 수도 야운데에서 서울~ 부산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영국 식민지로 있었기에 그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현지인들은 소위 카메룬과 서부아프리카에서 널리 쓰이는 크레올어(Creole Language), 또는 ‘비진잉글리쉬’라고도 하는 현지영어를 사용하는 데 처음에는 어색하였지만 잘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바멘다는 해발 2,000m로 항상 가을 같이 서늘하여 말라리아 환자가 없었습니다.

일반외과 과장으로 환자를 진료하는데, 특히 탈장과 화상환자가 많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였고, 수술은 책을 보며 연습하였습니다. 때 전공 중 그만둔 마취과 의술을 현지에 전수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탈장환자 수술을 하였는데 성공적이었습니다.

처음 수술할 때에 흑인은 피부가 까만데 속은 어떤 색깔일까 궁금하였지만 우리와 같았으며 피부 색깔만 달랐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너무 태연히 받아들였습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하여 환자는 의사를 한 번만 보고 죽어도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만큼 의사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고, 의사 장계만에 대한 존경은 하늘같았습니다.

 

카메룬 부통령은 바멘다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의사였기에 서로 대화가 통하였습니다.

언젠가 바멘다의 대 부족의 추장 동생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정성스런 치료로 완쾌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대문에서 현관 그리고 거실까지 빨간 카펫이 깔려 있어 당황하였습니다.

그때 추장은 고맙다는 인사를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왔고, 고마움의 표시로 추장의 딸인 공주까지 부인으로 맞이하라 하니, 옆에 있던 그의 부인이 황당하여 ‘You are bad!(나빠요!)’라고 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추장의 공식행사장에서는 모두가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였지만, 그의 부인은 한국식으로 허리만 굽히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만약 추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사람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닌 그곳에서 말입니다.

순간 의사 장계만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추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부인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부인에게는 추장과의 까다로운 격식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부통령과는 언제라도 통화가 가능하였고, 추장은 그들 부부를 은근히 떠받들었습니다.

민간 외교전선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곳의 전통의학이 독특하여 골절환자는 약초를 바르면 금세 나았습니다.

한번은 그의 친구인 미국보험회사 지사장이 교통사고로 뼈가 부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치료도 제대로 못해 주어 얼마 후 미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방문하였더니 멀쩡하였습니다.

그는 사무실에서 깁스도 안한 채로 회사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서 물어보니 어떤 풀즙을 발랐더니 통증 없이 아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경우를 그는 여러 차례목격하였습니다.

 

카메룬 사람들은 참 유순합니다.

그러나 한번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렸습니다. 근무하는 2년 동안 싸움이나 실랑이하는 것을 거의 못 보았는데, 한번 싸웠다 하면 도끼를 휘둘렀습니다. 사망 아니면 대형 사고였습니다.


카메룬은 인구 부족으로 인한 출산장려 정책이 활발하였습니다. 이슬람 사회가 아닌데도 일부다처제였습니다. 그런 정책 때문인지 심지어는 중,고등학생들까지 불타는 사랑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학생이 임신을 하면 경사였습니다. 취직을 보장받고 정부의 보조가 뒤따랐습니다.

때문에 카메룬의 산부인과 의사는 밤낮 없이 바빴습니다.


카메룬 사람들은 동양인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시절 카메룬에도 이소룡의 영화가 인기여서 동양인은 모두 장풍을 하는 줄 알고 겁냈습니다.

반갑다고 손을 잡으면 도망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1979년 1월 귀국하였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즐거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를 카메룬 사람들은 아쉬워하였습니다.

 

카메룬의 바멘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웃나라 가봉 랑바레네에서 생명외경의 신념으로 거룩한 인술을 펼쳤던 슈바이처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원주민들은 카메룬에도 슈바이처와 같은 의사가 있는데, 그가 바로 한국에서 온 슈바이처라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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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룬의 슈바이처 김시원

카메론의 울려 퍼진 한국의 노래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
꼬마야 꼬마야 잘~가거라.


아프리카 카메룬(Cameroon)의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우리나라 동요가 울려 퍼집니다.
어린 아이들과 한국 사람들이 어울려 재미있게 고무줄놀이를 하는데,

그 나라 어린이들은 한국말로 노래를 잘도 부릅니다.

 


2001년. KBS 《한민족리포트》에〈닥터 김의 미라클 가방〉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야룬데 이슬람마을 어느 초등학교의 고아들을 찾은 의사 김시원과 한국의 자원봉사자들이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마음속의 사랑을 찾아 카메룬까지 왔다는 의사 김시원.

 


그는 1952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 공부를 마쳤고, 1986년 병원을 개업하였습니다. 평탄하면서도 행복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1991년 교통사고에서 기적처럼 살아나면서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제2의 삶을 결심하게 됩니다. 1993년. 아내와 세 딸을 설득해 의료기술과 시설이 낙후한 카메룬으로 향했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카메룬 야운데 의과대학부속 중앙병원(L'hospital Central de Yaounde)에 부임하여 2007까지 15년간 근무하였습니다.

 

 

각오는 하였지만, 너무 가혹하였습니다. 지독한 아프리카식 프랑스어는 차라리 고문이었으며, 한마디로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4개월 배운 프랑스 어로는 환자의 증상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수술실을 따라 다니며 조수를 자청하고 현지의사들과 가까워지려 했지만 철저히 찬밥 신세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는 끝이 없었습니다.....

 

 

 응급환자의 연락을 받고 수술실로 달려가면 마취의사는 아예 없고, 마취의사를 데려오면 수술실 간호사가 없어졌습니다. 겨우겨우 사람을 모아 놓으면 수술포가 소독되어 있지 않거나, 산소통을 보관함에 넣은 채 수간호사는 열쇠를 갖고 퇴근해 버린 다음이었습니다.

간호사 출신인 부인 서현숙 역시 수모 아닌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내로라하던 그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켰습니다. 눈 딱 감고 이 악물고,AIDS 환자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멋도 모르고 따라 온 금지옥엽 세 딸이 외국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언어문제로 3일 만에 쫓겨났으며, 병원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는 누가 슬쩍 가져가 버렸습니다.

 

 

의사 김시원은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버팀목이었던 아내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피나는 적응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환자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었고, 그들만의 프랑스 어에 귀가 열릴 즈음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아졌으며, 외과 의사들도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카메룬에서 최고의 의사라 자타가 인정하던 외과부장의 위암환자 수술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과도하게 절제하고 수술의 기본을 무시하는 엉터리였습니다. 그가 메스를 잡아 수술을 했고, 아무런 합병증세없이 봉합했습니다. 야운데병원에서는 어려운 췌장암 수술은 아예 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완벽하게 집도하였습니다.


수술실에는 수술기구가 없었습니다. 그는 수술기구가 담긴 가방을 메고 다녔으며, 그 가방에는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방을 열고 이것저것 꺼내 수술을 마치면, 사경을 헤매던 환자는 살아났습니다. 소위 기적의 가방이었습니다.

환자가 입원하려면 입원비는 물론 모든 경비를 먼저 내야 합니다. 죽어가는 응급환자라 해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살려놓으면 돈을 안내고 도망 을 간다고 하였습니다.

 

 

 ..일대 참상이었습니다..

 

의사인 그는 슬펐지만, 응급실과 수술실에는 장갑이나 소독약 그리고 간단한 수술기구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약품과 의료소모품은 너무 비쌌습니다.

 


KOICA에 그가 보고한 1994년 3/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진료, 치료환자 250여 명. 수술건수 110여 건 등.
진료환자, 수술건수 계속 증가. 진료 연 1,800여 명, 수술 300여 건. 총상이나 열상환자 증가.

경제난과 치안부재로 강절도 등의 증가가 원인. 충수염의 경우에도 병원에 오지 못하고 버티다가

복막염으로 악화되어야 오는 실정.

간호사도 없이 의과대학생인 조수 한명만 데리고 큰 수술도 해내야하는 실정임....


그들은 돈 몇 천 원이 없어 아파도 병원을 찾지 못했으며, 막다른 상황에서야 그를 찾아왔으나, 그때는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 고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불행과 고통을 덜어줄 방안을 모색하여 1998년 평소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뜻을 같이한 봉사자들과 별도 진료소를운영하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40여 명의 환자를 무료 진료하였고, 또한 벽지농촌과 오지를 찾았습니다. 아내는 간호사를 자처하였습니다.


카메룬의 의료인력은 주로 프랑스에 유학하였으나, 그 수는 극히 적었습니다. 야운데 중앙병원에서 배출시키는 전공의는 1년에 고작 4~5명에 불과하여 그는 의료 인력 양성에 적극 참여해 10여 년 동안 50여 명의 의사를 길러냈습니다.

 

 


그가 휴가와 보수교육 등으로 자리를 잠시 비웠습니다. 다시 만난 환자들이 아주 귀국해 버린 것으로 알고 많이 낙담하여 눈물을 글썽일 때, 이들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었었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음속의 진정한 사랑을 찾게 해준 것은 바로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그에게 더 소중하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카메룬 축구팀은 강호 아르헨티나와 루마니아를 꺾고 당당히 8강에 진출하였습니다. 카메룬 국기를 상징하는 녹색상의에 빨강과 노란색이 조화를 이룬 강렬한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들에게 세계인은 환호를 보냈습니다. 축구만은 강대국인 나라였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중부의 카메룬은 프랑스와 영국의 통치를 받다가 1961년 독립하였습니다. 부존자원이 풍부하여 수도 야운데는 비교적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나, 나라는 후진국이었습니다.


수술하다가 정전이 되면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랜턴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수술을 마쳤으나 마음이 불안하였습니다.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 가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카메룬 최대 병원 응급실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게다가 1997년 한국의 IMF환란으로 대사관이 철수하여 그는 KOICA 직원도 없는 그곳에서 교민들의 주치의와 보호자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15년의 세월을 뒤돌아봅니다.
카메룬의 푸른 신록과 붉은 땅이 환상으로 다가옵니다.
좌절을 극복하고 보람을 일궈냈습니다.
사랑을 찾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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