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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나눔&봉사

[금요특집]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제3부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카메룬의 슈바이처 김시원

카메론의 울려 퍼진 한국의 노래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
꼬마야 꼬마야 잘~가거라.


아프리카 카메룬(Cameroon)의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우리나라 동요가 울려 퍼집니다.
어린 아이들과 한국 사람들이 어울려 재미있게 고무줄놀이를 하는데,

그 나라 어린이들은 한국말로 노래를 잘도 부릅니다.

 


2001년. KBS 《한민족리포트》에〈닥터 김의 미라클 가방〉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야룬데 이슬람마을 어느 초등학교의 고아들을 찾은 의사 김시원과 한국의 자원봉사자들이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마음속의 사랑을 찾아 카메룬까지 왔다는 의사 김시원.

 


그는 1952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 공부를 마쳤고, 1986년 병원을 개업하였습니다. 평탄하면서도 행복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1991년 교통사고에서 기적처럼 살아나면서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제2의 삶을 결심하게 됩니다. 1993년. 아내와 세 딸을 설득해 의료기술과 시설이 낙후한 카메룬으로 향했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카메룬 야운데 의과대학부속 중앙병원(L'hospital Central de Yaounde)에 부임하여 2007까지 15년간 근무하였습니다.

 

 

각오는 하였지만, 너무 가혹하였습니다. 지독한 아프리카식 프랑스어는 차라리 고문이었으며, 한마디로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4개월 배운 프랑스 어로는 환자의 증상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수술실을 따라 다니며 조수를 자청하고 현지의사들과 가까워지려 했지만 철저히 찬밥 신세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는 끝이 없었습니다.....

 

 

 응급환자의 연락을 받고 수술실로 달려가면 마취의사는 아예 없고, 마취의사를 데려오면 수술실 간호사가 없어졌습니다. 겨우겨우 사람을 모아 놓으면 수술포가 소독되어 있지 않거나, 산소통을 보관함에 넣은 채 수간호사는 열쇠를 갖고 퇴근해 버린 다음이었습니다.

간호사 출신인 부인 서현숙 역시 수모 아닌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내로라하던 그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켰습니다. 눈 딱 감고 이 악물고,AIDS 환자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멋도 모르고 따라 온 금지옥엽 세 딸이 외국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언어문제로 3일 만에 쫓겨났으며, 병원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는 누가 슬쩍 가져가 버렸습니다.

 

 

의사 김시원은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버팀목이었던 아내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피나는 적응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환자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었고, 그들만의 프랑스 어에 귀가 열릴 즈음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아졌으며, 외과 의사들도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카메룬에서 최고의 의사라 자타가 인정하던 외과부장의 위암환자 수술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과도하게 절제하고 수술의 기본을 무시하는 엉터리였습니다. 그가 메스를 잡아 수술을 했고, 아무런 합병증세없이 봉합했습니다. 야운데병원에서는 어려운 췌장암 수술은 아예 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완벽하게 집도하였습니다.


수술실에는 수술기구가 없었습니다. 그는 수술기구가 담긴 가방을 메고 다녔으며, 그 가방에는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방을 열고 이것저것 꺼내 수술을 마치면, 사경을 헤매던 환자는 살아났습니다. 소위 기적의 가방이었습니다.

환자가 입원하려면 입원비는 물론 모든 경비를 먼저 내야 합니다. 죽어가는 응급환자라 해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살려놓으면 돈을 안내고 도망 을 간다고 하였습니다.

 

 

 ..일대 참상이었습니다..

 

의사인 그는 슬펐지만, 응급실과 수술실에는 장갑이나 소독약 그리고 간단한 수술기구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약품과 의료소모품은 너무 비쌌습니다.

 


KOICA에 그가 보고한 1994년 3/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진료, 치료환자 250여 명. 수술건수 110여 건 등.
진료환자, 수술건수 계속 증가. 진료 연 1,800여 명, 수술 300여 건. 총상이나 열상환자 증가.

경제난과 치안부재로 강절도 등의 증가가 원인. 충수염의 경우에도 병원에 오지 못하고 버티다가

복막염으로 악화되어야 오는 실정.

간호사도 없이 의과대학생인 조수 한명만 데리고 큰 수술도 해내야하는 실정임....


그들은 돈 몇 천 원이 없어 아파도 병원을 찾지 못했으며, 막다른 상황에서야 그를 찾아왔으나, 그때는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 고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불행과 고통을 덜어줄 방안을 모색하여 1998년 평소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뜻을 같이한 봉사자들과 별도 진료소를운영하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40여 명의 환자를 무료 진료하였고, 또한 벽지농촌과 오지를 찾았습니다. 아내는 간호사를 자처하였습니다.


카메룬의 의료인력은 주로 프랑스에 유학하였으나, 그 수는 극히 적었습니다. 야운데 중앙병원에서 배출시키는 전공의는 1년에 고작 4~5명에 불과하여 그는 의료 인력 양성에 적극 참여해 10여 년 동안 50여 명의 의사를 길러냈습니다.

 

 


그가 휴가와 보수교육 등으로 자리를 잠시 비웠습니다. 다시 만난 환자들이 아주 귀국해 버린 것으로 알고 많이 낙담하여 눈물을 글썽일 때, 이들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었었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음속의 진정한 사랑을 찾게 해준 것은 바로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그에게 더 소중하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카메룬 축구팀은 강호 아르헨티나와 루마니아를 꺾고 당당히 8강에 진출하였습니다. 카메룬 국기를 상징하는 녹색상의에 빨강과 노란색이 조화를 이룬 강렬한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들에게 세계인은 환호를 보냈습니다. 축구만은 강대국인 나라였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중부의 카메룬은 프랑스와 영국의 통치를 받다가 1961년 독립하였습니다. 부존자원이 풍부하여 수도 야운데는 비교적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나, 나라는 후진국이었습니다.


수술하다가 정전이 되면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랜턴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수술을 마쳤으나 마음이 불안하였습니다.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 가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카메룬 최대 병원 응급실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게다가 1997년 한국의 IMF환란으로 대사관이 철수하여 그는 KOICA 직원도 없는 그곳에서 교민들의 주치의와 보호자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15년의 세월을 뒤돌아봅니다.
카메룬의 푸른 신록과 붉은 땅이 환상으로 다가옵니다.
좌절을 극복하고 보람을 일궈냈습니다.
사랑을 찾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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