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카메룬의 슈바이처  장계만

  민간외교전선 이상없다

 

 

 

 

 

 

 

 

자식들이 아빠인지 몰라볼 만큼 새카맣게 탄 얼굴로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의사가 있었습니다.
의사 장계만.


 

그는 1945년에 출생하여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림대학교 한강성심병원에서 일반외과를 전공하였으며, 육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당시 외무부에 근무하던 친구의 추천으로 1977년 정부파견의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고국에 남겨둔 채 인술을 펴고자

아내와 함께 동경하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두툼한 겨울 잠바를 걸치고 파리를 경유하여 카메룬(Cameroon)에 도착했지만, 국제공항은 입국대가 턱없이 높아서 짐을 밟고 올라서서 입국 수속을 마쳐야 할 정도로 허름한 시외버스 정거장과도 같았습니다.

 

처량하고 쓸쓸하였으나 내심 마음을다잡고 한국대사관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미터기에 표시된 대로 요금을 건네는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무뚝뚝하던 택시운전사가 갑자기 긴장하더니 짐도 들어주고 사근사근 대하는 등 마치 VIP를 모시는 자세로 변한 것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프랑스 프랑과 카메룬 쎄파프랑(CFA)을 혼동하여 택시비의 100배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택시운전사가 내려 준 곳이 태극기가 펄럭이는 한국대사관이 아니라 인공기가 휘날리는 북한대사관이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비동맹권 아프리카 국가를 대상으로 한 외교 강화 추진 차원에서 1972년에 카메룬과 북한과의 수교가 이뤄졌습니다. 대한민국과 카메룬과는 1969년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여 왔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서로의 입장을 견지하는 등 양국은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택시는 다시 달렸습니다.
태극기를 보고 그제서야 그는 안심했습니다.
대사관으로 들어가 그의 입국을 당당히 알렸고, 다음날 오기로 했는데 벌써 도착하였다며 대사관 직원들은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카메룬 바멘다병원(Bamenda Provincial Hospital)과

수도 야운데보건소에서 2년간 외과과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한때 나이지리아 땅인 바멘다는 수도 야운데에서 서울~ 부산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영국 식민지로 있었기에 그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현지인들은 소위 카메룬과 서부아프리카에서 널리 쓰이는 크레올어(Creole Language), 또는 ‘비진잉글리쉬’라고도 하는 현지영어를 사용하는 데 처음에는 어색하였지만 잘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바멘다는 해발 2,000m로 항상 가을 같이 서늘하여 말라리아 환자가 없었습니다.

일반외과 과장으로 환자를 진료하는데, 특히 탈장과 화상환자가 많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였고, 수술은 책을 보며 연습하였습니다. 때 전공 중 그만둔 마취과 의술을 현지에 전수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탈장환자 수술을 하였는데 성공적이었습니다.

처음 수술할 때에 흑인은 피부가 까만데 속은 어떤 색깔일까 궁금하였지만 우리와 같았으며 피부 색깔만 달랐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너무 태연히 받아들였습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하여 환자는 의사를 한 번만 보고 죽어도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만큼 의사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고, 의사 장계만에 대한 존경은 하늘같았습니다.

 

카메룬 부통령은 바멘다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의사였기에 서로 대화가 통하였습니다.

언젠가 바멘다의 대 부족의 추장 동생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정성스런 치료로 완쾌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대문에서 현관 그리고 거실까지 빨간 카펫이 깔려 있어 당황하였습니다.

그때 추장은 고맙다는 인사를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왔고, 고마움의 표시로 추장의 딸인 공주까지 부인으로 맞이하라 하니, 옆에 있던 그의 부인이 황당하여 ‘You are bad!(나빠요!)’라고 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추장의 공식행사장에서는 모두가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였지만, 그의 부인은 한국식으로 허리만 굽히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만약 추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사람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닌 그곳에서 말입니다.

순간 의사 장계만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추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부인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부인에게는 추장과의 까다로운 격식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부통령과는 언제라도 통화가 가능하였고, 추장은 그들 부부를 은근히 떠받들었습니다.

민간 외교전선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곳의 전통의학이 독특하여 골절환자는 약초를 바르면 금세 나았습니다.

한번은 그의 친구인 미국보험회사 지사장이 교통사고로 뼈가 부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치료도 제대로 못해 주어 얼마 후 미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방문하였더니 멀쩡하였습니다.

그는 사무실에서 깁스도 안한 채로 회사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서 물어보니 어떤 풀즙을 발랐더니 통증 없이 아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경우를 그는 여러 차례목격하였습니다.

 

카메룬 사람들은 참 유순합니다.

그러나 한번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렸습니다. 근무하는 2년 동안 싸움이나 실랑이하는 것을 거의 못 보았는데, 한번 싸웠다 하면 도끼를 휘둘렀습니다. 사망 아니면 대형 사고였습니다.


카메룬은 인구 부족으로 인한 출산장려 정책이 활발하였습니다. 이슬람 사회가 아닌데도 일부다처제였습니다. 그런 정책 때문인지 심지어는 중,고등학생들까지 불타는 사랑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학생이 임신을 하면 경사였습니다. 취직을 보장받고 정부의 보조가 뒤따랐습니다.

때문에 카메룬의 산부인과 의사는 밤낮 없이 바빴습니다.


카메룬 사람들은 동양인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시절 카메룬에도 이소룡의 영화가 인기여서 동양인은 모두 장풍을 하는 줄 알고 겁냈습니다.

반갑다고 손을 잡으면 도망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1979년 1월 귀국하였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즐거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를 카메룬 사람들은 아쉬워하였습니다.

 

카메룬의 바멘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웃나라 가봉 랑바레네에서 생명외경의 신념으로 거룩한 인술을 펼쳤던 슈바이처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원주민들은 카메룬에도 슈바이처와 같은 의사가 있는데, 그가 바로 한국에서 온 슈바이처라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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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풀칠아비 2011.07.08 1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금요일에는 어김없이,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시는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야기를 전해주시는군요.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그리고 아낌없는 박수 보내드립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에티오피아의 슈바이처  유민철

에티오피아의 아픔을 보듬다

 

 

 

 

 

 

 


아픔과 배고픔 그리고 슬픔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에티오피아(Ethiopia).


한때 솔로몬의 후손이라 자처하며 아프리카의 자존심이었던 에티오피아는 지금은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였고, 오늘도 뜨거운 태양 아래 기아와 질병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에는 아픔을 같이하고 사랑을 나누었던 성형외과 의사 유민철이 있었습니다.


그는 1941년에 태어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련의를 마쳤습니다.

1975년, 그는 아프리카 파견의사 모집에 지원했습니다.

인술에 목마른 곳에서 봉사하며 살고 싶었던 평소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가 갑자기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부모는 반대하였습니다.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아들의 뜻을 꺾을 수 없게 된 부모는 몇 년 만 있다가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부인과 다섯 살 난 딸, 세 살 난 아들이 동행하였습니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블랙 라이온(Black Lion) 국립의료원으로 파견되어 30년이 지난 2005년 정년퇴임하였습니다.

 

 

학생 기술 회진을 하고 있는 의사 유민철

 


그가 도착한 1975년은 하일레 셀라시에 왕정이 군부쿠데타로 무너진 직후였습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운 나라였지만, 경제는 끝없이 추락만 거듭하였습니다.

세계는 에티오피아를 도왔지만, 쿠데타가 터지고 나서는 에티오피아를 외면하였습니다.


공산화된 그곳의 현실은 혹독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몇 달 일하지도 못하고 쫓겨났으나 현지 의사의 도움으로 의료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1980년대까지 잇따라 내란과 분쟁을 겪으며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여 병원은 전상자들로 넘쳤습니다. 절단, 총알제거 수술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습니다.

 

1991년 공산 정권이 무너질 때는 집 근처까지 총탄이 날아왔습니다.

사관에서는 철수를 종용했지만, 그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평화는 찾아왔지만 병원은 또 다른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병원 내과환자 중 60%가 AIDS 환자인데다 낙후된 의료장비와 시설은 그를 항상 감염의 위험으로 내몰았습니다.

에티오피아는 AIDS환자가 3백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아디스아바바는 더욱 심해서 6명 중 1명이 감염자입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넘쳐나 AIDS 검사도 없이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화상을 입은 소말리아 난민 환자를 수술할 때였습니다.

환자에게 가벼운 마취를 한 뒤 수술에 들어갔는데, 환자가 그의 팔을 치는 바람에 피 묻은 수술 칼에 손을 베이고 말았습니다. 환자가 AIDS에 걸렸다면 그도 감염될 우려가 큰 것입니다.

환자의 피를 채취해 AIDS 검사를 요청했으나 하루 뒤 결과가 나오기까지 착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환자는 AIDS 감염자가 아니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선 싸구려 부탄가스를 쓰는 가정이 많아 가스폭발로 인한 화상을 입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구순구개열인 언청이가 흔할 뿐만 아니라 턱없이 부족한 의료시설로 종양이 생겨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말기에 이르러서야 의사를 찾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유일한 성형외과 전문의인 의사 유민철은 일상처럼 종양과 화상 그리고 언청이 환자의 수술을 맡았습니다.

 

주 6회 언청이 수술을 하였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끝이 없었습니다.

입천장이 바깥으로 드러난 환자, 얼굴이 기형인 환자를 수술했습니다.

수술 뒤 좋아하는 환자들을 볼 때면 그는 뿌듯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병원을 찾는 환자는 약값은 물론 수술 장갑이나 반창고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형편이었고, 이것마저 살 수 없는 환자도 흔하였습니다.

입원환자는 그나마 치료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일반 환자들이 여기 오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빈 병실이 나오기만 기다리다 죽어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가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 보고한 1996년 1/4분기 활동내용입니다.
 

분기별 600여 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거나 수술함.

선천성 질환 및 총상환자, 화상환자 등을 주로 치료함.

 

의료 활동상의 애로사항은 마취약, 고가 항생제 등의 부족과 위생 재료의 부족

그리고 AIDS 환자의 증가는 큰 문제점임.

 

 

장갑이나 반창고를 살 수 없는 극빈자에게 그는 장갑 등을 주었습니다.
연신 고마워하며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는 이들.

어떤 이는 나중에 찾아와 지푸라기가 묻은 달걀 10여 개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순박한 표정에서 그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맛보곤 했습니다.


아디스아바바 국립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레지던트 트레이닝을 맡아 200명이 넘는 외과 의사를 배출시켰고, 난민촌 방문을 통해 다수의 빈곤자 들에게 무료 의료 봉사활동을 실시하였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들과 고아원에 무료 진료와 지속적인 지원을 하였고, 의술만큼이나 신앙심도 깊었던 그는 노숙 아동, 전쟁 미망인을 지원하는 사회봉사 활동에도 헌신적이어서 ‘걸인의 아버지’라 불렸습니다.

 

에티오피아는 그에게 있어 삶 전체였습니다.

 

50년 전의 아시아와 비슷한 수준인 아프리카 지역은

50년 후에는 분명 우리 후손의 삶의 터요, 외교와 무역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를 돕는 일은 50년 후 세계무대의 주역이 될 우리 후손을 위한

외교의 시작인만큼 더 많은 이들이 앞장서 주길 바랍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에티오피아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정부와 민간차원의 인도적 지원을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1997년 그의 슈바이처 같은 감동적인 삶은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실렸습니다.

 

1982년 정부에서는 의사 유민철에게 수교훈장 숙정장을 수여하였고, 1994년에는 KOICA 총재 표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제7회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30년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그 오랜 세월을 에티오피아인으로 살았습니다.

30년 세월을 뒤로 하면서 어느 기자와 나눈 대화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제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를 떠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조선일보 97년 6월 23일자 기사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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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풀칠아비 2011.07.01 12: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금요일마다 여기서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시는 분들을 만나는 행복한 시간을 갖게 되네요.
    오늘도 아낌없는 박수 보내드립니다.
    행복한 7월 보내세요.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간다의 슈바이처  유덕종

받은사랑이 더 많기에, 사랑할 수 있었다

 

 

 

 

 

 

 

대학 입학 땐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인생을 어떻게 살더 라도 의미가 없어 보였죠.

어차피 의사가 될 거라면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졸업하기 전에 결심을 했죠.

아프리카로 가야겠다고, 가서 나보다 힘든 사람을 도와야겠다고요.

 

2010년 잠시 귀국한 유덕종이 모교인 경북대학교 웹진에 전한 서면 인터뷰 내용입니다.
유덕종은 1959년 출생하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아프리카 우간다(Uganda)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린 두 딸과 임신한 아내가 눈에 밟혔지만, 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캄팔라 물라고(Mulago) 국립병원에서 16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곳에서 머물며 캄팔라 마케레레(Makerere)대학에서 의학을 강의하며 진료도 계속하였습니다.

 

강의를 마친후 의과 대학생들과 함께

 

캄팔라 외곽에 의사가 처방한 약이 환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기초가 제대로 서 있는 병원을 세우려고 동분서주하는 의사 유덕종을 경북대학교 동문들은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습니다.

 

서른 셋, 의사로서의 앞날이 창창한 그가 처음 우간다 땅을 밟았다.

리고 그의 나이 쉰하나. 젊음도, 열정도, 꿈도 모두 그 땅에 바쳤다.

18년 동안 그를 붙든 것은 배고픔과 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그곳 사람들이었다.

 

 우간다의 열악한 의료상황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고 병원건립을 준비한 것만도 9년째.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이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는 폐결핵과 위암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은 뭔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하는 생각을 자주하였고, 의대에 들어가 크리스천이 되면서 아프리카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부터 아프리카에서 사는 문제를 상의했고, 동의를 받아 결혼했습니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그에겐 보람이고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들이 아플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모든 걸 다 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위로가 된다면 족하였다.

 

1992년 정부파견의사로 우간다에 도착한 그가 KOICA에 보낸 편지 일부분입니다.

 

저는 이곳에 도착하여 수도 캄팔라에 있는 물라고병원(Mulago Hospital)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병원인 물라고 병원의 시설이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곳의 재정상태가 엉망이라 기구와 약품이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입니다.

비싼 약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약도 없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환자를 지켜봐야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며칠 전 20세 밖에 되지 않은 환자가 당뇨혼수로 죽는 것을 보고 화가 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환자가 한국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걸어서 퇴원을 할 환자인데

속수무책으로 죽는 것을 보고 한동안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인구의 60%가 의사 한 번 만나 본 적이 없이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바짝 마른 결핵환자가 그를 보고 “Doctor, I am hungry.(선생님, 배고파요.)”라고 할 정도로, 환자들이 굶주려 죽어나가는 그곳의 병원은 차라리 난민촌이 었습니다.

 모기장만 있어도 말라리아 발병률을 60%가량 줄일 수 있지만, 모기장 구입도 큰 부담인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덕종은 한국의 앞선 의료기술과 의료기자재의 활용방법 등을 익혀 그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봉사에 나서리라 다짐하였습니다.


 1993년 7월.
 의사 유덕종은 어느 환자의 조직검사를 하다가 주사 바늘에 손이 찔렸습니다.

 끼고 있던 장갑에 피가 흥건히 고일 정도로 깊이 찔렸습니다.

 문제는 그가 AIDS환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치료약이 없는 천형…….

 

“순간 손가락을 잘라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그 상황에서

AIDS에 걸릴 확률이 3백분의 1이기 때문에 거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죠.”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까지 기다린 5개월간 그는 정상인이 아니었습니다.

 부부관계도 멀리하는 등 매사에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것을 깨달은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한 달 간은 정말 우울했습니다.

 

그러나 감염됐다 해도 5~6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동안 더 가깝게 AIDS환자를 치료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1994년 봄.
 이번에는 폐결핵이었습니다. AIDS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아프리카였기에 결코 간단한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큰딸 주은이가 뇌염에 걸렸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뇌염이 없지만, 일단 걸리면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명색이 의사라는 애비가 한다는 게 링거주사를 놓는 것뿐이었어요.
AIDS 때도, 폐결핵 때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는데, 막상 딸이 뇌염에 걸리자

‘왜 이곳에 왔나’하는 후회뿐이었습니다. 집 사람은 그저 울고 만 있었지요.”

1997년 8월 24일자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AIDS에 감염됐다 해도 몇 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동안 더 가깝게 AIDS환자를 치료할 수 있겠구나 하던 유덕종이였습니다.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던 환자가 완치된 후 퇴원하면서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입원환자의 80%가 AIDS 환자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AIDS 환자가 줄고 있는 나라가 우간다라며,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 아프리카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국에서 자리 잡은 대학 동기생과 비교해 본적이 없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부동산도 집도 없다. 하지만 그런 게 다가 아니다.

사람의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경제가 발전하면서 삶은 윤택해졌는지 모르지만 삶의 질은 퇴보한다는 인상이다.

 

내 눈길에 와 닿는 아프리카의 하늘은 아름답고, 힘과 용기를준다.

당신은 한국의 하늘을 가끔씩이라도 올려 보는가?

행복지수로 보자면 한국보다 아프리카 나라들이 더 높을지 모른다. 나는 행복하다.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행복한 의사 유덕종입니다.

 

우간다 캄팔라에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진료하는 유덕종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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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르세 2011.06.27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행복한 시간이 되세요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코트디부아르의 슈바이처  안순구

사랑을 실천한 의사 추장님

 

 

 

 

 

 

 

 

환자 치료를 잘하는 의사가 명의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상 사랑을 실천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의사.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한 안순구.

 

 


검은 대륙의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황색 슈바이처’라 칭송하였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아프리카를 사랑하였습니다.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난 아프리카에 미친 사람이었어요.

 

안순구는 1937년에 태어나, 1962년 가톨릭대학교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육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69년 코트디부아르 국립중앙의료원에 정부파견의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아비장국립 중앙의료원에서 1년간 열대의학과 프랑스어를 공부한 후, 디보 도립병원을 거쳐 띠아살레도립병원에서 26년간 봉직하다가 1993년 1월 영예로운 정년퇴직을 맞으면서 귀국하였습니다.


1975년 외무부장관 표창, 1997년 수교훈장 숙정장, 1982년 대통령 표창,1985년 코트디부아르 농림부장관 표창, 1994년 KBS해외동포상, 1995년 대한의사협회 표창 등을 수상하였고, 1994년에는 가톨릭대학교 명예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학생 시절부터 막연히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왔던 ‘사랑의 실천’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아프리카 외교의 일환으로 봉사할 의사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서를 냈고, 2~3년 정도를 예상하고 어린 두 딸을 떼어놓고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젊음을 송두리째 바친 3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 서부 기니아만 연안의 나라로서 면적은 한국의 4배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나라이지만, 수도를 벗어나면 바로 오지가 펼쳐집니다.

프랑스 식민지로 있다가 1960년 독립하였고, 공용어는 프랑스 어이며, 종교는 이슬람교와 토착신앙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1993년 시무식후 병원직원들과 함께

 

 

띠아살레시 도립병원장에 취임하면서 사랑의 실천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일한 의사 안순구와 현지 출신 간호사를 포함한 30여 명의 직원 그리고 40여 개의 병상이 고작인 가난한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열대성 기후와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으로 가족의 건강 위협은 물론, 토착민의 상이한 체질과 열대성 특이체질에 대한 의료지식 이 부족하여 모든 것을 다시 공부해야 했습니다.

특히 언어소통의 장애로 진료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은 드물고, 60개의 종족이 서로 다른 토착어를 제각기 사용 하고 있어 타 종족끼리는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진료나 회진 때면 통역관 3명을 동반해야 하였고, 환자가 오면 같은 종족의 간호사를 찾아 통역을 부탁해야 했습니다.


병원살림이 열악하여 종종 약품부족으로 치료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십 리 먼 길을 찾아와 병원 앞에서 서성이는 수많은 환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자비를 털어 의약품을 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갈 경우 X-Ray를 찍어봐야 하는데, 장비가 없으니 도무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나라 관계부처에 몇 번이나 의료지원을 건의하였지만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봉사하러 온 것이지 불평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마음을 다잡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해결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뼈가 부러진 사람들은 며칠 간 입원시켜 놓고 상태를 본 후 그 차이에 따라 조치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 온 이상 아프리카의 법을 따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들을 주민들도 차츰 이해하게 되었고, 의사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의 어른으로 서도 존경받게 되었습니다.

 

환자들은 말라리아, 피부기생충, 폐렴은 기본이고 원목수송차량들의 교통사고가 빈번해 새벽에 응급환자를 맞거나 한밤중에 왕진가방을 꾸리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출산에서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의 삶과 죽음을 보살피는 일 외에도 아버지 판정, 어린이 나이결정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으며, 인근 부족을 아우르는 유일한 해결사이기도 했습니다.

 

바우레족과 아베족 사이의 갈등을 풀었던 그는 두 부족의 명예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안순구가 치료한 환자의 수는 분기별 1,000명 정도가 예사였고, 예방접종까지 포함하면 2,000명을 훌쩍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병원 진료활동 이외에 순회 진료를 실시하였는데, 1992년 모무리진료소와 이로보진료소 등지에 월 2회 총 24회의 순회 진료활동으로 2,000여 명의 환자를 살폈습니다.

또 중, 고등학생들에 대하여 AIDS에 대한 예방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때로는 원주민들이 그를 마술사나 신적인 존재로 오해하였습니다.


AIDS 감염률이 10%정도 되는데, 그가 고쳐낼 수 있을 거라며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뻔히 아는데 조금 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그들을 볼 때 안타까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의료비는 무료입니다.

그래서 환자들도 부담 없이 병원을 찾았고, 의사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치료를 받다가 죽어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처럼 애써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원주민의 생로병사를 사랑으로 따듯하게 감싸면서 그 들은 의사 안순구를 삶의 주재자처럼 대하였고, 스스럼없이 그를 찾아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학교를 가야겠는데 자신의 나이를 모를 때, 키와 몸무게를 재고 치아의 수를 헤아리는 등 나름대로 검사를 하지만 당사자에게 몇 살이 좋겠느냐고 물어보고, 큰 무리가 없는 한 원하는 나이에서 역산해 생년월일을 정해 주었으며,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그를 찾았습니다.

 

사람이 귀한 곳이라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하면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혈액검사를 해주기도 하지만, 산모를 은밀히 불러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묻고서 아버지를 선택해 주는 현명함도 발휘해 주는 의사추장님이었습니다.

 

 

어머니날 행사에 그날 출산한 산모에게 선물증정

 

환자가 오면 무슨 종족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어디가 아파서 왔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띠아살레의 대표적인 인물은 그였습니다.

 

그들은 의사추장님을 부를때, ‘띠아살레 안순구’라 부릅니다.

그의 삶은 1994년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하면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바 있는데, 아프리카 체류 25주년을 기념하며 명예추장으로 추대되었던 장면입니다.

 


취임식장에 코트디부아르 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렸다.

마을 사람들은 의사선생님을 추장으로 모시게 됐다.

추장을 상징하는 의상이 둘러지고 띠아살레 안순구씨는 의사추장님이 되었다.

같이 어울려 춤을 추고 아프리카 노래가 울려 퍼진다.

아프리카에서 25년의 시간이 안원장에게 남긴 것은 바로 함께 살아간다는 것 아닐까.

피부색이 다르고 풍습이 달라도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

 

명예추장 추대식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는 안순구 [주간조선 95.9.7자]


의사 안순구가 의사추장으로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은 것은 바로 피부색이 다르고 풍습이 달라도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소박한 바람인 ‘사랑의 실천’에 따른 보람이었습니다.

열대의 악천후를 비롯한 제반 악조건 속에서 오직 훌륭한 의료인으로서 남겠노라는 다부진 결심 하나로 버텨온 시간들 속에서 아프리카인들의 믿음직한 보호자로 우뚝 서긴 했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가장으로서 또한 아버지로서의 아픈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부인과 어린 둘째 딸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가족은 본의 아니게 이산가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지낸지 2년 후에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스페인 라스팔마스로 마중을 나갔는데, 가슴에 커다란 이름표를 달고 스튜어디스의 손을 꼭 잡은 아이들이 부모도 몰라보고 엄마와 아빠를 찾아야 된다면서 울 때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프리카와 한국 그리고 파리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아온 탓에 세 딸들 중 첫째와 막내는 1살 때 헤어져 15살이 되어서야 만났습니다. 세 딸 모두 10세 전후해서 한국과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10년에 한 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아기를 낳으면 절대로 자식과 떨어져 지내지 않겠다고...

매일 일기에 써 부부를 울렸던

세 딸은 이제는 ‘부모님을 존경하고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의사 안순구가 코트디부아르 띠아살레를 떠나던 날. 마치 혈육의 생이별인양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온 원주민들은 그를 에워싸고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든 일을 기쁘게만 받아들여 장례식에서조차 춤추고 노래하던 그들에게 안순구는 사랑 그 이상이었습니다.

울면서 매달리는 원주민들에게 ‘이젠 세 딸과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설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귀국 도중 비행기 안에서 아내 의 손을 잡고 내내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던 그였습니다.
아베족의 노래를 들으며 아프리카식 죽음을 맞고 싶다던 안순구는 다 음 세상에 태어나도 꼭 다시 아프리카로 가고 싶다고 합니다.


일산 신도시에 그림 같은 하얀 돌담집.
31년 만에 돌아와 자리 잡은 보금자리.
안순구는 열대의학과 법률, 상식 등을 잘 몰라 고생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가이드를 정리하였습니다.
이제 안순구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한국의 도시생활을 하고 있지만,

프리카가 환청처럼 늘 그를 부르고 있습니다.


 

맨발로 몇 십리 병원을 찾던 원주민이 몹시도 그립네요.
한 달이 지난 지금도 현관 소리가 나면 원주민 환자들이 병원 문을 두드리는 것 같습니다.

눈에 선해요. 호롱불 하나 들고 새벽 3~4시부터 몇 십리 길을 달려와

아픈 아이를 절절한 눈으로 내맡기던 원주민들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요

 

 

아비잔 한인교회 입원환자 위문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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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닐라로맨스 2011.06.17 1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첫 한국인 추장님의 탄생인가요!?
    정말 멋지십니다~

  2. 풀칠아비 2011.06.17 1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신 분을 또 한분 뵙고 갑니다.
    아낌없는 박수 보내드립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탄자니아의 슈바이처  박형동, 서미라 부부

신앙의 힘과 생명 존중의 외경심으로

 

 

 

 

 

 

 

선교활동을 펴기 위해 1991년 8월 초 탄자니아로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가톨릭병원 일반외과장을 그만 둔 박형동(35)씨와 성남병원 정신과장인 서미라(34)씨 부부가 두 자녀와 함께

탄자니아 킬리만자로산 밑 인구 80만 명의 아루샤 기독병원에서 무료봉사하기 위해 출국한다.

 

 

그들의 장도를 격려하는 어느 신문 기사의 일부분입니다.
박형동은 1957년에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의대에서 일반외과를 공부하였고, 1991년부터 의료선교의 일환으로 탄자니아(Tanzania)에서 근무하다, 1993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신분이 변경되었습니다.

 

서미라는 1958년에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의대에서 정신병과를 공부하였고, 1991년부터 의료선교의 일환으로 탄자니아에서 근무하다, 1996년KOICA 정부파견의사로 신분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들은 부부였습니다. 그들이 몸담았던 병원은 킬리만자로 크리스천 메디컬센터(Kilimanjaro Christian Medical Center).

 

KCMC 중환자실에서의 진료모습


의사 박형동과 의사 서미라는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였으며, 평생의 동지였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났습니다.
부부의 어느 날 선언은 폭탄이었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로 간다. 의사보다는 선교사에 더 매력을 느낀다. 미련없이 떠나겠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이들 부부가 독실한 신자인줄은 알았으나, 막상 선교사로 떠날 줄은 몰랐습니다.

주위의 부러움을 받던 맞벌이 의사가 안정된 직업을 박차고 오지인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난다는 것은 그
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동부 인도양을 마주한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산이 있는 나라.
그들의 활동은 드넓은 아프리카 초원의 표범처럼 긍정적이며 역동적이었습니다.

 

의사 박형동은 일반외과 전문의였습니다.
탄자니아의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자 세스나기를 구입하여, 직접 몰고 하늘로 날아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호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신속히 사막을 날아가 최고의 의료 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를 제공하는 것에 착안하여, 경비행기를 타고 외과의사가 없는 지역을 순회 진료하면서 환자 수송에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탄자니아의 의료 상황도 여타의 아프리카 최빈국과 유사하였습니다.
불안한 전력 공급과 부족한 의료 장비는 물론 병원의 재정난으로 인한 마취약 부족으로 응급 수술 위주의 수술만 시행하였습니다.

 

수술을 하다가 불이 나가면 랜턴을 밝혀야 했습니다.
의사들의 협조가 부족하여 항상 갈등이 발생하였고, 생명 경시 등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좌절도 맛보아야 했습니다. 약품 밀반출과 금품수수 등의 부조리가 만연하였고, 병원도 항상 원조를 바라는 구태의연한 모습이었으며, 심한 부패와 불신으로 인하여 세계가 등을 돌렸습니다.

 

 

수술중 전기가 나가 후레쉬로 비춰가며 수술하고 있는 광경

 

 

그는 묵묵히 그의 본분을 지켰습니다.
그가 KOICA에 보고한 1993년 3/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치료한 환자는 약 400여 명으로 병명은 각종 외상, 화상, 위장질환, 혈관질환, 항문질환 등이다.

또한 위절제술, 소장대장절제술, 피부이식, 혈관외과수술 등 100여건의 수술을 집도하였다.

 

특히 그는 탄자니아 최초로 식도암 절제와 혈관 문합 그리고 흉부교감 신경절제수술 등을 시도하여 최신 의료시술을 선보였습니다.
매주 준의사 코스 수강생을 대상으로 외과학을 강의하였으며, 분기별 한차례씩 마사이족을 찾아 아픔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았으나 임박한 약품을 정가보다 싸게 구매하여 원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에는 브룬디(Burundi)와 르완다(Rwanda) 두 나라에서 발발한 내전과 부족간의 전쟁으로 탄자니아 서북쪽 국경지대에 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난민들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그는 UN이나 적십자기구 등에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난민수가 워낙 많아 세계 각국의 구호가 절실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예방 가능한 질환으로 죽어가는 환자가 많아 예방의학의 중요성도 주장하였고 보건소 건설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특히 심장센터 설립이 절실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르완다 난민 지원 프로젝트 활동 모습


 

 

의사 서미라는 신경외과 전문의였습니다.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에 의사를 파견할 때는 주로 Major과인 외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위주였습니다.

실제 탄자니아에서도 Minor과 전문의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탄자니아에서는 구순구개열인 언청이 등 성형수술이 필요한 환자수가 부지기수인데도 성형외과 전문의는한 명도 없는 상태였으며, 신경외과 전문의는 딱 한 명만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는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탄자니아의 정신질병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1994년. 3천2백만의 탄자니아 인구 가운데 전문적 정신치료가 요구되는 환자의 수는 70~80만 이상으로 추정되었는데, 아프리카는 미개발지역으로서 문화가 덜 발달하여 환경적인 스트레스가 적으므로 정신질환자가 적을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간질환자는 잘못된 문화적 관습과 가정불화 그리고 기생충의 만연으로 선진국보다 환자수가 2배이상 많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서미라 의사의 근무 모습

 

 

그가 KOICA에 보내온 1996년 1/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외래환자 분기당 외래환자는 450여 명. 카운슬링환자는 100여 명에 이르며 병명은 정신분열증, 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간질, 치매, 파킨슨증후군 등 다양하다.

의료 활동상의 문제점으로 정신과 약품구입의 어려움과 수입약품 대부분이 고가로 매매된다.

중증 정신질환자 수용시설 및 훈련인력이 부족하다.

정신질환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주재국과 주민의 반응이 호의적이나 정신과 의사의 태부족으로 훈련된

간호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KOICA에서 지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탄자니아 국민의 간질환자 실태 조사 및 진료 프로젝트를 실시하였으며, 세계적으로 치료를 요하는 간질환자의 수는 인구의 1~2%선으로 알려졌으나 탄자니아는 이보다 두 배가량 높은 3% 전후일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 원인으로 분만 시 뇌손상 후유증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열악한 교통시설로 인한 가정에서의 출산과 미비한 의료시설 및 여성할례 등 잘못된 관습으로 인한 산도손상에 기인하며, 기생충감염도 한 원인이라 지적하였습니다.

 

탄자니아 인구 중 약 백만 명 가까이가 치료가 요구되는 간질환자로 추정되며 이중 어떤 형태이든 투약을 받고 있는 환자 수는 불과 1%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그나마 약효가 떨어지는 페노바비탈에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탄자니아에 정신과 전문의가 불과 10명 내외인 것을 고려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의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의 수
는 불과 1천 명 내외일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정신질환자 인식증대와 정신과 위상 제고에 노력하였으며, 그의 부단한 노력으로 탄자니아에서 처음으로 정신과가 개설되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킬리만자로 영봉을 바라봅니다.

아프리카인의 성지라 일컬어지며, 적도 부근에 있으면서도 만년설로 덮여 있어 항상 번쩍거리는 산.
설산이 아프리카를 묵묵히 굽어보고 있습니다. 그들 부부는 그 산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강원도 산골에 들어와 있는 느낌 같아요.


젊음으로 버텼지만, 어찌 갈등과 좌절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힘과 생명존중의 외경심으로 탄자니아에서의 봉사활동을 성실히 수행하였습니다.

 

 

국민일보, 1997.7.11일자 「검은대륙에 심은 복음인술」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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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기한별 2011.06.10 08: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의 슈바우쳐 잘 보고 갑니다~

  2. 풀칠아비 2011.06.10 1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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