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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맞춤형

담아둬야 빛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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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니 담아두는 것만 못하다
- 노자 -

 

 

나는 말이 좀 많다. 스스로를 위로하자면 나름 입담이 괜찮은 편이고, 그냥 말하면 좀 수다스럽다. 집식구는 이런 내게 수다수위를 약간만 낮추라고 충정어린(?) 잔소리를 해댄다. 수시로 수위가 아슬아슬하단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충고. 내게도 그건 예외가 아니다. “모임 때 서로 웃고 재밌음 좋잖아.” 한마디 툭 던지고 추가 잔소리를 차단한다. 하지만 마음 한켠이 왠지 찜찜하다. “내가 좀 심한가?” 잠시 생각뿐이다. 모임 속 나는 또 수다를 떤다. 모든 것엔 관성이 붙는다. 수다도 수다에 취하면 더 수다스럽고, 단어를 내뱉는 속도가 빨라진다.

 

 

때론 침묵이 명언보다 낫다

 

다언삭궁(多言數窮).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얘기로,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는 뜻이다. 맞는 얘기다. 말이 과하면 오해가 생기고, 변명할 일도 늘어난다. 불필요한 단어들이 끼어들어 ‘말의 결’에 흠집을 내는 탓이다. 약속 역시 지나치면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못 지키는 일이 많아진다. 물론 침묵이 미덕인 시대는 아니다. 당당히 자기를 표현해야 하는 시대고, 입담은 어느 때보다 몸값이 높아졌다. 유머감각이 리더의 자질로 1, 2위를 다투는 시대다. 하지만 담아둬야 더 가치있는 말들도 많다. 때론 침묵이 명언보다 나은 법이다. 노자는 다언삭궁 뒤에 불여수중(不如守中)을 붙였다. (아니할 말들은) 마음에 담아두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순자는 ‘다투려는 사람과는 일의 옳고 그름을 더불어 논하지 말라’(有爭氣者 勿與辯也)고 했다. 옳은 말이다. 노(怒)가 얼굴에 가득한 사람과는 일단 논쟁을 유(留)해야 한다. 분노는 모든 이성을 가린다. 대한민국에 파열음이 커지는 것은 노한 사람들끼리 얼굴을 마주하는 탓이다. 그대가 준 것이 그대에게로 돌아간다.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세상의 이치다. 분노는 분노로 돌려받고,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온다. 그러니 받고 싶으면 먼저 주고, 받고 싶지 않은 것은 주지를 마라.

 

 

분노를 숙성시키면 상서가 작아진다

 

담아둬야 할 것이 어디 말뿐이 겠는가. 분노를 마음에서 숙성시키면 서로의 상처가 작아지고, 과욕을 숙성시키면 시기·질투가 멀어진다. 그러니 ‘숙성’은 인격을 만드는 일종의 담금질이다. 포도주가 숙성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이치다. 숙성은 건강에도 보약이다. 짠 음식, 매운 음식보다 훨씬 해로운 음식은 ‘분노’라는 음식이다. 건강의 최대 적 스트레스도 어찌 보면 분노의 입자들이 몸안에 퍼진 결과다. 짠 음식은 육체에만 해롭지만 분노는 육체와 정신에 모두 치명적이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건강하고, 오래 산다. 

 

지식도 너무 자주 드러내면 오히려 격이 낮아진다. 지식은 종종 회중시계에 비유된다. 안주머니에 잘 간직하고 다니다 시간을 궁금해하는 사람에게만 살짝 꺼내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부(富)와 인품이 나란히 높아진다. 과시가 과하면 천해지고, 욕심이 지나치면 속물이 된다. 격(格)이란 보여주는 것과 안으로 품는 것의 수위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다. 그러니 격은 삶의 균형인 셈이다.

 

 

원칙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라

 

세상에는 의외로 장점으로 죽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 말에 취한 달변가가 설화(說禍)로 몰락하고, 내로라하는 지식인이 아집으로 빛을 잃고,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탐욕으로 추락한다. 칭찬도 과하면 때로 본마음이 오해를 받는다. 그러니 묵자는 ‘맛있는 샘이 먼저 마르고, 높은 나무가 먼저 베어진다’고 꼬집었다. 

 

뱉으면 오히려 빛이 바래는 말들이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오”라고 말하기보다 원칙을 지키면 누구나 그가 ‘이런 사람’임을 안다. 약속을 지킨다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면 누구나 그를 믿는다. 사심이 없다고 목소리를 키우기보다 이를 스스로 입증하면 누구나 그를 따른다. 그러니 스스로의 ‘언행괴리’가 얼마나 벌어졌는지 한번쯤 그 간극을 재봐야 한다. 행여 그 간극이 크다면 ‘말은 느리게, 실천은 빠르게’로 삶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머리로 하는 자비보다 몸으로 행하는 자비가 어렵다.’ 소외된 자를 위해 마라톤하는 구도자 진오 스님, 그가 말만 내뱉고 실천은 허약한 중생에게 던진 한마디가 왠지 오늘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