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에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하지만 무소유를 몸소 삶으로 가르친 법정스님은 ‘함부로 인연을 맺지말라’고 한다.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을 구분해, 진정한 인연은 최선을 다하되 스쳐가는 인연은 그냥 스치게 놔두라는 것이다. 인연을 너무 헤프게 맺으면 그 인연들이 상처를 만들고, 삶이 소모된다는 가르침이다. 스님의 말씀처럼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 투자해야 인생이 좋은 열매를 맺는다.
인연에도 각자의 길이가 있다 |
‘옷깃만 스쳐도 인연’은 삶에서 맺어진 소소한 연들이 모두 소중함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는 인연의 귀함을 간과한 표현이다. 인연이란 나무엔 꽃이 피고 향기가 흩날리지만, 때로는 가시가 슬며시 발톱을 감춘다. 꽃과 향기, 가시가 엉켜나는 게 인연이란 나무다. 어떤 인연은 삶을 온기로 포근히 감싸지만, 어떤 인연은 삶의 아픔을 자극한다. 좋은 인연은 선(善)을 틔우는 자양분이지만, 나쁜 인연은 심성을 흐리는 불순물이다.
만물은 흐르고, 어느 것도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인연도 그 길이가 있다. 계곡에서 만난 인연이 바다로 이어지기도 하고, 시냇물을 만나기도 전에 메마르기도 한다. 사랑도, 행복도, 이별도 다 길이가 있다. 영원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이고, 여기까진 줄 알았는데 그 끝이 무궁하다. 인연이란 길이는 그만큼 예측불허다. 애쓰지 않아도 맺어지고, 애써도 끊어지는 게 인연이다. 그러니 인연의 이어지고 끊어짐에 너무 애달아 할 필요는 없다. 인연의 이어짐과 끊어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인연이 ‘어떤 인연’이냐다.
상처를 무리하게 떼어내지 마라 |
인연의 끊어짐은 때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그 아픔은 어찌 달랠까. 마음 다스리기의 ‘멘토’ 혜민스님에게 지혜를 빌려온다. 스님은 그 상처를 프라이팬에 붙은 음식 찌꺼기에 비유한다. 찌꺼기를 떼어내려고 무리하게 숟가락으로 긁어대면 찌꺼기가 잘 떨어지지 않고, 프라이팬에 되레 흠집만 생긴다. 이때는 물을 붓고 그냥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그러면 찌꺼기가 저절로 떨어지고 프라이팬도 흠집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의 프라이팬에도 물을 붓고 상처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인연은 흔적을 남긴다. 내가 뿌려놓은 흔적, 네가 심어놓은 흔적이 영사기의 필름에 촘촘히 꽂혀 있다. 이 흔적은 물로 씻겨지지 않는다. 이 또한 세월이 약이다. 세월이란 약은 추억의 필름을 점차 흐리게 한다. 필름이 흐려지면, 그게 바로 추억의 영화다. 추억은 이런저런 인연의 흔적들이 뛰노는 운동장이다. 인연은 주고받는 것이다. 나의 흔적과 너의 흔적이 섞인 것이 인연이다. 그러니 나의 흔적이 얼마나 진실된지부터 수시로 살펴야 한다. 인연이든, 사랑이든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소중한 인연에 마음을 다해라 |
셰익스피어는 ‘인생의 옷감은 선과 악이 뒤섞인 실로 짜여졌다’고 했다. 인연도 다르지 않다. 인연의 옷감 역시 선과 악이 뒤엉킨 실로 짜여졌다. 반짝인다고 다 금이 아니듯, 스친다고 다 소중한 인연은 아니다. 인연은 순진한 아기가 아니다. 우유만으로 쑥쑥 크지 않는다. 진심을 쏟고, 마음도 통해야 한다. 인연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키우는 것이다. 세상에는 인연이 넘쳐난다. 어떤 인연은 삶의 상처를 치유하고, 어떤 인연은 삶에 상처를 낸다. 그러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너무 낭만적이다. 법정스님의 말처럼 스치는 인연은 그냥 흘려보내고, 소중한 인연은 정성을 다해 가꾸는 것, 그게 바로 ‘인연 관리법’이다. 혹여 인연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면 마음의 프라이팬에 물을 붓고, 그 상처가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려보자. 세상엔 발버둥쳐도 안되는 일이 많다. 아닌 인연은 아무리 붙여놔도 언젠가 떨어진다. 진정한 인연은 소중히 가꾸고, 스치는 인연은 그냥 스쳐 보내자. 세상의 모든 인연을 관리하기엔 인연들이 너무 넘쳐난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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