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2차선 도로가 겨우 놓여있는 폭 좁은 땅이 태평양 바다 위에 뻗어있다. 오른쪽과 왼쪽에서 동시에 바닷물이 찰랑이는 것을 보면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마치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착각이 든다. 물이 들어오는 때, 남은 땅은 가까스로 폭 30미터 정도다. 미국 워싱턴주 북단, 캐나다 국경 바로 밑에 있는 세미아무 곶(Semiahmoo Spit)은 이토록 이국적이고 이토록 외지다.
태평양 바다 위에 길게 뻗은 세미아무 곶. 왼편 태평양쪽은 모래 해변, 오른편 대륙쪽은 개펄이다.
물이 빠져 개펄이 드러나 있다. ●세미아무=김희원기자
알래스카를 제외한 미국 국토의 서북단. 워싱턴주 왓컴군의 작은 마을 블레인에 위치한 이 길다란 곶은 미주의 태평양 연안을 차로 여행하지 않는 한 오기 어렵다. 그랜드 캐년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스펙터클이 있는 것도 아니지 말이다. 오히려 이 보기 드문 고요한 비경은 널리 알리고 싶은 않은 편에 속한다. 푸른 바다 사잇길을 걷다가 어느덧 한편 바다가 붉은 석양에 물든 것을 보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이 잊히고 만다. 마음엔 평온이 충만해진다. 여행의 기쁨이 이런 것이니, 나 혼자만 알고 싶은 그런 곳이다.
세미아무 곶 끝에서 바라본 건너편 육지. 200m쯤 헤엄치면 건너편 땅에 닿는다.
●세미아무=김희원기자
세미아무 곶은 움푹 들어온 세미아무 만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북쪽으로 약 2㎞ 뻗어있다. 200m만 더 뻗으면 아예 바다를 가로막을 수도 있는 형국이다. 폭이 좁은 곶 초반부 1㎞ 정도는 왕복 2차선 도로와 산책로만 존재하는 세미아무 공원이고, 공원을 지나 폭이 좀 넓어진(그래봐야 200m 정도지만) 곶 끝부분에 세미아무 리조트와 스파, 요트 정박시설, 간이 카페, 전망대 등이 있다. 서쪽 해안은 모래와 자갈이 펼쳐지고, 동쪽 해안은 개펄이다. 물이 빠지면 광활하게 드러난 개펄에서 쉽게 조개가 잡힌다.
우리나라 서해안처럼 넓은 이 개펄에서 몇 시간만 수고하면 조개를 한 바구니 가득 채취할 수 있다.
●세미아무=김희원기자
주변에 사는 블레인 주민들은 공원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무 쪽 해변이나 골라 소풍을 즐긴다. 해가 기울기 시작한 늦은 오후 갓난아기까지 네 아이를 데리고 온 한 가족은 오른편 잔디밭 피크닉 장소에서 바비큐로 이른 저녁을 시작한다. 딸들만 데리고 온 두 엄마는 돗자리를 들고 왼편 해안으로 내려간다. 유모차를 끌고 온 일행은 산책로를 걷고 있다. 해는 바다에서 뜨고 바다에서 진다.
고요한 석양의 바다. ●세미아무 리조트 웹사이트
일부러 찾기는 어렵더라도, 미국이나 캐나다 서부를 차로 여행하는 경우라면 한번 들러 이 평온한 석양의 바다를 보고 갈 일이다. 잠깐 들러 산책을 하든, 리조트(https://www.semiahmoo.com/index.php)에서 하루 묵으며 주변지역을 관광하든 기억에 남을 시간이 될 것이다. 세미아무 곶 바로 아래에 골프 코스가 있고, 고래관광이나 조류관측을 할 수 있다. 미국 시애틀까지 차로 1시간 반, 캐나다 밴쿠버는 1시간이면 갈 수 있다. 두 나라를 다 여행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치다. 단 국경을 넘는다면 휴일은 피해야 한다. 운전 시간보다 국경을 지나는 대기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해가 지는 바닷가 해변을 전용으로 쓸 수 있는 콘도(아파트).
●세미아무=김희원기자
혼자만 아껴두고 싶은 이 바다 한가운데의 고즈넉한 땅은 그러나,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태평양을 향한 워터프론트 콘도(어딘들 워터프론트가 아니겠냐만)가 지어져 분양 중이고, 이어지는 부지에 주택 개발이 계획돼 있다. 주민을 위한 편의시설이라곤 물론 없고, 수위가 조금만 높아져도 곧 물에 잠길 것 같은 엉뚱한 생각마저 들지만, 그래도 이런 석양을 만끽할 수 있는 곳에 살고 싶은 게다. 개발 계획을 보여주는 팻말 앞에서 가슴이 무거워지는 건 아쉬움인지 부러움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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