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애쓰지 않는다. 거슬러 오르려고 무리한 몸짓을 하지 않는다. 자연스레 아래로 흘러 강에 닿고 바다에 이른다. 물은 자연의 이치를 안다. 만물은 각자의 결이 있고, 사물은 각자의 법칙이 있음을 안다. 


세상은 틀림이 아닌 다름의 모둠이다. 다르다고 따돌리지 마라. 어울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걸어가라. 함께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봐라. 나의 마음으로 너를 헤아려라. 



세상의 다른 결을

인정해라


목수는 나무의 결을 안다. 결을 거스르지 않아야 무늬가 산다는 걸 안다. 대패는 결을 따라 움직인다. 결은 사물의 이치이자 본래의 모습이다. 



타고난 고유성, 너와 다른 나만의 색깔이다. 만물은 각자의 결이 있다. 결은 일종의 DNA다.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소 잡는 백정 이야기가 ≪장자≫에 나온다.


소 잡는 솜씨가 경지에 이른 백정에게 문혜왕이 물었다. 


“참으로 훌륭하다. 재주가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르렀느냐.” 


백정이 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인데, 그 도가 재주보다 앞섭니다. (중략) 소의 본래 몸을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을 건드리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를 건드리겠습니까.”



그는 또 능숙한 백정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건 살을 자르기 때문이고, 보통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건 뼈를 건드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칼은 19년간 잡은 소가 수천 마리나 되지만 숫돌에 새로 간 듯 날이 서 있다고 했다. 


역시 장자는 이야기꾼이다. 맛깔난 비유로 말하고자 하는 뜻을 짚어준다. 


도(道)는 결국 결을 따르는 것이다. 세상을 인간 중심이라고 우길 때, 인간을 내 중심이라고 고집할 때 결이 어긋난다. 장자는 인간의 결만 고집하지 말고 세상의 결을 보라 한다. 내 결만 곱다 하지 말고, 너의 결도 살펴보라 한다.



최고 화술은

언변이 아닌

독심(讀心)이다


한비는 유세(遊說)가 어려운 건 앎이 얕기 때문도, 논리가 부실한 때문도, 용기가 부족한 때문도 아니라 했다. 


진짜 어려운 건 상대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 상대가 왕이라도 된다면 유세는 목숨을 건 도박이다. 


“무릇 용이란 짐승은 잘만 길들이면 등에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다. 하지만 턱밑에 한 자쯤 거꾸로 난 비늘(逆鱗)을 건드리면 누구나 죽임을 당한다.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목숨을 잃지 않고 유세도 절반쯤은 먹힌 셈이다.” 


한비는 최고의 화술은 수려한 언변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읽는 독심(讀心)임을 일깨운다.



남의 의중을 헤아리면 절반은 성공이다. 이미 절반쯤 설득하고, 절반쯤 성사시킨 거다. 의중은 마음의 결이다. 헤아림은 그 결을 거스르지 않는 거다. 


세상은 내 맘 같지 않다. 그게 정상이다. 결이 모두 다른데 어찌 한마음이겠는가. 그릇이 큰 자는 세상의 결들을 두루 보고, 그릇이 작은 자는 자신의 결 하나로 만물을 재단한다. 


성숙은 다름의 인정이다. 소는 다리가 네 개고, 닭은 두 개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아지랑이는 위로 피어난다.



속도에

너무 매이지 마라


인(仁)을 묻는 궁중의 질문에 공자가 답했다.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바라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 성경도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으로 남을 헤아리는 혈구지도(絜矩之道) 역시 ≪대학≫이 강조하는 덕목이다. 우리는 이 ‘처세의 황금률’을 거꾸로 적용한다. 


내가 바르다고, 그러니 내게 맞추라고 한다. 약을 독으로 쓰고, 황금을 쇠붙이로 쓰는 격이다. 지켜야 할 때 공격하고, 떠나야 할 때 머무는 식이다.     



먼 길은 쉬며 걸어라.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뛰면 그림자를 떨쳐낼 거로 생각했다. 


한데 아무리 달려도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뜀박질이 느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숨이 차도록 뛰다 죽었다. ≪장자≫ 어부 편에 나오는 얘기다. 


속도에 매달린 그는 몰랐다. 그늘에 들어가면 그림자가 절로 없어진다는 것을, 한숨 돌리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것을. 


삶에는 속도가 필요하다. 한데 사람들은 자주 잊는다. 빠름도 속도지만 느림도 속도라는 사실을. 크면 만 길도 내어준다. 작으면 한 치도 다툰다. 그 한 치가 작은 자의 전부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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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한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마을의 모든 사람이 어떤 사람을 선하다고 하면 그 사람을 선하다고 믿으면 됩니까?” 공자가 답했다. “좀 생각해봐야지.” 제자가 또 물었다. “그럼, 마을의 모든 사람이 어떤 사람을 악하다고 하면 그는 악할 사람입니까?” 공자가 또 답했다. “그 또한 좀 생각해봐야지.” 그러면서 공자가 덧붙였다. “악한 사람들이 모두 어떤 사람을 악하다고 하고 선한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을 선하다고 하면, 그는 분명 선한 사람이다.”




성숙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성숙을 관용으로 대체해도 별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좀 관용스러운 것, 이게 바로 성숙이 아닐까 싶다. 나이 30이 넘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정신적 미숙아’다. 특히 누군가를 떼를 지어 따돌린다면 ‘집단적 미숙아’에 다름 아니다. 선한 사람, 성숙한 사람은 무리를 짖지 않는다. 더구나 남을 비난하는 무리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말이 곧 자신의 인격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직장은 인생 일정 구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삶의 공간이다. 일이 좀 버거워도 행복해야하는 직장인의 터전이다. 직장이 무너지면, 행복이 무너지고, 행복이 무너지면 삶이 무너진다. 그러니 직장은 서로 이해하고, 서로 보듬으며, 서로의 행복을 키워줘야 하는 삶의 무대다. 한데 안타깝게도 직장의 모습이 늘 그렇지만은 않다. ‘왕따 바이러스’가 대표적 악균이다. 만물의 영장, 합리적 동물이라는 인간에게는 묘한 심리가 있다. 누군가를 조직적으로 따돌리면서 그들 스스로 유대감을 형성하려는 심리다. 그러면서 ‘저급의 우리’라는 패거리즘을 짖는다. 그들 스스로는 고상하다고 착각하면서. 그런 점에서 인간은 어쩌면 만물의 영장이 아닌 ‘자잘한 영혼들의 군집체’인지도 모른다.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대신 방공이 조나라에 인질로 가는 태자를 수행하게 되었다. 방공이 떠나면서 왕에게 물었다. “한 사람이 달려와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임금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당연히 믿지 않지.” 방공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함께 나타나서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래도 믿지 않지.” 방공이 또 물었다. “그럼 다시 세 사람이 와서 이구동성으로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그래도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답했다. “그렇다면 믿을 수밖에 없겠지.” 그러자 방공이 말했다.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날 리 없음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세 사람이 한 목소리로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호랑이는 나타난 것입니다.” 세 사람이 입을 맞추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가 유래한 고사로, ≪한비자≫에 나오는 얘기다. 방공이 떠나자 왕의 측근들은 한목소리로 방공을 비방했고, 그는 결국 조정에 복귀하지 못했다.





말로 입은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깊고 오래간다. 말을 흉기로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했다. 군자는 두루 어울리되 불의에 의기투합하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지으면서도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니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그룹인지를 이 말에 맞춰보면 대충 어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를 악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세상에 적다. 보통은 자신이 중간쯤은 된다고 믿고 산다. 그럼 몇 가지를 물어보자. 당신은 누구를 칭찬하는가, 아니면 험집을 들춰내는가. 공(功)을 공평히 나누는가, 아니면 공은 독차지하고 과(過)는 누군가에게 떠넘기는가. 타인의 잘못에 합당한 꾸지람을 하는가, 아니면 화풀이 차원의 비난으로 상처를 주는가. 이(利)와 의(義)가 엇갈리는 지점에서 고민하는가, 아니면 냉큼 이익만을 거머쥐는가. 당신이 주로 만나는 사람은 어떤가. 누군가를 칭찬하며 모임의 온기를 데우는가, 아니면 누군가를 집단으로 헐뜯으며 ‘악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가. 그러면서 혹여 ‘우리는 한편’이라고 어줍잖은 착각을 하는 건 아닌가.





공자는 인(仁)의 본질을 추기급인(推己及人)으로 봤다. 자기의 마음으로 미뤄 남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얘기다. ‘네가 원하는 않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마라’는 성경의 말씀과 뜻이 하나다. 누구나 마음이 하나일 수는 없다. 누구는 낙관적이고, 누구는 비관적이다. 누구는 말이 많고, 누구는 말이 적다. 세상에는 무수한 ‘다름’이 있다. 그걸 마음으로 푸근히 받아주는 게 지성이고 품격이다. 때로는 부모를 생각하고, 때로는 자식을 생각하고, 때로는 형제, 때로는 친구를 생각해라. 당신의 행동, 당신의 말을 누군가가 그대로 당신의 부모 자식 형제 친구에게 돌려준다고 생각해봐라. 세상은 돌고돈다. 주는 대로 돌려 받는 게 인생이다. 또 하나. 남의 흠을 들춰내는 것은 당신의 단점으로 남의 단점을 공격하는 일이다. 정신이 무너진 육체만의 건강은 ‘절름발이 건강’이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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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생이란 즐거운 롤러코스터 2017.02.28 1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왕따가 뭐 그렇게 좋은 문화라고 그걸 따라하는지 모르겠네요..ㅠ.ㅠ






자로(子路)는 ‘공자학당’의 맡형격이었다. 성격이 곧고 순수해 평생 스승 공자를 헌신적으로 섬겼다.  공자는 이런 자로를 아끼면서도 그의 조급함을 늘 경계했다. 하루는 공자가 자로를 불렀다. “자로야! 너는 육언(六言)과 육폐(六蔽)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자로가 답했다.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럼 거기 앉거라. 내가 너에게 말해주마.”




공자는 자로를 맞은 편에 앉히고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사람이 인덕(仁德)을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어리석기 쉽고, 지혜를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방탕하기 쉽고, 믿음을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남을 해치기 쉽고, 곧음을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조급하기 쉽고, 용맹을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난을 일으키기 쉽고, 강함을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망령된 짓을 하기 쉽다. 이게 바로 육언·육폐니라.”





육언은 모두 아름다운 덕(德)이다. 한데 공자는 배움이 부족하면 그 덕들이 가려지고(蔽), 되레 화(禍)까지 입을 수 있다고 했다. 힘쓰는 데는 무모하리 만큼 나서지만 배움에는 게으른 제자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스승의 마음이 물씬 묻어나는 장면이다. 새겨보면 참으로 맞는 말이다. 성품이 인(仁)해도 배움이 부족하면 어리석은 판단을 하기 일쑤고, 인품이 곧아도 배움이 약하면 조급해지기 다반사다. 배움이 허한 용기는 만용으로 변질되기 쉽다. 공자는 모든 게 배움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논어≫의 첫장을 학(學)으로 연 건 다 까닭이 있다.




공자가 하루는 제자들을 나무랐다. “너희들은 어찌 시(詩)를 배우지 않는냐? 시는 감성을 깨어나게 하고, 판단을 바로 서게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게 하고, 감정을 추스르게 하고,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사리를 깨닫고 군주를 충심으로 섬기게 하고, 새나 초목의 이름도 많이 알 수 있게 하느니라.” 공자는 시를 통해 인간이 마음을 다스리고, 인륜과 학문에서도 유익함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 공자였기에 아들 백어(伯魚)에게도 “시(詩)를 모르면 홀로 서지 못하고, 예(禮)를 모르면 사회로 들어설 수 없다”고 가르쳤다.





공자는 “인간은 시로 깨어나고(興於詩), 예로 바로서고(立於禮), 음악으로 완성된다(成於樂)”고 했다. 인의예지의 사상가가 아닌, 시인 공자의 모습이 더 크게 다가온다. 감성은 나이로 시들지 않는다. 지레 포기한 우리의 마음이 감성의 수분을 마르게 한다. 잠자는 감성을 깨우자. 추억의 시를 꺼내고, 추억의 음악을 돌려보자. 중년의 학(學)은 영어 단어 외우고, 난해한 사상을 탐구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참된 인품을 빛나게 하는 조그만 사유들, 오다가다 눈길을 주는 문구 하나도 모두 배움이다. 나를 바르게 세워주고, 잠들어가는 감성을 깨워주고, 지식을 한뼘씩 넓혀주는 건 모두 스승이다. 배우려 하면 스승 아닌 게 없다.




주자(朱子)는 유가에 바탕한 성리학을 체계화한 송 시대의 큰 사상가다. ≪근사록(近思錄)≫에는 그의 논리가 고스란히 담겼다. ≪근사록≫이란 표제는 공자의 제자 자하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자하는 겸손이 지나쳐 공자가 ‘불급(不及)’으로 비유한 인물이다. 하지만 배움의 자세만큼은 그 누구보다 독실했다. “널리 배우되 뜻을 독실히 하고, 간절히 묻되 가까운 것부터 생각(近思)하면 인(仁)은 저절로 그 가운데 있다”는 말은 그의 배움의 자세를 오롯이 보여준다. 주자도 이 구절에 크게 감명을 받은 듯하다.





게으르면 처음과 끝이 크게 다르다. 부지런하면 처음과 끝이 한결같다. 시작은 창대하되 끝이 초라한 것은 갈수록 초심이 흐려진 탓이다. 배움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나이에 맞게, 처한 상황에 맞춰 배움이 그 모습을 조금씩 바꿔갈 뿐이다. 삶의 어느 한 때 밤잠을 줄여가며 몰입한 배움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길어진 인생에 배움의 보충이 없으면 지혜가 줄고, 어리석음은 늘어난다. 청춘의 노년으로 살지말고, 노년의 청춘으로 살자. 조깅으로 근력을 키우듯, 배움으로 사유를 키우자. 건강한 신체, 건강한 영혼은 100세 시대의 ‘축복된 짝궁’이다. 세상은 좀 멀리 봐야 희망이 커지고, 눈앞의 고만고만한 근심거리가 사라진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미래도 결국은 현재가 결정한다.



글/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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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생이란 즐거운 롤러코스터 2016.08.22 1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이어트와 공부는 평생 해야 하는 거 같아요

  

 

 

 

 

 

 

 

 

인생을 25로 나누면 첫 번째 25년은 무엇인가 배우며 살아갑니다. 두 번째 25년은 무엇인가 되고자 살아갑니다. 세 번째 25년은 무엇인가 전하고자 살아갑니다. 인생의 첫 번째 25년 중간에 우리는 사춘기(思春期)를 겪습니다. 호르몬 변화로 인해 신체 내에 변화가 오는 것이지요. 나이 오십은 인생에 또 하나의 변곡점입니다. 두 번째 25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25년을 맞이하는 시기이지요. 나이 오십은 사추기(思秋期)라고도 합니다. 갱년기 질환은 이러한 사추기때 찾아옵니다.

 

 

 

 

사춘기가 성호르몬에 영향을 받았듯이 사추기도 성호르몬에 영향을 받습니다. 여성은 폐경을 겪게 되고, 남성은 점차 근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이 시기는 신체적 변화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자신의 품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자식들은 하나둘 부모 곁을 떠나가며 빈 둥지 증후군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도 은퇴 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지요. 신체적 심리적으로 복잡한 변화를 겪게 되는 시기입니다.

 

공자는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여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 했는데, 하늘의 뜻을 알기 어렵더라도 우선 자신의 몸의 변화를 알아야 하는 나이이지요. 여성의 경우 폐경이 50세 전후로 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 시기를 폐경기라고 하지요. 얼굴은 화끈거리고 땀이 많이 나는 증세를 흔히 겪게 됩니다. 창문을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아 보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왠지 답답함이 개이지 않고 잠도 안 오게 되지요. 가족들에게는 괜한 짜증을 내고 감정의 기복이 커집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가족들도 당황하지만,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가족에게 서운한 마음도 들지요. 이러한 갱년기 증세와 더불어 피부 노화와 하얀 머리카락이 느는 것은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겉모습 변화이겠지요.

 

 

 

여성과 남성의 갱년기는 성호르몬 감소라는 비슷한 변화를 가지지만,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성 갱년기는 50세 전후에 갑작스러운 여성호르몬의 감소로 폐경이 되지만, 남성 갱년기의 호르몬 변화는 갑작스럽게 떨어지지 않고 삼십 대부터 매년 조금씩 서서히 감소합니다. 그래서 남성은 50이 되어서도 자신의 신체적 변화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몸은 갱년기로 접어드는데, 마음은 청춘이라 술 담배도 이십 대처럼 그대로 하면서 몸을 망가뜨리기도 하지요. 폐경을 겪게 되는 여성은 특징적인 갱년기 증세가 뚜렷이 나타나는 경우가 흔하나, 남성은 폐경이란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아 뚜렷한 갱년기 증세를 겪기보다 체력 저하나 피곤감, 성 기능 저하 등을 서서히 느끼게 됩니다.

 

또한, 여성은 폐경 후 아이를 낳는 출산 능력을 잃는 변화를 갖지만, 남성은 나이 들어서도 성 기능은 떨어지지만, 아이를 가지는 생식능력은 유지하지요. 이렇게 여성과 남성의 갱년기는 차이가 나며, 이에 대한 서로의 이해가 있어야 갱년기 부부가 큰 갈등 없이 사추기의 파도를 넘을 수 있습니다.

 

 

 

나이 오십에 이르게 되면,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뿐 아니라 우리 몸 안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혈관과 근육, 뼈의 변화입니다.  건물의 파이프도 오래 사용하면 녹스는 것처럼 우리 몸의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혈관도 나이가 들면서 녹이 습니다. 즉 혈관 탄력성이 떨어지게 되고, 혈관 벽에 찌꺼기가 끼면서 동맥경화에 이르게 되지요. 그나마 그냥 좁아진 정도라면 혈액이 각 장기에 충분한 산소와 영양을 공급하는데 부족한 기능 저하의 문제이겠지만, 혹시라도 혈관이 막히면 그것이 심근경색증이고 뇌졸중이 되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지요. 이러한 혈관 변화가 주로 일어나기 시작하는 시점이 바로 갱년기입니다.

 

두 번째는 뼈가 약해집니다. 뼈 안이 푸석푸석해지는 것을 골 다공증이라 하지요. 특히 여성의 경우 폐경이 되면 여성 호르몬이 급격히 떨어지며 뼈가 약해지게 됩니다. 남성보다 원래 골격이 작은 상태에서 골다공증이 나타나면 척추나 고관절 골절을 일으키게 되지요. 젊어서 골절은 몇 개월 지나면 대부분 단단히 잘 붙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나이 들어서 골절은 건강 상태에 큰 영향을 미쳐 회복이 어려운 경우도 발생하지요. 그러므로 갱년기 변화 중 뼈 건강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근육량이 감소합니다. 체중은 몇 년 사이 변화가 전혀 없더라도 내부의 체성분 구성비율은 변화가 생깁니다. 즉 근육량은 감소하고 체내 지방량은 증가하지요. 그러니 체중계에 올라 체중이 빠졌다고 좋아하는 경우도 사실 지방이 빠진 것이 아니고 근육이 빠진 경우가 많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운동은 하지 않고 식이요법만 하는 경우에 이를 흔하게 겪게 되지요.

 

 

 

 

 

 

갱년기의 가장 큰 변화가 성호르몬의 저하로 오기 때문에 일찍부터 성호르몬제 투여가 갱년기의 주요 치료가 되어 왔습니다. 여성호르몬은 폐경 후 여성에게서 안면 홍조 등 갱년기 증세가 심한 경우에 사용합니다. 폐경이 되면 질이 건조해져 부부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는데 여성호르몬은 이런 경우에도 도움이 됩니다. 또한 에스트로겐이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 골다공증에도 도움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여성호르몬은 갱년기 증세가 있는 경우 5년 이내 정도 단기적으로 사용을 권장니다. 장기간 사용할 경우 심뇌혈관 등에 대한 영향도 고려하여 여성호르몬제의 득실을 따진 후 지속적인 사용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남성호르몬의 사용은 여성호르몬보다 널리 사용되지는 않고 있으나, 과거보다 많은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갱년기 남성에게서 근력이나 의욕 저하, 성 기능 저하 등 남성 갱년기 증세가 있는 경우 남성호르몬을 측정하여 결핍된 경우에 제한적으로 사용합니다. 성호르몬을 복용할 때 암 걱정을 간혹 하십니다. 여성호르몬은 유방암, 남성호르몬은 전립선암과의 관련성 여부에 대한 관심때문이지요. 성호르몬이 이런 부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사전에 충분한 검사 평가를 한 후 전문의 진료 하에 적절한 용량을 사용한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호르몬제의 사용 여부는 의사의 전문적인 판단에 맡겨 놓으시면 되지만, 몸을 스스로 튼튼히 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지요. 갱년기에 일어나는 혈관 노화, 뼈와 근육 약화를 예방하기 위한 운동의 중요성은 어떤 예방치료보다 우선됩니다. 특히 이 시기는 혈관 노화를 이겨내기 위한 유산소 운동과 더불어, 뼈와 근육을 강화하기 위한 근력 운동에도 관심을 많이 두어야 합니다.

 

인생은 무엇인가 배우고, 무엇인가 되고자 하다, 무엇인가 전하면서 살아가는 흐름이겠지요. 이 인생의 흐름에서 나이 오십은 신체적이나 환경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사춘기를 잘 이겨냈듯이, 아름다운 사추기(思秋期)도 건강히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혈관은 잘 통하게, 뼈와 근육은 튼튼하게.'

 

글 / 이상현 교수(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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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는 유행어 제조기다. 특히 코미디 프로를 즐겨 보는 사람과 전혀 안 보는 사람은 웃음코드가 엇갈린다. 유행어를 패러디해도 원조(?)를 모르니 웃음이 터지지 않는다. 때론 옥외 광고도 독해(?)가 안된다. 유행어를 모르면 바로 구식취급이다. 나이 드는 것도 억울한데…. 새삼 ‘노년은 모든 것을 용서하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용서받지 못하고, 청년은 모든 것을 용서받지만 스스로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버나드 쇼의 말이 스쳐 간다.

 

  

마음은 마음으로 다가온다

 

‘느낌 아니까~.’ 한 때 대한민국을 돌고 돈 유행어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뽑은 2013년 유행어에선 당당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1위도 꿰찼다. 당차면서도 귀여운 개그우먼 김지민 씨는 개그콘서트(개콘)라는 프로에서 ‘느낌 아니까’를 연발하며 시청자를 웃긴다. 그 느낌 그~대로 살려 연기를 해보겠다는 건대, 왠지 그 느낌 그대로 살리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한 예감…. 그 엇박자가 또 한 번 웃음을 자아낸다. 

 

마음은 마음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마음이 마음을 안다. 상처를 입어 본 사람은 상처의 아픔을 알고, 이별을 경험한 사람은 이별의 애틋함을 안다. 칭찬을 받아 본 사람은 고래가 칭찬에 춤을 추는 이유를,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은 세상이 사랑을 찬미하는 이유를 안다. 그러니 느낌을 안다는 것은 남의 애락(哀樂)을 내 가슴에 담는 것이다. 함께 아프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오로시 가슴으로 느끼고 온 정성을 다해 마음으로 응원하는 것이다. 통하면 상대도, 나도 마음의 아픔이 치유된다. 동의보감이 강조한 ‘통즉불통(通則痛)’은 마음에도, 육체에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이치다.

 

 

건강한 마음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

  

예수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 12절)고 했다. 공자 역시 ‘네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세상은 이 말에 ‘황금률’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삶을 살아가는 근본 이치라는 뜻이다. 예수와 공자는 시대를 초월해 누구보다 ‘느낌’을 먼저 안 사람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느낌, 그 느낌을 제대로 꿰뚫은 셈이다.

 

느낌을 안다는 것은 서로 통한다는 얘기다. 소통은 내 마음이 상대를 향해 열려 있고, 상대 마음이 나를 향해 열려 있는 상태다. 마음을 여는 출발은 성찰이다. 성찰은 남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돈이든, 이해관계든 너무 달라붙으면 시야가 흐려진다. 가족의 상처도 대부분 지나친 마음의 밀착에서 온다. 맹목적 기대, 맹목적 헌신은 때로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그러니 가끔은 남의 눈으로 자기를 봐야 한다. 마음의 힐링은 바로 몸의 힐링이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고,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깃드는 법이다.

 

 

느낌은 서로를 이어주는 통로다

 

느낌을 안다는 건 마음에 가식이 없는 것이다. 진심으로 주고, 진심으로 받는 것이다. 교언영색으로 거짓을 가리지 않고, 따스함으로 마음의 냉기를 녹여주는 것이다. 몸을 아끼면 친구가 멀어지고, 미안하다는 말을 아끼면 틈새가 더 벌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느낌을 안다는 건 상대의 상처를 살포시 보듬는 것이다. 왜 상처가 났느냐고 형사처럼 따지기보다 응급조치부터 취하는 의사가 되는 것이다.

 

느낌은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통로다. 그 길로 배려, 칭찬, 격려, 믿음, 친절, 진심이 자주 다녀야 통로가 넓어진다. 이기심과 비웃음, 불신은 그 통로를 좁히는 마음의 찌꺼기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말이 있다. 더 멀리 가려면 어찌할까. 그건 느낌을 아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다. 느낌을 아는 것, 그건 더불어 사는 열쇠를 손안에 쥔 것이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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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명절은 평소 각자의 현실에서 바쁘게 살아가던 가족 친지들이 오랜 그리움의 공간인 고향에 모여 보고 싶던 사람들을 만나고 조상에게 예를 올리는 특별한 날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우리가 알던 명절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다함께 모여 조상에게 예를 다하던 기존과는 달리 명절은 그저 빨간 날이 되어 국내외로 여행을 가거나 업체를 통해 차례를 대신 지내는 날이 된 것. 달라지고 있는 명절 풍속 속에서 명절의 참 의미는 퇴색되어 가고 있다.

 

 

 

명절의 깊은 뜻

 

명절마다 만나는 형제와 친척들 사이에서, 우리는 오랜 친밀감을 다시 느낀다. 나와 네가 각기 다른 곳에서 살아가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가깝고 사랑할 수 있는 사이임을 기억하게 된다. 모두 모인 공간에서는 서로의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 내 문제가 네 문제가 되고, 네 기쁨이 내 기쁨이 된다.

 

뿐만 아니라, 명절은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한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고 있다는 유대감은 가족과 친척간의 공감과 친밀감에서 시작된다. 특히 명 절은 우리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한 공동체 의 구성원임을 느끼게 한다. 오랜 세월 휴식과 화해의 시간이었던 명절에 이루어지는 전통 음식, 놀이, 예식 등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가족과 친지를 넘어 이 전통에 속 한 모든 이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일이다.

 

공자(孔子)는 명절(제사)의 의미를 단순히 죽은 조상(귀신)을 섬기는게 아니라 (未能事人 焉能事鬼), 친족들간의 유대라는 사회적 기능으로 파악했다. 명절은 그렇게 가족으로부터 시작된 사랑과 유대가 뻗어나가 사회와 국가를 이롭게 한다는 원리 (修身齊家 治國平天下)를 내포하고 있다.

 

한 사회에서 서로 연결된 마음의 힘을 현대적 용어로는 ‘사회적 자본’이라 부른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 구성원의 연대감, 상호 신뢰, 사회적 연계망, 호혜적 규범, 협력 가능성 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사회적 자본이 강할수록 그 사회는 건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명절은 한 개인이나 사회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화기애애한 명절을 보낼 수 있는 이들은 개인적으로도 좋은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풍속도

 

그러나 근래에 명절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 하룻밤 이상을 함께 보내며, 웃음꽃을 피우고 전통 놀이와 음식을 즐기던 명절의 풍 속도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명절이면 먼 길을 달려 고향에 가지만, 그저 형식적으로 얼굴만 보고 몇 시간 되지 않아 금방 떠나곤 한다. 많은 이들은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를 불편해 하기도 하고, 그냥 집에서 쉬는 걸 더 선호하기도 한다. 특히 요즘 명절 기간에는 대규모 해외여행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미리부터 해외여행을 예약하고, 연휴가 시작되기 무섭게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난다. 자신이 사는 곳이나 살던 곳에 더 이상 진정한 휴식이 없다 고 믿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명절의 풍속도는 우리 사회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현상이 되고 있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강한 유대감은 사라지고, 남들로부터 분리되어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를 선호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과거와 같은 집단주의적 문화를 멀리하는 대신, 개인주의 문화를 선호하며, 서로 강하게 연계된 ‘소속의 삶’ 보다는 ‘자립의 삶’을 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한탄할 일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강한 유대’의 집단주의 문화는 장점만큼이나 부작용 역시 심각했다. 사람들은 각각 고유한 개인으로 존중 받기 보다는, 집단주의적 역할과 불합리한 위계질서에 일방적으로 복종하고, 집단이 만들어낸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또 개인들은 각자의 삶을 존중 받기 보다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하나의 편견에 따라 평가 받고 규정되는 일에 굴욕과 모욕을 느껴왔다. 친척이 모인 곳에서, 자신이 선택한 싱글라이프는 시집 못간 노처녀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프리랜서는 출세 못한 백수로, 남들보다 천천히 가며 행복을 중시하는 삶은 남에게 뒤처지는 인생으로 취급 받아 왔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할 문화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불합리한 악습을 재생산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새로운 명절 문화를 위하여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현대사회에서 구성원 상호 간의 연대감과 상호신뢰의 회복은 긴박한 문제가 되고 있다. 사회구성원들이 서로를 이 사회를 이루고 함께 살아갈 존재라고 믿기 보다는, 경쟁자나 적이라고 여겨 시기 질투하고 증오하는 현상이 이미 이 사회를 뒤덮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웃간의 교류가 단절되고, 가족 친척도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은 사회에서 ‘명절의 복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모든 문제 해결이 그렇듯이 단순히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명절 문화, 새로운 유대감을 만들어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아무리 가족이나 친지라 할지라도, 상대방을 한 명의 개인으로 존중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로부터 시작된다. 나이가 많다고 혹은 가족이라고 상대에게 무조건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공감의 태도 가 필요하다.

 

명절을 맞아 우리는 사로잡혀 있는 편견으로 부터 벗어나고, 나와 남이 다른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람들 이 모인 자리에서 일어나는 악습들, 즉 남과 나를 비교하고, 시기 질투하며, 상대에게 굴욕감을 주는 자기 과시 행위 등은 모두 ‘특정한 기준’이라는 편견으로부터 나온다. 돈, 사회적 명예, 출세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인 가족과 친지를 대할때 만큼은, 그런 속물적 기준에서 벗어나 인간대 인간으로 만나야 한다. 그렇게 인간적인 소통과 관계가 가족과 친척에서 부터 자라난다면, 다시 우리에게 화목한 명절이 돌아오고, 우리가 사는 사회 역시 더 아름답게 변해갈 것이다.


글 / 정지우(인문학 칼럼니스트)

출처 / 사보 '건강보험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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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야심가의 위선이거나 노예근성의 비굴함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 그의 눈에 비친 겸손은 다소 비아냥적이다. 하기야 겸손이 인간의 본능은 아닌 듯도 하다. 맹자는 인간의 심성이 본래 선하다는, 이른바 성선설(性善說)의 근거로 사양지심(辭讓之心)을 꼽는다. 인간은 남에게 양보하고, 겸손하고자 하는 성품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겸손은 일종의 ‘가면’이다. 겸손은 뭔가를 얻으려는 속셈으로 스스로를 일부러 낮추는 행위다. 맹자가 옳은지, 스피노자가 옳은지 정답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마찰이 사유의 공간을 넓힌다. 그게 철학이 인류에게 선사한 귀중한 선물이다.

  

 

과욕은 불행을 잉태한 씨앗

 

사실 세상은 겸손한 자보다 야심가들이 주도한다. 전쟁도, 물질도, 혁신도 세상의 역사는 대부분 야심가들이 쓴다. 그러니 어찌보면 세상의 역사는 야심가들의 스토리다. 어떻게 전쟁을 승리해 영토를 넓히고 권력을 키웠는지, 어떻게 기업을 일궈 막대한 돈을 벌었는지, 어떻게 창의적 아이디어로 혁신을 선도했는지에 관한 얘기다. 그러니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청춘에게 울림을 주는 메시지다.

 

삶은 구함의 연속이다. 물질을 구하고, 명예·권력을 구하고, 사랑을 구하고, 인기를 구한다. 구함은 희비가 갈리는 교차점이다. 그 교차점에서 누구는 환호하고, 누구는 좌절한다. 욕구는 맥주의 거품 같은 것이다. 거품 빠진 맥주는 고유의 맛을 잃는다. 욕구는 삶에 맛을 내주는 또다른 거품이다. 욕구 없는 삶은 거품 빠진 맥주만큼이나 밋밋하다. 

 

만이불일(滿而不溢). ‘가득 차면서도 넘치지는 말라’는 뜻으로 효경에 나오는 말이다. 차면서도 넘치지 않는 것은 말만큼 쉽지 않다. 욕심은 만족을 꺼린다. 구해서 얻어도 또 구하고 싶어한다. 영혼의 허기는 과한 욕심의 틈새에 끼어든다. 그 허기가 수시로 불행을 끌고 온다. 과욕은 불행을 잉태한 씨앗이다. 만족이 멀어지면 불행은 그만큼 가까워 진다. 세상에 불행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만족 앞에 높고 단단한 장벽을 세워두기 때문이다. 성숙한 삶은 높고 두터운 장벽을 허물고 무언가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비워야 보이는 것들

 

명품연기는 차지만 넘치지 않는다. 과함의 억제가 바로 프로연기다. 세상사의 이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겸손이 지나치면 비굴해 보이고, 관심이 과하면 간섭이 되고, 용기도 선을 넘으면 만용이 된다. 그러니 멈춰야 할 선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바로 삶의 품격이다. 높이 오르면 주변을 살피고, 배움이 많으면 교만을 낮추고, 가진 게 많으면 베품을 생각하고, 욕망이 지나치면 가치를 고민해야 한다. 만이불일(滿而不溢)은 공자의 과유불급(過猶不及)과 길이 통한다. 춘추좌전은 ‘교만하면서도 망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驕而不亡者, 未之有也)고 꼬집는다. 

 

살다보면 넘치고 싶은 충동이 수시로 마음에 펌프질을 해댄다. 분노를 토해내라고, 맘껏 헐뜯어보라고, 자신을 좀 과장하라고,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가지라고…. 하지만 급박한 충동의 펌프질엔 맞대응을 피해야 한다. 그 땐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잠잠함으로 그 충동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면 스스로가 보이고, 길이 밝아진다. 흔히 마음공부는 뺄셈이라고 한다. 세상엔 비워야 보이는 것들이 널려 있다. 지혜도 채움보다는 비움에서 온다. 잠잠함과 비움은 지혜가 자라는 최적의 토양이다.

 

  

넘칠수록 낮아지는 (格)

 

급하고 넘칠수록 사람의 격(格)은 그만큼 낮아진다. 그러니 꾸지람을 해도 견뎌낼 높이를 재봐야 하고, 물질을 탐해도 취한 경로가 선(善)한지 고민해야 하고, 친구를 만나도 과한 인맥이 오히려 영혼을 혼탁하게 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삶은 교차로다. 어디로 가고, 언제·어디서 멈출 지를 항상 곱씹어봐야 한다. 원래 뿜어내는 향기보다 우러나는 향기가 더 그윽하고 멀리 가는 법이다. 삶의 향기도 마찬가지다.

 

겸손도, 용기도, 욕심도 도를 넘지 않는 게 좋다. 그게 균형이고, 그게 성숙이다. 채우되 넘쳐 흘려버리지 않는 것이 충만한 삶, 격있는 삶이다. 눈물이 지나쳐도, 분노가 지나쳐도, 나무람이 지나쳐도, 걱정이 지나쳐도 지나친 건 넘치지 않고 꽉 채워진 것만 못하다. 공자의 과유불급이 시대를 초월한 명언인 이유다. 과함이 없는 삶이 우아하고 향기를 우려낸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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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쉬움의 연속이다. 삶은 항상 뭔가 부족하다. 누구는 돈에 결핍을 느끼고, 누구는 명예에, 누구는 권력에, 누구는 지식에 허기를 느낀다. 떡은 남의 것이 커보이고, 고기는 놓친 놈이 커보이는 법이다. 그러니 삶은 채움의 충만감보다 부족의 결핍감이 더 큰 공간을 차지한다. 물론 생각을 좀 돌려보면 그 ‘아쉬움’이란 갈증이 물질과 정신을 키운 촉매인지도 모른다.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다

 

비교하지 않고 산다는 건 말만큼 쉽지 않다. 삶은 수시로 저울질을 한다. 그 저울은 때로는 머리이고, 때로는 마음이다. 1억은 분명 1000만원의 열배다. 하지만 마음이란 저울은 그 열배를 백배 천배로 부풀리고, 때로는 팽팽한 무게로도 맞춘다. 결국 마음이란 저울의 사용법이 삶의 모습을 결정한다. 흔히 ‘부러우면 진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스스로를 패자(敗者)라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남의 것을 지나치게 부러워한다는 반증이다. 부러움보다는 당당함이 삶에 에너지를 주고, 비관보다는 낙관이 성공으로 끄는 힘이 강하다. 그러니 세상은 당당한 자가 이끌고, 낙관적인 사람이 세상을 주도한다.       

 

≪한서≫ 동중서전에는 ‘이빨을 준 자에게는 뿔을 주지 않는다(豫之齒者, 去其角)’는 말이 나온다. 날개를 단 새는 두 발만 있듯 하늘은 두 가지를 다 주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날개와 네 다리를 포기한 대신 머리를 얻은 셈이다. 누구에게나 값진 달란트는 있다. 하지만 남의 것이 너무 커보이면 자신의 달란트가 보이지 않는다. 남의 삶이 부럽고, 나의 삶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부러운 삶은 지는 삶이다.

 

 

누구도 완벽하진 못하다

 

얼굴이 다르듯 재능도, 생각도 다르다. 남과 비교만 한다면 평생 나의 삶이 아닌, 남의 삶을 살다 가는 셈이다. 원숭이를 헤엄치는 실력으로 평가하고, 물고기를 나무타는 재능으로 저울질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을 아는 것은 겸손에의 굴종이 아니라 스스로의

귀중함을 아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자존을 세우는 일이다. 세상에 당당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사는 삶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고개를 숙이면 땅밖에 보이지 않지만 고개를 들면 창대한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곳에 꿈이 있고, 그 곳에 도전이 있다. 삶은 꿈꾸는 것이고, 도전하는 것이다. 꿈꾸고 도전하는 삶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건강하다.

 

공자는 ‘한 사람에게서 완전하기를 구하지 말라(無求備於一人)’고 했다. 공자 말씀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삶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누구나 뻥뚫린 공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그게 삶이고, 인생이다. 에디슨, 베토벤, 셰익스피어, 알렉산더대왕, 존 밀턴, 헤밍웨이, 헬렌 켈러…. 대다수 역사 속 인물들도 뚫린 구멍이 컸다. 누구는 세상을 보지 못했고, 누구는 세상을 듣지 못했고, 누구는 지독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 들리는 않는 세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콤플렉스에 무릎꿇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세상에 승부를 걸었다. 세상의 박수는 그 당당함에 보내는 찬사다.

 

 

당당한 삶이 아름답다

 

시선(詩仙)’ 이백(李白)은 ‘하늘이 내게 재능을 주었으니 반드시 쓰일 곳이 있으리라’고 노래했고, 스티브 잡스는 ‘당신이 한 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당당히 받아들이라’고 외쳤다. 옳은 얘기다. 명심보감의 말처럼 스스로를 믿는 사람은 남 또한 믿어주는 법이다. 강에서 물고기를 탐하는 것보다 집에서 그물을 짜는 것이 현명하고, 들에서 이웃의 곡식을 탐하는 것보다 집에서 씨앗을 준비하는 것이 지혜롭다. 탓하기보다는 자신을 키우고, 부러워하기보다는 스스로 당당히 서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기가 꺾이면 세상도 나를 우습게 본다. 회피하는 삶은 언제나 도망만 친다. 세상에는 타고난 천재가 있고, 타고난 갑부도 있다. 몇 안되는 그런 사람들은 대범하게 세상의 예외쯤으로 받아주자. 그리고 내게 주어진 달란트로, 당당히 고개를 들고 세상을 살아가자. 남의 떡이 커보인다고 한숨 짓고, 넋두리만 늘어놓기에는 살아갈 날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다. 누가 뭐래도 당당한 삶이 아름답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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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가끔 되돌아 보는 것이 좋다. 그래야 현재의 스스로가 잘 보이고, 미래도 더 밝아진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함이다. 과거는 살아 갈 미래의 지혜를 넌즈시 던져준다. 그러니 역사는 현재학이자 미래학이다. 하지만 과거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누구는 과거에 담긴 참 뜻을 읽지만, 누구는 그 의미를 자신의 입맛대로 각색한다. 과거를,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제각각인 이유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에 힘을 좀 빼야한다. 그게 바로 성숙이다. 고집의 유연화는 비굴함, 연약함이 아니라 배려의 공간을 그만큼 넓히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고집이 더 단단해지는 사람이 있다. 고집에도 일종의 관성이 생기는 탓이다. 경험이란 것이 때로 아이러니하다. 경험은 세상을 넓혀 주는 망원경이지만 경험에만 매몰되면 오히려 시야가 좁아진다. 경험이란 편린들은 간혹 잘못된 믿음이나 신념을 바윗돌처럼 단단하게 만든다. ‘내가 경험해 봐서 아는데…’는 때로 스스로를 한정짓는 올가미다. 몇몇 경험으로만 단정짓기에는 세상의 이치가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성숙은 일종의 나잇값이다. 나이에 걸맞게 생각하고, 나이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나이에 걸맞다’함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균형을 잡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너무 자기 잇속만 챙기면 육체는 성숙해도 정신은 미숙한 셈이다. 용기와 배려, 관용, 더불음 등은 대표적 ‘성숙지표’다. 과욕은 정신은 물론 육체 건강도 해친다. 어찌 보면 정신의 균형이 바로 건강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고,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는 얘기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창한 맹자는 모든 사람의 본성은 착하지만 지나친 욕심이 그 본성을 가린다고 했다. 선한 본성의 인간이 사는 세상에 악이 넘치는 이유를 과욕으로 설명한 것이다. 

 

 

 

거울은 형상을 비춘다. 거울을 마주하면 자신의 얼굴이, 스스로의 스타일이 드러난다. 그러니 겉모습이  궁금하면 누구나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며 애를 태운 ‘질투의 여왕’ 거울만이 진실을 말하는 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거울은 진실하다. 그러니 외형에 자신이 없으면 거울 마주하기가 영 불편하다. 우리사회에 성형이 늘어나는 것은 거울 앞에 설 때의 불편함을 덜어보려는 것이다. 

 

거울이란 발명품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물은 인간의 형상을 비춰주던 ‘자연의 거울’이었다. 인간은 물에 비친 얼굴에서 외형의 더러움을 보고 그 물로 그 더러움을 씻어냈다. 인간에게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깨달음의 근원, 더러움을 씻겨주는 정화수인 셈이다. 그러니 물은 늘 인간 마음을 비유한다. 잔잔한 호수로 마음의 평온을 노래하고, 성난 파도로 격노한 심성을 암시한다. 명경지수(明鏡止水)는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을 일컫는 상징어다. 물은 고요해야 비춰지는 형상이 비툴리지 않는다. 마음 또한 고요해야 내면이 더 깊게, 더 투명하게 비쳐진다. 그러니 도도히 흐르는 물은 세상사의 많은 이치를 담는다.

 

 

 

물(거울)로 외면을 살핀다면 내면은 무엇에 비쳐볼까.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 묵자(墨子)는 ‘물을 거울로 삼지말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라’(不鏡於水 而鏡於人)로 깨우친다. 거울에 비춰보면 얼굴 하나쯤은 보이겠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스스로의 길흉화복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세 사람이 걸으면 그 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고 했다. 장점을 배우고, 단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면 모두가 스승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결국 누군가의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타인이라는 거울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묵자·공자의 말씀이 아니라도 세상엔 사람만한 거울이 없다. 나는 누군가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고, 누군가는 나를 통해 그 스스로를 들여다본다. 사람이라는 거울도 유리라는 거울만큼 거짓이 없다. 호주머니에 숨겨둔 송곳처럼 언젠가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니 ‘나’라는 거울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수시로 살펴봐야 한다. 혹여 내가 닮고 싶은 형상이 아닌, 반면교사로 누군가의 삶에 깨달음을 주는 존재라면 그것만큼 슬픈 것도 없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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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바라보는 느낌은 동양과 서양이 약간 다르다. 동양은 속세와 묘지의 분리 개념이 강하고 서양은 속세와 묘가 좀더 친화적이다. 동양은 묘가 산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서양은 묘가 삶에 가까이 붙어있다. 공동묘지는 아이들이 뛰노는 동네 공원이다. 하기야 요즘엔 장례문화가 바뀌면서 우리나라도 공동묘지가 생활 속으로 많아 들어와 있다. 이름도 공동묘지가 아닌 (추모)공원이다.

 

 

 

죽음을 보는 엇갈리는 느낌들

 

 

 

공동묘지에 서면 여러 생각이 묘하게 중첩된다. 죽음, 허무, 세월, 이별이란 아련함이 가슴에 스미지만  한편에선 평화, 고요, 해탈처럼 왠지 모를 포근한 느낌이 아린 가슴을 달랜다. 공동묘지는 삶과 죽음이 마주하는 곳이다. 세상으로 등을 돌리면 분주한 삶이 보이고, 무덤으로 등을 돌리는 순간 적막한 죽음이 들어온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파노라마처럼 스쳐보기엔 공동묘지만한 장소도 없다. 어쩌면 그 곳은 삶의 철학이 촘촘히 응집된 ‘인생의 가르침 터’ 인지도 모른다.

 

칠십 평생 세상의 이치를 설파한 공자는 죽음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공자의 훈계로 입문해 헌신적으로 공자를 섬긴 ‘공자학당’의 맏형 자로(子路)가 죽음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어느날 그가 공자에게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의 대답이 걸작이다. “삶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 평소 배움이 부족하다고 안타까워한 자로에게 죽음보다는 먼저 삶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따끔한 질책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공자 스스로 죽음을 모른 것은 아닐까.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럴듯한 포장으로 죽음을 설파했지만 과연 그 안에 정답은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슬픈 이별

 

 

 

종교는 이후의 세계가 미지인 죽음에 위로를 준다. 기독교는 천국으로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고, 지옥으로 현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훈계한다. 불교는 과거-현재-미래가 하나의 커다란 둥근고리라고 말한다. 윤회라는 고리로 죽음이 종지부가 아님을, 오늘이 과거의 환생임을, 내세가 현생의 탈바꿈임을 강조한다. 그래도 죽음은, 이별은 여전히 슬프다. 천국으로, 삶의 윤회로 위로를 한다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생각이 얼마나 바뀔까.

 

공포, 두려움, 고통, 이별, 망각은 죽음이 연상시키는 단어들이다. 누군가에게 죽음은 이별의 아픔이고, 누군가에겐 고통의 두려움이다. 또 다른 누군가에겐 자신의 존재가 잊혀지는 서글픔이다. 이 모든 것이 죽음이 두려운 이유다. 하지만 ‘죽음이란 무엇일까’라는 태고적부터의 질문에 어느 누구도 정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죽음이 철학의 씨앗이 되고, 사유의 토대가 되는 이유다. 죽음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시각이 엇갈리는 교차점이기도 하다.

 

 

 

명약은 '현세의 바른 삶'

 

 

 

하지만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그 수명을 다한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이 시작되었 듯,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 삶이 마무리된다. 그건 우주의 필연이다. 필연은 순응해야 한다. 그 게 바로 성숙이다. 노년의 인생이 죽음에 지나친 공포를 느낀다면 정신적 성숙이 나이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그처럼 두려워 하는 것은 바로 생전의 생활이 사악했다는 증거’라고 설파했다. 올바른 삶이 죽음의 공포를 덜어준다는 얘기를 역으로 표현한 셈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삶은 죽음에서 생긴다. 보리가 싹트기 위해선 씨앗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맞는 말이다. 씨앗이 썩어야 새싹이 움을 트는 법이다. 이 이치는 사람이나 식물이나, 살아있는 모든 것에 적용되는 순리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오래 살고 싶으면 잘 살으라’고 강조했다. 어리석음과 사악함이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것이다. 바른 삶, 순리에 맞는 삶을 살다보면 더 오래 살고 죽음의 두려움도 덜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장수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받는 느낌은 안정감과 평온함이다. 그만큼 인생을 바르게 살아온 결과다.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는 공자의 말씀 역시 죽음을 궁금해하기보다 삶에 더 충실하라는 따끔한 충고다. 지금 사는 삶에도 더 배워야 할 것, 더 깨우쳐야 할 것, 더 실천해야 할 것, 더 꿈꿔야 할 것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아침에 도(道)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이승에서 더 깨우칠수록 죽음이 그만큼 덜 두려워진다는 삶의 이치를 함의한다. 현세를 바르게 사는 것, 그 게 바로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는 명약이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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