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카메룬의 슈바이처  장계만

  민간외교전선 이상없다

 

 

 

 

 

 

 

 

자식들이 아빠인지 몰라볼 만큼 새카맣게 탄 얼굴로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의사가 있었습니다.
의사 장계만.


 

그는 1945년에 출생하여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림대학교 한강성심병원에서 일반외과를 전공하였으며, 육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당시 외무부에 근무하던 친구의 추천으로 1977년 정부파견의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고국에 남겨둔 채 인술을 펴고자

아내와 함께 동경하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두툼한 겨울 잠바를 걸치고 파리를 경유하여 카메룬(Cameroon)에 도착했지만, 국제공항은 입국대가 턱없이 높아서 짐을 밟고 올라서서 입국 수속을 마쳐야 할 정도로 허름한 시외버스 정거장과도 같았습니다.

 

처량하고 쓸쓸하였으나 내심 마음을다잡고 한국대사관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미터기에 표시된 대로 요금을 건네는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무뚝뚝하던 택시운전사가 갑자기 긴장하더니 짐도 들어주고 사근사근 대하는 등 마치 VIP를 모시는 자세로 변한 것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프랑스 프랑과 카메룬 쎄파프랑(CFA)을 혼동하여 택시비의 100배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택시운전사가 내려 준 곳이 태극기가 펄럭이는 한국대사관이 아니라 인공기가 휘날리는 북한대사관이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비동맹권 아프리카 국가를 대상으로 한 외교 강화 추진 차원에서 1972년에 카메룬과 북한과의 수교가 이뤄졌습니다. 대한민국과 카메룬과는 1969년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여 왔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서로의 입장을 견지하는 등 양국은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택시는 다시 달렸습니다.
태극기를 보고 그제서야 그는 안심했습니다.
대사관으로 들어가 그의 입국을 당당히 알렸고, 다음날 오기로 했는데 벌써 도착하였다며 대사관 직원들은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카메룬 바멘다병원(Bamenda Provincial Hospital)과

수도 야운데보건소에서 2년간 외과과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한때 나이지리아 땅인 바멘다는 수도 야운데에서 서울~ 부산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영국 식민지로 있었기에 그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현지인들은 소위 카메룬과 서부아프리카에서 널리 쓰이는 크레올어(Creole Language), 또는 ‘비진잉글리쉬’라고도 하는 현지영어를 사용하는 데 처음에는 어색하였지만 잘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바멘다는 해발 2,000m로 항상 가을 같이 서늘하여 말라리아 환자가 없었습니다.

일반외과 과장으로 환자를 진료하는데, 특히 탈장과 화상환자가 많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였고, 수술은 책을 보며 연습하였습니다. 때 전공 중 그만둔 마취과 의술을 현지에 전수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탈장환자 수술을 하였는데 성공적이었습니다.

처음 수술할 때에 흑인은 피부가 까만데 속은 어떤 색깔일까 궁금하였지만 우리와 같았으며 피부 색깔만 달랐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너무 태연히 받아들였습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하여 환자는 의사를 한 번만 보고 죽어도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만큼 의사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고, 의사 장계만에 대한 존경은 하늘같았습니다.

 

카메룬 부통령은 바멘다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의사였기에 서로 대화가 통하였습니다.

언젠가 바멘다의 대 부족의 추장 동생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정성스런 치료로 완쾌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대문에서 현관 그리고 거실까지 빨간 카펫이 깔려 있어 당황하였습니다.

그때 추장은 고맙다는 인사를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왔고, 고마움의 표시로 추장의 딸인 공주까지 부인으로 맞이하라 하니, 옆에 있던 그의 부인이 황당하여 ‘You are bad!(나빠요!)’라고 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추장의 공식행사장에서는 모두가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였지만, 그의 부인은 한국식으로 허리만 굽히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만약 추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사람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닌 그곳에서 말입니다.

순간 의사 장계만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추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부인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부인에게는 추장과의 까다로운 격식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부통령과는 언제라도 통화가 가능하였고, 추장은 그들 부부를 은근히 떠받들었습니다.

민간 외교전선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곳의 전통의학이 독특하여 골절환자는 약초를 바르면 금세 나았습니다.

한번은 그의 친구인 미국보험회사 지사장이 교통사고로 뼈가 부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치료도 제대로 못해 주어 얼마 후 미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방문하였더니 멀쩡하였습니다.

그는 사무실에서 깁스도 안한 채로 회사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서 물어보니 어떤 풀즙을 발랐더니 통증 없이 아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경우를 그는 여러 차례목격하였습니다.

 

카메룬 사람들은 참 유순합니다.

그러나 한번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렸습니다. 근무하는 2년 동안 싸움이나 실랑이하는 것을 거의 못 보았는데, 한번 싸웠다 하면 도끼를 휘둘렀습니다. 사망 아니면 대형 사고였습니다.


카메룬은 인구 부족으로 인한 출산장려 정책이 활발하였습니다. 이슬람 사회가 아닌데도 일부다처제였습니다. 그런 정책 때문인지 심지어는 중,고등학생들까지 불타는 사랑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학생이 임신을 하면 경사였습니다. 취직을 보장받고 정부의 보조가 뒤따랐습니다.

때문에 카메룬의 산부인과 의사는 밤낮 없이 바빴습니다.


카메룬 사람들은 동양인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시절 카메룬에도 이소룡의 영화가 인기여서 동양인은 모두 장풍을 하는 줄 알고 겁냈습니다.

반갑다고 손을 잡으면 도망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1979년 1월 귀국하였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즐거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를 카메룬 사람들은 아쉬워하였습니다.

 

카메룬의 바멘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웃나라 가봉 랑바레네에서 생명외경의 신념으로 거룩한 인술을 펼쳤던 슈바이처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원주민들은 카메룬에도 슈바이처와 같은 의사가 있는데, 그가 바로 한국에서 온 슈바이처라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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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 가운데 자리한 푸르른 소나무를 닮은 사람들이 사는 곳, 그 집 앞 개울가에 어느새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1년 전, 할머니가 중풍 후유증으로 오른팔과 다리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치매까지 있어 할아버지가 대, 소변을 받아내며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집은 엉망이었다.


 


 문을 열면 코를 찌르는 냄새와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옷가지, 지린내가 진동하던 화장실, 몇 날 며칠을 치우지 않아 겨우 할머니가 누울 정도의 잠자리. 할머니는 노인요양 2등급 수급자가 되어 시설 입소가 가능했지만, 그래도 함께 살고 싶다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가요양을 받게 되었다.

광시면에 위치한 조그만 재가요양센터, 사랑의 장기요양기관 소속인 오숙자 요양보호사가 할머니를 담당하면서 그 집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앉아 옮기기 어려웠던 할머니는 조금씩 기어다니기 시작했고,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오숙자님은 1년 전 홀로 되신 어머님과 함께 살기 위해 귀향하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할머님댁에 처음으로 배치된 경험이 전무한 요양보호사였지만, 늘 본인의 홀로 되신 어머님을 모신다는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으로 직업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생각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집에 방문하면 우선 할머니 방부터 깨끗이 청소하고, 화장실, 주방 등을 차례로 청소하면서 점심 준비를 하는데, 늘 시간이 부족하단다. 그리고 따뜻한 밥을 드리기 위해 항상 새로 밥을 지어 영양이 부족한 할머니를 위해 사골 국물을 준비하여 드시게 한다. 물론 할아버지도 함께...

 그들의 밥상은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정성과 사랑으로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치매에 걸리신 할머니는 항상 오숙자 요양보호사의 옆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여 기본적인 운동능력을 위해 기는 연습, 숟가락질하는 연습 등을 꾸준히 시키면서, 그녀 자신이 무릎보호대도 수건으로 만들어 드릴 정도로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그녀는  “나누며 사는 것이요... 돈은 없지만 참 쉬워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드리면 되는 것 같아요,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한다. 제 특기가 청소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냄새도 특별한 방법없이 그냥 어느날 없어졌어요. 전에는 동네 분들이 방문도 하지 않는 외딴집이었는데, 지금은 자주들 놀로도 오세요. 그래서 더 열심히 쓸고 닦죠, 냄새 나면 안 되잖아요." 라고 한다

 


  어느 자식이 치매 걸려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할머니에게 이런 순수한 웃음을 줄 수 있을까?
  어느 누가 어둠이 드려 있던 그 집에 이렇게 웃음꽃을 피울 수 있을까?

 

 모든 반찬은 본인이 만들어 드리고 있단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동치미, 깻잎 김치, 김장 등 본인의 어머님 드리려고 만드는 음식을 함께 드시게 한단다. 할아버지는 늘 공단 직원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신다. 쑥스럽고,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그래도 사회적 “효”를 실천하는 노인요양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끔 우쭐하고, 뿌듯해져 한참을 함께 웃고 돌아서게 된다.

 

  그들의 만찬...

  음식의 수는 중요치 않다.
  사랑과 정성...
  보이지 않는 반찬이 그들의
  밥상에는 항상 그득하다.




 요양보호사에 수급자, 간혹 삐걱거리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행복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조금씩 나누어 가면서.



 국민건강보험공단 사내기자단 / 박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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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사는 곳은 작년 슬로우 시티로 지정된 예산군 대흥면 교촌리다.  집 앞으로는 전국 제일의 저
 수지인 예당호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바로 옆에는 대흥 향교. 그리고 뒤에는 백제 부흥 운동의 마
 지막 본산인 임존성이 위치한 봉수산을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 그녀의
 공간에서 행복을 조금 담아 가지고 온다.





그녀를 알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4월, 함께 살고 있는 그녀의 어머님이 중풍으로 거동이 어려워 노인장기요양보험 신청조사를 하면서였다. 쇼파에 누워 거동을 거의 못하시던 그녀의 어머니를 조사하면서도 그녀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


몇 개월 후 그녀가 서울 신문사에 근무했고, 글도 지으시는 작가분이며, 온양민속박물관장을 지냈다는 것을 이웃분들을 통해 자연스레 알게 되었는데, 동네에선 지금도 관장님으로 불리며 유명하시다.


그 후 국민건강보험 예산지사 직원과 지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청소년 봉사단 “푸른하늘”에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항상 꾸밈없고 행복한 얼굴의 그녀가 말하는 '행복하게 사는 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픈 마음에 인터뷰를 부탁하고, 올 3월 그녀를 다시 한 번 찾았다.



자연을 닮은 그녀

  


 

그녀의 집앞에 도착하면 그녀가 직접 만들었다는 우체통이 문짝이 없어진 대문기둥 옆에 몸을 꼿꼿이하며  마중 온 것을 볼 수 있다. 인터뷰를 하던 날에는 근처 다양한 나무들, 고즈넉한 정원 등 주변 여기저기서  봄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부르자,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하시면서 화장기 없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 오라신다.  인터뷰는 소박하고 조용한 서재에서 이루어졌는데 "시골에 사는 할머니한테 무슨 얘기를 들을게 있다고 , 나야 고맙지, 물어 볼 것 있으면 물어봐"라고 하시면서 편하게 대해 주셨다. 그녀의 행복을 들어보자.



Q. 서울에서 성공한 직장인으로 알고 있는데, 대흥으로 귀향하게 된 이유가 뭐예요?

A. 이곳은 부모님 고향이에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도, 50이 넘으면 부모님과 함께 이곳에서 흙과 함께 생활하려 준비 중에 있었지요. 아버님이 2001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병 수발하던 어머니마저 건강이 악화되어 그 시기가 좀 빨라졌는데 마침, 우리나라 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가까운 곳에 민속박물관장 제의가 들어와 흔쾌히 수락하면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이곳에서 온양까지 출,퇴근을 했죠

그 후 2005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져 중풍으로 쓰러져 모든 것을 정리하고 어머님과 함께 이곳에서 생활하기 시작한거예요.


        “글쎄, 먹기 싫다는데 왜 그래. 제발 귀찮게 좀 하지 마!”
       눈치 없이 자꾸 음식 디민다고 제발 이러지 마세요.
       주어도 주어도 덜 준 것만 같아 속 끓이는 것이 엄마랍니다. 

       “아버지는 원래 그러니까 엄마가 좀 참아.”
       엄마가 져야 큰소리 안 나고 편안하다고 제발 이러지 마세요.
       '걱정 마 걱정 마'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참는 것만 입력된 인조인간이 아니랍니다.

       그리고 제발 이러지 마세요.
       “엄마 괜찮지?”
       힘없어 주저앉으면서도 ‘괜찮아 괜찮아’ 하는 것이 엄마랍니다.

       나이 들어 걸음 둔해진 엄마는 
       당신 나이 든 것까지도 자식에게 미안해 많은 걸 숨긴답니다. 
       온 힘 다해 쥐고 있던 끈,
       너무 힘겨워 한순간 놓쳐버리면 그만 스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을.
       지금, 
       중환자실, 저 문 안에서 혼자 힘겹게 싸우고 있는 엄마, 
       딸은 또 한번 바보같이 이런답니다.
       '엄마 괜찮지? 우리 엄마는 강하니까 이겨낼 거야'

 

 

                   박효신/『바람이 흙이 가르쳐 주네』'엄마한테 이러지 마세요' 中



Q. 귀향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어려움이 있으셨으면 말씀 좀 부탁드려요.

A. 육체적 노동에 따른 체력적인 어려움이 가장 컸어요. 첫해에는 요령도 없고, 무작정 일을 해 허리 치료를 오래 동안 받았는데, 어느정도 적응이 된 지금은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도 즐겁고 행복했지만 자연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행복해요.



Q. 그럼 행복이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혹시 행복하려고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지요?

A. 보통 사람들은 너 지금 행복하니! 하고 물으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생각을 하죠. 행복하고 싶기는 하니! 라고 다시 물어도 여전히 고개를 가우뚱 거리구요.


 저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즐겁게 일하고, 성취하는 모든 것에 행복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 노력을 했구요. 자신의 행복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행복에게 대접을 해주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꼭 행복해 지려 일부러 한 것은 아니지만, 즐거운 생활을 위해 나를 사랑하며 살아왔지요.

'나'가 아닌 '누구나'라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사랑하고 싶은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고, 사물에 대한 호기심, 고정 관념 깨기, 재미 찾기, 긍정적 사고, 인생 설계, 비우며 살기, 내탓이오, 마음에 남을 위한 공간 만들기, 지금에 최선을 다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나누고 봉사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생각해요. 지금도 저는 나는 행복하다 라고 주문을 걸고 있고, 미워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고, 인연을 만들지 말자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조그만 시골이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예산지사에서도 지금 청소년들에게 행복을 만들어 주는 함께 나누는 푸른하늘 봉사단을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Q. 현재 나눔을 통한 행복한 삶에 대해 말씀 해주세요.

A. 지금요!. 자연과 나누고 있죠..시골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자신을 맡기고 사는 것 같아요. 도시에서는 시간에 쫓기고, 안달하고, 성공을 위해, 경제적 효용가치를 위해 계산하며 살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마음이라는 운동장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아요. 생각도 넓고, 마음도 오픈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할까요. 무엇이든 한방에, 일확천금을 바라는 사고 없이 자신의 노력만큼, 자연이 주는 만큼만 얻으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지금도 저는 배우고 닮아가려 노력하고 있거든요.

2006년에 농사일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시작한 블로그 “풀각시 뜨락”도 지금 저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며 연령대 관계없이 일상을 나누고 있고, 함께하는 이웃들과도 나에게 필요한 것 외에는 나누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내가 심어 키운 꽃의 씨를 나누고, 받아 키운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을 보며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거창한거 같은데 자연과 나누려 노력하고 있어요. 지구를 지켜야죠, 작은 일이지만 나부터 열심히 지키려 재활용 한다든지, 필요한 만큼 먹고, 버리지 않고, 무엇이든 아끼면서 말이에요.

저는 양말이 발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렇게 뀌메고, 깁고, 짝이 없어도 그냥 신고 있어요.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물 절약을 위해 설거지는 모아 두었다 하루에 한번, 수세미는 제가 직접 키운 천연 수세미를 이용하고 있죠 (웃음~)

그리고 대흥 슬로시티 주변에 있는 임존성, 대흥 동헌, 의좋은 형제 등의 문화 해설을 맡고 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구 있구요, 물론 무보수입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문화를 나누기 위해, 청소년들에게 제대로된 문화 해설을 해주고 싶어서 하는 일이에요



Q. 마지막으로 건강을 위해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이 있을까요?

  



A. 건강해야죠, 어머니 수발을 위해, 농사일을 위해서는 더욱요. 특별히 하는 것은 없고, 봉수산 주변을 자주 걷습니다. 그리고 시골에서는 자연스럽게 채식위주의 제철에 나는 것 들을 먹고 사니 건강해 지는 거 같아요.

제가 직접 키우는 제철 과일과 음식들, 사시사철 이것들로 인해 건강은 자연스럽게 관리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화장품은 거의 쓰지 않아도 피부가 매끄러워요, 나이보다 젊어 보이지 않나요.(웃음~) 가끔 쌀뜨물로 세안하고, 매실주를 직접 담가 스킨 대용으로 이용하고 있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경제인연합회 참사 시절, 건강보험 탄생에 참여 했고, 마포로 독립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아버지의 병원 생활과, 어머님의 중풍 등을 수발하게 된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관여 했던 일이었지만 건강보험은 참 잘 만들어졌다 하는 얘기를 하면서, 지금은 어머니가 노인요양보험의 혜택을 받고 있으니, 사람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같단다.

그녀를 만나고, 뒤돌아 예당저수지를 바라보면서 내려오는데 치매로 어린아이가 되었던 아버지의 딱딱해진 변을 손가락으로 파내면서도 즐겁더라고, 자기에게 이런 기회를 준 아버지에게 고마웠다는 얘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눔과 행복이 바로 내 앞에 있다는 사실과 어머니를 위해 본인이 건강해야 된다는 말과 함께 떠돈다.

짧은 인터뷰이지만 그녀의 나눔의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였으면 좋겠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사내기자단 / 박현영 



 

그녀에 대해 더 알고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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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것을 다른 이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100원짜리 하나도 아까운 것이 사람 마음인데, 자신의 장기를 사후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의 마음은 아름답기만 하다. 이런 따뜻한 마음을 모아두는 곳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직원들도 자신의 것을 조금이나마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다. 어렵고 아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눠주는, 작지만 아름다운 동행에 취재진이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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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장기운동본부에 모여드는 사람들

 

서울 충정로역에 위치한 사랑의 장기운동본부에는 매일같이 2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가며 분주하다. 흔히 장기기증 단체라고 하면 단순히 장기를 기증받고 필요한 이에게 나눠주는 일만 생각하기 쉽지만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만성 신부전증 환자들이다. 취재가 있던 날에도 어김없이 오전부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장 투석을 위해 이곳을 찾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운 병원을 두고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무료로투석을해주기때문. 신장투석을한번하기위해서는 수십만 원이 넘는 의료비가 들다 보니 보통 이틀에 한번은 투석을 받아야 하는 만성 신부전증 환자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랑의 장기기증본부에서는 매일 같이 신장 투석을 무료로 지원해주고 있다. 만성 신부전증 환자들에게는 이곳이 그야말로 삶의 최전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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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밥 한 끼에 희망을

 

이곳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직원들은 매월 한 번씩 투석을 받은 환자들에게 따뜻한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취재가 있던 날도 10여 명의 공단 직원들이 남녀 가릴 것 없이 앞치마에 위생 모자를 쓰고 점심식사를 위한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집에서도 안 하는 마늘을 까느라 서툰 손을 놀리고 100인분의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4시간이 넘는 힘든 투석을 마친 환자들이 자신들이 만든 한 끼의 식사를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면 힘든 줄도 모른다. 이렇게 오전 내내 준비한 음식은 점심시간이 되어서 환자들이 있는 6층으로 옮겨져 일일이 배식이 된다. 전쟁 같은 병원에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퍼지며 삶의 여유를 찾는 시간이다.


특히 이날은 평소보다 더욱 특별한 날이었다. 바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온 기부금으로 사랑의 장기운동본부 제주지부에 냉장고를 기증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봉사에 함께한 김국환 차장은 자신들의 자발적인 작은 도움이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만드는 한 끼의 식사는 단순한 자원봉사가 아닌 아픈 이들에게 희망을 안기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런 작은 봉사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 더 많은 사람들이 나서길 꿈꿨다.


_글.. 이상현 _사진.. 신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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