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라는 말은 참 많이 쓰는 단어이죠. 담배, 커피 등..  내 의지대로 쉽게 중단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중독”이라고

하는데요. 봉사도 하다 보면, 그 뿌듯함과 타인을 위한 일을 했다는 성취감 때문에 중독이 된답니다. 가슴은 따뜻,

심장이 뭉클해지는 그런 ‘건강보험공단 동대문지사’의 봉.사.중.독.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실까요? ^^

 

 

2014년 5월 15일, 따뜻한 봄날, 동대문지사의 건이강이 봉사단은 동대문노인종합복지관에 다녀왔어요. 한 달에 한 번

어르신들을 위한 배식 봉사를 하러 갔어요. 배식봉사 하면 흔히 밥을 퍼주는 장면만 생각이 나시지요? 하지만 밥을

푸기까지 보이지 않는 땀방울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400명이 넘는 어르신들의 식사를 준비하다 보면, 모든 게 다 대용량이랍니다. 장롱만한 냉장고 세 개에도 안 들어갈 만한

엄청난 양의 식재료를 깨끗이 물에 씻고, 정성껏 칼로 다듬어 준비를 하는 첫 준비 작업이 필요해요. 하고 나면 칼을 쥐었던

손에는 영광스런 눌린 자국이 남고, 팔 근육이 당기고 알이 송송이 밴답니다.

 

 

 

다음은 고기볶음을 만드는 작업인데요.

 

성인이 두 팔 벌린 길이만큼의 가마솥에, 호랑이랑 사자가 함께 먹어도 배가 부를 양만큼의 돼지고기를 넣어요.

양 팔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을 있는 힘껏 사용하여 고기에 양념이 고루 배게 젓다 보면, 어느 덧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심박동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 마냥 쿵쿵쿵 뛰지요.  

  

 

400인 분의 식사를 준비하다보니, 폐기물 박스도 고물상에 팔아도 될 만큼 많이 나온답니다. 박스에 끈끈하게 붙어있는

테이프를 쭉 잡아 뜯고, 버리기 수월하도록 꾹꾹 눌러 펴서 카트에 올리는 작업을 수십 개 하다보면 입에 단내가 난답니다.

밥을 담아드리는 것만 생각했지, 이런 고단한 작업이 있는 줄은 몰랐지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작업들까지 맛있는 식사 준비가 완료 되고 나면, 배식봉사자들은 먼저 밥을 먹는답니다. 젖먹던

힘까지 내어 배식을 하려면 밥심이 필수이거든요. ^^

 

내가 만든 반찬이라서 그런지, 직접 조리과정을 보고 믿을 수 있는 식사라서 그런지, 완성된 밥들은 참말로 꿀맛입니다.

브로콜리와 시금치의 건강한 향기와, 미역국 속 들깨 가루 하나하나가 입 안에서 맴돌며 춤을 추는 기분이 듭니다. 

 

이제, 이 맛있는 식사를 오랫동안 기다리신 동대문구 어르신들에게 하나하나 사랑담아 퍼드릴 시간이 왔어요. “줄을

서시오.” 허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인기있는 복지관 식당 계단엔 배식시간 1시간 전부터인 10시 반부터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계시답니다. 

 

11시 27분, “3분 남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복지관 영양사 선생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 밥 담당, 반찬

담당, 퇴식구 담당이 일사불란하게 자기의 위치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1시 30분 정각이 되면, 입구가 열리자 마자 물밀 듯이 어르신 듯이 몰려 들어오십니다. 그 과정에서 새치기를

했다며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그럴 때면 봉사자들은 어쩔줄 몰라 하지요.

 

숟가락 젓가락을 나누어 드리면서, 어르신들게 맛있게 드시라고 미소로 따뜻한 말 전해드리면,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 한마디가 정말 마음이 먹는 꿀처럼 느껴져요. 

 

 

 

 

역시, 오늘의 식사 만족도는 100% 였나봐요! 불만족 칸에 담기는 공이 한 건도 없이, 모두들 활짝 웃고 가셨어요! 

 

비싼 호텔 식사도 좋지만, 봉사자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지는 식사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깨끗하고 믿을 수

있는 식재료로 봉사자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거든요. 한 끼 식사라 할지라도, 건이강이 봉사단 5명과, 시니어

봉사단 5인이 합작하여 만든 사랑과 정성의 하모니이기도 합니다. 정말 뿌듯하지요!

 

 

이제, 배식봉사의 꽃인 설거지가 시작되었어요. 식판 수백 개를 뜨거운 증기가 나오는 소독기 옆에서 씻어내는 고단한

작업이 남았습니다. 옷에는 있는 대로 음식물 찌꺼기가 섞인 물이 튀고, 날도 더운데 뜨거운 바람 때문에 더 힘든 작업

이에요. 그래도, 다음 식사를 위해서 꼭 해야 하는 일이기에, 동대문지사 건이강이 봉사단은 분주히 움직입니다. 

 

고된 일정을 마치고 건이강이 봉사단의 마음엔 달처럼 두둥실, 행복이 충전되었어요. 

 

아차, 봉사중독 이야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말씀을 드리고 끝을 맺어야 할 것 같아요. 건이강이 봉사단 동대문지사와

함께 봉사한 시니어봉사단 단원이신 75세의 할머니께서 그러시더라구요. “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여기랑 밥퍼

봉사랑 같이해. 봉사를 안하고 집에서 쉬면 쉬는 것 같지가 않아. 봉사 중독인 것 같아. 봉사를 안하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그 강력한 단어 봉.사.중.독. 이 세상 어떤 중독보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뭉클해지는 아름다운 단어인 것 같아요.

함께 사는 세상, 국민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공단의 아름다운 가치가 빛난, 건이강이봉사단 동대문지사의

하루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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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튀니지의 슈바이처  장기순

봉사는 내 생애의 가장 큰 보람

 

 

 

 

 

 

 

  한국이 오히려 외국같다

 

이 말은 의사 장기순이 1997년 유석창박사가 제정한 상허대상을 수상하기 위해 20년 만에 세 번째로 귀국하면서 고국을 낯설어 하며 한 이야기입니다.

1934년에 태어난 그는 1960년 전남대학교 의대를 졸업하였고, 광주적십자병원을 거쳐 충남 금산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했으며, 10여 년 동안 재산도 많이 모았습니다.


그는 1977년 의학전문지에 실린 아프리카지역 정부파견의사 모집광고를 보고 새 삶을 계획했습니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조국을 위해서는 이 만큼 일했으면 됐다. 이제 정말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일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처음엔 병원도 잘되고 아이들도 아직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 반대가 심했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오자며 가족을 설득했습니다.  계약기간인 2년만 근무하다 오기로 약속하였습니다.


1977년 겨울. 그는 부인과 세 자녀를 데리고 생면부지의 땅 아프리카 튀니지(Tunisie)로 떠났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남은 생애를 아프리카 환자들과 함께 지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에 인접한 튀니지

 

 

그곳에는 풍토병이 없고 의료수준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는 튀니지의 스팍스(Sfax) 대학병원 산부인과 의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곧 이동시술반 차량을 다섯 팀으로 꾸렸습니다. 이후 시골 구석구석을 돌며 하루 최고 20건씩 무료 불임시술을 했습니다.

그 후 10년간 총 7,000건의 복강경시술을 한 결과 가구당 7명의 자녀수가 평균 3명으로 줄어드는 성과를 냈습니다.

튀니지 국민들과 정부의 신임을 얻어 부임 6년째 되던 해 병원장에 취임했습니다.

 

아내가 이제 그만 고국으로 돌아가자고 몇 번이나 졸랐지만, 한 참 진행 중이던 가족계획운동을 중도에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1986년까지 10년 동안 고국에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일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그가 보고한 1986년 4/4분기 활동 결과입니다.

  산부인과 분야 질환 치료(치료인원 1,386명).
  난소낭종 제거술 1건, 자궁경관 낭종제거술 5건, 자궁외 임신수술 1건.

  자궁하수증 복원수술 1건, 계류 유산 제거술 31건, 유방농양 절제술 5건  

 
 
의약품 및 의료장비의 부족으로 의료 활동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580건의 복부소절개술에 의한 여성 불임시술, 9,000여건의 복강경을 통한 여성 난관 불임시술, 6만 천여 건의 산부인과 질환 진료수술, 10만 2천의 산부인과 환자 진료를 시행하였습니다.

정부파견의사 계약 기간도 끝났습니다.
그는 튀니지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한국에 있는 의사 월급의 50% 수준밖에 안됐지만, 그때만큼 보람 있고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더 험한 곳, 모리타니아(Mauritania)로 갔습니다.

 

사하라사막 서부의 신생국 모리타니아는 튀니지와는 달리 가난한 국가인데다, 일부다처제의 영향으로 가구당 8~15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처음 그가 모리타니아 수도에 있는 누악쇼트 국립병원에 부임했을 때는 의사들도 거의 없었고 의료장비도 청진기에 간단한 X-Ray 장비가 고작이었습니다.  국민들도 10살만 되면 결혼하기 시작해 보통 6~7명의 자녀를낳았습니다.

 

그는 장관을 찾아갔습니다.
가족계획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산아 제한 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더니, 이슬람국가로서의 풍습과 전통 운운하며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시술기구를 이용해 시범을 보여주며 설득해 마침내 정부의 지원을 받아냈습니다.
 
현지 원주민들은 그를 ‘독토르(Doctor) 장’이라 부르며 따랐고, 정부도 보건부 자문관으로 위촉했습니다.

 

낙태가 금지되었기에 아버지 없는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할 때,
의사 장기순은 자신의 성을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땅 모리타이니아에는 한국의 ‘장씨’ 성을 가진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의사 장기순은 모리타니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 선원 2,000여 명을 공휴
일과 주말을 이용해 10년간 무료 진료했습니다.
그곳에서 13년의 세월이었습니다.

 

23년간, 그의 튀니지와 모리타니아에서 인술활동은 고귀한 희생이었지
만,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어느 포털사이트 검색란에 '의사 장기순'을 쳐 보았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 중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 좀 찾아주세요.’라는 어느 중학생의 질문에 반갑게도 의사 장기순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1999년 정부는 의사 장기순에게 수교훈장 창의장을 수여했습니다.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다시 아프리카 모리타니아로 돌아가야 합니다.
후임의사가 갑자기 오지 않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은 아주 행복하다며 빈자리를 지키러 다시 간다고 하였습니다.

 

의사 장기순은 1988년 재외국민포상 대통령상, 1989년 대통령 표창,
1996년 적십자사 박애장 은장, 1997년 상허대상, 1999년 수교훈장 창의장을 수상하였지만, 요즘 사회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 중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에 더 깊은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장기순박사가 1989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고 있는 모습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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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복돌이^^ 2011.07.15 1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의 사랑은 삶 자체였다고 하신 부분에서 마음의 생각이 많아 지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2. 핑구야 날자 2011.07.15 1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불어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한것 같아요..

  3. pennpenn 2011.07.15 1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분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오늘은 즐거운 금요일~ 주말을 멋지게 보내세요~

  4. 레오 ™ 2011.07.15 1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다면 남자가 아니죠 ..
    훌륭한 분들만 오래 오래 장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5. Pole barn prices 2011.10.10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된 것 Success in life is founded upon attention to the small things rather than to the large things; to the every day things nearest to us rather than to the things that are remote and uncommon. I want to know where to find Pole barn prices, do you?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에티오피아의 슈바이처  유민철

에티오피아의 아픔을 보듬다

 

 

 

 

 

 

 


아픔과 배고픔 그리고 슬픔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에티오피아(Ethiopia).


한때 솔로몬의 후손이라 자처하며 아프리카의 자존심이었던 에티오피아는 지금은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였고, 오늘도 뜨거운 태양 아래 기아와 질병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에는 아픔을 같이하고 사랑을 나누었던 성형외과 의사 유민철이 있었습니다.


그는 1941년에 태어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련의를 마쳤습니다.

1975년, 그는 아프리카 파견의사 모집에 지원했습니다.

인술에 목마른 곳에서 봉사하며 살고 싶었던 평소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가 갑자기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부모는 반대하였습니다.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아들의 뜻을 꺾을 수 없게 된 부모는 몇 년 만 있다가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부인과 다섯 살 난 딸, 세 살 난 아들이 동행하였습니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블랙 라이온(Black Lion) 국립의료원으로 파견되어 30년이 지난 2005년 정년퇴임하였습니다.

 

 

학생 기술 회진을 하고 있는 의사 유민철

 


그가 도착한 1975년은 하일레 셀라시에 왕정이 군부쿠데타로 무너진 직후였습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운 나라였지만, 경제는 끝없이 추락만 거듭하였습니다.

세계는 에티오피아를 도왔지만, 쿠데타가 터지고 나서는 에티오피아를 외면하였습니다.


공산화된 그곳의 현실은 혹독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몇 달 일하지도 못하고 쫓겨났으나 현지 의사의 도움으로 의료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1980년대까지 잇따라 내란과 분쟁을 겪으며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여 병원은 전상자들로 넘쳤습니다. 절단, 총알제거 수술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습니다.

 

1991년 공산 정권이 무너질 때는 집 근처까지 총탄이 날아왔습니다.

사관에서는 철수를 종용했지만, 그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평화는 찾아왔지만 병원은 또 다른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병원 내과환자 중 60%가 AIDS 환자인데다 낙후된 의료장비와 시설은 그를 항상 감염의 위험으로 내몰았습니다.

에티오피아는 AIDS환자가 3백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아디스아바바는 더욱 심해서 6명 중 1명이 감염자입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넘쳐나 AIDS 검사도 없이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화상을 입은 소말리아 난민 환자를 수술할 때였습니다.

환자에게 가벼운 마취를 한 뒤 수술에 들어갔는데, 환자가 그의 팔을 치는 바람에 피 묻은 수술 칼에 손을 베이고 말았습니다. 환자가 AIDS에 걸렸다면 그도 감염될 우려가 큰 것입니다.

환자의 피를 채취해 AIDS 검사를 요청했으나 하루 뒤 결과가 나오기까지 착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환자는 AIDS 감염자가 아니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선 싸구려 부탄가스를 쓰는 가정이 많아 가스폭발로 인한 화상을 입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구순구개열인 언청이가 흔할 뿐만 아니라 턱없이 부족한 의료시설로 종양이 생겨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말기에 이르러서야 의사를 찾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유일한 성형외과 전문의인 의사 유민철은 일상처럼 종양과 화상 그리고 언청이 환자의 수술을 맡았습니다.

 

주 6회 언청이 수술을 하였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끝이 없었습니다.

입천장이 바깥으로 드러난 환자, 얼굴이 기형인 환자를 수술했습니다.

수술 뒤 좋아하는 환자들을 볼 때면 그는 뿌듯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병원을 찾는 환자는 약값은 물론 수술 장갑이나 반창고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형편이었고, 이것마저 살 수 없는 환자도 흔하였습니다.

입원환자는 그나마 치료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일반 환자들이 여기 오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빈 병실이 나오기만 기다리다 죽어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가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 보고한 1996년 1/4분기 활동내용입니다.
 

분기별 600여 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거나 수술함.

선천성 질환 및 총상환자, 화상환자 등을 주로 치료함.

 

의료 활동상의 애로사항은 마취약, 고가 항생제 등의 부족과 위생 재료의 부족

그리고 AIDS 환자의 증가는 큰 문제점임.

 

 

장갑이나 반창고를 살 수 없는 극빈자에게 그는 장갑 등을 주었습니다.
연신 고마워하며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는 이들.

어떤 이는 나중에 찾아와 지푸라기가 묻은 달걀 10여 개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순박한 표정에서 그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맛보곤 했습니다.


아디스아바바 국립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레지던트 트레이닝을 맡아 200명이 넘는 외과 의사를 배출시켰고, 난민촌 방문을 통해 다수의 빈곤자 들에게 무료 의료 봉사활동을 실시하였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들과 고아원에 무료 진료와 지속적인 지원을 하였고, 의술만큼이나 신앙심도 깊었던 그는 노숙 아동, 전쟁 미망인을 지원하는 사회봉사 활동에도 헌신적이어서 ‘걸인의 아버지’라 불렸습니다.

 

에티오피아는 그에게 있어 삶 전체였습니다.

 

50년 전의 아시아와 비슷한 수준인 아프리카 지역은

50년 후에는 분명 우리 후손의 삶의 터요, 외교와 무역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를 돕는 일은 50년 후 세계무대의 주역이 될 우리 후손을 위한

외교의 시작인만큼 더 많은 이들이 앞장서 주길 바랍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에티오피아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정부와 민간차원의 인도적 지원을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1997년 그의 슈바이처 같은 감동적인 삶은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실렸습니다.

 

1982년 정부에서는 의사 유민철에게 수교훈장 숙정장을 수여하였고, 1994년에는 KOICA 총재 표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제7회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30년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그 오랜 세월을 에티오피아인으로 살았습니다.

30년 세월을 뒤로 하면서 어느 기자와 나눈 대화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제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를 떠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조선일보 97년 6월 23일자 기사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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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풀칠아비 2011.07.01 12: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금요일마다 여기서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시는 분들을 만나는 행복한 시간을 갖게 되네요.
    오늘도 아낌없는 박수 보내드립니다.
    행복한 7월 보내세요.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탄자니아의 슈바이처  박형동, 서미라 부부

신앙의 힘과 생명 존중의 외경심으로

 

 

 

 

 

 

 

선교활동을 펴기 위해 1991년 8월 초 탄자니아로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가톨릭병원 일반외과장을 그만 둔 박형동(35)씨와 성남병원 정신과장인 서미라(34)씨 부부가 두 자녀와 함께

탄자니아 킬리만자로산 밑 인구 80만 명의 아루샤 기독병원에서 무료봉사하기 위해 출국한다.

 

 

그들의 장도를 격려하는 어느 신문 기사의 일부분입니다.
박형동은 1957년에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의대에서 일반외과를 공부하였고, 1991년부터 의료선교의 일환으로 탄자니아(Tanzania)에서 근무하다, 1993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신분이 변경되었습니다.

 

서미라는 1958년에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의대에서 정신병과를 공부하였고, 1991년부터 의료선교의 일환으로 탄자니아에서 근무하다, 1996년KOICA 정부파견의사로 신분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들은 부부였습니다. 그들이 몸담았던 병원은 킬리만자로 크리스천 메디컬센터(Kilimanjaro Christian Medical Center).

 

KCMC 중환자실에서의 진료모습


의사 박형동과 의사 서미라는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였으며, 평생의 동지였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났습니다.
부부의 어느 날 선언은 폭탄이었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로 간다. 의사보다는 선교사에 더 매력을 느낀다. 미련없이 떠나겠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이들 부부가 독실한 신자인줄은 알았으나, 막상 선교사로 떠날 줄은 몰랐습니다.

주위의 부러움을 받던 맞벌이 의사가 안정된 직업을 박차고 오지인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난다는 것은 그
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동부 인도양을 마주한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산이 있는 나라.
그들의 활동은 드넓은 아프리카 초원의 표범처럼 긍정적이며 역동적이었습니다.

 

의사 박형동은 일반외과 전문의였습니다.
탄자니아의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자 세스나기를 구입하여, 직접 몰고 하늘로 날아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호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신속히 사막을 날아가 최고의 의료 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를 제공하는 것에 착안하여, 경비행기를 타고 외과의사가 없는 지역을 순회 진료하면서 환자 수송에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탄자니아의 의료 상황도 여타의 아프리카 최빈국과 유사하였습니다.
불안한 전력 공급과 부족한 의료 장비는 물론 병원의 재정난으로 인한 마취약 부족으로 응급 수술 위주의 수술만 시행하였습니다.

 

수술을 하다가 불이 나가면 랜턴을 밝혀야 했습니다.
의사들의 협조가 부족하여 항상 갈등이 발생하였고, 생명 경시 등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좌절도 맛보아야 했습니다. 약품 밀반출과 금품수수 등의 부조리가 만연하였고, 병원도 항상 원조를 바라는 구태의연한 모습이었으며, 심한 부패와 불신으로 인하여 세계가 등을 돌렸습니다.

 

 

수술중 전기가 나가 후레쉬로 비춰가며 수술하고 있는 광경

 

 

그는 묵묵히 그의 본분을 지켰습니다.
그가 KOICA에 보고한 1993년 3/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치료한 환자는 약 400여 명으로 병명은 각종 외상, 화상, 위장질환, 혈관질환, 항문질환 등이다.

또한 위절제술, 소장대장절제술, 피부이식, 혈관외과수술 등 100여건의 수술을 집도하였다.

 

특히 그는 탄자니아 최초로 식도암 절제와 혈관 문합 그리고 흉부교감 신경절제수술 등을 시도하여 최신 의료시술을 선보였습니다.
매주 준의사 코스 수강생을 대상으로 외과학을 강의하였으며, 분기별 한차례씩 마사이족을 찾아 아픔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았으나 임박한 약품을 정가보다 싸게 구매하여 원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에는 브룬디(Burundi)와 르완다(Rwanda) 두 나라에서 발발한 내전과 부족간의 전쟁으로 탄자니아 서북쪽 국경지대에 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난민들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그는 UN이나 적십자기구 등에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난민수가 워낙 많아 세계 각국의 구호가 절실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예방 가능한 질환으로 죽어가는 환자가 많아 예방의학의 중요성도 주장하였고 보건소 건설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특히 심장센터 설립이 절실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르완다 난민 지원 프로젝트 활동 모습


 

 

의사 서미라는 신경외과 전문의였습니다.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에 의사를 파견할 때는 주로 Major과인 외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위주였습니다.

실제 탄자니아에서도 Minor과 전문의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탄자니아에서는 구순구개열인 언청이 등 성형수술이 필요한 환자수가 부지기수인데도 성형외과 전문의는한 명도 없는 상태였으며, 신경외과 전문의는 딱 한 명만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는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탄자니아의 정신질병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1994년. 3천2백만의 탄자니아 인구 가운데 전문적 정신치료가 요구되는 환자의 수는 70~80만 이상으로 추정되었는데, 아프리카는 미개발지역으로서 문화가 덜 발달하여 환경적인 스트레스가 적으므로 정신질환자가 적을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간질환자는 잘못된 문화적 관습과 가정불화 그리고 기생충의 만연으로 선진국보다 환자수가 2배이상 많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서미라 의사의 근무 모습

 

 

그가 KOICA에 보내온 1996년 1/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외래환자 분기당 외래환자는 450여 명. 카운슬링환자는 100여 명에 이르며 병명은 정신분열증, 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간질, 치매, 파킨슨증후군 등 다양하다.

의료 활동상의 문제점으로 정신과 약품구입의 어려움과 수입약품 대부분이 고가로 매매된다.

중증 정신질환자 수용시설 및 훈련인력이 부족하다.

정신질환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주재국과 주민의 반응이 호의적이나 정신과 의사의 태부족으로 훈련된

간호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KOICA에서 지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탄자니아 국민의 간질환자 실태 조사 및 진료 프로젝트를 실시하였으며, 세계적으로 치료를 요하는 간질환자의 수는 인구의 1~2%선으로 알려졌으나 탄자니아는 이보다 두 배가량 높은 3% 전후일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 원인으로 분만 시 뇌손상 후유증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열악한 교통시설로 인한 가정에서의 출산과 미비한 의료시설 및 여성할례 등 잘못된 관습으로 인한 산도손상에 기인하며, 기생충감염도 한 원인이라 지적하였습니다.

 

탄자니아 인구 중 약 백만 명 가까이가 치료가 요구되는 간질환자로 추정되며 이중 어떤 형태이든 투약을 받고 있는 환자 수는 불과 1%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그나마 약효가 떨어지는 페노바비탈에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탄자니아에 정신과 전문의가 불과 10명 내외인 것을 고려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의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의 수
는 불과 1천 명 내외일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정신질환자 인식증대와 정신과 위상 제고에 노력하였으며, 그의 부단한 노력으로 탄자니아에서 처음으로 정신과가 개설되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킬리만자로 영봉을 바라봅니다.

아프리카인의 성지라 일컬어지며, 적도 부근에 있으면서도 만년설로 덮여 있어 항상 번쩍거리는 산.
설산이 아프리카를 묵묵히 굽어보고 있습니다. 그들 부부는 그 산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강원도 산골에 들어와 있는 느낌 같아요.


젊음으로 버텼지만, 어찌 갈등과 좌절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힘과 생명존중의 외경심으로 탄자니아에서의 봉사활동을 성실히 수행하였습니다.

 

 

국민일보, 1997.7.11일자 「검은대륙에 심은 복음인술」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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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기한별 2011.06.10 08: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의 슈바우쳐 잘 보고 갑니다~

  2. 풀칠아비 2011.06.10 1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랑을 실천하시는 분들께 아낌없는 박수 보내드립니다.
    행복한 금요일과 주말 보내세요.



 

앞 못 보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임에 몇 해 전 가입했었습니다.

 

그중에는 유명한 성우도 있었고 탤런트, 국어선생님 연극배우도 계셨지요. 모두가 없는 시간을 쪼개서, 보이지도 않을 손짓, 몸짓 연기까지 섞어가며 재미있게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 까지! 다음 주에 계속 하겠습니다.”

 

아이들의 우렁찬 박수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고맙다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봉사자는 유명 성우도 탤런트도 배우도 아닌 칠순의 할머님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도착할 시간이면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서 있기까지 했습니다.

언제나 두툼한 돋보기를 걸치고 책을 펼쳐들어 '안경 할머니'로 불리는 할머니.

 

“ 어디 보자… 내가 어디까지 했더라…음… 그래 여기다!”드디어 할머니의 책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도착한곳은 추억의 나라였어요. 그곳에는 치르치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어요. 앗! 할아버지 할머니닷! 미치르가 외치는 소리에 졸고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눈을 떳습니다.”

 

“하,하,하… 와, 재밌다. 할머니,최고!”

 

 

돋보기를 써도 글씨가 잘 안보여 더듬거릴 텐데… 잇새로 바람이 새서 발음도 정확하지 않을 텐데… 노인 냄새도 날 텐데… 다른 봉사자들은 안경 할머니의 인기비결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 왜들 안경할머니를 좋아하지?”

“그러게…”

 

그런데, 사람들의 대답은 참 간단했습니다.

 

“안경 할머니가 왜 그렇게 좋으세요?”

“아, 예… 그거야 할머니는 늘 손을 꼭 잡고 책을 읽어 주시거든요.”

“아… 예… 그렇군요.”

 

시각 장애인들에게 책 속에든 몇 줄의 정보, 몇 줄의 지식보다 더 값진 것은 할머니의 손끝에서 손끝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임혜란/경기도 구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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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기한별 2011.04.30 2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2. 루비™ 2011.05.02 00: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손끝으로 전해지는 사랑이라....
    가슴이 따스해집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이면 서울시립은평노인종합복지관 진료실이 노랫소리로 떠들썩해진다. 미모면
  미모, 실력이면 실력, 다정
다감한 마음 씨까지 3박자를 고루 갖춘 어르신 의료봉사단이 떴기 때문이
  다. 전직 의사, 수간호사 출신 60~70대 어르신들이
모여 14년째 의료 봉사를 펼치고 계신 웃음이 넘
  치는 진료실 현장으로 함께 가보자.
 

 

 

노래하는 진료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지난 12월 21일 화요일 아침 10시, 서울시 은평구 노인종합복지관 진료실에 딸린 온돌방에서 난데없이 흥겨운 합창 소리가 들렸다. 무료 진료일에 맞춰 아침 일찍부터 진료실 앞에 줄을 섰던 환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아침체조를 하시는 것. 손뼉을 치며 대여섯 곡을 이어 부르고 노래가 끝나도 열기는 식지 않는다.

 


1999년 개관한 은평 노인종합복지관의 역사와 함께 촉탁의로 봉사하고 있는 조남인 원장님에 대한 환자 팬들의 찬송(?)이 이어진다.
“ 원장님! 최고야! 원장님! 최고야! ” 조남인 원장님은 진료실의 ‘이효리’. 환자 팬들의 원장님 사랑이 어찌나 지극한지 톱스타 부럽지 않다.


“  병원 운영할 때보다 봉사하는 지금이 더 좋아. 그동안 의사생활 중에 제일 행복해. 환자들이 너무 예뻐. 할머니들도 나만 보면 좋다고 내 얼굴에 뽀뽀하고 난리야. 사실 내가 더 고맙지. 나를 너무 행복하게 해주니까. 의료 인생의 마무리를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이렇게 봉사할 수 있는 내가 복이 많은 것 같아.  ”


가정의학 전문의로 개인병원을 운영하다 의사인 딸에게 병원을 맡기고 97년부터 의료 봉사에 나선 조 원장님. 웃음 가득한 호탕한 목소리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사는 여유와 행복감이 묻어난다.


어르신 의료봉사단 멤버는 총 여섯 분이다. 조 원장님 외 정서옥, 안옥분, 이영자, 이경자, 송재희 어르신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조 원장님이 76세, 정서옥, 안옥분 어르신이 74세, 이영자 어르신이 69세로 모두 60~70대이지만 편안히 노후를 즐기기보다 의료 봉사를 자원했다.


올해로 14년째 활동 중인 어르신 의료봉사단은 다양한 무료 진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은평 노인종합복지관에서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봉사하고 있는데 서울시에 거주하는 60세 이상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분들을 대상으로 많게는 하루 100명 이상을 진료한다. 은평 노인종합복지관 외에도 인덕노인복지회관, 돌봄노인요양원, 녹번동, 역촌동 관련 기관 등도 방문한다.


평일 중 목요일만 빼고 오전, 오후가 봉사 스케줄로 빽빽하다. 어르신 봉사단은 평소에는 서로 ‘형님, 동생’ 하다가도 진료 시간에는 처방, 차트 작성, 주사, 조제, 혈압 측정 등 역할을 나누어‘현역’때와 다름없이 프로페셔널하게 일한다.

 

 

환자를 가족처럼 대하는 의료 봉사단

 

십 년 이상 매주 만나 온 가족 같은 환자들이다 보니 처방하는 약이나 영양제는 제일 좋은 것으로 쓴다. 예전에는 무료 진료라고 하면 ‘이름 없는 저가 약을 쓰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환자들도 있었지만 나라의 의료복지사업에 대한 홍보가 잘 되면서 지금은 믿고 먹는다.


감기나 병이 즉각 나았다며 환자들이 고맙다는 뜻으로 기어이 찔러주고 가는 커피 값 천 원, 이천 원은 일일이 모아 연말이면 환자들을 위한 선물도 사고 간식거리도 준비한다. 어르신 봉사단은 복지관 방문이 어려운 노인들의 집으로 약을 드리러 직접 찾아가고 환자들을 위해서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좀에 걸린 환자 발에 직접 약을 발라주고 노인요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면 변비에 걸려 고생하는 노인이 쾌변을 보시도록 옆에서 도와드리고 용변 후엔 씻겨 드리기까지 한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목욕시키는 일도 기꺼이 맡아서 한다. 모든 환자들을 내 가족처럼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모든 환자 분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해요. 우리에게 진료를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연세가 많고 생활이 어려운 분들이 대부분이라 전문용어나 어려운 말을 쓰면 못 알아들으실 때가 많거든요. 가령 소변, 대변 하는 말도 모르는 분들이 계셔서 똥, 오줌이라고 해야 해요. 표준어로 부추를 전라도 지방에서는 솔, 경상도에서는 정구지라고 하는 식으로 환자 개개인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말로 대화하려고 노력해요.”


서울시 간호직 공무원으로 보건소 등에서 38년 동안 근무하다 98년 퇴직한 정서옥 어르신의 말이다. 환자를 진심으로 대하려는 어르신의 마음이 느껴진다.


서독병원(옛 시립 서대문병원) 등에서 수간호사로 근무하다 정서옥 어르신과 같은 해 퇴직한 후 나란히 의료 봉사의 길로 들어선 안옥분 어르신도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의료인이다. 80년대 결핵, 장티푸스 등이유행하던 시절, 모든 간호사가 마스크를 낀 채 근무하는데도 수간호사로서 차마 마스크를 낀 채 환자를 대할수가 없어 당신 자신이 결핵에 걸려 1년 반을 고생한 적도 있다.


옛 내무부장관 표창, 서울시장 표창 등 각종 상도 많이 받으신 두 분은 주변인들에게 의료 봉사의 즐거움과 필요성을 홍보하며 ‘의료 봉사 홍보대사’ 를 자처한다. 두 분은 한목소리로  “ 더 많은 은퇴 의료인들이 의료 봉사에 나섰으면 좋겠다 ” 고 말했다.

 


가장 멋진 노후


어르신 봉사단은 한 사람이 그만두면 다 같이 그만두기로 해서 아무도 그만하겠다는 말을 못 꺼낸다고 한다. 이영자 어르신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몸이 힘들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  처음에는 내가 얼마나 이 일을 하려나 싶었는데 이제는 정이 들어서 내 일이라 생각하며 하고 있지. 우리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일찍 돌아가셔서 아픈 노인 분들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 우리 남편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봉사 활동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면서 집안 일까지도와줘. 남에게 봉사하다 보면 내가 더 행복하고 배우는 것도 많아.  ”


평균 수명 80세의 노령화 시대. 60세 정년이면 은퇴 후에도 20여 년을 더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일만큼 멋진 노후가 또 있을까. 의료봉사단 어르신들을 본받아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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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타리나^^ 2011.01.11 0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멋지신데요
    노후가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도

  2. 굄돌 2011.01.11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렇게 저물어가면 멋진 황혼이겠지요?
    남은 생,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주며
    기쁘게 사시니 늙지도 않으실 것 같구요.
    정말 멋지십니다.

  3. 풀칠아비 2011.01.11 1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쟁이 의료봉사단 어르신들께 아낌없는 박수 보내드립니다.

  4. pennpenn 2011.01.11 1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복 받을 거에요~
    차가운 날씨에 건강 유의하세요~

  5. 테리우스원 2011.01.11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의 기립박수를 보내드립니다
    흐뭇한 광경들 멋진 인생들이십니다
    즐거우시고 승리하시길

    사랑합니다 행복하세요 파이팅 !~~~

  6. 칼리오페 2011.01.11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황혼인생 들이시네요. 젊은 제가 고개가 숙여집니다 ㅠ

  7. 칼스버그 2011.01.11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더욱 멋진 날들을 기원할게요...

  8. 꽁보리밥 2011.01.11 1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러운 정도가 아닙니다.
    얼마나 보람있고 행복할까요?
    건강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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