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사모아의 슈바이처  최영진

  남태평양 푸른바다처럼 행복했노라

 

 

 

 

 

 

 

 

 

 

 

 

 

 

 군대가 없는 나라.
 태고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섬나라.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작은 섬.

 

 사모아(Samoa)는 오세아니아 남태평양 서사모아 섬들로 구성된 입헌군주제 국가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령에서 뉴질랜드 통치령으로 바뀐 뒤 1962년 폴리네시아 민족국가 최초로 독립하였고, 1997년 서사모아에서 사모아로 나라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 곳에 소아과 의사 최영진이 정부파견의사로 20년간 봉사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최영진은 1948년에 태어나 1978년 가톨릭대학교 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대구에서 소아과를 개원하여 안정된 삶을 누리던 그는 45살 나이에 KOICA(한국국제협력단) 의료봉사단에 지원했습니다.

 슈바이처를 존경하며 인도주의 의사를 꿈꾸던, 어릴 적 그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병원과 집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려 할 때 반대도 있었지만, 그는 가족과 함께 1993년 서사모아로 떠났습니다.

 

 서사모아의 수도 아피아 사모아 국립병원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아과 의사로 인술을 펼쳤습니다.

 서사모아의 평균 가족 수는 8~13명입니다. 그 만큼 자녀수가 많고, 자연히 그를 찾는 어린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국립병원임에도 의료기기들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1kg 이하의 미숙아들이 많은 이곳에서 인큐베이터의 부족으로 모두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인공호흡기가 없어 위급한 신생아가 사망한 적도 많았습니다.

 

 이런 환경이지만, 그는 사모아의 어린이들이 언제나 건강하게 웃을 수 있도록 정성을 쏟았습니다.

 파견 초기에는 폐렴, 심장질환, 류머티즘 환자를 매일 30~40명 정도 진료하였습니다. 특히 기생충 감염과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 등을 치료하였습니다.

 

 턱없이 부족한 의료시설로, 섬 곳곳에는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 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인과 함께 봉사단을 조직하여 무의촌 진료를 시작하여 매달 한 번 사바이 섬으로 가, 마을을 돌며 시력이 약한 노인에게 안경을 제공하고 각종 필요한 의약품을 주면서 많은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서사모아 무의촌 순회진료 모습

 

 

 

 의사 최영진은 꼼꼼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분기마다 활동내용을 KOICA에 보고하였는데, 주재국의 일반정세와 특별사항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KOICA 남태평양 직원 신의철에게 <서사모아 사람들>이라는 내용으로 쓴 편지도 흥미롭습니다.

 

   처음 신생아실에서 아기들을 검진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아기의 엉덩이에서 몽고반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만나는 서사모아 사람들에게 사모아인과 한국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서사모아 사람들은 먼 옛날에 페루의 원주민들이 조류를 이용해 뗏목을 타고 이곳까지 이동해 왔으리라고 설명합니다.

 

   이들은 혈액만 한국인과 비슷한 것이 아니고 삶의 형태와 그들의 성질, 현대사까지도 비슷합니다.

   남의 앞을 지나갈 때는 꼭 몸을 숙이고 ‘토로우(죄송합니다)’하면서 지나가고, 밥을 먹을 땐 꼭 어른들이 먹은 후에야

   아이들이 먹습니다.

   어른들에겐 존경어가 따로 있고, 앉을 때도 양반자세로 앉고 꽃을 좋아해서 백일홍, 맨드라미, 봉숭아꽃들을 집 주변에

   항상 심고 머리에 꽃들을 꽂기도 합니다. 술도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도 좋아하고 춤을 추는 것도 남녀 모두 즐깁니다.

 

   이들의 전통의상은 라바라바라고 하는 치마 같은 옷인데, 우리 아들 다니는 학교도 교복이 청색 라바라바입니다.

   처음엔 그 옷 때문에 안가겠다고 우겼습니다.

   다행히 교장선생님이 청색반바지를 입어도 된다고 해서 몇 개월 입고 다니더니, 요새는 라바라바를 입으면서 자기가

   제일 세련되게 입는다고 웃습니다.
   저도 가끔 초대를 받으면 라바라바를 입고 갑니다. 제 집사람도 이 곳 전통의상을 물론 입지요.

 

  1, 2년이 다르게 발전하는 한국의 소식을 정부에서 보내주시는 신문을 통해서 읽으면서 어떤 때는 한국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이만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라바라바 한 장 두른 그의 환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길고 자세한 편지 여서, 전문을 다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의사 최영진의 자상하면서도 다정한 성품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사모아 어린이들 엉덩이의 몽고반점을 보고 한국과 사모아와 몽고 그리고 페루까지 열거하며 세계는 하나라는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닥터 초이’하면서 사모아인들은 그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보냅니다.
 사모아의 국왕이 인정하는 사모아 사람사모안’으로, 코리언의 사랑과 평화를 남태평양 푸른 바다에 펼쳤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로그인없이가능한 손가락추천은 글쓴이의 또다른 힘이 됩니다 


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저녁노을* 2011.11.18 08: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라이름도 생소하네요.
    날개없는 천사의 횡보...
    금요일마다 잘 보고 있습니다.

    행복하세요.

  2. 명태랑 짜오기 2011.11.18 2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보기드문 선행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페루의 슈바이처  문장호

  가난한 인디오의 만병통치약

 

 

 

 

 

 불가사의한 잉카문명을 꽃피웠던 나라, 페루(Peru).  아름다운 절경에 잉카인의 슬픔을 담았던 마추픽추.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잉카제국의 후예 인디오들은 옛 제국의 영화는 뒤로하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여 까야오 지역과 같은 빈민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1992년 페루 대통령 후지모리 방한을 기념하기 위해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서 총 15개의 병원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까야오의 제1병원을 시작으로 꼬마스 제2병원, 아마존지역의 제3병원 그리고 안데스지역의 제4병원 등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세운 까야오병원은 저렴한 비용으로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서 이른 새벽부터 환자들은 줄을 서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에서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의료혜택이 있을 리 만무하였으며, 있다고 해도 이들의 생활 수준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곳들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까야오병원은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곳입니다.

 

 

 

이 병원을 지켰던 의사 문장호.

 

그는 1955년에 태어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비뇨기과 전문의였던 그는 한국에서 유능한 의사로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그는 KOICA의 정부파견의사로 가족과 함께 1993년 페루 리마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안정된 서울생활을 정리할 때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2년을 약속하고 도착한 곳 페루. 그 때 페루는 경제위기에다 좌익게릴라들 때문에 걸핏하면 전기가 끊기는 등 어수선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의사인 그도 결코 안전할 수 없었던 곳에서의 생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밤새 울고 투정하는 아이들을 달래며 그가 쉽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의사로서 목표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 페루 의료원에서 비뇨기과와 내과를 담당하여 외래환자 진료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비뇨기과 전문의지만 외과수술이나 소아과 진료를 할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일단 그를 찾아온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파견 기간 동안 5만 명에 가까운 환자를 진료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결핵환자 전담 진료 병동 건립 및 리마시 외곽 빈민 부락에 대한 순회 진료사업 등 열 개가 넘는 의료단 소규모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한국, 페루 의료협력사업 현장 관리 및 지역 전문가의 역할을 하였으며, 민간 외교사절로서 국위 선양 및 양국간 우호관계 증진에 기여하였습니다.

 

 까야오병원은 교민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습니다.

 언어의 장벽 앞에 병을 키우기 일쑤인 이민 1세대들. 그들에게 그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전화상담을 받으며 멀리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늦은 밤 식탁을 수술대로 내줘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언제나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그는 그들의 주치의임을 자처하였습니다.


1994년 11월. 그가 KOICA 총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정주년 총재님께.


  지난 봄 새로 부임하시면서 보내주신 격려 편지에 답신도 못 드린 채, 이번에 새로이 공로패와 함께 보내주신 서신을 읽게

  되니 송구스러운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페루의 제가 근무하는 병원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후지모리 대통령의 한국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 KOICA에서 건설

  하여 이곳 정부에 기증한 병원으로서, 파견의사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손에 의해 건설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병원운영도 완전히 궤도에 올라, 금년 7월 이미 개원 1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렀으며, 현재 치과의사와 임상병리

  의사를 포함하여 의사 6명 외에 간호사, 의료기사, 행정직원 등 20여 명이 함께 근무하고 있으며, 월 진료인원 2,000~2,500

  명, 연인원 3만 명에 육박하는 진료실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페루의료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현지주민들 뿐만 아니

  라, 이 지역의 한국인 선원들 그리고 교민들까지도 멀리서 찾아와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까야오보건청 산하의 일차 진료기관이기 때문에 입원과 수술이 안되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처음에는 일종의 텃세라고도 할 수 있는 현지 의사들의 견제도 받았으며, 우리가 지어준 병원인데도

  불구하고, 운영권이 이미 이곳 보건청 소속이기 때문에, 개인진료실을 내주지를 않아 애로가 많았으나, 대사관의 협조와

 또한 어떠한 이해관계 없이 단지 도움을 주기 위하여 파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결과, 출근 4개월이 지나서야

  개인진료실을 확보했습니다.

 

   이제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저에게 진료하기 위해 병원문도 열기 전에 아침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는 안면 있는 환자들의

 인사를 받을 때는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게다가 Project의 일환으로 지원해주신 X-Ray 장비나, 임상병리검사장비 덕분에

 일차 진료기관으로서는 이 지역의 다른 보건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 또한 흐뭇합니다.

 

 

 주로 까야오와 꼬마스병원에서 진료를 하던 그는 페루생활에 적응이 되면서 누구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페루의 사회구조는 양극화가 심하여, 원주민이나 빈민계층과 일부 부유층에 대한 의료시설 및 혜택의 차이가 매우 심하였습니다.  빈민계층을 위한 보건소를 포함한 공공의료기관이나 사회보험병원들은 시설도 빈약하고 환자들이 많아 끝없이 기다려야 했으며, 의료진들 역시 박봉에 따른 의욕감소와 무성의로 일관하였습니다.

 

 반면에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시립병원들은 진료수준이나 시설도 미국이나 유럽 못지않았으며, 따라서 진료비 자체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번 진료만 받는데 90달러, 정상 분만비용이 2,500달러, 또는 단순한 맹장수술이 3,000달러 등 상식선에서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빈민촌의 순회 진료였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선교사의 도움으로 히까마르까를 포함한 몇 개 빈민지역의 진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전혀 의료혜택이 없고 철저하게 소외되어 사는 사람들. 가끔 진료를 가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그는 오히려 작은 일이 더욱더 그들에게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들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들의 땅을 제공하며 상주진료소를 세워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999년 그는 리마시 변두리 비타르테지역 빈민가에 작은 병원을 지었습니다. 사재를 털고 현지 동포들의 도움을 조금씩 모았습니다.

준공테이프를 끊던 날, 그는 부인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내의 말없는 격려가 없었다면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타르테 빈민촌에 병원을 짓고 나서 그는 더 바빠졌습니다. 까야오 제1의료센터에서 정상근무를 마치고 1주일에 두 번씩 오후에 이 곳 병원으로와 무료진료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페루 친구들을 여러 명 사귀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현지 자원봉사자들입니다. 그들은 교대로 시간을 내어 비타르테병원을 지켰습니다.

 

 그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꼬 마스지역 보건소 최초로 정관수술을 시행하여 모자보건사업에 기여하였습니다. 또  그는 항상 빈민촌의 부족한 병원시설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조만간 다시 일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습니다.

 

 

 1993년. 안정된 서울생활을 접고, 가족들과 2년을 약속하고 도착한 곳 페루에서 의사 문장호는 10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지만, 귀국하지 않았습니다.

 

2009년 5월.《서울경제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에 따라 대사관 측은 본국에서 아직 타미플루가 도착하지도 않았으며, 예방백신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흘려


 야만 했다. ‘동포사
회의 주치의’로 불리는 한,멕병원의 문장호 박사도 ‘인플루엔자(H1N1)의 백신은 아직 없다.’고 확인해 주면

서 ‘타미플루는 치료약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의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지금도 그는 중미 멕시코에서 동포사회와 가난하고 병든 원주민의 주치의로서 사랑의 인술을 펼치고 있을 것입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로그인없이 가능한 손가락추천은 글쓴이의 또다른 힘이 됩니다 


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animal feed mixer 2011.11.22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첨 반갑기는 한데 나이 먹은 사람으로 할줄모라서 못쓰겠네요.
    컬처랜드에 가입하기는했는데 도모지 영 이해가 않가네요.좀 알려주세요.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즈베키스탄의 허준  김현탁

  사랑의 마음을 전하다.

 

 

 

 

 

 

 

 초등학교 6-2학기 도덕교과서에 어느 한의사의 미담이 실려 있습니다.

 고려인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치료해 준 은인에게 쓴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소녀는 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류머티즘이 편도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였기에, 그 소녀는 엉뚱하게 편도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류머티즘 증상은 개선되지 않고 붓는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 학교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온 한의사에게 20여 회에 걸친 봉독치료인 벌침주사를 맞은 후 거뜬하게 나아 다시 등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정부파견한의사 김현탁입니다.

 

 


 그는 1962년에 태어나, 1987년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한의원을 하면서 환자와 돈이 연결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약을 먹어야하는 환자에게 약을 권했을 때, 환자는 약을 팔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시골이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약을 먹지 않고 병을 나을 수 있는 방법인 침과 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침으로 한의원은 명성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에 돌연히 한의원을 그만둘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간간히 시간을 내어 차가 다니지 않는 시골로 의료봉사를 하러 다녔고, 여름휴가 때 휴가 대신 에티오피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등 해외의료봉사를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느꼈던, 대가와 연결되지 않는 인술을 베풀고 싶다는 생각을 현실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누구의 평가보다 나 스스로 나를 평가했을 때 떳떳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행복감으로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한 생을 살면서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삶보다 남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삶이 행복한 삶일 것 같았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 모집기사를 읽었을 때, 그는 기쁜 마음으로 참가하였습니다.

 

 KOICA 지원 아래 KOMSTA(대한한방의료봉사단)가 활발히 활동하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겐트 국립 제1의과대학의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 한방병원에서 1998년부터 2002년까지 4년간 근무하였습니다


출국을 준비하면서 우즈베키스탄에는 화장지가 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는 이삿짐의 절반이 휴지였다고 합니다.

생필품이 턱없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처음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몇 달 동안은 식료품 및 생필품을 사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많은 민족이 살았고 그들의 음식문화가 모두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시장, 러시아시장, 고려시장 등 각 민족의 먹을거리가 다르고 파는 품목이 달라 하루는 고려시장에서 두부를, 하루는 러시아시장에서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하루는 독일시장에서 유제품을 사기위해서 다니는 색다른 경험을 하였습니다.

 시장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러시아어이었는데, 그들은 각기 자기 민족어를 시장에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각각 다른 민족들의 생활상을 경험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 곳의 아픔을 차근차근 보듬었습니다.

 

 사회주의국가인 구소련의 지배를 받으며 세계적인 의료수혜를 받던 백인계 러시아 사람들로 하여금 한방치료는 첨단치료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독립 이후, 치료를 한 번도 제대로 못 받았다.

 

 그곳에서의 의료체계는 1차 진료기관(보건소)과 2차 진료기관(시립병원) 그리고 3차 진료기관(대형병원)으로 상당히 선진화된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지원받던 것이 단절되고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해 의료시설은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병이 나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무료로 운영하는 한국,우즈베키스탄 한방병원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갔습니다.

 과다한 항생제복용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침이나 뜸이 한국 사람들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습니다.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이 호전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한방병원의 신뢰도는 점점 높아갔습니다. 자연히 보건당국 및 의과대학에서 한국한의학에 대한 관심도도 지대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국 의서를 번역하여 전통의학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한의학교재를 만들고, 의과대학에 한의학과를 개설하여 한의사를 양성하여 주민들을 치료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는 타슈겐트 국립 제1의과 대학생에게 매주 두 시간 씩 한의학 강의를 하였고, 대학 부속병원 원장 및 의사들에게 침구학 강의를 하였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은 한국과 일본을 같은 수준의 나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위상은 옛날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5년에 걸쳐 연인원 약 6만여 명의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전체 인구의 10%가 러시아인인데, 내원 환자의 80% 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타타르의 환자일 정도로 그들은 한의학치료에 대한 관심과 신뢰가 지대하였습니다.

 

 한의학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아 뇌성 마비환자가 내원해 치료해 달라고 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그는 희망적인 말로 환자를 따듯하게 위로하였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신통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하루는 병원입구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사색이 된 아이를 안고서 살려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습니다. 아이는 급체로 얼굴은 샛노랬고, 사지는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아이의 명치끝에 장침을 놓자, 한 시간 가량 안정을 취한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씩씩하게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엄마가 울면서 그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라신이 선생님을 우리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치료할 때는 통역사가 옆에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통역사가 환자에게 통역해 주는 동안 치료방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과 말은 안 통했지만, 성실한 의술을 사랑의 마음으로 전하였습니다.

 

 그곳의 전통의학은 물리요법이 위주가 되어 숯치료와 물치료 그리고약초 연기치료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물치료는 물속에서 디스크 환자의 척추를 만지는 것으로, 특이한 물리요법이었습니다.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한국에서 가져간 벌의 독인 봉독으로 치료하였습니다.
 봉독치료를 할 때,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인과 외국인의 체질이 달라서인지 한국인은 침 맞은 부위가 금방 부어오르는데, 그들은 피부에 별다른 반응이 없어 매일 시술할 수 있었습니다.

 

 바다가 없는 내륙지역이라 해산물이 부족하여 요오드 결핍으로 갑상선 질 환자들이 증가했지만 약품이 없었습니다. 구소련 시절에는 식품에 요오드를 첨가하여 섭취해 왔었으나 연방 해체 후 요오드 부족현상이 심각했습니다.
 불쌍한 그들에게 빨간 소독약인 소위 머큐로크롬은 만병통치약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빈민촌의 엄마가 자기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울면서 순서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병원입구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요오드 성분이 들어있는 옥도정기를 달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자기 동네 아이가 상처가 나서 옥도정기를 발랐는데 나았고, 배가 아플 때도 나았다며 제발 옥도정기를 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맨 윗쪽에 위치한 카라칼팍스탄 누크스 한방 진료소를 찾아 순회 진료 및 이동 진료를 실시하였습니다.

 

그가 거주하던 타슈켄트에서 1,200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는 누크스에서 갈 때나 돌아올 때는 항상 마음이 짠해서 발걸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든 아랄해는 바다의 염도를 적절히 유지하였는데, 소비에트연방시절 댐을 건설하여 아랄해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을 목화밭으로 비틀었기에 아랄 해에서는 소금꽃만 날렸고 그들의 짜디 짠 생활은 처참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인 리뾰시카나밀빵 하나를 물에 풀어 끓여서 다섯 식구가 한 끼니를 때우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여름에는 신도 안 신고 너나 할 것 없이 팬티 한 장 달랑 걸치고 돌아다녔습니다. 순회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숙소 문 앞에 모여들어 그에게 제발 타슈켄트로 데려가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월급으로 한국 돈 2,000~3,000원만 줘도 된다고 하였고, 어떤 아이 엄마는 자기 아들을 그냥 데리고 가서 심부름시키고 밥만 먹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른조차도 월급은 필요 없으니 문지기라도 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너무나 불쌍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5년에 걸쳐 환자들을 보면서 환자의 체격과 말투와 의복을 한번 보고서 어느 민족인지 그리고 민족의 음식습관에 따라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가난한 우즈베키스탄 할머니가 4번 이상 재사용한 꼬질꼬질한 검은 비닐봉지에 버터 대신 양 기름을 사용해 만든 빵을 감사하게 그는 받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나 올 때의 우즈베키스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봉사활동을 마치고 이제는 돌아와 대전의 어느 한의원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파견의사활동에 대한 여러 번의 텔레비전 출연요청에 대하여 정중히 거절하였고, 당연히 할 일을 하였다고 오히려 그런 시간을 갖게 된 것에 대하여 고마워할 뿐이었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그때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합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로그인없이 가능한 손가락추천은 글쓴이의 또다른 힘이 됩니다 


Posted by 국민건강보험공단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1.10.14 1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이전버튼 1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건강천사'는 국민건강보험이 운영하는 건강한 이야기 블로그 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공지사항

Yesterday888
Today171
Total2,101,404

달력

 « |  » 2019.1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