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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나눔&봉사

[금요특집] 한국의 슈바이처들....제22부 김현탁(우즈베키스탄)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즈베키스탄의 허준  김현탁

  사랑의 마음을 전하다.

 

 

 

 

 

 

 

 초등학교 6-2학기 도덕교과서에 어느 한의사의 미담이 실려 있습니다.

 고려인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치료해 준 은인에게 쓴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소녀는 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류머티즘이 편도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였기에, 그 소녀는 엉뚱하게 편도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류머티즘 증상은 개선되지 않고 붓는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 학교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온 한의사에게 20여 회에 걸친 봉독치료인 벌침주사를 맞은 후 거뜬하게 나아 다시 등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정부파견한의사 김현탁입니다.

 

 


 그는 1962년에 태어나, 1987년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한의원을 하면서 환자와 돈이 연결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약을 먹어야하는 환자에게 약을 권했을 때, 환자는 약을 팔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시골이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약을 먹지 않고 병을 나을 수 있는 방법인 침과 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침으로 한의원은 명성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에 돌연히 한의원을 그만둘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간간히 시간을 내어 차가 다니지 않는 시골로 의료봉사를 하러 다녔고, 여름휴가 때 휴가 대신 에티오피아와 캄보디아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등 해외의료봉사를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느꼈던, 대가와 연결되지 않는 인술을 베풀고 싶다는 생각을 현실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누구의 평가보다 나 스스로 나를 평가했을 때 떳떳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행복감으로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한 생을 살면서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삶보다 남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삶이 행복한 삶일 것 같았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정부파견한의사 모집기사를 읽었을 때, 그는 기쁜 마음으로 참가하였습니다.

 

 KOICA 지원 아래 KOMSTA(대한한방의료봉사단)가 활발히 활동하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겐트 국립 제1의과대학의 한국,우즈베키스탄 친선 한방병원에서 1998년부터 2002년까지 4년간 근무하였습니다


출국을 준비하면서 우즈베키스탄에는 화장지가 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는 이삿짐의 절반이 휴지였다고 합니다.

생필품이 턱없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처음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몇 달 동안은 식료품 및 생필품을 사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많은 민족이 살았고 그들의 음식문화가 모두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시장, 러시아시장, 고려시장 등 각 민족의 먹을거리가 다르고 파는 품목이 달라 하루는 고려시장에서 두부를, 하루는 러시아시장에서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하루는 독일시장에서 유제품을 사기위해서 다니는 색다른 경험을 하였습니다.

 시장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러시아어이었는데, 그들은 각기 자기 민족어를 시장에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각각 다른 민족들의 생활상을 경험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 곳의 아픔을 차근차근 보듬었습니다.

 

 사회주의국가인 구소련의 지배를 받으며 세계적인 의료수혜를 받던 백인계 러시아 사람들로 하여금 한방치료는 첨단치료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독립 이후, 치료를 한 번도 제대로 못 받았다.

 

 그곳에서의 의료체계는 1차 진료기관(보건소)과 2차 진료기관(시립병원) 그리고 3차 진료기관(대형병원)으로 상당히 선진화된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지원받던 것이 단절되고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해 의료시설은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병이 나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무료로 운영하는 한국,우즈베키스탄 한방병원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갔습니다.

 과다한 항생제복용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침이나 뜸이 한국 사람들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습니다.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이 호전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한방병원의 신뢰도는 점점 높아갔습니다. 자연히 보건당국 및 의과대학에서 한국한의학에 대한 관심도도 지대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국 의서를 번역하여 전통의학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한의학교재를 만들고, 의과대학에 한의학과를 개설하여 한의사를 양성하여 주민들을 치료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는 타슈겐트 국립 제1의과 대학생에게 매주 두 시간 씩 한의학 강의를 하였고, 대학 부속병원 원장 및 의사들에게 침구학 강의를 하였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은 한국과 일본을 같은 수준의 나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위상은 옛날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5년에 걸쳐 연인원 약 6만여 명의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전체 인구의 10%가 러시아인인데, 내원 환자의 80% 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타타르의 환자일 정도로 그들은 한의학치료에 대한 관심과 신뢰가 지대하였습니다.

 

 한의학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아 뇌성 마비환자가 내원해 치료해 달라고 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그는 희망적인 말로 환자를 따듯하게 위로하였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신통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하루는 병원입구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사색이 된 아이를 안고서 살려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습니다. 아이는 급체로 얼굴은 샛노랬고, 사지는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아이의 명치끝에 장침을 놓자, 한 시간 가량 안정을 취한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씩씩하게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엄마가 울면서 그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라신이 선생님을 우리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치료할 때는 통역사가 옆에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통역사가 환자에게 통역해 주는 동안 치료방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과 말은 안 통했지만, 성실한 의술을 사랑의 마음으로 전하였습니다.

 

 그곳의 전통의학은 물리요법이 위주가 되어 숯치료와 물치료 그리고약초 연기치료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물치료는 물속에서 디스크 환자의 척추를 만지는 것으로, 특이한 물리요법이었습니다.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한국에서 가져간 벌의 독인 봉독으로 치료하였습니다.
 봉독치료를 할 때,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인과 외국인의 체질이 달라서인지 한국인은 침 맞은 부위가 금방 부어오르는데, 그들은 피부에 별다른 반응이 없어 매일 시술할 수 있었습니다.

 

 바다가 없는 내륙지역이라 해산물이 부족하여 요오드 결핍으로 갑상선 질 환자들이 증가했지만 약품이 없었습니다. 구소련 시절에는 식품에 요오드를 첨가하여 섭취해 왔었으나 연방 해체 후 요오드 부족현상이 심각했습니다.
 불쌍한 그들에게 빨간 소독약인 소위 머큐로크롬은 만병통치약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빈민촌의 엄마가 자기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울면서 순서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병원입구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요오드 성분이 들어있는 옥도정기를 달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자기 동네 아이가 상처가 나서 옥도정기를 발랐는데 나았고, 배가 아플 때도 나았다며 제발 옥도정기를 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맨 윗쪽에 위치한 카라칼팍스탄 누크스 한방 진료소를 찾아 순회 진료 및 이동 진료를 실시하였습니다.

 

그가 거주하던 타슈켄트에서 1,200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는 누크스에서 갈 때나 돌아올 때는 항상 마음이 짠해서 발걸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든 아랄해는 바다의 염도를 적절히 유지하였는데, 소비에트연방시절 댐을 건설하여 아랄해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을 목화밭으로 비틀었기에 아랄 해에서는 소금꽃만 날렸고 그들의 짜디 짠 생활은 처참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인 리뾰시카나밀빵 하나를 물에 풀어 끓여서 다섯 식구가 한 끼니를 때우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여름에는 신도 안 신고 너나 할 것 없이 팬티 한 장 달랑 걸치고 돌아다녔습니다. 순회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숙소 문 앞에 모여들어 그에게 제발 타슈켄트로 데려가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월급으로 한국 돈 2,000~3,000원만 줘도 된다고 하였고, 어떤 아이 엄마는 자기 아들을 그냥 데리고 가서 심부름시키고 밥만 먹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른조차도 월급은 필요 없으니 문지기라도 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너무나 불쌍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5년에 걸쳐 환자들을 보면서 환자의 체격과 말투와 의복을 한번 보고서 어느 민족인지 그리고 민족의 음식습관에 따라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가난한 우즈베키스탄 할머니가 4번 이상 재사용한 꼬질꼬질한 검은 비닐봉지에 버터 대신 양 기름을 사용해 만든 빵을 감사하게 그는 받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나 올 때의 우즈베키스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봉사활동을 마치고 이제는 돌아와 대전의 어느 한의원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파견의사활동에 대한 여러 번의 텔레비전 출연요청에 대하여 정중히 거절하였고, 당연히 할 일을 하였다고 오히려 그런 시간을 갖게 된 것에 대하여 고마워할 뿐이었습니다.
한의사 김현탁은 그때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합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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