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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나눔&봉사

[금요특집] 한국의 슈바이처들....제23부 문장호(페루)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페루의 슈바이처  문장호

  가난한 인디오의 만병통치약

 

 

 

 

 

 불가사의한 잉카문명을 꽃피웠던 나라, 페루(Peru).  아름다운 절경에 잉카인의 슬픔을 담았던 마추픽추.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잉카제국의 후예 인디오들은 옛 제국의 영화는 뒤로하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여 까야오 지역과 같은 빈민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1992년 페루 대통령 후지모리 방한을 기념하기 위해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서 총 15개의 병원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까야오의 제1병원을 시작으로 꼬마스 제2병원, 아마존지역의 제3병원 그리고 안데스지역의 제4병원 등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세운 까야오병원은 저렴한 비용으로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서 이른 새벽부터 환자들은 줄을 서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에서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의료혜택이 있을 리 만무하였으며, 있다고 해도 이들의 생활 수준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곳들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까야오병원은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곳입니다.

 

 

 

이 병원을 지켰던 의사 문장호.

 

그는 1955년에 태어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비뇨기과 전문의였던 그는 한국에서 유능한 의사로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그는 KOICA의 정부파견의사로 가족과 함께 1993년 페루 리마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안정된 서울생활을 정리할 때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2년을 약속하고 도착한 곳 페루. 그 때 페루는 경제위기에다 좌익게릴라들 때문에 걸핏하면 전기가 끊기는 등 어수선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의사인 그도 결코 안전할 수 없었던 곳에서의 생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밤새 울고 투정하는 아이들을 달래며 그가 쉽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의사로서 목표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 페루 의료원에서 비뇨기과와 내과를 담당하여 외래환자 진료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비뇨기과 전문의지만 외과수술이나 소아과 진료를 할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일단 그를 찾아온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파견 기간 동안 5만 명에 가까운 환자를 진료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결핵환자 전담 진료 병동 건립 및 리마시 외곽 빈민 부락에 대한 순회 진료사업 등 열 개가 넘는 의료단 소규모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한국, 페루 의료협력사업 현장 관리 및 지역 전문가의 역할을 하였으며, 민간 외교사절로서 국위 선양 및 양국간 우호관계 증진에 기여하였습니다.

 

 까야오병원은 교민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습니다.

 언어의 장벽 앞에 병을 키우기 일쑤인 이민 1세대들. 그들에게 그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전화상담을 받으며 멀리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늦은 밤 식탁을 수술대로 내줘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언제나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그는 그들의 주치의임을 자처하였습니다.


1994년 11월. 그가 KOICA 총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정주년 총재님께.


  지난 봄 새로 부임하시면서 보내주신 격려 편지에 답신도 못 드린 채, 이번에 새로이 공로패와 함께 보내주신 서신을 읽게

  되니 송구스러운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페루의 제가 근무하는 병원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후지모리 대통령의 한국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 KOICA에서 건설

  하여 이곳 정부에 기증한 병원으로서, 파견의사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손에 의해 건설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병원운영도 완전히 궤도에 올라, 금년 7월 이미 개원 1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렀으며, 현재 치과의사와 임상병리

  의사를 포함하여 의사 6명 외에 간호사, 의료기사, 행정직원 등 20여 명이 함께 근무하고 있으며, 월 진료인원 2,000~2,500

  명, 연인원 3만 명에 육박하는 진료실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페루의료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현지주민들 뿐만 아니

  라, 이 지역의 한국인 선원들 그리고 교민들까지도 멀리서 찾아와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까야오보건청 산하의 일차 진료기관이기 때문에 입원과 수술이 안되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처음에는 일종의 텃세라고도 할 수 있는 현지 의사들의 견제도 받았으며, 우리가 지어준 병원인데도

  불구하고, 운영권이 이미 이곳 보건청 소속이기 때문에, 개인진료실을 내주지를 않아 애로가 많았으나, 대사관의 협조와

 또한 어떠한 이해관계 없이 단지 도움을 주기 위하여 파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결과, 출근 4개월이 지나서야

  개인진료실을 확보했습니다.

 

   이제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저에게 진료하기 위해 병원문도 열기 전에 아침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는 안면 있는 환자들의

 인사를 받을 때는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게다가 Project의 일환으로 지원해주신 X-Ray 장비나, 임상병리검사장비 덕분에

 일차 진료기관으로서는 이 지역의 다른 보건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 또한 흐뭇합니다.

 

 

 주로 까야오와 꼬마스병원에서 진료를 하던 그는 페루생활에 적응이 되면서 누구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페루의 사회구조는 양극화가 심하여, 원주민이나 빈민계층과 일부 부유층에 대한 의료시설 및 혜택의 차이가 매우 심하였습니다.  빈민계층을 위한 보건소를 포함한 공공의료기관이나 사회보험병원들은 시설도 빈약하고 환자들이 많아 끝없이 기다려야 했으며, 의료진들 역시 박봉에 따른 의욕감소와 무성의로 일관하였습니다.

 

 반면에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시립병원들은 진료수준이나 시설도 미국이나 유럽 못지않았으며, 따라서 진료비 자체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번 진료만 받는데 90달러, 정상 분만비용이 2,500달러, 또는 단순한 맹장수술이 3,000달러 등 상식선에서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빈민촌의 순회 진료였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선교사의 도움으로 히까마르까를 포함한 몇 개 빈민지역의 진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전혀 의료혜택이 없고 철저하게 소외되어 사는 사람들. 가끔 진료를 가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그는 오히려 작은 일이 더욱더 그들에게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들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들의 땅을 제공하며 상주진료소를 세워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999년 그는 리마시 변두리 비타르테지역 빈민가에 작은 병원을 지었습니다. 사재를 털고 현지 동포들의 도움을 조금씩 모았습니다.

준공테이프를 끊던 날, 그는 부인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내의 말없는 격려가 없었다면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타르테 빈민촌에 병원을 짓고 나서 그는 더 바빠졌습니다. 까야오 제1의료센터에서 정상근무를 마치고 1주일에 두 번씩 오후에 이 곳 병원으로와 무료진료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페루 친구들을 여러 명 사귀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현지 자원봉사자들입니다. 그들은 교대로 시간을 내어 비타르테병원을 지켰습니다.

 

 그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꼬 마스지역 보건소 최초로 정관수술을 시행하여 모자보건사업에 기여하였습니다. 또  그는 항상 빈민촌의 부족한 병원시설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조만간 다시 일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습니다.

 

 

 1993년. 안정된 서울생활을 접고, 가족들과 2년을 약속하고 도착한 곳 페루에서 의사 문장호는 10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지만, 귀국하지 않았습니다.

 

2009년 5월.《서울경제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에 따라 대사관 측은 본국에서 아직 타미플루가 도착하지도 않았으며, 예방백신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흘려


 야만 했다. ‘동포사
회의 주치의’로 불리는 한,멕병원의 문장호 박사도 ‘인플루엔자(H1N1)의 백신은 아직 없다.’고 확인해 주면

서 ‘타미플루는 치료약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의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지금도 그는 중미 멕시코에서 동포사회와 가난하고 병든 원주민의 주치의로서 사랑의 인술을 펼치고 있을 것입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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