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으로,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베트남의 슈바이처   황혜헌

의사이기 전에 인간이다.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 상하의 나라 베트남(Vietnam).
 하얀 아오자이를 차려입고 야자 나뭇잎으로 만든 모자 농라를 날렵하게 쓴 어여쁜 처녀들이 시원한 야자수 그늘 아래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는 나라.

 

 강대국 프랑스와 미국과의 처절한 전쟁을 두 번이나 치룬 참상의 나라.
 특히 정치경제적인 이해가 맞물려 파월한국군이 참전해야 하였던, 현대사의 비극을 나누어야 했던 나라.

 



 

  가정의학 전문의 황혜헌...

 

 

 그는 1953년에 태어나 1972년 서울대학교 의대에 입학하였지만, 학생운동에 연루되어 제적과 동시에 투옥되었습니다.

 이후 5년 동안 회사원 생활을 하다가 복학해서 11년 만에 의대 공부를 마쳤습니다. 

 

 1986년부터 정읍 아산병원에 18년간 근무하면서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주민에게 무료진료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2004년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베트남 하노이의 한국, 베트남 친선 병원에 부임하였습니다.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 사업은 1995년부터 시작되었고, 2007년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 병동이 완공되었습니다.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 등 6개 분야 진료소에 수술실, 입원실 그리고 통역원을 갖춘 국제종합 진료소였습니다.

 

 대형종합병원장이 어느 날 그 자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개발도상국의 작은 병원으로 봉사활동을 떠났습니다.

 그의 의사로서의 직업관이 선합니다.
  의학은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방편이고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의사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의사는 이미 기득권자가 아니다. 의학도 자기가 가진 달란트이다.  

 사회와 더불어 살고 선한 데 사용하여야 한다.

 

현지인과 의료상담을 하는 의사 황혜헌

 

 

 

 

 

  그는 하노이에 도착하여 일기를 씁니다...

 

 2004년 3월 30일 화요일.....
 대한항공 683편으로 하노이공항에 도착했다. 캄캄한 어둠과 공산국가라는 음울한 선입견이 나를 에워싸며 다가 온다.

케냐이던가, 아프리카의 황량한 공항에 도착한 이야기를 적었던 의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국제협력단의 김복희 부소장이 마중 나와 주었다. 대우하노이호텔에 짐을 풀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다음 날....

 앞으로 근무할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에 책을 운반한 후, 성 바울병원 원장과 기획실장에게 인사한 후, 코이카 단원인 임상병리사 황승원씨, 베트남 소아과 의사 뇨, 간호사 러이, 통역 흐엉과 짱, 행정요원 하 등과 상견례를 했다

대사관을 방문, 공사, 참사관등과 만난 후 대사와 점심식사를 했다.

 

하노이의 수많은 오토바이가 매연을 품으며 나를 압도한다. 6성조를 가진 베트남어가 소음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얼마나 지나면 이것들에 익숙해질까?  호텔에 오니 벌써 한국에 두고 온 사람들이 보고파진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소한 약 이름을 정리해야하나, 옷을 정리하여야 하나, 밥을 먹으러 갈까?


한 달 전 답사차 여행사를 통해 관광객으로 왔건만 이제는 관광객을 보
는 입장이다.
밖은 번개가 치고 비가 오는데 창밖의 대하센터의 붉은 조명은 유행가가락이 생각날 듯, 하지만 내 심사는 무겁고 편치가 않다.

지금은 암울하게 보이는 이 도시가 언젠가는 따뜻하게 다가오리라 기대해본다.

‘대하’라는 말이 대우와 하노이를 합한 말이라고 하는데 나도 하노이와 친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남다른 활동을 펼쳤습니다.


 

 4년 동안 한국, 베트남 친선병원에서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현지인, 외국인 그리고 교민에 대한 진료가 5만 2천여 명을 넘었습니다. 주말을 이용하여 소수민족과 벽지주민을 위한 진료를 벌였습니다.

  월 3~4회 정도 시행하였고, 한국인이 세운 공장에 있는 근로자와 음식점 종업원을 중심 으로 진료 및 투약, B형 간염검사 및 예방접종, 일부 AIDS와 매독 반응검사, 구충제 투여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시행한 주말진료는 총 횟수가116회, 진료인원 5,800여 명, 간염검사 및 백신투여 5,700여 명, 구충제투여1,900여 명, AIDS와 매독검사는 2,600여 명이었습니다.

 

 2005년.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한국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는 병원 직원 6명과 세인트 폴 병원(St. Paul Hospital) 직원 2명을 시작으로 한국어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베트남 사람들 30명 정도 씩 모아 3개월 단위로 강습을 시작하였고, 초급 3개월, 중급 3개월 합계 6개월의 ‘무궁화 한글교실’을 운영하였습니다. 이후 한국어 강습은 귀국 때까지 6기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국제화시대의 추세에 따라, 베트남 처녀들이 한국남자와 결혼하는 수가 날로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베트남 처녀와 건강한 2세 출산을 위하여 서울 아산재단의 도움을 받아 AIDS와 매독 검사를 위한 시약을 공급받아 검사와 예방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시 살포된 고엽제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자 외에도 후유증을 가진 2~3세가 선천성 이상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루 종일 자기 머리를 때리는 아이. 매일매일 뼈가 부러지고, 머리에 물이 차서 큰 호박만한 아이. 하루에도 수차례 간질발작을 일으키는 아이. 15살인데도 몸무게가 8kg인 소년. 뇌수술 후 자극만 가면 웃는다는 아이 등 전쟁의 처참한 후유증이었습니다.  그는 베트남에서 인술을 펼쳤고, 한국과 베트남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졌습니다.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집안이 어려워 미국 독지가한테서 약 2년 동안 매월 25,000원 정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액수는 그 당시 한 달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그후 그가 12년 동안 선명회를 통해 베트남에 월 2만 원씩 후원하였는데, 그 액수도 베트남 시골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그는 ‘아!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며 갚아가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의사 황혜헌의 진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환자들



 



  4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치고

 

 

 그는 경기도 도립의료원 포천병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만약 정부파견의사제도가 계속 시행되었다면, 아직도 그는 베트남에서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입니다.
 해외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체가 기뻤는데,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아 안타깝네요.

 그는 처음 3개월 동안 베트남에서 적응하기에 무척 힘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의사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목숨을 걸고 인술을 펼치는데, 이곳 베트남에서조차 버거워 하는 자신을 자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업무기간 중 아픈 하루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환자와 함께 병마와 씨름하였습니다. 직접 환자를 상대하지 않았던 전직 병원장으로서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의사 황혜헌은 베트남을 사랑합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거리와 그 소음과 그 말소리와 그 살아가는 모습 들을 문득문득 떠올리고 있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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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타니아의 슈바이처  최상일

그러나 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10월이 막바지에 들면서 누아디부의 기온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사하라 서쪽 끝자락에도 계절이 바뀌고 한해도 막바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나라 밖에서의 일을 마무리하면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봅니다.

 

 

 

 

   처음 아프리카 땅에 발을 들였을 때는 벌써 13년 전의 일입니다.

 

종족분쟁이 한창이던 르완다 난민촌에서 온통 검은 얼굴 검은 몸에 유난히 흰 이빨의 낯설던 아프리카인들의 첫 인상이 기억납니다. 먹구름이 드리우고 비를 뿌리던 아름다운 키부호수 위로 하혈하던 산모를 모터보트에 태우고 절박한 심정으로 키를 잡고 후송하던 일의 기억도 선명합니다.

 

캄보디아에서의 2년은 주로 말라리아와 지뢰 그리고 험한 도로 사정에 얽힌 경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증상이 시작된 지 2~3일 만에 혼수상태에 빠져버리는 열대열 말라리아의 무서움과 산간마을 곳곳에서 수시로 불거져 나오는 지뢰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주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직도 크메르루즈 잔당의 영향 아래 있던 북부 산간지대를 유엔 안전 담당관의 인솔 하에 답사하던 일과 우기에 마을로 난 길이 뻘밭으로 변해버려 소달구지를 타고 진료소로 향하던 일의 기억도 새롭습니다.

 

사막의 나라 모리타니아는 참 메마르고 혹독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심성도 기후와 어느 정도 닮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특히 정착초기에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수술이 필요했던 응급환자들과 딴청을 피우는 팀원들 사이에서 느꼈던 당황스러움을 기억합니다.

양철지붕의 열기, 파리 떼의 성가심과 함께 빈민진료실 문을 기웃거리는 염소와 벽에 난 틈새로 들락거리던 고양이의 정경도 떠오릅니다. 조가비처럼 엎드린 누아디부 잿빛 시가지 사이로 석양이 지고 있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계속되어오던 한국정부의 제3세계 의사파견프로그램이 종료되기로 결정되면서 이제 귀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구촌 주민들을 위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동기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는 이곳에서의 활동에 큰 힘이 되어왔으며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보름 쯤 후면 그간 사용하던 책이며 세간을 컨테이너로 부칠 예정이며, 귀국날짜는 12월 4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서신이 모리타니아에서의 마지막 통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간 부족함이 많은 활동에 성원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건강한 활동 그리고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며, 한국에 도착하면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누아디부에서 최상일......

 

 

  2007년 11월 18일

 

모리타니아(Mauritania) 누아디부에서 의사 최상일은 자신의 활동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지원하였던 한국의 카페회원들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전합니다.


얼마나 고되고 얼마나 험하고 얼마나 혹독한 노정이었을까요.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의 편지는 자신의 험했던 역경을 담담히 회고하면서 서정성을 갖춘 낭만적인 문학미가 물씬 배어 있습니다.

1955년에 태어나 고교 시절부터 제3세계에 가서 봉사하는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는 카이스트 전기과에 진학했고,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덕연구단지에서 전자공학을 연구하면서도 꿈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부친의 병환을 계기로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30살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처자가 있는 가장의 몸으로 의대로 학사편입해서 39살에 부산 고신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부산의 외과병원에서 7년을 근무하였지만 한시도 자신의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침내 그는 자원봉사 자격으로 1994년 가족을 남겨둔 채 전쟁이 한창이던 우간다로 향했습니다.

20만 명이 수용된 난민캠프에서 2개월간 구호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캄보디아에서 2년간 유엔 자원봉사 의료단원으로 일했습니다.
킬링필드로 유명한 캄보디아, 그 중에서도 태국과의 국경지대인 북부 지역은 아직도 지뢰가 살아있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얻지 못한 극빈층이지뢰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말라리아 위험 지역일 뿐만 아니라 도로 사정도 워낙 좋지 않아 의료 사각지대였습니다.

유엔에서 추천한 비교적 안전한 지역 대신 스스로 이 지역을 택했습니다. 이유는 너무나 명료했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도 의사가 필요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왕복 4시간이 넘는 비포장도로는 소형트럭으로, 진흙탕은 소달구지나 오토바이로 약품 상자를 끌고 다니며 야전병원 의사처럼
환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2000년에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모리타니아 누악쇼트 국립병원으로 부임했습니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모리타니아, 의과대학이 없는 인구 약 300만의 사막국가는 전국에 외과의사가 30여 명에 불과하여 외과 질환으로 인한 수술적 치료가 어려웠습니다.

 

현지 외과의사가 꺼리던 대수술을 솔선수범함으로써 직접진료를 통한 의료기술 전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한편, 외과전공의를 교육하여 전문의를 배출하였습니다.

 

그가 KOICA에 보고한 2003년 1/4분기 활동내용을 간추리면, 전신 혹은 척추마취 하 수술을 113건, 국소마취 하 수술을 29건 시행하였습니다. 외래진료는 512명을 진료하였으며, 병실 대 회진은 12차례가 있었고, 야간 및 휴일 당직근무 총 22일이었습니다.
고군분투의 의료 활동이었습니다.

2005년 9월부터는 의료 환경이 끔찍하고, 외과의사도 절대 부족한 수도에서 500km 떨어진 누아디부 국립병원을 자원하였습니다.

진료 외에도 빈민지역민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무의촌 진료시술을 실시하는 등 ‘인간생활의 기본적 욕구’라는 뜻의 인도적인 BHN(Basic Human Needs)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였습니다.

 

 

  낡은 수술대 하나에 플라스틱 테이블 두 개가 있다.

 

천장의 떨어져 나간 나무판자 사이로 햇빛을 타고 들어오는 먼지바람으로 실내는 먼지투성이다.
“제가 보따리 장사입니다.”
최박사는 큰 가방 두 개에서 손 씻을 물이 담긴 10리터짜리 플라스틱 물통과 물주전자를 먼저 꺼냈다.

 

그리고 도시락 크기의 알루미늄 상자에 든 의료기구들과 진료기록을 위한 노트, 휴지 뭉치와 밴드를 꺼냈다.
파리 떼와 모래가 날리는 진료실. 수술대에 쌓인 먼지를 손수 닦아 내고 첫 환자를 맞았다.

야전병원보다 더 열악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0대로 보이는 한 남자의 38년간 지녀온 복부지방 혹 제거 수술이 시작됐다.
마취주사, 메스 선택, 약품 찾기, 수술 봉합, 소독…… 붕대와 밴드, 자르고 붙이기까지 모든 작업을 최박사 혼자서 했다.
수술 중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쳐낼 수 없었다.

 

“손이 하나만 더 있어도…….”
최박사는 “큰 수술 때는 집사람이 와서 도와준다.”고도 했다. 대부분의 의료장비와 약품은 KOICA에서 지원받지만, 간단한 소모품들은 자비로 구입했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들이닥친 두 번째 환자의 머리에 난 혹을 제거하고, 세 번째 환자의 이마에 난 혹을 제거했다.

세 환자를 수술하고 다른환자를 진료했다.

 

행장 스님의 《아프리카 대륙 자전거 종단기》에 실린 누악쇼트 서남쪽 ‘시지엠’ 지역의 빈민촌 진료소 장면을 그린〈사하라 ‘모래 늪’에서 만난 아름다운 의사 최상일〉의 한 장면입니다.

스님은 의사 최상일을 전쟁지역과 오지를 누비고 다니는 야전병원 체질이라 말합니다.

 

의사 최상일은 어떤 사람일까요.  독한 사람일까. 약한 사람일까요.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포연이 자욱한 전장이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두메든 가리지 않는 진정한 의사였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그곳에서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가 있었기에 그들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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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간다의 슈바이처  유덕종

받은사랑이 더 많기에, 사랑할 수 있었다

 

 

 

 

 

 

 

대학 입학 땐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인생을 어떻게 살더 라도 의미가 없어 보였죠.

어차피 의사가 될 거라면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졸업하기 전에 결심을 했죠.

아프리카로 가야겠다고, 가서 나보다 힘든 사람을 도와야겠다고요.

 

2010년 잠시 귀국한 유덕종이 모교인 경북대학교 웹진에 전한 서면 인터뷰 내용입니다.
유덕종은 1959년 출생하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아프리카 우간다(Uganda)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린 두 딸과 임신한 아내가 눈에 밟혔지만, 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캄팔라 물라고(Mulago) 국립병원에서 16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곳에서 머물며 캄팔라 마케레레(Makerere)대학에서 의학을 강의하며 진료도 계속하였습니다.

 

강의를 마친후 의과 대학생들과 함께

 

캄팔라 외곽에 의사가 처방한 약이 환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기초가 제대로 서 있는 병원을 세우려고 동분서주하는 의사 유덕종을 경북대학교 동문들은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습니다.

 

서른 셋, 의사로서의 앞날이 창창한 그가 처음 우간다 땅을 밟았다.

리고 그의 나이 쉰하나. 젊음도, 열정도, 꿈도 모두 그 땅에 바쳤다.

18년 동안 그를 붙든 것은 배고픔과 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그곳 사람들이었다.

 

 우간다의 열악한 의료상황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고 병원건립을 준비한 것만도 9년째.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이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는 폐결핵과 위암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은 뭔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하는 생각을 자주하였고, 의대에 들어가 크리스천이 되면서 아프리카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부터 아프리카에서 사는 문제를 상의했고, 동의를 받아 결혼했습니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그에겐 보람이고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들이 아플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모든 걸 다 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위로가 된다면 족하였다.

 

1992년 정부파견의사로 우간다에 도착한 그가 KOICA에 보낸 편지 일부분입니다.

 

저는 이곳에 도착하여 수도 캄팔라에 있는 물라고병원(Mulago Hospital)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병원인 물라고 병원의 시설이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곳의 재정상태가 엉망이라 기구와 약품이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입니다.

비싼 약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약도 없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환자를 지켜봐야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며칠 전 20세 밖에 되지 않은 환자가 당뇨혼수로 죽는 것을 보고 화가 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환자가 한국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걸어서 퇴원을 할 환자인데

속수무책으로 죽는 것을 보고 한동안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인구의 60%가 의사 한 번 만나 본 적이 없이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바짝 마른 결핵환자가 그를 보고 “Doctor, I am hungry.(선생님, 배고파요.)”라고 할 정도로, 환자들이 굶주려 죽어나가는 그곳의 병원은 차라리 난민촌이 었습니다.

 모기장만 있어도 말라리아 발병률을 60%가량 줄일 수 있지만, 모기장 구입도 큰 부담인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덕종은 한국의 앞선 의료기술과 의료기자재의 활용방법 등을 익혀 그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봉사에 나서리라 다짐하였습니다.


 1993년 7월.
 의사 유덕종은 어느 환자의 조직검사를 하다가 주사 바늘에 손이 찔렸습니다.

 끼고 있던 장갑에 피가 흥건히 고일 정도로 깊이 찔렸습니다.

 문제는 그가 AIDS환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치료약이 없는 천형…….

 

“순간 손가락을 잘라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그 상황에서

AIDS에 걸릴 확률이 3백분의 1이기 때문에 거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죠.”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까지 기다린 5개월간 그는 정상인이 아니었습니다.

 부부관계도 멀리하는 등 매사에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것을 깨달은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한 달 간은 정말 우울했습니다.

 

그러나 감염됐다 해도 5~6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동안 더 가깝게 AIDS환자를 치료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1994년 봄.
 이번에는 폐결핵이었습니다. AIDS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아프리카였기에 결코 간단한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큰딸 주은이가 뇌염에 걸렸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뇌염이 없지만, 일단 걸리면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명색이 의사라는 애비가 한다는 게 링거주사를 놓는 것뿐이었어요.
AIDS 때도, 폐결핵 때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는데, 막상 딸이 뇌염에 걸리자

‘왜 이곳에 왔나’하는 후회뿐이었습니다. 집 사람은 그저 울고 만 있었지요.”

1997년 8월 24일자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AIDS에 감염됐다 해도 몇 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동안 더 가깝게 AIDS환자를 치료할 수 있겠구나 하던 유덕종이였습니다.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던 환자가 완치된 후 퇴원하면서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입원환자의 80%가 AIDS 환자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AIDS 환자가 줄고 있는 나라가 우간다라며,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 아프리카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국에서 자리 잡은 대학 동기생과 비교해 본적이 없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부동산도 집도 없다. 하지만 그런 게 다가 아니다.

사람의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경제가 발전하면서 삶은 윤택해졌는지 모르지만 삶의 질은 퇴보한다는 인상이다.

 

내 눈길에 와 닿는 아프리카의 하늘은 아름답고, 힘과 용기를준다.

당신은 한국의 하늘을 가끔씩이라도 올려 보는가?

행복지수로 보자면 한국보다 아프리카 나라들이 더 높을지 모른다. 나는 행복하다.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행복한 의사 유덕종입니다.

 

우간다 캄팔라에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진료하는 유덕종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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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보츠와나의 슈바이처 김정

그저 사람만이 중요할 뿐

 

 

 

 

 

 

이름도 생소한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와 보츠와나(Botswana)에서 인술을 펼쳤던,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의사였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부자였던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 김정.


김정은 1925년에 태어나서, 1950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외과 공부를 마쳤습니다.
1970년부터 정부파견의사로 서부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어퍼볼타(Upper Volta)로 불렸던 부르키나파소 가와병원(Burkinafaso Gawa Hospital)에서 4년간 근무하였습니다.
에어컨 안에서 뱀이 나오고, 자고 일어나면 신발 속에서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한 번도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없었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 남부 중앙 내륙에 있는 나라 부르키나파소에서 외과 의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곳은 평균 수명이 짧아 노동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빈곤층의 격증과 국력의 약화가 계속 진행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는 1973년부터 1990년까지는 남부 아프리카에 있는 보츠와나 프란시스타운 주빌리병원(Botswana Fransis Town Jubiley Hospital)에서 인술을 펼쳤습니다. 정년 퇴직으로 1986년 귀국하였다가 한 달여 만에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 무료로 자원봉사를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의료 봉사활동을 벌이고 민간외교관 역할까지 담당하다가 1999년 그곳에서 고귀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김정의 아들, 사진작가 김중만은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지구촌 가족》에서 그의 아버지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버지는 내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의사였다.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수술과 치료를 하면서 살았고,
와인을 즐기는 로맨티스트였다.


1971년 아버지가 정부파견의사로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이 기억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집은 양계장을 방불케 할 만큼 온통닭 천지였다.

아버지는 개인병원을 하셨는데, 가난한 환자들이 치료비 대신 닭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는 그저 ‘사람’만이 중요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로 떠났다.
가난한 외과의사 김정은 30여 년을 그렇게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와 보츠와나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소박하고 위대한 삶을 마쳤다.
나에게 아버지가 평생 쓰던 청진기 2대와 2,000달러의 유산을 남기고…….

 

 


 

 

의사 김정의 부인은 그의 남편과의 추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Dr. Kim은 1970년 아프리카 어퍼볼타 지역에 외과의로 파견 갔어요.
딱 2년만 하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현지의사 부족으로 불가피하게 계약을 연장하게 됐습니다.

이후 보츠와나로 재파견 되었고, 현지 생활에 정이 들어 계속해서 연장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1979년에는 Dr. Kim이 보츠와나 정부로부터 대통령수교훈장을 받았지요.

 

보츠와나의 경우 에이즈는 물론 야생동물로 인한 피해환자가 많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저희 둘째 아들은 현재 보츠와나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요.

 그곳에서 태어난 손주 김유순과 김규환도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쳤어요.

보츠와나 현지 주민들이 정이 많고 정직해서 그곳에 관한 추억이 참 많네요.

당시 보츠와나에 공설운동장을 건립하는데 Dr. Kim이 한국인으로서 5,000달러의 거금을 기부했던 기억도 납니다.

Dr. Kim은 1986년 정년퇴직하고 한국으로 복귀했지만,

한 달여 만에 다시 보츠와나로 돌아가 파견 당시 근무했던 병원에서 무료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Dr. Kim은 인턴으로 온 학생들을 데리고 독립적으로 의료행위를 할 수 있을 만큼 진료여건은 좋았어요.

 

특히 1970년 11월 4일 어퍼볼타로 파견됐을 당시

그곳에는 전기는커녕 수돗물조차 나오지 않는 열악한 국가였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생활하기에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요.

 

이후 파견된 보츠와나는 어퍼볼타와 달리 근무환경, 복지, 치안상태가 매우 안정적이어서 굉장히 좋았어요.

현지주민들의 의사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봉사활동에 대한 굉장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국가차원으로 정부파견의사를 기리는 단체나 조직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런 단체가 존재함으로써 정부파견의사가 현지,

혹은 한국 복귀 이후 겪는 고충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의사 김정의 부인과 원주민들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의연하고 올곧게 일생을 보냈지만, 는 물론 자식들의 국적도 한국으로 고집하여 현지에서 태어난 손자들이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쳐 언론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거주하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기념하여 병원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의사 김정은 오랫동안 아프리카에 있었기에 국내에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작고하고서 편안히 묻힐 유택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외국관광객을 위한 통역 안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부인은 그런 상황을 못내 아쉬워하였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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