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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나눔&봉사

[금요특집] 한국의 슈바이처들....제11부 최상일(모리타니아)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모리타니아의 슈바이처  최상일

그러나 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10월이 막바지에 들면서 누아디부의 기온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사하라 서쪽 끝자락에도 계절이 바뀌고 한해도 막바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나라 밖에서의 일을 마무리하면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봅니다.

 

 

 

 

   처음 아프리카 땅에 발을 들였을 때는 벌써 13년 전의 일입니다.

 

종족분쟁이 한창이던 르완다 난민촌에서 온통 검은 얼굴 검은 몸에 유난히 흰 이빨의 낯설던 아프리카인들의 첫 인상이 기억납니다. 먹구름이 드리우고 비를 뿌리던 아름다운 키부호수 위로 하혈하던 산모를 모터보트에 태우고 절박한 심정으로 키를 잡고 후송하던 일의 기억도 선명합니다.

 

캄보디아에서의 2년은 주로 말라리아와 지뢰 그리고 험한 도로 사정에 얽힌 경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증상이 시작된 지 2~3일 만에 혼수상태에 빠져버리는 열대열 말라리아의 무서움과 산간마을 곳곳에서 수시로 불거져 나오는 지뢰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주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직도 크메르루즈 잔당의 영향 아래 있던 북부 산간지대를 유엔 안전 담당관의 인솔 하에 답사하던 일과 우기에 마을로 난 길이 뻘밭으로 변해버려 소달구지를 타고 진료소로 향하던 일의 기억도 새롭습니다.

 

사막의 나라 모리타니아는 참 메마르고 혹독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심성도 기후와 어느 정도 닮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특히 정착초기에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수술이 필요했던 응급환자들과 딴청을 피우는 팀원들 사이에서 느꼈던 당황스러움을 기억합니다.

양철지붕의 열기, 파리 떼의 성가심과 함께 빈민진료실 문을 기웃거리는 염소와 벽에 난 틈새로 들락거리던 고양이의 정경도 떠오릅니다. 조가비처럼 엎드린 누아디부 잿빛 시가지 사이로 석양이 지고 있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계속되어오던 한국정부의 제3세계 의사파견프로그램이 종료되기로 결정되면서 이제 귀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구촌 주민들을 위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동기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는 이곳에서의 활동에 큰 힘이 되어왔으며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보름 쯤 후면 그간 사용하던 책이며 세간을 컨테이너로 부칠 예정이며, 귀국날짜는 12월 4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서신이 모리타니아에서의 마지막 통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간 부족함이 많은 활동에 성원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건강한 활동 그리고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며, 한국에 도착하면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누아디부에서 최상일......

 

 

  2007년 11월 18일

 

모리타니아(Mauritania) 누아디부에서 의사 최상일은 자신의 활동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지원하였던 한국의 카페회원들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전합니다.


얼마나 고되고 얼마나 험하고 얼마나 혹독한 노정이었을까요.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의 편지는 자신의 험했던 역경을 담담히 회고하면서 서정성을 갖춘 낭만적인 문학미가 물씬 배어 있습니다.

1955년에 태어나 고교 시절부터 제3세계에 가서 봉사하는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는 카이스트 전기과에 진학했고,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덕연구단지에서 전자공학을 연구하면서도 꿈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부친의 병환을 계기로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30살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처자가 있는 가장의 몸으로 의대로 학사편입해서 39살에 부산 고신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부산의 외과병원에서 7년을 근무하였지만 한시도 자신의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침내 그는 자원봉사 자격으로 1994년 가족을 남겨둔 채 전쟁이 한창이던 우간다로 향했습니다.

20만 명이 수용된 난민캠프에서 2개월간 구호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캄보디아에서 2년간 유엔 자원봉사 의료단원으로 일했습니다.
킬링필드로 유명한 캄보디아, 그 중에서도 태국과의 국경지대인 북부 지역은 아직도 지뢰가 살아있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얻지 못한 극빈층이지뢰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말라리아 위험 지역일 뿐만 아니라 도로 사정도 워낙 좋지 않아 의료 사각지대였습니다.

유엔에서 추천한 비교적 안전한 지역 대신 스스로 이 지역을 택했습니다. 이유는 너무나 명료했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도 의사가 필요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왕복 4시간이 넘는 비포장도로는 소형트럭으로, 진흙탕은 소달구지나 오토바이로 약품 상자를 끌고 다니며 야전병원 의사처럼
환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2000년에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모리타니아 누악쇼트 국립병원으로 부임했습니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모리타니아, 의과대학이 없는 인구 약 300만의 사막국가는 전국에 외과의사가 30여 명에 불과하여 외과 질환으로 인한 수술적 치료가 어려웠습니다.

 

현지 외과의사가 꺼리던 대수술을 솔선수범함으로써 직접진료를 통한 의료기술 전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한편, 외과전공의를 교육하여 전문의를 배출하였습니다.

 

그가 KOICA에 보고한 2003년 1/4분기 활동내용을 간추리면, 전신 혹은 척추마취 하 수술을 113건, 국소마취 하 수술을 29건 시행하였습니다. 외래진료는 512명을 진료하였으며, 병실 대 회진은 12차례가 있었고, 야간 및 휴일 당직근무 총 22일이었습니다.
고군분투의 의료 활동이었습니다.

2005년 9월부터는 의료 환경이 끔찍하고, 외과의사도 절대 부족한 수도에서 500km 떨어진 누아디부 국립병원을 자원하였습니다.

진료 외에도 빈민지역민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무의촌 진료시술을 실시하는 등 ‘인간생활의 기본적 욕구’라는 뜻의 인도적인 BHN(Basic Human Needs)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였습니다.

 

 

  낡은 수술대 하나에 플라스틱 테이블 두 개가 있다.

 

천장의 떨어져 나간 나무판자 사이로 햇빛을 타고 들어오는 먼지바람으로 실내는 먼지투성이다.
“제가 보따리 장사입니다.”
최박사는 큰 가방 두 개에서 손 씻을 물이 담긴 10리터짜리 플라스틱 물통과 물주전자를 먼저 꺼냈다.

 

그리고 도시락 크기의 알루미늄 상자에 든 의료기구들과 진료기록을 위한 노트, 휴지 뭉치와 밴드를 꺼냈다.
파리 떼와 모래가 날리는 진료실. 수술대에 쌓인 먼지를 손수 닦아 내고 첫 환자를 맞았다.

야전병원보다 더 열악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0대로 보이는 한 남자의 38년간 지녀온 복부지방 혹 제거 수술이 시작됐다.
마취주사, 메스 선택, 약품 찾기, 수술 봉합, 소독…… 붕대와 밴드, 자르고 붙이기까지 모든 작업을 최박사 혼자서 했다.
수술 중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쳐낼 수 없었다.

 

“손이 하나만 더 있어도…….”
최박사는 “큰 수술 때는 집사람이 와서 도와준다.”고도 했다. 대부분의 의료장비와 약품은 KOICA에서 지원받지만, 간단한 소모품들은 자비로 구입했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들이닥친 두 번째 환자의 머리에 난 혹을 제거하고, 세 번째 환자의 이마에 난 혹을 제거했다.

세 환자를 수술하고 다른환자를 진료했다.

 

행장 스님의 《아프리카 대륙 자전거 종단기》에 실린 누악쇼트 서남쪽 ‘시지엠’ 지역의 빈민촌 진료소 장면을 그린〈사하라 ‘모래 늪’에서 만난 아름다운 의사 최상일〉의 한 장면입니다.

스님은 의사 최상일을 전쟁지역과 오지를 누비고 다니는 야전병원 체질이라 말합니다.

 

의사 최상일은 어떤 사람일까요.  독한 사람일까. 약한 사람일까요.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포연이 자욱한 전장이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두메든 가리지 않는 진정한 의사였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그곳에서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가 있었기에 그들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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