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튀니지의 슈바이처  장기순

봉사는 내 생애의 가장 큰 보람

 

 

 

 

 

 

 

  한국이 오히려 외국같다

 

이 말은 의사 장기순이 1997년 유석창박사가 제정한 상허대상을 수상하기 위해 20년 만에 세 번째로 귀국하면서 고국을 낯설어 하며 한 이야기입니다.

1934년에 태어난 그는 1960년 전남대학교 의대를 졸업하였고, 광주적십자병원을 거쳐 충남 금산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했으며, 10여 년 동안 재산도 많이 모았습니다.


그는 1977년 의학전문지에 실린 아프리카지역 정부파견의사 모집광고를 보고 새 삶을 계획했습니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조국을 위해서는 이 만큼 일했으면 됐다. 이제 정말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일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처음엔 병원도 잘되고 아이들도 아직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 반대가 심했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오자며 가족을 설득했습니다.  계약기간인 2년만 근무하다 오기로 약속하였습니다.


1977년 겨울. 그는 부인과 세 자녀를 데리고 생면부지의 땅 아프리카 튀니지(Tunisie)로 떠났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남은 생애를 아프리카 환자들과 함께 지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에 인접한 튀니지

 

 

그곳에는 풍토병이 없고 의료수준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는 튀니지의 스팍스(Sfax) 대학병원 산부인과 의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곧 이동시술반 차량을 다섯 팀으로 꾸렸습니다. 이후 시골 구석구석을 돌며 하루 최고 20건씩 무료 불임시술을 했습니다.

그 후 10년간 총 7,000건의 복강경시술을 한 결과 가구당 7명의 자녀수가 평균 3명으로 줄어드는 성과를 냈습니다.

튀니지 국민들과 정부의 신임을 얻어 부임 6년째 되던 해 병원장에 취임했습니다.

 

아내가 이제 그만 고국으로 돌아가자고 몇 번이나 졸랐지만, 한 참 진행 중이던 가족계획운동을 중도에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1986년까지 10년 동안 고국에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일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그가 보고한 1986년 4/4분기 활동 결과입니다.

  산부인과 분야 질환 치료(치료인원 1,386명).
  난소낭종 제거술 1건, 자궁경관 낭종제거술 5건, 자궁외 임신수술 1건.

  자궁하수증 복원수술 1건, 계류 유산 제거술 31건, 유방농양 절제술 5건  

 
 
의약품 및 의료장비의 부족으로 의료 활동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580건의 복부소절개술에 의한 여성 불임시술, 9,000여건의 복강경을 통한 여성 난관 불임시술, 6만 천여 건의 산부인과 질환 진료수술, 10만 2천의 산부인과 환자 진료를 시행하였습니다.

정부파견의사 계약 기간도 끝났습니다.
그는 튀니지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한국에 있는 의사 월급의 50% 수준밖에 안됐지만, 그때만큼 보람 있고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더 험한 곳, 모리타니아(Mauritania)로 갔습니다.

 

사하라사막 서부의 신생국 모리타니아는 튀니지와는 달리 가난한 국가인데다, 일부다처제의 영향으로 가구당 8~15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처음 그가 모리타니아 수도에 있는 누악쇼트 국립병원에 부임했을 때는 의사들도 거의 없었고 의료장비도 청진기에 간단한 X-Ray 장비가 고작이었습니다.  국민들도 10살만 되면 결혼하기 시작해 보통 6~7명의 자녀를낳았습니다.

 

그는 장관을 찾아갔습니다.
가족계획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산아 제한 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더니, 이슬람국가로서의 풍습과 전통 운운하며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시술기구를 이용해 시범을 보여주며 설득해 마침내 정부의 지원을 받아냈습니다.
 
현지 원주민들은 그를 ‘독토르(Doctor) 장’이라 부르며 따랐고, 정부도 보건부 자문관으로 위촉했습니다.

 

낙태가 금지되었기에 아버지 없는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할 때,
의사 장기순은 자신의 성을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땅 모리타이니아에는 한국의 ‘장씨’ 성을 가진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의사 장기순은 모리타니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 선원 2,000여 명을 공휴
일과 주말을 이용해 10년간 무료 진료했습니다.
그곳에서 13년의 세월이었습니다.

 

23년간, 그의 튀니지와 모리타니아에서 인술활동은 고귀한 희생이었지
만,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어느 포털사이트 검색란에 '의사 장기순'을 쳐 보았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 중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 좀 찾아주세요.’라는 어느 중학생의 질문에 반갑게도 의사 장기순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1999년 정부는 의사 장기순에게 수교훈장 창의장을 수여했습니다.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다시 아프리카 모리타니아로 돌아가야 합니다.
후임의사가 갑자기 오지 않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은 아주 행복하다며 빈자리를 지키러 다시 간다고 하였습니다.

 

의사 장기순은 1988년 재외국민포상 대통령상, 1989년 대통령 표창,
1996년 적십자사 박애장 은장, 1997년 상허대상, 1999년 수교훈장 창의장을 수상하였지만, 요즘 사회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 중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에 더 깊은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장기순박사가 1989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고 있는 모습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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