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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나눔&봉사

[금요특집] 한국의 슈바이처들....제8부 유민철(에티오피아)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에티오피아의 슈바이처  유민철

에티오피아의 아픔을 보듬다

 

 

 

 

 

 

 


아픔과 배고픔 그리고 슬픔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에티오피아(Ethiopia).


한때 솔로몬의 후손이라 자처하며 아프리카의 자존심이었던 에티오피아는 지금은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였고, 오늘도 뜨거운 태양 아래 기아와 질병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에는 아픔을 같이하고 사랑을 나누었던 성형외과 의사 유민철이 있었습니다.


그는 1941년에 태어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련의를 마쳤습니다.

1975년, 그는 아프리카 파견의사 모집에 지원했습니다.

인술에 목마른 곳에서 봉사하며 살고 싶었던 평소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가 갑자기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부모는 반대하였습니다.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아들의 뜻을 꺾을 수 없게 된 부모는 몇 년 만 있다가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부인과 다섯 살 난 딸, 세 살 난 아들이 동행하였습니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블랙 라이온(Black Lion) 국립의료원으로 파견되어 30년이 지난 2005년 정년퇴임하였습니다.

 

 

학생 기술 회진을 하고 있는 의사 유민철

 


그가 도착한 1975년은 하일레 셀라시에 왕정이 군부쿠데타로 무너진 직후였습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운 나라였지만, 경제는 끝없이 추락만 거듭하였습니다.

세계는 에티오피아를 도왔지만, 쿠데타가 터지고 나서는 에티오피아를 외면하였습니다.


공산화된 그곳의 현실은 혹독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몇 달 일하지도 못하고 쫓겨났으나 현지 의사의 도움으로 의료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1980년대까지 잇따라 내란과 분쟁을 겪으며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여 병원은 전상자들로 넘쳤습니다. 절단, 총알제거 수술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습니다.

 

1991년 공산 정권이 무너질 때는 집 근처까지 총탄이 날아왔습니다.

사관에서는 철수를 종용했지만, 그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평화는 찾아왔지만 병원은 또 다른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병원 내과환자 중 60%가 AIDS 환자인데다 낙후된 의료장비와 시설은 그를 항상 감염의 위험으로 내몰았습니다.

에티오피아는 AIDS환자가 3백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아디스아바바는 더욱 심해서 6명 중 1명이 감염자입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넘쳐나 AIDS 검사도 없이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화상을 입은 소말리아 난민 환자를 수술할 때였습니다.

환자에게 가벼운 마취를 한 뒤 수술에 들어갔는데, 환자가 그의 팔을 치는 바람에 피 묻은 수술 칼에 손을 베이고 말았습니다. 환자가 AIDS에 걸렸다면 그도 감염될 우려가 큰 것입니다.

환자의 피를 채취해 AIDS 검사를 요청했으나 하루 뒤 결과가 나오기까지 착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환자는 AIDS 감염자가 아니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선 싸구려 부탄가스를 쓰는 가정이 많아 가스폭발로 인한 화상을 입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구순구개열인 언청이가 흔할 뿐만 아니라 턱없이 부족한 의료시설로 종양이 생겨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말기에 이르러서야 의사를 찾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유일한 성형외과 전문의인 의사 유민철은 일상처럼 종양과 화상 그리고 언청이 환자의 수술을 맡았습니다.

 

주 6회 언청이 수술을 하였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끝이 없었습니다.

입천장이 바깥으로 드러난 환자, 얼굴이 기형인 환자를 수술했습니다.

수술 뒤 좋아하는 환자들을 볼 때면 그는 뿌듯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병원을 찾는 환자는 약값은 물론 수술 장갑이나 반창고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형편이었고, 이것마저 살 수 없는 환자도 흔하였습니다.

입원환자는 그나마 치료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일반 환자들이 여기 오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빈 병실이 나오기만 기다리다 죽어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가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 보고한 1996년 1/4분기 활동내용입니다.
 

분기별 600여 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거나 수술함.

선천성 질환 및 총상환자, 화상환자 등을 주로 치료함.

 

의료 활동상의 애로사항은 마취약, 고가 항생제 등의 부족과 위생 재료의 부족

그리고 AIDS 환자의 증가는 큰 문제점임.

 

 

장갑이나 반창고를 살 수 없는 극빈자에게 그는 장갑 등을 주었습니다.
연신 고마워하며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는 이들.

어떤 이는 나중에 찾아와 지푸라기가 묻은 달걀 10여 개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순박한 표정에서 그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맛보곤 했습니다.


아디스아바바 국립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레지던트 트레이닝을 맡아 200명이 넘는 외과 의사를 배출시켰고, 난민촌 방문을 통해 다수의 빈곤자 들에게 무료 의료 봉사활동을 실시하였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들과 고아원에 무료 진료와 지속적인 지원을 하였고, 의술만큼이나 신앙심도 깊었던 그는 노숙 아동, 전쟁 미망인을 지원하는 사회봉사 활동에도 헌신적이어서 ‘걸인의 아버지’라 불렸습니다.

 

에티오피아는 그에게 있어 삶 전체였습니다.

 

50년 전의 아시아와 비슷한 수준인 아프리카 지역은

50년 후에는 분명 우리 후손의 삶의 터요, 외교와 무역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를 돕는 일은 50년 후 세계무대의 주역이 될 우리 후손을 위한

외교의 시작인만큼 더 많은 이들이 앞장서 주길 바랍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에티오피아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정부와 민간차원의 인도적 지원을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1997년 그의 슈바이처 같은 감동적인 삶은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실렸습니다.

 

1982년 정부에서는 의사 유민철에게 수교훈장 숙정장을 수여하였고, 1994년에는 KOICA 총재 표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제7회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30년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그 오랜 세월을 에티오피아인으로 살았습니다.

30년 세월을 뒤로 하면서 어느 기자와 나눈 대화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제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를 떠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조선일보 97년 6월 23일자 기사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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