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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나눔&봉사

[금요특집] 한국의 슈바이처들....제7부 유덕종(우간다)

 

 이하 글은  아프리카 오지로 머나먼 남미의 산골로 젊은 시절을 온통 다바쳐 인류애를 실천하신 정부파견 의사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 출판된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내용을, 발간 주체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동의를 얻어 건강천사에서 금요특집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읽는 모든이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감동과 삶에 귀감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간다의 슈바이처  유덕종

받은사랑이 더 많기에, 사랑할 수 있었다

 

 

 

 

 

 

 

대학 입학 땐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인생을 어떻게 살더 라도 의미가 없어 보였죠.

어차피 의사가 될 거라면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졸업하기 전에 결심을 했죠.

아프리카로 가야겠다고, 가서 나보다 힘든 사람을 도와야겠다고요.

 

2010년 잠시 귀국한 유덕종이 모교인 경북대학교 웹진에 전한 서면 인터뷰 내용입니다.
유덕종은 1959년 출생하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아프리카 우간다(Uganda)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린 두 딸과 임신한 아내가 눈에 밟혔지만, 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캄팔라 물라고(Mulago) 국립병원에서 16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곳에서 머물며 캄팔라 마케레레(Makerere)대학에서 의학을 강의하며 진료도 계속하였습니다.

 

강의를 마친후 의과 대학생들과 함께

 

캄팔라 외곽에 의사가 처방한 약이 환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기초가 제대로 서 있는 병원을 세우려고 동분서주하는 의사 유덕종을 경북대학교 동문들은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습니다.

 

서른 셋, 의사로서의 앞날이 창창한 그가 처음 우간다 땅을 밟았다.

리고 그의 나이 쉰하나. 젊음도, 열정도, 꿈도 모두 그 땅에 바쳤다.

18년 동안 그를 붙든 것은 배고픔과 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그곳 사람들이었다.

 

 우간다의 열악한 의료상황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고 병원건립을 준비한 것만도 9년째.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이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는 폐결핵과 위암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은 뭔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하는 생각을 자주하였고, 의대에 들어가 크리스천이 되면서 아프리카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부터 아프리카에서 사는 문제를 상의했고, 동의를 받아 결혼했습니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그에겐 보람이고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들이 아플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모든 걸 다 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위로가 된다면 족하였다.

 

1992년 정부파견의사로 우간다에 도착한 그가 KOICA에 보낸 편지 일부분입니다.

 

저는 이곳에 도착하여 수도 캄팔라에 있는 물라고병원(Mulago Hospital)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병원인 물라고 병원의 시설이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곳의 재정상태가 엉망이라 기구와 약품이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입니다.

비싼 약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약도 없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환자를 지켜봐야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며칠 전 20세 밖에 되지 않은 환자가 당뇨혼수로 죽는 것을 보고 화가 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환자가 한국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걸어서 퇴원을 할 환자인데

속수무책으로 죽는 것을 보고 한동안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인구의 60%가 의사 한 번 만나 본 적이 없이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바짝 마른 결핵환자가 그를 보고 “Doctor, I am hungry.(선생님, 배고파요.)”라고 할 정도로, 환자들이 굶주려 죽어나가는 그곳의 병원은 차라리 난민촌이 었습니다.

 모기장만 있어도 말라리아 발병률을 60%가량 줄일 수 있지만, 모기장 구입도 큰 부담인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덕종은 한국의 앞선 의료기술과 의료기자재의 활용방법 등을 익혀 그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봉사에 나서리라 다짐하였습니다.


 1993년 7월.
 의사 유덕종은 어느 환자의 조직검사를 하다가 주사 바늘에 손이 찔렸습니다.

 끼고 있던 장갑에 피가 흥건히 고일 정도로 깊이 찔렸습니다.

 문제는 그가 AIDS환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치료약이 없는 천형…….

 

“순간 손가락을 잘라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그 상황에서

AIDS에 걸릴 확률이 3백분의 1이기 때문에 거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죠.”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까지 기다린 5개월간 그는 정상인이 아니었습니다.

 부부관계도 멀리하는 등 매사에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것을 깨달은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한 달 간은 정말 우울했습니다.

 

그러나 감염됐다 해도 5~6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동안 더 가깝게 AIDS환자를 치료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1994년 봄.
 이번에는 폐결핵이었습니다. AIDS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아프리카였기에 결코 간단한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큰딸 주은이가 뇌염에 걸렸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뇌염이 없지만, 일단 걸리면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명색이 의사라는 애비가 한다는 게 링거주사를 놓는 것뿐이었어요.
AIDS 때도, 폐결핵 때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는데, 막상 딸이 뇌염에 걸리자

‘왜 이곳에 왔나’하는 후회뿐이었습니다. 집 사람은 그저 울고 만 있었지요.”

1997년 8월 24일자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AIDS에 감염됐다 해도 몇 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동안 더 가깝게 AIDS환자를 치료할 수 있겠구나 하던 유덕종이였습니다.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던 환자가 완치된 후 퇴원하면서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입원환자의 80%가 AIDS 환자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AIDS 환자가 줄고 있는 나라가 우간다라며,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 아프리카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국에서 자리 잡은 대학 동기생과 비교해 본적이 없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부동산도 집도 없다. 하지만 그런 게 다가 아니다.

사람의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경제가 발전하면서 삶은 윤택해졌는지 모르지만 삶의 질은 퇴보한다는 인상이다.

 

내 눈길에 와 닿는 아프리카의 하늘은 아름답고, 힘과 용기를준다.

당신은 한국의 하늘을 가끔씩이라도 올려 보는가?

행복지수로 보자면 한국보다 아프리카 나라들이 더 높을지 모른다. 나는 행복하다.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행복한 의사 유덕종입니다.

 

우간다 캄팔라에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진료하는 유덕종

 

 

 

출처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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