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사과를 눈으로 볼 때와 눈을 감고 상상할 때 뇌의 활동은 거의 비슷하다.

       단지 ‘상상’이냐 ‘실제’냐 정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 소풍가거나 여행을 가기 전에도 그렇게 설레었고,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그렇게 떨렸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상상만 해도 우리의 뇌는 직접 그 경험을 한 것처럼

       반응한다. 뇌의 반응은 당연히 신체 반응으로까지 이어진다. 심장도 뛰고, 식은땀도 나며 혈압도 올라간다. 이런

       면에서 고통스러운 경험이 실제로는 과거에 딱 한 번이었을지 몰라도, 우리의 마음과 몸은 그것을 여전히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경험하게 한다.  

 

 

     

 

 

생각의 역설

 

과거 사건에 대해 힘들어 하면 주변 사람들은 “왜 아직까지 그 일에 그렇게 매달리니?”, “이제 다 끝난 일이니까 잊어”라고 쉽게 말한다. 누군들 잊고 싶지 않겠는가? 어찌된 일인지 이놈의 기억은 잊으려고 할수록 더 자주 기억난다. 마치 기억의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다. 어떤 자신들의 이런 모습을 또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이제 그쳐야 할 듯싶다. 누구나 그렇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웨그너(Daniel Wegner)는 원하지 않는 머릿속의 정보를 얼마나 통제할 수 있을지 알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고안했다. 참가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눈 후 한쪽 집단에는 백곰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다른 한쪽 집단에는 백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이 지시한 제외하면 두 집단은 5분 동안 동일한 절차의 실험 과제를 수행했다. 그 결과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던 집단이 평균 7번 정도 더 백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다.

 

실험 결과는 명확하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더 그 생각을 하게 된다는 역설이다. 과거의 기억이라고 다르랴. 과거의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더 고통스럽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자기비난을 하는 이유

 

과거의 고통을 대할 때 사람들은 자기비난을 일삼는 경우가 많다. 직장 상사 앞에서 말실수를 했을 경우 ‘앞으로는 보다 신중해야지’라고 생각을 하고 나서, ‘아 그 때 왜 그랬지. 미쳤나봐. 난 이래서 안돼’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만드는 방편이고, 과거의 잘잘못을 따져서 발판을 삼는 것은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도가 심해져서 과거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오히려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자기비난을 자주 하는 것일까? 그 이면에는 통제감(sense of control)이라는 심리적 원리가 숨어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사건, 자신과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다. 심리학자들은 다양한 실험으로 통제감을 박탈했을 경우 느끼는 무력감이 여러 정신장애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사람들은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조차 ‘통제할 수 있었다’는 착각을 한다. 아침 출근시간이나 등교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열심히 달렸지만 간발의 차이로 버스나 지하철을 놓쳤을 경우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느린 걸음이나 게으름을 탓하면서 ‘조금만 더 서두를 걸’, ‘5분만 더 일찍 일어났으면 좋았을 걸’, ‘밥을 빨리 먹을 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버스나 지하철을 간발의 차이로 놓치게 될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즉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타당하지 않다. 착각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이더라도 통제감을 갖고 싶어 한다.

 

이런 통제력 착각, 즉 ‘그 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가 심해지면 자기비난으로 발전한다. 일례로 성폭행 피해자들은 자신에게 큰 고통을 준 가해자를 비난하기보다는 자신을 비난한다. ‘그 길로 가지 말았어야 했어’, ‘그 때 도망쳐야 했어’라는 생각은 결국 ‘모두 내 잘못이야’로 귀결된다. 아니다. 이런 자기파괴적 생각은 우울증이나 자살 같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정과 수용

 

자기비난을 멈추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의 사건이 예측 가능했던 일인지 따져보자. 취업준비생이 낙방경험을 되짚어 보는 것은 또 다른 취업의 기회가 왔을 때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경험까지 우리의 삶은 예측불가능한 일이 더 많다. 이럴 경우 ‘그 때 이렇게 했어야 했다’는 비난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함께 놀러갔다가 안전사고를 당한 친구들이나 놀이공원에서 자녀를 잃어버린 부부가 서로를 비난한다고 해서 도움이 될까? 오히려 서로를 멀어지게 하고, 관계를 깨뜨릴 뿐이다. 그 누구도 비난하지 말자. 그런데 성폭행 사건처럼 가해자가 명확한 경우라면 비난의 화살을 상대에게 돌리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서는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는 ‘어쩔 수 없었다’고 되새겨야 한다. 우리는 단 1초 후에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한다. 통제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를 성숙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마음가짐이다. 심리학자들이 언급하는 건강한 마음가짐 중 하나는 ‘유아적 욕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뭐든지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 반면, 어른들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것이 인생의 교훈이자 삶의 지혜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끊임없이 과거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해야 한다. 앞서 살펴보았을 애써 다른 것을 생각하려할수록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것은 ‘난 왜 아직도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와 같은 이차적인 자기비난을 멈추라는 말이다. 우리의 마음이 아직 그 사건을 건강하게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떠오를 뿐이다. 이럴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가까운 사람, 혹은 심리학자나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과거가 더 이상 현재의 발목을 잡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글 / 심리학칼럼니스트 강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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