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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맞춤형

기억과 기억상실증

 

 

 

       심리학자나 정신과 전문의를 찾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다시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경험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냈거나 친구들로부터 배척을 당한 경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는 외상경험, 어린 시절 부모로

       부터의 학대나 방임, 수치스러웠고 무기력했던 사건들까지 그 종류와 내용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이들의 하소연이다. “그 기억을 제 머리에서 지우고 싶어요.”

 

 

             

 

 

 

기억, 지울 수 있을까?

 

가끔 신문에 보면 최근 연구결과를 이용해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곤 한다.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기사이겠지만, 기사를 꼼꼼히 읽다보면 시쳇말로 낚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기사는 대부분 어떤 과학자가 기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물질(혹은 세포)을 발견했다는 것이고 이런 연구가 앞으로 계속 된다면 ‘언젠가는 원치 않은 기억을 없애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뇌와 기억을 연구하는 과학자들 중에는 언젠가는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못을 박는다. 기억이란 뇌의 특정 부분에만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뇌 전체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뇌를 완전히 교체하지 않고서는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화와 드라마 속 기억상실

 

2003년 K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아내>는 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해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잊은 상태에서 만난 여성과 예전의 아내 사이에서 겪는 일을 그렸다. 이 드라마로 사람들은 교통사고를 당하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모두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실제의 기억상실증과는 사뭇 다르다. 기억상실증은 크게 뇌 손상으로 인한 기질성(organic)과 심리적 충격으로 인한 심인성(psychogenic)로 나눌 수 있는데, 위의 예는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우선 뇌 손상이 없었으니 기질성도 아니다. 그리고 과거를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심인성이라고도 보기 어렵다.

 

기질성 기억상실은 교통사고나 뇌졸중,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질환, 간질 등으로 인한 실제적인 뇌 손상 때문에 발생한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해마(hippocampus)가 손상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억상실로,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의 주인공 루시(드류 베리모어 분)가 바로 이런 예였다. 해마는 새로운 정보를 기억의 창고로 보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해마가 손상되면 된 이후의 정보를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도 이미 기억의 창고로 들어간 과거의 사건은 사라지지 않는다.

 

심인성 기억상실은 다른 말로 해리성 기억상실이라고 한다. 교통사고나 폭행 같은 끔찍한 사건을 당했을 때, 해당 사건만을 기억하지 못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신의 정체성을 비롯해 모든 과거를 잊는 일은 거의 보고되지 않는다. 이 증상은 과거의 기억을 잊었다기보다는 잠시 억압해 둔 것이다. 마음이 사건과 경험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마음 저편에 두었을 뿐이지, 기억이 지워진 것은 아니다.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기억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우성과 손예진이 출연했던 영화 <내 머릿 속의 지우개>는 기억상실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치매에 대한 영화다.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듯이 알츠하이머 치매는 이상 단백질이 뇌 속에 쌓이면서 뇌 세포가 죽는 퇴행성 뇌질환이다. 이 때문에 기억상실이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지만, 기억에만 문제가 오는 것이 아니라 감정 조절과 인지, 행동까지 문제가 오는 종합적인 뇌 질환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한 기억을 위해

 

우리를 고통에 빠져들게 하는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없애는 마법 따위는 없다. 우울이나 불안을 통제할 수 있는 약물은 있으나,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워주는 약물 또한 없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운 기억을 평생 지고 가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 가능하다.

 

먼저 고통스러운 기억 자체만을 보았을 때는 ‘그렇다’이다. 너무하다 싶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기억은 시간에 지나면 희미해지지만, 강렬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평생 지고가야 한다. 몸의 상처가 심하게 나면 흉터가 가시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기억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는 ‘아니다’라는 답도 가능하다. 기억 용량 자체는 무한대로 크지만, 우리가 순간 기억할 수 있는 내용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고통스러운 기억보다 즐겁고 행복한 기억을 더 많이 만든다면 고통스러운 기억에 덜 시달릴 수 있다.

 

긍정심리학자들은 ‘우울’을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행복과 감사’를 더 많이 만들다보면 자연스럽게 ‘우울’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없애려하기보다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경험을 많이 만들자. 어느 순간 고통스러운 기억이 아니라 행복한 기억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 / 심리학칼럼니스트 강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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