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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맞춤형

불임 20만 시대, 잉태와 출산의 정치학

 

    

 

 

 

 

 

 

 

 

 

 

폴 고갱(1848~1903)의 1897년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에서 출발하자.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고갱은 정신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었떤 것으로 전해진다. 딸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한 고갱은 자살을 결심하고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 마지막 작품을 남기기로 한다. 원근법도 무시한 이 불안한 구도의 대작(大作)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림설명> 그림의 오른쪽 아래, 잠든 아기를 세 명의 여인이 둘러싸고 있다. 여인 두 명의 피부는 희고 한 명은 검다. 고갱은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림은 현대 인류가 맞닥뜨린 딜레마와 묘하게 연결된다.

 

 

 

 

<사진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구글 베이비'>

인도의 한 대리모 공장. 얼굴이 검은 인도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 갓 태어난 아기는 백인이다. 이 아기를 만들어낸 난자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다니는 젊고 아름다운 여대생의 것. 의사는 탈진한 인도 여자의 품에서 아기를 끌어내 미국에서 온 부유한 불임 부부에게 안겨준다. 인도 여자는 운다. 부부는 행복한 표정으로 잔금을 치르고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스라엘 여성 감독 지피 브랜드 프랭크가 2009년 발표한 다큐멘터리 <구글 베이비>의 한 장면이다. 현재 인도 대리모 산업의 규모는 연간 1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산업이 번성하면서 대리모들은 '아기 공장'으로 불리는 기숙사에서 모여 살기도 한다.

 

 

 

 

잉태와 출산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적어도 근대 이전까지는 그랬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에 대한 인류 전반의 공감대는 긴 인류사를 지배해 온 여성 혐오와 차별의 역사를 뛰어넘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급속하게 발달한 유전공학과 생식공학은 '그래도 자궁은 경이롭다'는 공고한 관념을 완전히 뒤엎었다. 생의학 기술 발달 초기만 해도 여성은 임신 여부와 시기를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 존재로 부상하리라고 여겨졌다. 인류는 아이의 성별을 선택할 수 없고 폐경기 이후에는 임신할 수 없는 생물학적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리라는 환상에 들떴다. 그러나 이 기술들은 결과적으로 여성의 생식통제력을 빼앗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모체는 철저하게 도구화됐다. 제3세계 여성이 대리모로, 서구 백인 여성이 난자 제공자로 각자의 자리에서 분업화된 노동을 시작했다. 생명체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도 자유롭게 처분 가능한 상품이 되었다. '대지'의 모성적 이미지가 서서히 사라진 것도 이 시기다. 여성적 감수성은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일부 여성학자들은 유전공학과 생식공학을 신체에 대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강탈하는 요소라고 분석한다.

 

 

 

 

 

어쨌든 이렇게 잉태와 출산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게 된 인류에게 재앙이 닥친다. 다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이야기로 돌아가자. 서기 2027년. 인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불임이 된다. 마지막으로 태어난 18세 소년이 폭탄 테러로 숨지자 전 세계는 절망한다. 폭력과 무정부주의에 휩싸인 런던은 광신적인 폭력주의자들이 장악한다. 이 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다. 한 흑인 이민자 소녀가 임신한 것. 왜 하필 흑인 이민자인가. 비로소 정치가 개입되는 대목이다. 영국 본토인으로부터 차별에 시달리던 영국 내 이민자 반정부 집단은 이 소녀를 자신들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도구로 이용키로 한다. 오늘날 대리모 기술의 정치적 논리와 꼭 닮았다.

신성한 행위였던 잉태는 이제 원하는 유전자를 가진 아기를 얻기 위한 기술적 수단으로 변모했다. 당초 대리모 기술은 단순히 아이를 원하는 불임 부부를 위해 고안됐지만 이제는 맞춤 제작된 아이를 갖고자 하는 세계 부자들의 욕망의 도구가 됐다. 얼마전 영국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과 중국에서는 많은 대리모 에이전시가 성업 중이다. 특히 산아제한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중국에서는 약 10만 달러(우리돈 1억 1100만원)를 미국 대리모 에이전시에 내면 중국 내 1자녀 정책에 걸리지 않고 '똑똑하게 디자인 된' 아이에게 미국 시민권까지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대리모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민권을 가진 자녀를 통해 미국으로의 가족이민을 계획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 시민권자는 21세가 되면 부모를 위해 영주권 발급을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의 불임병원과 대리모 에이전시들은 중국어로 된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중국어가 가능한 직원을 채용할 정도다. 무엇보다도, 이 같은 방법을 통해 미국 국적의 아이를 갖게 되면 합법적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미국으로 빼돌려 관리할 수 있기 떄문에 정치적 정쟁의 타깃이 될 수 있는 중국 주요 인사들이 대리모 기술을 선호한다고 한다. 주로 아이비리그 출신 유전자를 선택하고, 일부는 취향에 따라 키가 큰 금발 여성의 유전자를 고르기도 한다. 원하는 성별을 지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전병 없는 건강한 아기를 갖기 위한 유전자 선별은 기본이다

 

 

 

 

 

결국 자신의 아이가 동료들에 의해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녀는 도망친다. 그리고 감독은 영화를 종교 수난극으로 마무리 지어 버리면서 신 앞에 나약한 인간을 조롱한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회개파 사람들은 이 같은 재앙이 자신들의 오만 때문이었다고 오열한다. 주인공 테오가 총격적이 한창인 가운데 아기를 안고 조심스럽게 건물을 나오는 후반부 장면에서 군인들은 무릎을 꿇고 성호를 긋는다. 유토피아를 만들려던 인류의 오만이 결국 디스토피아를 초래했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영화는 끝난다.

인도 정부는 비자 규정을 개정해 해외 동성 커플과 동성애자가 대리모를 이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대리모와 아동보호를 위한 조력 생식 기술 관련법도 발의를 준비 중이다. 법안 초안에 따르면 모든 불임 치료 센터는 등록 후 규제 당국의 감독을 받아야 하고, 대리모에게는 보험이 제공돼야 한다. 뒤늦은 조치이지만, 자국이 세계 대리모 산업의 허브가 돼 가고 있는 현실을 위기로 인식한 결과다.

이 같은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대리모 산업이 멀지 않은 미래 인류의 중심 산업이 될 것은 명백해 보인다. 독일의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는 저서 <위대한 미래>에서 2050년쯤 되면 대리모는 정식 직업으로 인정받게 되며 동성애 커플의 30%가 자녀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따라 '맞춤 아기'가 보편화 돼 100년쯤 지나면 우수한 유전 형질의 인류만 남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똑똑한 사람들만 남은 지구는 낙원일까.

 

글 / 세계일보기자 조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