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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생활

[유기그릇] 생명을 담은 느림의 미학 '유기'

 

    

 

 

 

 

 

 

 

 

 

 

과거 현대인들에게 속도는 미덕이었다. 매일 '빨리 빨리'를 외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일상인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여유가 생기고 건강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느림'은 이제 현대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 주변에는 오히려 과거를 쫓고 전통에 숨겨진 우리네 조상의 지혜를 따르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생겨나고 있다. 그 느림의 미학을 이어오고 있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한국 전통의 놋그릇 '유기'이다.

 

 

 

 

 

 

필자는 올해 설을 맞아 장인, 장모님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 와이프와 두 자녀까지 모두 네 식구의 수저는 물론 밥그릇과 국그릇, 반찬을 담는 접시까지 풀세트로 말이다. 명절 때마다 입버릇처럼 건강을 강조하시는 장모님의 사랑을 담아 필자의 가족은 청아한 울림이 나는 유기그릇을 식탁에 올릴 수 있었다. 유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청동기 시대에 탄생을 알린다. 식기류는 물론 무기까지 널리 사용하던 유기는 8세기 경 삼국시대 유기를 전담하는 철유전이란 기관이 있을 정도로 전성기를 맞는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생활용기는 물론 불교 공예품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다.

도자식기가 보편적이었던 조선시대마저도 구리의 채굴을 장려하면서 유기를 사용해왔고 민간은 물론 관영수공업체로부터 궁중과 관청에서 사용할 유기를 납품받기도 했다. 유기는 특히 조선말기 활성화를 이루면서 안성유기가 유명해져 제작 기교가 발달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이후 일제침략으로 쇠퇴기를 걷던 유기제작은 해방과 함께 성행하더니 광복 후 급변한 플라스틱, 스테인레스 그릇의 보편화로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춰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엌 찬장에서 다락방에서 잠자고 있던 유기는 현대사회에서 접어 다시 건강과 멋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며 각광을 받는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진 유기 제작방법은 안성의 주물유기, 납청의 방짜유기, 순천의 반방짜유기 등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살펴보면 주물유기는 녹인 쇳물을 틀에 부어 내는 방법으로 동일규격 제품을 다량 생산하는 장점을 지닌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대 22%의 비율로 합금해 거푸집에 붓거나 불에 달군 뒤 무수히 반복해 두들기는 단련의 시간을 거쳐 완성된다. 두드림에 나온 자국은 수공예품으로서의 멋과 품위를 지니면서 더 가치를 높인다. 마지막으로 반방짜유기는 궁그름 옥성 기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오목한 형태의 식기를 만드는 기법으로 주물기법과 방짜기법을 절충한 방식을 취한다. 예부터 왕실과 사대부들이 대를 물려가며 사용할 정도로 유기는 품격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왔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생명의 그릇으로 불릴 만큼 독성에 민감한 부분 때문이다.


유기는 보통 음식에서 조금의 독성이라도 나오면 그릇이 검게 변하는 특성을 지닌다. 이미 과학적으로 유기가 농약 성분을 감지하거나 식중독균을 없앤다는 사실도 증명되고 있다. 유기의 이 같은 강점에는 소화를 돕고 혈압을 안정시키는 질병예방 효과까지 확대되고 있다. 채소를 유기에 담으면 신선도가 오래가고 멋스러움까지 더하면서 한정식집에서 사용을 늘려 오던 유기의 인기는 이제 비빔밥 전문점, 냉면 전문점을 비롯해 팥빙수를 판매하는 디저트 전문샵으로까지 그 인기를 늘려나가고 있다. 유기그릇과 관련한 한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 실험을 보면 강력한 식중독균이 유기그릇에서 24시간 후 부연 침전물로 나타났고 그릇 표면색이 변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 농약사용 채소를 그릇에 담은 결과 역시 유기그릇이 검게 탈색되는 모습을 보였으며 생화를 유기그릇에 넣고 11일을 지나 관찰한 결과에서도 모두 메말라 버린 일반 그릇의 생화와 달리 유기그릇의 생화는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나에게 맞는 유기그릇을 고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선 유기그릇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기는 반 영구적으로 한 번 장만하면 웬만해선 깨지기 어려워 대물림이 가능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전자렌지 사용이 불가능하고 무게감이 있는 것은 물론 열전도율이 높아 뜨거운 음식을 담을 경우 잡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도 있다. 때문에 나에게 꼭 필요한 식기류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보관이나 세척 역시 일반 식기류에 비해 조금 더 번거로울 수 있기 때문에 평소 설거지를 싫어해 미뤄두는 분들이라면 구매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필자가 명품이라고 인정하는 기준은 하나다. 오랜 시간 쓰면 쓸수록 깊이를 더하고 빛을 내는 그 자연스러움이 있느냐 없느냐다. 그런 점에서 유기는 쓰면 쓸수록 윤기와 빛깔을 내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분명 명품 그릇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오래 방치하면 변색이나 얼룩이 오기도 한다. 관리방법은 간단하다. 과거의 방법을 빌리자면 가루 낸 기와조각이나 타고 남은 재를 연마재 삼아 짚으로 문지르면 빛깔이 되살아난다. 현대의 방식으로는 식사 후 바로 설거지를 하는 것이 좋고 아니면 물속에 완전히 담가둬 설거지를 하고 유기그릇 전용 수세미를 마련해 한쪽 방향으로 닦아내면 원래의 유기 모양을 되살릴 수 있다.

 
글 / 김지환 자유기고가 (전 청년의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