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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생활

먼저 할 바와 나중 할 바

 

 

 

                       

“선생님. 제가 지금 나이가 30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쉴 수 있겠어요.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은 토익 고득점을 확보하는 거예요.”

30대에 접어든 한 여성의 하소연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왜냐면 그녀는 항상 아프기 때문이다. 첫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날에도 그녀는 아팠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자꾸 아프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도 도전하고 있다. 스펙을 쌓는 일에 말이다.


그녀의 생각이 문제라고 책망할 필요도 없다. 그녀 자신도 책망해서는 곤란하고, 주변의 그 누구도 그렇게 책망할 자격이 없다. 다만 관찰만이 필요하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마음을 잘 들여다보세요.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말이에요. 우리의 마음은 언제라도 두 가지죠. 마음 하나는 푹 쉬면서 행복이라는 에너지를 충전하려고 하고 있고요, 또 다른 마음 하나는 자꾸 달리려고만 하는 조급해 하고 있죠.”

 

 

 

 

우리의 마음은 치처럼 여유를 추구하는 본성(本性)이라는 마음과 빨리 얻으려고만 하는 칠정(七情)의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성에 가까우면 깨달음에 이른 것이요, 칠정에 가까우면 마음이 병든 것이다. 그녀가 다시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저 모든 것을 내려 놨었거든요. 그리고 충분히 쉬었어요. 그런데 왜 자꾸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거죠?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정말 짜증나는 일이에요.”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화도 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충분히 쉬었다면, 그래서 내가 삶의 에너지를 충분히 축적했다면, 어찌해서 내가 도전하는 일들이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자연과 인생에는 거짓이 없다. 따라서 이유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도전하는 일들이 너무 크거나, 혹은 내 행복의 에너지가 아직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음처럼 말했다.

 

“믿음(가명)씨! 자동차가 언덕을 올라가다가 멈췄어요. 차에는 이상이 없다고 가정하면 어떤 문제일까요?”
“그야 언덕이 너무 길고 높거나, 연료 탱크에 연료가 떨어졌겠죠. 뭐”
“바로 그렇죠. 당신 마음의 행복 연료가 충분치 않은 거예요.”

 

우리 몸의 느낌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힘이 들거나, 어떤 사정도 없이 몸이 아픈 일은 없다. 반드시 몸이 불편하고 건강이 따르지 않음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그러니 내 몸에 일어나는 모든 병증 들, 그것이 우울이든, 그것이 불안이든, 두려움이든, 만성 통증이든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몸의 증상들에 대해 좀 더 경건해져야 한다. 왜 이렇게 몸이 아프냐고, 자신의 몸 신호를 경시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학대해서는 곤란하다.


필자는 중,고교 학창시절에 공황장애를 앓았다. 그 땐 그 공황장애가 공황장애인 줄 몰랐다. 강단에 서는 게 두려웠고, 어른들을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 밤에는 속칭 ‘가위귀신’이 날마다 찾아들었다.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두려움에 엄습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이 공황장애인 줄 몰랐다. 참으로 불행한 일 같지만, 엄청나게 다행한 일이다. 왜냐면 모르기 때문에 심각하지 않았고, 심각하게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을 매우 잘 앓을 수(?) 있었다.


그렇다. 병이란 비록 불편하지만, 내 몸이 스스로 병을 고쳐내려는 과정이다. 즉, 내 몸의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자연치유력의 발동이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병이든, 육체적인 질환이든지 병이 걸리게 되면, 병이 걸렸다고 나 자신을 미워하거나, 재수 없다면서 자기를 부정하기 전에 내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고, 좀 더 겸허한 자세로 병을 맞이하고, 병이 잘 빠져나가도록 관리하는 게 낫다.


나는 잠시 몸과 마음이 힘들면서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생겨났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정신병이라는 심각한 단정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내 병에 심각하지 않았다. 또한 내가 아프다보니, 대학시절 한의학과에 다니면서 좀 더 마음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증상 역시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병이 다 나아갈 무렵, 내게는 속칭 ‘가위눌림’증이 더욱 거세게 다가왔다. 잠결에 나타난 시커먼 귀신! 아, 다시 의심이 생겨났다. ‘뭐야 정말 귀신이 있는 거야?’ 그러나 내 마음은 이런 의심을 희석시킬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이미, 논어와 노자, 장자, 황제내경, 퇴계집, 율곡전서 등 동양의 고전으로부터 스며든 크고 아름다운 삶에 대한 믿음이 가슴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나는 고전이 주는 메시지 그대로 ‘마음을 비우고 현실을 인정하라’는 가르침이 가슴 깊이 새겼다. 그리고 내 상황에 대해서 겸허히 수용했다. ‘그래 모든 증상이 나타나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목이 타면 갈증이 느껴진다. 물을 마셔도 물이 충분치 않으면 다시 갈증이 올라온다. 그러한 갈증이 어찌 가짜일 수 있겠는가. 내 몸이 아프다는 것, 내 마음이 우울하다는 것은 반드시 내 몸과 마음에 필요한 심리적인 영양분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그 영양분이 있더라도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다. 행복의 샘물, 기쁨이라는 감로수, 그리고 평화가 충분히 깃들어야 비로소 통증과 우울감이 해소된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충분히 기뻐야 한다.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또 사랑해야 한다. 내일은 신경을 꺼야 한다. 오늘만이 중요하다. 오늘 내가 행복한 삶만큼 중요한 과제는 없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나는 내 몸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몸의 기력을 보강하는 한약을 들었고 당랑권과 태극권을 수련하면서 몸과 마음에 기쁨의 물결을 일으켰다. 지금의 아내가 된 한 여인을 만나면서 뜨겁게 사랑도 했다. 수시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성현의 말씀을 암송하고 숙독했다. 그러자 밤마다 찾아왔던 ‘가위귀신’이 어찌 대결할 수 있겠는가.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위귀신은 나의 부정적인 생각이 몰고 온 부정적 에너지의 덩어리였을 뿐이었다. 내 마음이 기뻐지고 내 생활에 활력이 생기면,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나의 공황장애는 나를 드러내려는 교만한 생각이 몰고 온 부정적인 감정이었을 뿐이었다. 우주는 그런 내게 두려움이라는 손님을 보내주었던 것이다. 지금 만성통증과 공황증을 앓고 있는 그녀는 서른 살이다. 가장 나이의 무게가 크게 느껴지는 시기다. 그 젊고 싱싱한 서른 살밖에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 내 나이 51세, 그러나 나는 참으로 감사하다. 그래도 80대보다는 30년이 젊지 않은가? 나는 어쩌면 80대가 되어도 100세보다 젊다고 자위할 수 있을 듯하다. 누군가 말했다. 오늘은 남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젊은 날이라고 말이다. 참으로 멋진 생각이다.


절대동감! 그녀는 지금 의지로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 그녀 몸의 통증이 잘 물러서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비록 지금 내가 마음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증상의 소멸에는 시간이 필요해요. 왜냐면 내가 그 전에 경쟁적으로 살려다 보니, 세상과 싸워야만 했고, 그 것이 내 몸에 좋지 않은 파장을 일으켜서 통증이 있는 거죠. 그러니 이재는 그 통증을 그대로 두고, 오늘 하루 행복을 찾아보는 거예요.”


“어떻게 찾죠?” “간단해요. 일단 걸음걸이에 집중해 봐요. 그리고 숨 쉬는 것에, 먹는 것, 보는 것, 듣는 것에 집중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감각을 느껴 봐요. 처음에는 잘 느껴지지 않아요.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요. 그러나 자꾸 시도하면 미세한 희열이 생겨나고, 그 희열의 불꽃이 점점 발화하면서 내 몸의 통증과 내 마음의 불안을 씻어낼 정도로 거대해지면서 병이 낫게 되죠.”

 

다행히 그녀는 지금 감각의 기쁨을 찾아가는 훈련을 시작했다. 더 이상 자신의 증상과 싸우지 않는다. 그녀의 미래는 당연히 해피엔딩이다. 내가 그랬듯이.


대학(大學)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니,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알면 거의 도에 가깝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무엇을 먼저 할 바인가? 내 인생의 행복이 먼저다. 그 다음이 직장이다. 내 인생이 기쁨이 먼저다. 그 다음이 돈이다. 사랑이 먼저다. 결혼은 나중이다. 먼저 할 바가 근본이고, 나중할 바가 말단이다. 이를 거꾸로 하면 몸에 고통이 따르고 마음이 힘들어진다. 나는 마음병을 앓았을 때, 나를 드러나는 일을 중시했다. 거꾸로다. 그러니 두려울 수박에 없었다. 나를 낮추는 일이 먼저다. 그래야 내 마음이 기뻐진다. 서른 살의 그녀도 이제 순서를 제대로 잡았다. 스펙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일이다.


‘일이 안 돼서 웃을 수 없다’는 말은 사물의 근본과 말단을 모르기 때문이다. 먼저 할 바와 나중할 바를 모르기 때문이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웃는다. 웃으면 일이 다 잘 풀리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어떨까? 일이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있는가? 아니면 오늘 하루 열심히 웃으며 살아가는가? 무엇이 먼저 할 바인가?         

                             

글/ 제천시 제3한방명의촌 한방자연치유센터장 황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