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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코로나19 팬데믹,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우울의 그림자가 길고 짙어졌다.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으로 ‘비대면’이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된 지 오래고, 둘러앉아 차 한 잔 마시려면 친구 숫자부터 헤아려야 하는 세상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은 점차 ‘고독한 존재’로 내몰리고, 내면에는 우울이 잉태한다. 우울은 제2의 살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는 우울한 대한민국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우울은 외로움의 뒷면이고, 삶을 무너뜨리는 질병이다.

 

 

 

 

 

마음의 그림자 ‘우울’

 

오르락내리락 마음이 천국이고 지옥이다. 세상 최고의 이야기꾼 또한 마음이다. 금세 웃다가, 어느새 눈물 흘리는 게 마음이다. 내 안에 품고 있으면서도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게 바로 마음이다. 그런 마음에 ‘우울’이라는 그림자가 수시로 드리워지는 게 현대인이다. 앞날에 대한 근심, 뜻하지 않은 질병, 관계의 단절, 막연한 불안감이 켜켜이 우울을 키운다. ‘군중의 고독’은 이 시대를 상징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백세 시대’는 빛이자 어둠이다. 건강하고 풍족한 삶에는 찬란하지만, 아프고 빈곤한 삶에는 막막한 시대다.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라고 삶에 속은 자들을 다독였다. 한데 살다 보면 참고 견디지 못할 만큼 삶이 그대를 속일 때가 있다. 누구나 안에 품고 감당해야 할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게 인생이다. 슬픈 이야기 몇 개, 아픈 추억 몇 개쯤은 데리고 걷는 게 삶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마주 보고 맘껏 웃는 것조차 주변 눈치를 보는 세상이 됐다. 그러니 ‘마음의 병’을 호소하는 신음도 커지고 있다. 관계가 단절되고 어긋나면 마음에 병이 생긴다. 고독과 우울이 바로 그 병이다. 인간은 정신이다. 고독·불안·절망은 그 정신을 좀먹는다.

 

 

 

 

 

 

 

‘우리’가 절실해진 시대

 

인간은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존재다. 타인은 또 다른 나다. “군자는 타인에게서 나를 보고, 소인은 타인에게서 낯섦을 본다”고 했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하겠는가. 한데, 내가 나만을 위한다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랍비 힐렐은 자신만을 위하는 인간은 진정한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고 설파한다. 힘든 시절에는 함께 손을 잡고 걸어야 험하고 외로운 세상을 건널 수 있다. 손가락 하나하나는 약하지만 합치면 주먹이 된다. 나와 너, 각자는 약해도 마음을 모은 ‘우리’는 서로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된다.

“인간은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존재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관계적 존재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말이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다. 그 관계가 삐걱대면 마음이 상처를 입고, 마음이 병을 앓는다.

 

팬데믹 시대는 단절의 시대다. 병상에 누워계신 부모님조차 맘대로 뵙지 못하는 자식, 그 자식을 그리는 부모님의 쓸쓸함, 벚꽃이 흐드러질 봄날에 맘 놓고 꽃구경을 하러 가야 할지의 고민, 코로나19에 감염이라도 되면 이름 대신 번호가 붙여지는 이 황당함, 이 모두 단절 시대의 아픈 풍경들이다.

 

굳이 리처드 도킨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이기적이다. 그것도 지독히 이기적이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왔을까. 답은 간단하다. 이기적이지만 동족이 어려움에 처하면 배타심을 발휘해 서로를 돕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나로 살면서도 인간이란 동족이 곤경에 처하면 ‘우리’로 힘을 합쳐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절망은 정신의 죽음이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규정했다. 한데, 절망의 반전은 그 깊은 수렁에서 희망이 싹을 틔운다는 사실이다. 단절의 시대도 어둠의 한복판은 통과한 느낌이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끝이 보인다는 건 적잖은 희망이다. 어둠에 스며든 빛이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다.

 

‘백 리를 가는 자는 구십 리를 절반으로 친다’라고 했다. 천하통일을 앞둔 진왕(훗날 진시황)이 주색에 마음을 두자, 구십 노인이 찾아와 진왕에게 들려준 말이다. 끝점에서의 방심은 자칫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린다. 힘들고 지루한 바이러스와의 싸움이지만 조금 더 버텨서 새 세상을 맞자.

 

삶에 어찌 굴곡이 없겠는가. 살다 보면 어찌 외롭고 고독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름의 곡절이 있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만큼, 각자에게 주어진 하루만큼 귀한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힘들고 지쳐도 서로서로 보듬고 위로하자. 이 또한 지나가리라. 힘들어도 살아보면 살아진다. 그게 삶이다. 빛이 들면 어둠이 걷힌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작가, 시인 신동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