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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TV&영화 속 건강

운명이라는 장벽

  

 

 

 

 


‘안녕, 헤이즐’은 운명과 죽음, 사랑에 관한 영화다. 암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마주한 10대 청춘들. 영화는 그들의 ‘운명 대처법’을 애뜻하면서도 따스하게 그려낸다. 여주인공이 헤이즐이니 ‘안녕, 헤이즐’은 이미 슬픈 이별을 예고한다. 하지만 그 가혹한 운명을 영화는 용기있고 당당하고 솔직하게, 요즘말로 ‘러블리’하게 그려낸다. 죽음에서 삶을 배우고, 절망에서 사랑을 깨닫게 하는 영화다. 그래도 설정이 ‘운명적’이니 영화 내내 마음은 아리다.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가 원작이다.

 

 

때때로 뒤엉키는 운명들

 

세상에 나옴은 순서가 있지만, 세상에서 들어감은 무작위다. 암이란 운명을 마주한 삶은 그 순서가 더 뒤죽박죽이다. 한쪽 다리가 의족인 헤이즐의 남친 어거스터스는 짧은 삶 ‘유한(有限)의 길이’가 헤이즐보다는 길어보인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추도하는 사람은 뒤에 남겨진 헤이즐이다. 운명은 때로 이처럼 순서가 뒤엉킨다.

 

“넌 나의 유한한 삶에 영원함을 줬어(You gave me a forever within the limited days).’ 헤이즐의 추도사는 삶과 죽음, 운명으로 관객의 생각을 끌어간다. 화두는 ‘유한 속의 무한’이다. 인간은 모두 ‘유한의 길’을 걷는다. 그 길이 짧을지, 길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분명한 건 누구나 끝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유한엔 무한이 존재한다. 마치 0과 1사이에 무수한 무한의 숫자가 존재하듯. 0과 2, 0과 100으로 유한이 길어지면 그 안의 무한도 커진다. 허나 그것 역시 유한속의 무한이다. 짧음이 예언된 헤이즐의 유한을 무한으로 채워준 건 사랑이다. 애뜻한 설정의 영화가 나름 힐링이 되는 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 감독의 센스 덕이다. 하기야 영화 얘기니, 감독이 상상력을 동원하고 배우가 연기로 받쳐주면 아름답게 승화하지 못할 가혹할 운명이 어디 있겠는가. 

 

 

가혹한 운명을 바꾼 당당함

 

가을의 중턱을 넘어선 10월의 어느 날. 한 음악회에서 ‘소울 플레이어(Soul Player)’ 이남현 씨를 마주했다. 그는 어깨 아래로 신경이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다. 그의 운명은 타고난 게 아니라, 중간에 비틀렸다. 대학시절 목뼈가 무러지는 사고가 운명을 틀었다. 그는 가혹하게 돌변한 운명에 무릎꿇지 않았다. 목소리는 물론 재채기조차 힘들었던 그가 휠체어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 

 

순간, 무수한 생각이 교차한다. 평범한 운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비운의 운명’. 그 마음은 어떨까. 자신의 저서 <나는 지금이 좋다>고 외치기까지 얼마나 큰 슬픔이 가슴을 찔렀을까. 아니, 그 외침에 아직도 슬픔이, 비애가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 다행히 그의 얼굴에 퍼진 평온이 은근히 위로를 준다. 고통·비애·좌절을 모두 승화한 듯한 그 평온에서 참다운 극기가 읽혀진다. 단순히 비틀린 운명에의 순응이 아닌, 가혹한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당차게 뒤바꾼 당당함. 그 당당함이 수시로 쳐져가는 어깨에 힘을 얹혀준다. 

 

 

선택은 언제나 나의 몫

 

인생은 영화와 다르다. 현실 속 운명은 때로 영화보다 훨씬 가혹하다. 운명이란 장벽이 너무 높고 단단해 그 앞에서 속수무책인 삶도 많다. 운명이란 게 좀 얄밉다. 운명에 기가 꺾이면 그 장벽은 더 높고, 더 두터워 진다. 그러니 운명 대처 제 1의 법칙은 일단 당당히 어깨부터 펴는 것이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상처 입을 각오로 사랑을 하면 상처는 없고 사랑만 깊어진다’고 했다. 그의 사랑은 ‘안녕, 헤이즐’처럼 청춘의 사랑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운명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에게 새로운 길을 터준다. 그러니 운명의 개척자는 살아 있고, 살아갈 힘이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삶이 짧을런지 길런지, 포장도로일지 비포장도로일지 그 길이와 형상은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삶이란 그 유한의 여정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각자의 몫이다. 운명은 때로 무심히 던져지지만 선택은 언제나 내가 하는 것이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