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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TV&영화 속 건강

영화 <암살>에 대한 색다른 감흥

 

 

 

 

 

끝나지 않은 ‘암살’의 행진
“나 끝까지 갑니다”
“밀정이면 죽여라”

 

 

헌법전문에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표시하고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일제나 그 앞잡이 친일파에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오락영화이지만 이 영화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되새김하게 만든다.  
 
먼저 개인적으로 ‘암살’을 보면서 느낀 몇 가지 충격(?)이 있었다. 첫 번째 전지현의 ‘안옥윤’역의 소화. 둘째 약산 김원봉의 등장. 셋째 속사포의 순수성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전작들에서 나온 전지현의 ‘가벼운’ 이미지를 별로 좋아 하지 않았던 터라, 그녀의 안옥윤 역에서 보인 모습은 “참 새롭다. 아 예쁘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인공 안옥윤이 말한다.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이 멘트는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은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자주독립을 원한다”는 결코 멈추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의 항일독립투쟁사를 대변한다.  

 

의열단 단장으로 약산 김원봉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이다. 영화 속 멋쟁이 조승우가 맡은 김원봉은 느닷없이 당시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만난다. 영화 속처럼 두 사람은 독립운동 침체기였던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하지만 김원봉은 김구 선생과 달리 월북한 탓에 남한에서는 언급이 금기시 되었던 인물이다.

 

3.1운동의 실패를 보고 김원봉은 1919년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을 만들어 6년간에 걸쳐 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조종한다. 일제 천황 암살도 기획했다. 일제는 김원봉에게 100만 원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가장 조직적으로 완고하게 소수 인원으로 일제에 대항했던 김원봉은 1948년 월북한다. 북한에서 내각 국가검열상, 내각 노동상이 된다. 

 

 

 

 

하지만 1958년 10월에 장개석의 스파이로 몰려 옥중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그는 남북한 모두에서 거론하지 않는 인물로 여겨져 왔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는 사회주의계열은 배제되곤 한다. 암살 영화 감독은 김원봉을 김구 임시정부 주석과 더불어 끝까지 등장시켰다. 조국이 광복되는 순간 김구와 김원봉이 술잔에 술을 따르며 장례식을 대신하는 장면은 눈물겹다.

 

그리고 색다른 긴 여운을 남겨 주는 것은 ‘속사포’의 존재다. 어찌 보면 ‘생계형’ 독립운동가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행보는 독립운동사의 축을 관통한다.  영화<암살>은 1933년 친일파 암살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30년대는 치열했던 1910-1929년대 20여년 동안 진행됐던 초기 의병운동, 만주지역 무장투쟁이 무자비한 일제의 탄압으로 약화되어 가던 시기다. 속사포가 암살작전 참여제안을 받고 “그것도 배가 불러야 하는 거지. 돈 한 푼 없이 이러는 거는 좀... "이라고 말한 대목은 이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속사포는 우당 이회영(1867~1932) 6형제가 1910년 경숙국치 때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이주해 만든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초기에는 조선독립을 외치는 열렬 애국지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속사포가 썼다는 졸업 혈서에 나오는 “낙엽이 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해서 압록강을 한번 건너고 싶다”는 각오가 넘쳐났던 시기였다. 봉오동대첩, 청산리대첩, 안중근장군의 거사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만주국에 들어서고 20년간의 가열찬 독립투쟁에도 해방의 날은 보이지 않자, 독립운동 내부에서는 분열과 탈락, 염석진처럼 일제에 빌붙거나 앞잡이가 되는 자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암울한 1930년대 무장투쟁에 참여한 인물들은 대부분 20대들이었다. 김원봉 또한 그렇다. 20대였으니 작전 전날 춤을 출 수도 있었으리다.

 

총상을 입은 상태에서 속사포는 말한다. "나 끝까지 갑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임을 강조한다. 이후 결혼식장에 몰래 들어간 속사포는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많은 일본 헌병과 군인들이 죽어간다. 그 가운데 일제 앞잡이 염석진에게 치명상을 맞지만 속사포는 헌병들의 진입을 막고 안옥윤이 임무를 완수할 시간을 벌어준다.

 

이미 버틸대로 버틴 속사포는 안옥윤에게 마지막 대사를 남긴다. “대장, 우리 성공한 거지? 드레스 입으니까 이쁘네.... 먼저 내려가 이따가 일 층에서 보자... 가, 가 ....” 그리곤 속사포는 기관총을 들려고 애쓰다가 고꾸라진다. 속사포의 죽음은 수 없이 총을 맞고도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의 죽음보다 인상적이다.

 

이렇게 수많은 독립전사들의 죽음 속에 조국은 해방을 맞이한다. 영화 속 임시정부 요원들은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집에 가자”고 외친다. 얼마나 목메이는 외침인가.  이어 감독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재판 장면을 보여준다. 일제 앞잡이였던 염석진은 당당하게 외친다. 애국의 열정만으로 살아 왔다고. 그리고 무죄 판결을 받는다.

 

여기서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다면, 반민특위 재판 전에 김구 선생의 암살 장면을 보여줬으면 영화 끝머리에서 최고조의 긴장과 여운을 남기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보듯 반민특위의 실패는 우리나라가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은 세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의열단 단장으로 일제의 오금을 절게 했던 김원봉은 국내 귀국 후 친일파 경찰에게 폭행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김구 선생은 암살당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민주화 투쟁으로 얻은 헌법은 항일독립운동에서 건국의 시작을 되었음을 전문에 밝힌다. 그로부터 28년 지난 지금 암살 영화는 70년 전 우리사회가 하지 못한 희망을 담았다.  암살의 마지막 장면에서 일제의 앞잡이 염석진에게 총상을 입었던 명우가 김구 임시정부 주석의 지시를 받들겠다며 임무를 완수한다. 이미 서거한 김구 주석의 오래전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16년 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글 / 내일신문 김규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