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로(季路)가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 “감히 죽음을 묻습니다.” 공자가 답했다. “아직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죽음에 ‘훈수’를 뒀다. “사람이 죽음을 지나치게 공포스러워하는 건 삶이 바르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누구나 마주하기 두려운 죽음은 하루하루 삶으로 다가온다. 그건 순리, 만물의 이치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난다. 순리는 마음으로 오롯이 받는 게 지혜다. 순리에 맞서는 자는 발걸음이 무겁다. 가벼워야 멀리 걷는다. 가벼워야 지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세상의 이치다.




불경은 일종의 철학이다. 단순히 왕생극락(往生極樂)의 종교적 내세관을 넘어선다. 윤회(輪廻)·색(色)·공(空)·연기(緣起)는 생(生)과 사(死), 만남과 이별의 이치를 담는다. 불교에서 시작과 끝은 대척점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커다란 고리다. 만물은 흐른다. 어느 형상, 어느 본질도 제자리에 그대로  머물지 않는다. 인간이 집착하는 색(色)은 결국 모두 공(空)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우주는 공으로만 가득하진 않다. 공은 다시 색으로 형상을 바꾼다. 공과 색은 둘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둘이다. 인간은 부모를 보내고, 자식을 맞는다. 나는 부모의 자식, 자식의 부모다. 만물은 돌고돈다. 대지는 공평하다. 장자(莊子)는 “천도(天道)는 넘침에서 덜어내 부족한 곳을 채운다”고 했다.





불교의 사성제(四聖諦)는 윤회의 고리다. 세상은 고(苦)다.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집(集)은 고(苦)의 뿌리, 색(色)은 잠시 곁에 머무는 형상이다. 돈·명예·권력·인기는 잠깐 유(留)하는 객(客)이다. 오는 객은 반갑게 맞고, 때가 되면 아쉬워도 떠나보내는 게 예(禮)다. 집착을 떨치면 고통도 멸(滅)한다. 큰 깨달음, 즉 도(道)를 걸으면 고통은 가벼워진다. 불교는 도에 이르는 수양법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한다. 석가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르게 천명을 다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른 신념을 갖고(正念), 바르게 마음을 다스리면(正定) 도에 이른다고 했다. 도는 결국 ‘바르게 걷는 길’이다. 고(苦)의 진리→집(集)의 진리→멸(滅)의 진리→도(道)의 진리는 커다란 고리다. 시작과 끝이 맞닿은 윤회다.



 
흐르는 건 강물만이 아니다. 시간도 흐르고, 생각도 흐른다. 흐름을 ‘허무’로 받아들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순리에 마음을 실어 세상을 가볍게 걷고자 함이다. 이마의 주름을 보고 마음에 주름을 만들기보다 더 큰 덕을 베풀 경륜의 지혜를 찾고자 함이다. 인도의 승려 나가르주나는 “욕망은 괴로움의 근본이며 모든 재앙의 뿌리다. 덕이 상처를 입고 몸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모두 여기에서 생긴다”고 했다. 포용은 커지고, 아집은 작아지는 게 진짜 연륜이다. 과거에 발목 잡혀 앞길을 제대로 내딛지 못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나이 들었다고 한숨짓는 건 연륜이 세월을 따라가지 못한 탓이다. 만물은 변하고, 삶은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은 살아갈 날 중 가장 젊은 순간이다. 살아온 날의 후회가 살아갈 날의 꿈을 덮게 하지 말자. 지난 일을 되돌이킬 순 없어도 이 순간 새로 시작해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수는 있다. 그 일이 얼마나 크고 높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로 서는 일, 넓게 보는 일, 답게 사는 일, 건강한 습관을 들이는 일, 지식을 채우는 일, 관용을 키우는 일…. 둘러보면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은’ 일들이 여기저기서 나를 봐달라고 손짓한다. 퇴계 이황은 죽는 날 아침에도 “매화에 물을 주라”고 했다. 그는 죽음에 초연했고, 삶도 초연했다.




두려움은 짙은 안개다. 시야를 가리고, 길을 잃게 한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적이 된다”고 했다. 삶은 희망과 절망, 두려움과 믿음의 싸움이다. 게리 켈러, 제이 파파산의 ≪원씽≫(The One Thing)에는 두려움과 믿음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어느 저녁, 한 체로키 인디언 장로가 손자에게 사람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다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말했다. “아이야, 그 싸움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두 마리 늑대 사이에서 벌어진단다. 하나는 두려움이지. 놈은 불안과 걱정, 불확실성, 머뭇거림, 주저함, 그리고 무대책을 가지고 다니지. 다른 늑대는 믿음이지. 그 늑대는 차분함과 확신, 자신감, 열정, 단호함, 행동을 데리고 다닌단다.”
그 말을 듣던 손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럼 둘 중 어느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가 답했다.


“그거야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순리는 마음으로 받아라. 지는 게 두려워 피지 않는 꽃은 없다. 두려움보다는 희망에 먹이를 줘라. 세상은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고 언젠가 떠나야 할 삶의 무대다. 무대는 수시로 주연이 바뀐다. 그래서 새롭고, 그래서 설렌다. 인생이 무대에 비유되는 건 아마 그런 이유에서 일 듯싶다.



글 /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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