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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살아가는 이야기

세상은 넓고 삶은 길다. 배움에 게으르지 말자






자로(子路)는 ‘공자학당’의 맡형격이었다. 성격이 곧고 순수해 평생 스승 공자를 헌신적으로 섬겼다.  공자는 이런 자로를 아끼면서도 그의 조급함을 늘 경계했다. 하루는 공자가 자로를 불렀다. “자로야! 너는 육언(六言)과 육폐(六蔽)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자로가 답했다.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럼 거기 앉거라. 내가 너에게 말해주마.”




공자는 자로를 맞은 편에 앉히고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사람이 인덕(仁德)을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어리석기 쉽고, 지혜를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방탕하기 쉽고, 믿음을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남을 해치기 쉽고, 곧음을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조급하기 쉽고, 용맹을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난을 일으키기 쉽고, 강함을 좋아해도 배움을 싫어하면 망령된 짓을 하기 쉽다. 이게 바로 육언·육폐니라.”





육언은 모두 아름다운 덕(德)이다. 한데 공자는 배움이 부족하면 그 덕들이 가려지고(蔽), 되레 화(禍)까지 입을 수 있다고 했다. 힘쓰는 데는 무모하리 만큼 나서지만 배움에는 게으른 제자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스승의 마음이 물씬 묻어나는 장면이다. 새겨보면 참으로 맞는 말이다. 성품이 인(仁)해도 배움이 부족하면 어리석은 판단을 하기 일쑤고, 인품이 곧아도 배움이 약하면 조급해지기 다반사다. 배움이 허한 용기는 만용으로 변질되기 쉽다. 공자는 모든 게 배움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논어≫의 첫장을 학(學)으로 연 건 다 까닭이 있다.




공자가 하루는 제자들을 나무랐다. “너희들은 어찌 시(詩)를 배우지 않는냐? 시는 감성을 깨어나게 하고, 판단을 바로 서게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게 하고, 감정을 추스르게 하고,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사리를 깨닫고 군주를 충심으로 섬기게 하고, 새나 초목의 이름도 많이 알 수 있게 하느니라.” 공자는 시를 통해 인간이 마음을 다스리고, 인륜과 학문에서도 유익함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 공자였기에 아들 백어(伯魚)에게도 “시(詩)를 모르면 홀로 서지 못하고, 예(禮)를 모르면 사회로 들어설 수 없다”고 가르쳤다.





공자는 “인간은 시로 깨어나고(興於詩), 예로 바로서고(立於禮), 음악으로 완성된다(成於樂)”고 했다. 인의예지의 사상가가 아닌, 시인 공자의 모습이 더 크게 다가온다. 감성은 나이로 시들지 않는다. 지레 포기한 우리의 마음이 감성의 수분을 마르게 한다. 잠자는 감성을 깨우자. 추억의 시를 꺼내고, 추억의 음악을 돌려보자. 중년의 학(學)은 영어 단어 외우고, 난해한 사상을 탐구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참된 인품을 빛나게 하는 조그만 사유들, 오다가다 눈길을 주는 문구 하나도 모두 배움이다. 나를 바르게 세워주고, 잠들어가는 감성을 깨워주고, 지식을 한뼘씩 넓혀주는 건 모두 스승이다. 배우려 하면 스승 아닌 게 없다.




주자(朱子)는 유가에 바탕한 성리학을 체계화한 송 시대의 큰 사상가다. ≪근사록(近思錄)≫에는 그의 논리가 고스란히 담겼다. ≪근사록≫이란 표제는 공자의 제자 자하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자하는 겸손이 지나쳐 공자가 ‘불급(不及)’으로 비유한 인물이다. 하지만 배움의 자세만큼은 그 누구보다 독실했다. “널리 배우되 뜻을 독실히 하고, 간절히 묻되 가까운 것부터 생각(近思)하면 인(仁)은 저절로 그 가운데 있다”는 말은 그의 배움의 자세를 오롯이 보여준다. 주자도 이 구절에 크게 감명을 받은 듯하다.





게으르면 처음과 끝이 크게 다르다. 부지런하면 처음과 끝이 한결같다. 시작은 창대하되 끝이 초라한 것은 갈수록 초심이 흐려진 탓이다. 배움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나이에 맞게, 처한 상황에 맞춰 배움이 그 모습을 조금씩 바꿔갈 뿐이다. 삶의 어느 한 때 밤잠을 줄여가며 몰입한 배움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길어진 인생에 배움의 보충이 없으면 지혜가 줄고, 어리석음은 늘어난다. 청춘의 노년으로 살지말고, 노년의 청춘으로 살자. 조깅으로 근력을 키우듯, 배움으로 사유를 키우자. 건강한 신체, 건강한 영혼은 100세 시대의 ‘축복된 짝궁’이다. 세상은 좀 멀리 봐야 희망이 커지고, 눈앞의 고만고만한 근심거리가 사라진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미래도 결국은 현재가 결정한다.



글/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