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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여행

예산 가볼 만한 곳, 추사고택과 영당





안녕하세요. 호미숙 여행작가입니다. 충남 예산에 위치한 추사 고택 김정희 생가를 둘러보았습니다.


추사 김정희 고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 받았고 예산의 집, 김정희 고택은 53칸의 규모였는데 충청도 53개 군헌에서 한 칸씩 건립비용을 부담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안채에는 6칸 대청과 두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등을 갖춘 'ㅁ'자형 가옥입니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대청은 그리 흔하지 않은 규모입니다.


이러한 'ㅁ'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형입니다.



추사 고택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가인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 가옥 관념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랑채 댓돌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석주가 있습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했습니다.



방문했을 때 살구나무의 살구가 노랗게 익어 바닥에 떨어져 향긋한 내음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추사고택 방문 시 평일 낮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가운데 마침 몇 명의 단체 관광객들에게 해설사님께서 안내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추사의 세한도


'세한도'는 조선후기의 학자 추사 김정희가 그린 그림입니다. 전문화가의 그림이 아니라 선비가 그린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844년, 국보 180호 수묵화, 23x69.2 cm,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소나무 한 그루, 잣나무 세 그루. 집 한 채. 배경도 없고, 화려한 색채도 없는, 황량한데다 한기마저 느껴집니다.


추사고택에서 유심히 볼거리 중 하나는, 제주로 유배 간 그에게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이 연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 조달해 준 것에 보답하고자 추사의 마음이 담긴 그림을 그렸는데, '세한도(歲寒圖)'입니다. 세한도에는 꿋꿋이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선비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고택에서 만나는 추사 선생글씨와 말씀들


서세여고송일지-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라는 추사의 글을 인용해서 설명해 놓았습니다.


추사고택 안채 서쪽 뒤뜰에 있는 백송 한 그루. 중국이 원산지인 백송은 600여 년 전 외교사절단에 의하여 조선에 들어왔는데 껍질이 벗겨지면서 회백색을 띠기에 백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나무껍질의 백색과 녹색의 조화가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 예로부터 절이나 정원에 기념수나 관상수로 심어 왔습니다.



예산 백송


또한 추사 고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예산 백송 두 그루가 있습니다. 추사(김정희)선생이 순조 9년에 호조참판 부친 김노경께서 중국으로 사신 가실 때 갔다가 돌아올 때 붓대 속에 백송 씨를 넣어서 가지고 와 고조부 묘소 앞에 심어 키운 것으로(1809), 백송의 수령은 약 200년이며 높이는 약 10m입니다. 


김정희 선생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 김홍경의 묘소 앞에 심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원래는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아름다운 모양이었으나 두 가지는 말라 죽었고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 있습니다.



추사영당 현판


고택 맨 서쪽 끝, 안채 바로 뒤에는 추사 영당(影堂)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영당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 김상무가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안채 뒤쪽 언덕 위에 세웠습니다. 추사의 오랜 벗 권돈인도 영당을 세우는 일을 돕고 직접 쓴 추사영실 현판을 볼 수 있습니다.



추사 영당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으로 김정희의 평생의 벗 권돈인이 이 영당 세우는 일을 돕고 추사체로 추사영실이라는 현판을 직접 썼다고 합니다.


또한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의 초상을 그리게 했으며 권돈인은 이 초상화에 찬문을 쓰고 김정희를 추모하는 여덟수의 시를 지어 김상무에게 주었습니다.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습니다.



영당에서 내려다본 추사고택의 너른 기와집 풍경, 뒤뜰에도 잔디로 잘 가꾸어 영상을 오르내리는 길을 닦아 놓았습니다. 옆으로 기와 담장이 멋스럽게 울타리 조성해서 추사의 어린시절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추사고택 옆으로 우물이 하나 있는데 이곳의 우물을 이용했었다고 합니다. 일반 우물터와는 다르게 깊이 파인 곳에 돌로 담을 쌓고 우물과 지붕을 얹어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했으며 현재는 뚜껑을 덮어 놓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밖에도 추사 선생의 묘소와 증조부이신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 그리고 화순옹주 열녀문 즉, 홍문이 있습니다.